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신
1. 고구려의 관료
'''陽神'''
(? ~ ?)
고구려의 관료.
삼국사기에 따르면 비류내(沸流那)[1] 출신의 사람으로, 조의(皂衣) 벼슬을 지냈다.
132년(태조왕 80), 태조왕의 아우이자 당시 왕에 다음가는 권력자였던 수성을 따라 나서 왜산(倭山)으로 사냥을 하러 갔다. 그 곳에서 수성이 주위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미유와 어지류 등과 더불어서 수성에게 왕위를 찬탈할 것을 권하였다.[2]
146년, 결국 수성은 태조왕으로 부터 양외를 받았는데 그가 바로 차대왕이었다. 이듬해인 147년, 양신은 차대왕에 의해 중외대부(中畏大夫)로 임명되았으며, 우태(于台) 벼슬을 받았다.
한편 함께 차대왕에게 왕위찬탈을 권했던 미유, 어지류 등도 모두 승진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이들 모두가 차대왕의 측근이었으며 차대왕이 왕위를 양위받을 때에 어떤 역할을 했다고 여겨진다.
2. 명나라 중기의 학자 겸 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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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愼, 1488~1559
명나라 중기의 학자 겸 문학자. 대례의 분의로 관직을 빼앗긴 양정화의 아들이다.
경학(經學)과 시문이 탁월하였으며 박학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윈난에 관한 견문과 연구는 귀중한 자료로 전한다. 주요 저서에는《단연총록(丹鉛總錄)》,《승암집(升菴集)》 등이 있다.
3.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羊茞
(? ~ 232)
삼국시대 위나라의 지방관. 전처는 공융의 딸로 공융의 딸과의 사이에서 양발(羊發)을 낳았다. 후처는 채옹의 딸 채정희로 채정희와의 사이에서 양호, 양휘유, 양승(羊承)을 낳았다.
양도(羊衜)라는 이름으로도 기록되는데, 오나라의 신하인 양도도 동일하게 혼용되었다.
상당태수를 지냈고 아들 양호가 12살이 되었을 때 사망했으며, 이 때 양호가 부친인 양신에 대한 효심이 보통의 예의를 넘을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그의 가문은 9대째인 양호까지 2천석 이상의 관리를 역임했고 모두 청렴한 관리였다는 소문이 있다는 것으로 볼 때 적어도 2천석 이상의 관리를 지내면서 청렴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집해에서 노필이 살펴본 것에 따르면 진서 후비전의 경헌황후의 부친은 양도, 황후의 모친은 진류의 채씨로 한의 좌중랑장 채옹의 딸, 진서 양호전에서 양호의 부친은 양도이기에 양호는 채옹의 외손자가 되니 양호는 경헌황후와 동복남매로 이에 근거해 양도에게는 하후장, 사마사 등 두 명의 사위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