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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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명나라의 제8대 황제. 묘호는 헌종(憲宗), 시호는 계천의도성명인경숭문숙무굉덕성효순황제(繼天凝道誠明仁敬崇文肅武宏德聖孝純皇帝). 휘는 주견심(朱見深). 초명은 견준(見濬). 연호는 성화(成化). 정통제의 맏아들. 생모는 귀비 주씨(貴妃 周氏)[1] 이다.
토목의 변으로 경태제가 즉위한 이후 잠시 황태자에서 폐위되었다가, 아버지인 영종이 다시 즉위하여 무사히 황위에 올랐다. 여담으로 폐태자 시절 할아버지 선덕제의 후궁이었던 공신부인 한씨[2] 의 보살핌을 받아서# 나중에 황제가 된 후에 그녀를 정중히 모셨다고 한다.
2. 똑똑한 황제였던 시절도 있었다
성화제는 재위 중에 우겸[3] 의 억울함을 풀어주었으며 아버지의 두 번째 재위 시기에 격하된 경태제의 신분을 다시 황제로 올려 주었다. 자기를 황태자의 자리에서 쫓아낸 사람인데도.
성화제 시기에는 변방에서 일어난 큼직한 사건 (형양의 반란이나 광서 지역의 반란 등) 몇 개를 제외하면 대체로 평온한 편이었으며, 대체로 원만한 치세를 보냈다고 할 수 있다. 명사에서는 평하기를, 인선의 치세가 돌아왔다고 할 정도였으며, 명대 사람들은 성화 - 홍치로 이어지는 시기가 명나라의 마지막 평화였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의 재위 기간은 23년. 끝까지 이대로 갔으면 좋았겠지만 나중에가면 실책을 계속해서 저지르기 시작했다.
3. 말년에 도에 심취하다
말년에 성화제는 불교를 지나치게 믿어 승려들을 고관에 앉히는가 하면 환관들을 기용해, 권력을 잡은 환관들은 매관매직을 거침없이 자행하고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죽였다.
4. 연상을 좋아한 황제 폐하
또한 성화제는 '''19세 연상'''의 공숙황귀비인 만정아(萬貞兒), 통칭 만 귀비를 매우 총애하였다. 당대의 사회상을 생각하면 거의 모자 관계 수준의 나이 차이인데 실제로 만정아는 성화제를 열 살 때부터 모신 유모 같은 여인이다. 일종의 모자 관계 같은 것이 자라면서 애정 관계로 변한 것이라 볼 수 있을듯.
성화제가 만 귀비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신분도 낮고 궁녀 출신인 그녀를 황후로 만들려고 온갖 애를 썼으나 신하들과 태후의 반대로 실패했다. 결국 오씨 성을 가진 여인을 황후로 삼고 만씨는 비빈 중 하나인 귀비로 두긴 했으나 당연히 궁내 실세는 만 귀비였다.
그녀의 권세가 어느 정도였냐면 황후 앞에서도 싸가지없이 굴었을 정도였다. 결국 빡친 황후가 그녀에게 군기 교육을 시도하다 만 귀비를 통해 이를 알게된 분노한 황제에게 주저없이 폐위 크리를 당하고[4] 새 황후인 왕 황후는 선임의 사례로 배운 게 있었는지 만 귀비 앞에서 설설 기었다고 한다.
이 만 귀비도 황제만큼이나 심각한 인물로 자신이 낳은 아들이 요절하자[5] 후궁들과 궁녀들을 대상으로 온갖 패악질은 기본에, 성화제의 다른 후궁이 임신하면 기어이 낙태시키고야 말았다. 가까스로 태어난 황태자 주우극은 모친과 함께 독살당했다. 이때문에 성화제는 말년까지도 후사가 없었고, 환관이 숨겨서 기른 주우탱이 나타나 겨우 후사를 이을 수 있었다.[6][7] 한편 만 귀비는 주우탱마저 죽이려고 들었으나 태후가 맡아 기르는 바람에 실패했다.
만 귀비는 나이가 든 후에는 뚱뚱해졌는데, 이 때문에 고혈압이 왔던지 궁녀에게 무슨 일로 화가 나 궁녀를 때리다가 혈압이 올라 쓰러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길로 60세에 사망. 성화제는 이를 슬퍼한 나머지 '만 귀비가 저승으로 떠났으니 내가 살아 뭐하겠소' 하는 발언을 남기며 시름시름 앓다 결국 같은 해에 죽고야 말았다.[8]
이렇듯 성화제의 만 귀비를 향한 사랑은 매우 깊었다. 그걸 제대로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 다름아닌 만 귀비가 회임한 다른 후궁들을 낙태시키고, 황태자와 그의 모친까지 함께 독살시킨 것, 이후 겨우 본 후사였던 주우탱과 그 모친까지 계속해서 독살하려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만 귀비를 폐위시키거나 처벌하지 않고 눈감아줬다는 것이다.''' 왕실이나 황실에서 여러 이유로 왕/황제의 후사를 위협하는 시도를 했거나 해서 벌 받은 이들도 상당하다는걸 생각해보면, 성화제가 만 귀비를 얼마나 봐줬는지 알 수 있는 부분(...)[9]
5. 기타
조선 중기 채수의 설공찬전에도 등장한다. 자신이 총애하는 신하의 수명을 1년 정도 연장시켜 달라고 애박이란 사람을 보내 염라대왕에게 요청했는데, 염라 대왕이 한 달 이상은 곤란하다고 해도 계속 보채자 결국 화가 난 염라 대왕이 "'''아무리 천자라 해도 사람 살리고 죽이고 하는 건 내 권한인데 어디서 고유 권한 침해냐'''"며 수명 연장이고 뭐고 없이 당장 그 신하를 잡아오라고 한다. 성화제는 놀라서 본인이 몸소 염라 대왕에게 찾아가고, 염라 대왕이 앞서 황제가 수명 좀 늘려 달라고 부탁한 그 신하를 잡아다 손을 삶으라고 명령하는 부분에서 소설이 끝난다.[10]
아버지인 정통제와 성화제의 어진이나 초상화를 비교해 보면 닮은 것을 넘어 거의 쌍둥이 수준(...)이다.
서극 감독, 이연걸, 진곤, 계륜미, 주연의 용문비갑 2011판 (CG를 한국 기업에서 만들었고 감독의 적인걸 시리즈 CG도 같은 회사에서 만들었다) 에서 만 귀비와 환관들의 대화로 나오는데 환관들이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고 막고 동창이 신하가 황제에게 보낸 상소문을 도중에 빼돌리고 입막음하려다 이연걸이 막고 동창의 수장이 비명횡사 했는데도 동창에서 거짓 보고를 하려는등 막나간다. 서창을 만들어서 전권을 만 귀비의 청으로 그녀의 연인(진곤 분 헌종은 두사람의 관계를 모르는 것으로 보인다.)을 서창의 수장으로 만든다. 복식(후궁 환관)을 보면 고증을 잘한 것으로 보인다.
6. 둘러보기
[1] 성화제 즉위 이후에 효숙태후(孝肅太后)로 추존되었다.[2] 조선 사람으로서 한확의 누이 동생이였다.[3] 정통제 시기의 대신. 토목의 변 당시의 혼란을 바로잡았다.[4] 그것도 황후가 된지 한달만에 쫓겨났다.[5] 참고로 이때 만귀비의 나이는 48세였기에 아이를 더 갖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이 시점부터 만귀비를 통해 후사를 얻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었으므로 당대의 관점에서 판단할 때 성화제로서는 만귀비를 제지할 필요가 있었다.[6] 홍치제의 어머니 기씨는 소수 민족 수령의 딸로 아버지가 토벌 당하면서 죄인으로 끌려와 서적 관리하는 곳에서 일했다. 그러다 성화제의 눈에 띄어 하룻밤 상대가 됐었는데, 이때 홍치제를 임신한 것. 그녀에게도 낙태약을 내리는 궁녀가 찾아갔으나 낙태약 내리는 궁녀가 동정심이 발휘됐던지 약을 덜 줘서 다행히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고.[7] 참고로 홍치제 이후로는 만 귀비가 포기한 건지 몰라도 성화제는 여러 아들을 뒀다. 만귀비가 낳은 요절한 장남과 독살당한 주우극을 포함하여 14명의 아들을 두었고 11명이 성인으로 성장했으며 딸은 6명이 태어나 4명이 성인으로 성장했다. 어쨌든 홍치제가 태어난 뒤로부터야 겨우 후사 걱정을 한시름 놓은 건 사실이다.[8] 이때 숙부인 경태제가 만들었다가 아버지인 정통제가 없앤 황귀비 작위를 추서했다.[9] 이 정도 행각이면 다음 황제인 주우탱이 만 귀비의 삼족을 멸문시켜도 할 말이 없고, 실제로 만 귀비는 주우탱은 물론 그의 친모에게마저 여러번 해코지를 가했다. 당시에도 반응은 비슷해서 만 귀비가 살아있을 때나 죽은 뒤에나 그녀를 처벌하라는 상소는 하루가 멀다하고 올라왔다. 그러나 대인배인 주우탱은 만 귀비를 총애한 아버지를 위해서 그녀에 대한 처벌을 불문에 처했다. 그리고 자신은 아버지와 달리 후궁을 두지않고 황후에게만 일편단심으로 대했다. [10] 정확하게는 이 뒷부분이 전해지지 않는다. 설공찬전 자체가 내용이 요망하다고 해서 진작에 조정에서는 거두어 불태워 버리도록 명했고, 그걸 이문건이라는 사람이 자기 일기 뒷면에 국문으로 번역해 몰래 베껴둔 게 발견된 것이 현재 알려진 설공찬전의 전부이고, 이나마도 뒷부분 내용을 안 적어서 그 뒤의 이야기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