양정화(명나라)

 



楊廷和. 1459~1529
명나라 인물. 헌종 성화제 때 벼슬길에 올랐다. 무종 정덕제 때는 당시의 환관인 유근[1]에게 거역했다는 이유로 좌천되어 남경호부상서로 전임, 3개월 후에는 중앙으로 불려가 문연각대학사가 되어 조정에 참가했다. 이듬해에는 소보 겸 태자태보, 또 이듬해에는 광록대부, 주국, 이부상서, 무영전대학사에 임명되었다.
세종 가정제와 함께 정덕제의 악정의 잔재를 없애려고 했으나 중국예송논쟁인 '대례의 분의[2]' 때문에 가정 3년에 사직, 가정 7년에 관직을 빼앗기고 이듬해 죽었다.
명 중기 이후 시기에 손꼽히는 명신이나 여러모로 좋지 못한 황제 때문에 개고생한 인물.
그의 아들 양신#s-2도 대례의 분의와 관련되어 있다.


[1] 1451~1511 중국사에서 알아주는 간신배이다. 다행히도(?) 인과응보로 처형되었는데 대역죄까지 시도하려 했기에 분개한 황제의 명령으로 산 채로 살점을 조금씩 파내어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이는 처형인 능지형으로 죽었다.[2] 명나라 제12대 가정제 시대의 정쟁. 제10대 홍치제의 아들인 제11대 정덕제에게는 아들도 형제도 없었기 때문에, 정덕제의 유조에 의하여 홍치제의 동생 흥헌왕의 아들 주후총이 영립되어 가정제가 된 것인데, 그의 생부 흥헌왕의 제례와 존호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의 문제를 둘러싸고 분의가 발생하였다. 대학사 양정화 등은 가정제에게 마땅히 홍치제를 황고(아버지)라 부르고, 홍헌왕을 황숙부라 불러야 한다고 진언하였다. 그러나 가정제는 그렇게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황제의 의중을 알게 된 계악 등은 마땅히 홍치제를 황백고(백부)로 불러야 한다고 진언하였다. 결국 홍치제를 황백고로 부르고, 흥헌왕을 황고로 부르는 것으로 결정되었지만, 그동안 2파로 갈라져 분규가 계속되었고 4년에 걸쳐 논쟁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