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지형
凌遲刑
1. 개요
'''능지형(凌遲刑)''' 또는 '''능지처사(凌遲處死)'''는 전근대 중국의 사형 방식으로, 죄인의 살을 산 채로 회를 떠버리는 형벌이다. 진정한 의미로 '''뼈와 살을 분리시킨다'''. 교수형, 참수형, 요참형 등의 갖가지 사형의 형태 중에서도 반역죄 등 1급 중죄인에게 실시하는 가장 무거운 형벌이었다. 그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은 십자가형, 그 다음은 팽형, 그 다음은 화형이다.[1]
2. 의미
요나라 때 처음 시작되었다고 하며 원나라가 중국을 통치하면서 한족의 형벌제도로 편입되었다. 북송 때는 살을 뼈에서 발라낸다는 의미의 과형(剮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명나라 시대 형법의 기준이 된 법전인 대명률에서는 능지처사(凌遲處死)라고 적혀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공식적인 형벌의 방식은 태형, 장형, 도형, 유형 사형이었고, 그 중에서 사형의 방식은 여전히 참(斬)과 교(絞) 두 가지만 있었다는 점이다. 능지처사는 '''공식 형벌은 아니지만''' 특별 죄목에 대한 처벌방식으로서 개별적으로 삽입되어 있는 것이다. 아래 단락에서도 언급하겠지만 능지처사는 어지간히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시행되지 않았다.
원래 '능지'란 말은 힘을 안 들이고 넘어갈 수 있는 완만한 언덕을 가리키는데, 이 말이 '''사람을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인다'''는 뜻으로 변주되어 이 형벌의 명칭으로 굳어버렸다고 하거나[2] 혹은 요나라에서 시행되던 형벌이 북송대에 수입되면서 원래 있었던 단어인 '능지'로 음차되었다는 설도 있다. 별칭으로 백각형(百刻刑), 또는 살천도(殺千刀)라고 하는데, 이는 백 번, 천 번 칼질하여 천천히 고통을 주며 죽이는 형벌이란 뜻이다.
흔히 한국에선 죄인의 팔다리를 말이나 소 등에 묶고 각 방향으로 달리게 하여 사지를 찢는 형벌을 능지처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형벌은 '''거열형'''(車裂刑)으로 본래 엄연히 다른 형벌이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능지형으로 판결이 나와도 대신 거열형을 집행했고 이것도 그리 흔하지는 않아 대부분 참형에 처한 뒤 거열형에 처하듯이 사지를 절단하는 형태가 많았기 때문에 충분히 오해할 만하다. 원래 능지처참이라는 말은, 능지형과 참형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고대 중국에는 책형이라는 형벌이 있었는데 이건 어떻게든 사람을 찢어죽이면 되는 거라 능지형도 거열형도 책형이라고 할 수 있다. 단, 책형은 사형된 시체를 대중에 공개하는 기시의 의미로도 쓰인다.
참고로 날카로운 칼로 살을 발라내는 형벌은 중국이 원조(?)는 아니다. 아주 일찍이 고대 아시리아에서도 그 사례가 있었고 미얀마, 베트남 등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3. 처벌 대상
반역의 주동자[3] 이거나, 상급자나 주인, 부모를 고의로 살해하여 하극상이나 패륜을 저지르거나, 또는 3인 이상 살해하고 그 중에 대를 끊기게 했을 경우에만[4] 집행하도록 하고 있으나 판관의 판단에 따라서 참수형으로 대신할 수도 있다. 반대로 황제의 명에 의해 능지형을 금지하던 시기에도 판관의 재량에 따라 시행되는 일도 있는데, 일부러 거역한 것이 아니라 황제의 칙령이 지방까지 전해지지 못해 벌어지는 일이었고 대부분 칙령이 명확하지 않으면 그냥 참수형을 해도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물론 이와는 별개로 사형을 하되 교수형 정도로만 해도 되는 사형을 굳이 괘씸죄를 부과하여 능지형으로 바꿔서 사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라는 게 청나라에 가톨릭을 전파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이 능지형을 당했다. 아마도 청나라의 입장에서 봤을 때 가톨릭이 굉장히 지독한 악교(惡敎)였던 모양이다. 물론 이 짓 하다가 제2차 아편전쟁으로 큰 피해를 보게 된다.
참고로 조선에서는 아예 원론적인 의미에서의 능지형이 시행된 적이 없고, 대부분 참수한 뒤 시신을 능지형 비슷하게 절단하거나 거열형으로 대체했다. 이마저도 왕이 명령[5] 하지 않으면 대부분 그냥 참수로 끝났다. 이외에도 중국에서 행해지는 형벌의 상당 부분이 조선에는 존재하지 않는 등 조선 시대의 형벌 방식이 중국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덜 잔혹했던 건 사실이다.
4. 집행방식
능지형은 법정형이 아니기 때문에 분명하게 규정된 처벌 형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래의 설명은 초기 능지형의 모습과 후기의 모습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일단 집행과정에서 지켜져야 할 권장사항으로는 아래의 두 가지가 있다.
- 형이 집행되는 동안 사형수는 최대한 오래 살아있어야 한다.
- 최대한 많은 횟수로 살을 발라내야 한다. 단 권장 숫자는 시대마다 달랐다.
능지형이 가장 활발히 집행되었던 시기는 명나라대로 매관매직과 부정축재를 일삼으며 권력을 휘두르다가 결국 사형에 처해진 환관 유근(劉瑾, 1451~1511)이 최고 기록을 세웠는데, 황제의 명으로 총 6,000번이나 칼질을 해야 했다. 이 유근은 온갖 비리와 나라 말아먹을 일을 벌였으며 이를 고발하고 꾸짖던 정만(鄭曼)에게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 무고로 죽이게 했는데 바로 능지형으로 처형하게 만들었다. 그 죄라는 게 바로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강간했다는 죄였다. 물론 유근이 조작한 거였고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그런 일이 없다고 울며불며 정만이 죄가 없음을 알리려했으나 소용없었고 끝내 정만은 3600번 도끼질에 맞는 능지형으로 죽었고 이를 본 어머니는 정신이 나가 죽고 만다.
그밖에도 유근의 비리를 폭로하며 비난하는 투서를 황제에게 보내자 정사에 관심없던 황제도 이 투서를 보고는 유근을 불러와 경이 대체 어떻게 하기에 이런 건가? 자꾸 이러면 경에게 책임을 따지겠다라고 꾸짖었다. 유근은 쩔쩔매다가 나중에는 투서를 보낸 이를 찾겠다면서 대신 수백여명을 불러내고는 일부러 한여름 햇빛이 비추는 땡볕에 몇 시간이고 서게 하여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게 했다. 결국 대신 3명이 일사병으로 쓰러져 죽었으며 보다못한 환관 이영이 대신들에게 물을 마시게 하자 이를 본 유근은 오히려 이영을 욕하며 구타했고 그를 멀리 추방시켜 한직으로 내보냈다. 이후로도 유근은 비난 투서에 대하여 온갖 횡포로 막으려하니 허천석이라는 대신은 스스로 목메어죽고 유서로 유근을 비난하면서 지옥에서 기다리겠다는 말까지 남길 정도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강직하게 유근의 죄를 고발하던 남경어사 장흠은 중간에서 이를 가로챈 유근에게 수백대의 곤장을 맞고 투옥되어 굶주렸다가 옥 속에서 처참하게 숨을 거두었다.
온갖 횡포로 군림하던 유근은 이걸로도 부족해 반역까지 꾸미려다가 결국 들통나서 분노한 황제에게 똑같이 능지형으로 죽게 된다. 유근에 대한 능지형은 사흘 동안 집행되었으니 하루 평균 2천 번 생살이 발라졌는데, 이틀째 되던 날 끌어내기도 전에 유근은 이미 죽어 있었다. 사흘째 되던 날 몸통과 머리만 남은 유근의 시체를 장대에서 끌어내려 가슴께를 도끼로 부순 뒤에 내장을 끄집어 낸 후 목을 잘라 장대 위에 함께 걸어보임으로써 형이 모두 끝났다. 군중들 중에 유근에게 핍박당했거나 그의 모함으로 처형당한 유족들이 너나할 것 없이 달려들어 시신을 물어 뜯었다고 전해진다. 또는 유근의 살을 씹고자 도려낸 살을 푼돈으로 팔았는데 이걸 사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고 한다. 여기에 오빠가 억울하게 근친강간범으로 몰려 능지형으로 죽고 어머니도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죽게 한 것에 이를 갈던 정만의 누이동생을 비롯하여 허천석, 장흠 등등 유근의 간악함을 고발하려다가 죽게된 이들의 많은 유족들도 끼어서 기어코 유근의 살을 씹으며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위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당대에도 제3자고 이성을 유지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 잔혹한 광경을 절대로 좋게 보지 않아서, 당장 학자였던 적승위가 이걸 보면서 ''''유근이 간악하여 그동안 벌인 짓을 보면 자업자득이지만 그 잔혹함에 나도 하늘을 바라보며 뭔지 모를 한숨을 내비친다. 과연 악을 징벌한다는 명목으로 이런 것이 과연 옳을까?'''' 고민했다고 한다. 명말 최후의 명장 원숭환도 모문룡을 계책으로 죽였다는 죄로 책형에 처해졌는데, 이 경우 기둥에 묶어놓고 살점을 바르며 죽이고 나서 나중엔 두개골까지 부수어 버렸다고 한다. 다만 이 경우는 능지형까지 갈 정도의 죄라고 하기는 어려웠기에 당대에도 말이 많았다. 물론, 능지형의 주 대상이 괘씸죄인 만큼 모문룡의 죽음이 엄청난 괘씸죄로 작용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개 능지형이 끝난 후 뼈만 남은 토막난 몸통은 처형 직전에 입고 있었던 옷을 놓은 대바구니에 담겨 장대끝에 내장과 머리와 함께 걸리며, 처형 이튿날에는 각지로 보내져서 경계의 목적으로 쓰이기도 하고 그냥 묻어버리기도 했다.
사형집행에 걸리는 시간이 길고, 죄인에게 끔찍한 고통을 주기 때문에[10] , 이미 고대 중국에서도 황제에게 형의 폐지를 건의하는 의견이 있었다. 또한 일부 시대에는 형이 폐지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부활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청나라 말기까지 존속했다. 결국 1905년 4월에 능지형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신해혁명 이후에 다시 부활해 청나라 관리 출신의 탐관오리들이 능지형에 처해졌다가 중화민국이 공식적으로 수립된 뒤에 사형 방법을 규정[11] 하면서 완전히 폐지됐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군인을 제외하고는 총살형과 교수형을 폐지한 뒤 약물 주사형으로만 바꿔서 그대로 적용했다. 물론 이후에도 비슷한 형벌이 간혹 집행되긴 했는데 모두 비공식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형이 집행되는 초반에 사형수가 사망해 버리면 집행자를 처벌[12] 하였으나, 사망 전까지 2천 번 이상의 조각을 발라낸 경우에는 집행자에 대한 처벌이 면제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숙달된 집행자의 경우, 사형수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2만 번 이상''' 칼질이 가능했다 카더라는 말도 전해지나 그냥 카더라일 뿐 실제 그렇게까지 집행한 사례는 없다. 여기에 청대에 접어든 후 능지형의 칼질 상한도 크게 완화되었다. 대부분 그 범죄의 흉악에 따라 8도(8번 칼질을 함), 24도, 72도, 120도 등으로 수천 번 썰어죽이던 명에 비해 숫자상으로도 상당히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명대와 달리 숨통을 미리 끊어놓고 시신만 절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13] 사형 집행자도 죄수를 미리 죽여도 되는 조건으로 사형수에서 직업적인 사형 집행인으로 대체되었으며, 공개집행하는 일도 이전보다 훨씬 줄었다. 이 능지도 매뉴얼화 되어 첫 2도는 가슴, 그다음은 오른쪽 왼쪽 팔, 다리 뭐 이런 식으로 순서도 기록되어 있다. 실제 남아있는 집행 사진을 보면 시간의 경과에 따라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가슴살이 베어진 모습, 팔다리의 살덩어리가 떼어진 모습, 팔다리가 신체에서 분리된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5. 능지형의 목적?
사실 능지는 고통을 준다기보단[14] 유교적인 신체발부수지부모적 의미로써 영혼까지 토막쳐버린다는 의미가 더욱 강해졌다. 즉 이 형벌의 목적은 신체적인 고통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유교적인 의미에서 사후의 신체가 훼손당한다는 공포를 주는 것에 있다. 하지만 이후에도 반역이나 연쇄살인 등이 끊이지 않았던 점을 보면 범죄 예방 효과는 별로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주원장조차도 오늘 부패 관리를 능지처참하면 내일 다른 관리가 또 부패를 저지른다고 말했을 정도다.
특히 중국인의 타고난 야만성의 증거라면서 서양 문화권 혹은 한국, 중국, 일본에서도 비판의 도구로 곧잘 삼는데, 사실 고대 중국에서도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비판여론이 높았고 황제에 따라서는 재위기간 동안 금지시키기도 한 형벌이다. 특히 지식인들이 비판한 이유가 '''쓸데없이 잔인하기만 하고 계도의 효과도 없다'''라는 취지에서 비판해왔다. 사실 법전에도 없는 형벌이어서 법가나 유교 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죄형법정주의을 근거로 비판하면 할 말이 없었다. 물론 다른 문화권이나 나라들과 비교해봐도 유달리 잔혹한 사형법이 수천 년간 수많은 죄수들에게 행해진 것 자체는 사실이다.
6. 능지형의 형제들
한국 역사에서는 공민왕 때부터 능지형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특히 조선 태종, 세조, 연산군, 광해군 때에 많이 집행되었다고 하는데, 중국과 달리 거열형으로 대체했고 그 방식도 대부분 사형 자체는 참수형으로 집행하되, 시신을 절단하는 과정만 추가하는 것으로 마지막 모습만 능지형 비슷하게 하고 실제로는 고통을 덜어주는 형태였다.[15] 또한 살아있는 죄인을 토막내는 것 외에 이미 죽은 죄수의 시체를 토막내 공공장소에 전시하는 형벌도 능지라고 하였는데, 후자의 대표적인 예는 상하이에서 암살당한 후 본국으로 이송되어 토막난 김옥균을 들 수 있다. 죄인의 시체나 목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형벌을 실질적으로는 효시(梟示)라고 부른다.
야사인 청성잡기에 의하면 인조 시절 권신 김자점이 역모를 일으킨 과거 반정 공신인 심기원을 잔혹하게 처형해야한다면서 기존의 방법인 시체 상태에서 능지형을 집행하지 않고 '''"저 놈은 산 채로 팔, 다리를 절단한 뒤 머리를 잘라 죽여야한다!"''' 라고 주장했고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김자점의 권세가 워낙 엄청나던 시절이라 심기원은 그대로 형이 집행되었다. 그러자 심기원은 죽기 전 분노에 차서 '''"너도 똑같이 될 것이다. 이놈아!"'''라고 외치며 죽었고 훗날 김자점은 반역자가 되어 효종의 명령으로 능지형에 처해졌다. 그래도 김자점은 규정대로 처형되었고 김자점이 처형된 직후 능지형은 다시 폐지되었다고 한다.[16]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형벌이 시행된 경우는 역사적으로도 드문 편이었으며 인조 때부터는 금지했다. 대신 참수형을 집행한 뒤 시신을 훼손하는 방식의 처형을 추가하여 역적에 대한 처벌수위를 높였는데, 어차피 이전에도 간판만 능지형으로 달고 실제로는 이렇게 집행했으므로 의미는 없다. 갑오개혁이 이뤄진 후 모든 사형을 교수형, 총살형으로 대체하게 되면서 참수형 자체가 없어짐과 함께 완전히 폐지되었다.
한편 서양 세력이 중국으로 들어온 이후 유럽인들은 능지형을 중국의 야만성을 대표하는 예로 들었다.[17] 그런데 영국에는 거열형과 비슷한 형벌이 실존했었다. 바로 ''''교수척장분지형''''(Hanged, drawn and quartered)으로, 묘사 장면은 여기서 볼 수 있다. 국가에 대한 남성 반역죄인에게 행해지는 형벌로[18] 처음에 목을 매달아 죽기 직전 상태까지 만든 후 내려주고, 이후 칼로 죄인의 장기나 생식기를 차례차례 잘라 불에 구워 그것을 죄인 스스로가 지켜보게 한다. 그리고 목을 베고 마지막으로 칼이나 말로 사지를 찢는 오체분시로 몸을 찢는다. 경우에 따라 참수가 제일 마지막에 행해지기도 한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붙잡힌 윌리엄 월레스가 실제로 이 방식으로 처형당했다. 튜더스 시즌 4의 5화에도 같은 방식의 처형을 볼 수 있다. 단, 거기에선 사지가 잘리는 것까지만 표현되어 있다. '''참고로 둘 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영문 위키에는 아예 교수척장분지형을 당한 사람에 대한 리스트가 있을 정도(...). 이 끔찍한 처형법은 18세기 말 대역죄인도 교수형을 하도록 하는 법이 생김에 따라 영국 땅에서 사라지게 된다.
또한 프랑스에도 비슷하게 범죄자의 신체를 공개적으로 심하게 훼손하는 형벌이 있었는데, 루이 15세의 암살 미수범 로베르 프랑수아 다미엥에게 가해진 사형판결문에는 다음과 같이 사형방법을 매우 상세하게 지시하고 있다.
기독교 문명권은 아니지만 북유럽의 바이킹 문화권에서는 사람을 산 채로 등 쪽에서 해체하던 피의 독수리라는 형벌이 존재하기도 했다."손에 2파운드 무게의 뜨거운 밀랍으로 만든 횃불을 들고, 속옷 차림으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문 앞에서 사형수 호송차로 실려와, 공개적으로 사죄를 할 것. 다음으로, 상기한 호송차로 그레브 광장에 옮겨간 다음, 그곳에 설치될 처형대 위에서 가슴, 팔, 넓적다리, 장딴지를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을 가하고, 그 오른손은 국왕을 살해하려 했을 때의 단도를 잡게 한 채 유황불로 태워야 한다. 계속해서 쇠집게로 지진 곳에 불로 녹인 납, 펄펄 끓는 기름, 지글지글 끓는 송진, 밀랍과 유황의 용해물을 붓고, 몸은 네 마리의 말이 잡아끌어 사지를 절단하게 한 뒤, 손발과 몸은 불태워 없애고 그 재는 바람에 날려 버린다."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1장)
자무카가 칭기즈 칸에게 잡혔을 때 자신을 이 형벌로 죽여달라고 했다고 한다는 말이 있으나, 몽골인들의 세계관에 따르면 피를 보지 않고 죽는 것이 영적으로 가장 좋으며 반대로 최악은 물 또는 기름에 익사하는 것임을 감안할 때, 칭기즈 칸을 비하하고 몽골인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를 위해 넣은 엉터리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인지 정반대로 가죽푸대에 넣어서 말에게 밟혀죽거나 아니면 푸대에 넣은 채로 질식사 같은 식으로 '피를 흘리지 않는' 다른 방법으로 죽였다는 기록이 위인전이나 다른 창작물에 더 자주 나온다. 몽골인들도 이것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7. 공식적인 마지막 집행
문헌에 기록된 가장 마지막 집행[19] 은 능지형을 폐지하기로 한지 2주 전이었던 1905년 4월 10일, 베이징에서 이루어졌으며, 사형수는 내몽골 왕자인 아오한우안(Ao-Han-Ouan)의 근위병으로서 그를 암살한 죄로 사형이 집행된 18세의 만주족 청년 푸주리(富珠哩, Fou Tchou-Li).[20] 원래 몽골 측은 산 채로 불태워 죽일 것을 요구했으나 당시 청 황제였던 광서제가 그건 너무 잔인하다고 하여 대신 능지형을 집행하도록 했다 . 능지로 감형된 이유는 중국에서는 신체발부 수지부모의 사상에 의거, 시신의 원형이 조금이라도 유지되고 나중에 수습이라도 가능한 능지형이 아예 재가 되어 온전히 묻힐 수도 없는 화형보다는 그나마 인간적인 처벌이라고 봤기 때문.
그러나 중국 사회문화사 연구자인 티모시 브룩은 저서 『능지처참』에서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청대의 법정 최고형은 능지형일뿐 화형은 아니라는 것이다. 화형은 청대 형법에서 불법적 처형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처형 전 다량의 아편을 죄수에 먹이고 집행한다고 한다.
당연히 감형된 능지형이므로 횟수를 꽉꽉 채워서 말 그대로 FM대로 집행했고 또한 왕족 살해범의 최후라는 명목으로 집행과정이 베이징 저잣거리에서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이 집행 장면이 당시 베이징에 체류 중이던 서양 선교사의 카메라에도 담겼고, 후에 유럽에서 큰 이슈가 되었다. 이 사진은 조르주 바타이유가 그의 저서 『에로스의 눈물』에서 인용할 정도로 유명한 사진이 되었다. 바타이유는 이 사진에 극단적 공포와 극단적 황홀이 공존한다고 보았다.[21] 당연히 이 사진을 근거로 당시 서양에서 중국을 전근대적이라고 엄청나게 깠다. 참고로 이 사진은 구글에 'Fou Tchou-Li'라고 이름만 검색해도 볼 수 있으며 그리 잔인하지는 않으나 팔이 잘리고 갈비뼈가 드러난 모습이 여실히 담겨 있기에 유의하여 보는걸 추천.
8. 매체에서의 등장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중국의 소설가 모옌이 쓴 소설 탄샹싱에 능지처참을 집행하는 과정이 준비과정부터 아주 세세하게 묘사된다. 작중 위안스카이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부하에게 황실 최고의 집행인에 의해 집행된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 집행 마지막까지 죄수를 살려놓으려는[22] 집행인의 고뇌와 노력,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으며 버텨내나가다가 점점 정신이 무너져내려가는 죄수[23] 와 배경묘사를 비롯해 노벨상급 작가가 그려내는 잔혹도이니만큼 한 번쯤 감상해볼 가치가 있다. 능지형은 마지막에 한번 더 등장한다.
중국의 청대 태평천국의 난 시기를 다룬 명장(영화)에서도 고증에 따라 등장할 예정이었지만 분량 문제로 인해 본편에선 짤렸다. 한겨울에 특수분장을 했다지만 반나체로 촬영에 임했던 배우에게 감독이 사정을 해명하느라 진땀 꽤나 흘렸단 후문.[24] 참고로 실제 사건의 범인 장문상도 능지형을 당했는데, 촬영장면과 유일한 차이점은 집행 장소다.[25]
얼음과 불의 노래의 등장 가문들 중 볼턴 가문이 이것으로 악명높다.
나루타루의 코가 노리오가 이런 방식으로 죽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강간당하기까지 했다. 남잔데 남자한테. 최후는 머리만 남아 관절인형 같은 것에 장식...
워크래프트의 넬쥴도 이런 식으로 되어 킬제덴에 의해 죽지 못하게 된 상태로 고통받았다. 게다가 위의 능지형은 다 처형법인데 이쪽은 이걸 고문으로 당했다.[26] 어떻게 보면 더 끔찍한 경우. 리치 왕이 불타는 군단을 등질 이유는 이미 이때부터 있던 셈이다.
9. 능지형을 당한 인물들
참고: 능지형으로 판결받았으나 실제로는 거열형으로 집행된 인물에 대해서는 거열형 문서로.
9.1. 실존 인물
- 강조 - 산 채로 능지형을 당했으나 끝까지 고려에 충성하고 거란에 굴복하지 않자 결국 참수당했다.
- 경정충
- 고영상 - 이자성의 난 때 반란군 지도자 중 한 명. 농민 반란군을 이끌고 이자성, 장헌충과 합류해 명 조정을 괴롭히다 홍승주와 손전정의 관군에게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고 경성으로 압송되어 능지형에 처해진다.
- 사도 바르톨로메오 - 예수의 12사도 중 하나. 아르메니아에서 복음을 전하다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진 채로 순교.
- 상충
- 석달개를 비롯한 태평천국의 지도자들 - 익왕, 태평천국에서 내분이 일어나 양수청이 사망한 뒤 천왕 홍수전이 친척만을 기용하고 중시하자 석달개는 태평천국의 중심인 난징에서 이탈한 뒤 지지자들을 데리고 사천지방으로 가서 태평천국 운동을 이끌었지만 결국 관군에 체포되어 능지형을 당해 죽는다. 이때 수하들과 함께 능지형을 당했는데 능지형을 당하던 수하들이 고통에 못 이겨 신음소리를 내자 "그까짓 통증이 뭐라고 신음소리를 내어 긍지를 버리느냐"고 호되게 꾸짖었고, 자신이 능지형을 당해 뼈와 살이 발라질 때도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이걸 지켜보던 청나라 관리들이 "과연 천하를 어지럽힌 수괴답다"고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태평천국의 핵심 지도자들 중에 능지형을 면한 건 이수성 한 명밖에 없는데, 증국번이 반란의 수괴는 아니라는 이유로 중앙정부로 압송하지 않고 참수형에 처했다. 헌데 이 결정을 듣고 이수성은 "중당(증국번)의 후덕함은 각골난망이다. 이승에서는 이미 힘들어 졌으니, (그 은혜를) 내세에 갚겠다."라고 말하며 증국번에 감사했다. 아무리 용감한 반란군 두목이라고 해도 능지의 고통을 당하지 않고 한 번에 목을 잘라 죽이는 참수형으로 끝낸다는 말에 고마워한 걸 보면, 능지형이 얼마나 두려움의 대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심지어 15살에 불과했던 홍수전의 아들 홍천귀복도 능지처참에 처해졌는데, 천번이 넘는 횟수의 칼질을 하루 종일 당하는 동안 그 울음소리가 집행 과정 내내 흘러나왔다고 한다. 120도가 끝으로 규정된 횟수나 심장을 먼저 찔러주는 편법, 아편같은 자비도 태평천국의 수괴에겐 베풀어지지 않았다.
- 양금영(楊金英), 형취련(刑翠蓮), 양옥향(楊玉香), 소천약(蘇天藥), 요숙고(姚淑皐), 왕괴향(王槐香), 관매수(關梅秀), 유묘련(劉妙蓮), 진국화(陳國花), 장금련(張金蓮), 왕수란(王秀蘭), 서추화(徐秋花), 정금향(鄭金香), 황옥련(黃玉蓮), 양취영(楊翠英), 장춘경(張春景) - 명나라 가정제 때의 궁녀들. 1542년, 가정제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가정제를 시해하려다 실패한 사건인 임인궁변(壬寅宮變)을 일으킨 궁녀들이다. 여기에 후궁 영빈 왕씨(寧嬪王氏)와 단비 조씨(端妃曹氏)까지 연루되어 사건 직후 모조리 저자거리로 끌려가 능지처참을 당하고, 수급과 회떠진 살점들이 거리에 전시되었다.
- 여희
- 왕아종(王阿從): 1797년에 청나라에 대항해 거병한 포의족 여성 지도자. 청군에 패하여 생포된 후 북경으로 압송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20세의 나이로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 왕유근(왕웨이친): 1904년 가을. 리지창 가문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부하들을 시켜 그의 저택을 습격. 리지창과 그 가족 등 최소 12명을 살해한 죄로 사형판결을 받고 주범이라는 이유로 베이징 저잣거리에서 능지형 36도에 처해졌다. 일반인을 살해한 죄로 능지형을 받은 마지막 사례이다.
- 원숭환
- 유근: 명나라의 악질 환관. 백성들을 괴롭혀 상당히 많은 부를 축적했는데 인민일보와 아시아판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과거 제일 많은 부를 축적한 인물로 꼽힐 정도였다.[27] 그의 최후는 3번 문단 참고
- 유복만, 김장손: 임오군란의 반란군 지도자. 청군에게 붙잡혀 군기시에서 능지처참된다.
- 임희재: 임사홍의 아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가 연관된 갑자사화 때 연산군을 비난하는 시를 쓴 게 들통나서 능지처참을 당했다.
- 시황제의 공주들: 진의 시황제 사후 이세황제가 즉위했을 때 자신의 형제자매를 모조리 숙청했는데, 그 중 자신의 누이 10명은 사지를 절단하는 방식으로 처형하였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어쨌건 시황제의 무덤이 발굴될 때 사지가 잘린 흔적이 역력한 여성 유골들이 엄청나게 많이 나와서, 당시의 잔혹한 기록이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 부주리(푸주리) - 몽골 왕자를 암살한 죄로 베이징 거리에서 공개처형당했다. 상술하였듯 공식적으로는 마지막 능지형 집행 사례
- 장문상 - 영화 자마와 명장(영화)의 모티브인 자마안(刺馬案), 마신이 암살 사건의 범인. 능지형으로 최후를 맞았으며 마신이의 제단 앞에서 집행되어 수급, 심장, 살점이 제물로서 바쳐졌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DVD 특별판에만 나오는데 제단에서 집행한 건 아니고 그냥 모종의 장소에서 집행한 걸로 되어 있다.
- 장 샤를 코네이 - 베트남 북부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통킹에서 반란을 선동했다는 죄를 쓰고 사지를 마디마디 절단된 뒤 참수당하는 방식으로 순교.
- 조셉 마르샹 - 베트남 남부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박해받던 천주교도들과 함께 인근 국가인 시암 왕국의 도움을 받아 레 반 호이의 반란을 지원했다. 난이 진압되고 사이공에서 능지형으로 순교. 위의 코네이와 함께 베트남 역사상 천주교 박해가 절정에 달했던 명명제 시기의 인물로, 둘 다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진덕 - 청나라 가경제 암살 미수 사건의 주범. 어린이였던 두 아들도 연좌되어 처형되었다.
- 하화아 - 명나라 융경제 연간에 금의지휘로 있던 주세신의 하녀로 주세신이 살해되었을때 용의자로 오인되어 능지처참에 처해진다. 이때 끝까지 자신이 무고하다고 주장해 처형 직전에도 집행인에게 이왕 죽을 것 자신을 죽인 뒤에 살점을 발라내라고 부탁했으나, 집행인은 이를 듣지않고 규정대로 하화아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그대로 살점을 발라내어, 결국 하화아는 능지처참의 고통을 다겪으며 사망하였다. 결국 진범이 잡혀 무고함이 드러났고, 이때 심문을 담당했던 관원들이 무더기로 파직당한다.
- 홍재학 - 만언척사소를 올린 인물. 그러나 이 상소가 왕의 치부까지 거리낌없이 공격하는 매우 과격한 상소여서 결국 능지처참으로 처형당했다.
- 투팍 아마루 2세 - 스페인인들에 의해 거열형이 선고되었으나, 말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능지형으로 처형당했다.
- 히파티아 - 단 히파티아는 길거리에서 린치를 당해 갈갈이 찢겨 죽었으므로, 재판에서 능지형을 선고받은 게 아니다.
- 화석합달공주 망고제 - 청태조의 셋째딸이고 청태종의 누나다. 1635년 태종을 암살할 계획을 세운 홍문연사건의 주동자로써 능지형 360도에 처해졌다.
9.2. 가공 인물
- Library of Ruina의 셀마 : 도서관 의뢰를 간 유진 일행이 임무에 실패하면서 아르갈리아의 약속을 어긴 셈이 되었고, 그것 때문에 아르갈리아에게 잡혀 벌로 23구 뒷골목에서 웃는 얼굴들에게 산 채로 10000포를 뜨여버리는 처형을 받는다.
- 수호지의 황문병
- 워크래프트 시리즈의 넬쥴(리치 왕)
- 아카메가 벤다!의 오네스트 : 만화의 특성상 능지형을 당하는 모습이 그대로 나오므로 비위가 약하다면 주의. 물론 여기까지 본 사람들은 혐오감보다는 통쾌함을 느낄 것이다.
- 나루타루의 코가 노리오
- 원 뿔러스 원의 호구안
- EVE Online의 아마르 제국 황제 계승 후보 아릿시오 코르-아조르 : 망나니 짓으로 수억명의 사람들 한명한명에게 죽을 죄를 지었지만 황족이기에 죗값이 1인당 먼지 수준으로 줄었는데, 그래도 먼지를 수억번 모으면 1인분이 되는지라 그냥 고통없이 처형당할지, 그래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는 능지형[28] 을 받을지 선택해야 했고, 능지형을 받았다. 능지형을 당한 후 정신을 차려서 자신의 사디즘을 부패 정치인들을 몸소 찾아가 패 죽이는 건전한(?) 방향으로 돌리고 있다.
- 명군이 되어보세!의 임해군 : 경인왜란 때 조선 왕위를 찬탈할 목적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앞잡이가 되어 매국행위를 저질렀다. 당연히 조선이 승리한 후 주인공(조선 왕)이 사형에 처하기로 했는데 그냥 참수하지 않고 왕족이라는 이유로 명나라에서 사형집행인을 데려와 1,000번이나 칼질을 받게 하는 아주 특별한 스페셜 서비스를 베풀어줬다.
10. 인터넷 유행어
2018년 들어 지능을 뒤집은 능지라는 단어가 인터넷 상에서 유행하면서, '능지처참'을 '능지(=지능)가 처참하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일종의 말장난이라고 볼 수도 있다. 능지 문서 참조.
[1] 더 넓은 범위를 따지자면 1위는 능지형, 2위는 십자가형, 3위는 기정형(스카피즘), 4위는 관통형, 5위는 팽형, 6위는 화형 순이다. 단 중국이나 조선에서는 화형은 신체의 일부조차 온전하게 남지 않는다는 이유로 화형을 더 중한 형벌로 간주했다.[2] 중국 과거 문헌에서 능지가 완만한 언덕의 의미로 처음 사용된것은 순자의 유좌편인데, 여기선 "어떤 석자짜리 언덕은 빈 수레를 끌고도 오를수 없는데, 백장짜리 산도 가득찬 수레를 가지고 오를수 있다. 완만하기 때문이다. 높은 담장은 넘지 못하는데 더 높은 산을 오를 수 있는 것 또한 완만하기 때문이다"의 의미로 쓰였다. 완만하게 사람을 죽이려면? 치명상을 덜 입히면서 여기저기 발라내면 된다.[3] 단, 태평천국 운동 당시에는 태평군의 일반 병사들은 학살. 지휘관급은 무조건 생포하여 능지형을 집행했다.[4] 왕웨이친이 능지형을 받은 이유가 재산분쟁 와중에 이웃집을 습격하여 12명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그 집의 대를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혼자 한 것도 아니고 사람을 여럿 시켜서 저지른 점도 가중사유가 되었다.[5] 허가 정도가 아니라 '능지형을 반드시 집행하라'는 명령.[6] 수술용 메스가 가장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7] 물론 목숨에야 말단이 덜 치명적이겠지만 통각 신경은 말단부에 더 많이 분포해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 아프고 잔인하게 죽이려고 그러는 거(...).[8] 사지수족을 모두 처리했는데도 사형수가 아직 살아있을 때에는 흉곽에 구멍을 뚫어 기흉으로 사망시키거나 심장을 찔러 죽였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거의 없었고, 오히려 집행 초반에 미리 죽여놓고 시작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9] 애초에 이 형벌을 집행하는 경우는, 억울하게 숙청당한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 수십명씩 죽인 연쇄강간살인범이나 국가반역의 주동자 등의 악인이였기에 전근대의 인식으로는 어찌보면 축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참고로 능지에 국한되지 않고 사형 자체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마을 축제 취급 받은 역사는 유구하다. 유럽의 사형장면 기록을 봐도 죽은 사람의 피와 기름을 받으려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기록이 굉장히 자주 보인다. 사실 놀 거리도 없던 그 시절에 사형만큼 자극적인 눈요깃거리도 없기에...[10] 특히 보는 사람에게는 굉장한 혐오감을 준다.[11] 당연히 총살형, 교수형 등 서양에서 집행되던 방법만 수용하였다.[12] 그것도 그냥 처벌이 아니라 최대 사형. 단 이 경우는 사형수를 집행자로 투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능지형을 맡는 집행자도 사형수일 때도 있고 전문 직업인이 맡기도 하고 망나니를 시키기도 했다.[13] 왕웨이친도 산 채로 썰어 버리지 않고 심장을 찔러 숨을 끊은 다음에야 능지형을 집행했다. 다만 그냥 아편을 먹이고 절단하다가 중간에 사형집행을 하는 경우도 있는 등 집행자의 재량으로 보인다.[14] 대량의 아편을 먹였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었고, 청대 이후에는 아예 급소를 쳐서 숨통을 미리 끊어 놓은 다음 작업에 들어갔다.[15] 팽형 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 조선은 참혹한 형벌은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은 국가였다.[16] 김자점의 능지형을 전 드라마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에서 팔다리부터 잘라내도록 지시하는 것으로 나왔는데, 실제 그렇게 집행되었으면 기록에 남았을 것이다. 별다른 언급이 없는 걸 보면 원칙대로 참수형을 집행한 뒤, 시신을 절단했을 가능성이 높다.[17] 이는 티모시 브룩, 제롬 부르곤, 그레고리 블루 등이 지은 책에 잘 나와있다. 너머북스에서 번역본이 나왔는데 제목은 능지처참.[18] 참고로 여성 반역자는 교수척장분지형 대신 화형을 당했다.[19] 문헌에 기록된 마지막 집행이라고 말하는 건 실제로는 청의 통치권이 상대적으로 덜 미치는 변방에서 총독들이 흉악범 처형에 임의로 능지형을 채택한 사례가 그 뒤에도 신해혁명 전까지 드물지 않게 있었기 때문.[20] 구글링하면 보는사람에 따라 다소 충격적일수 있으니 주의바람[21] 참고로 보통 능지형 집행 과정은 무지한 대중이나 좋아하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좋게 볼 수 없는지라 대부분 그나마 좀 덜 잔인하게 한다고 숨을 끊고 나서 형을 집행하고 칼질 횟수도 제대로 채우지 않는 게 관행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청 황제의 지시로 말 그대로 FM대로 선고된 횟수를 '''살려놓고''' 채웠기 때문에 사형수는 집행이 끝날 때까지 확실하게 살아있었다고 한다.[22] 능지형을 받는 경우에는 흉악범 아니면 진짜 신념에 따라 암살 혹은 반란을 주도한 자들인데, 전자라면 당연히 극악무도한 놈이므로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어야 해서 그렇게 한 거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후자의 범죄자들에게 능지형을 집행할 때는 오히려 최대한 오랜 기간 살려서 집행하여 인상 깊은 죽음을 맞도록 해주는 게 오히려 그의 명예를 존중하는 거라 여겨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23] 위에 언급된 매뉴얼화된 능지처참의 집행 순서가 고증되어 유두를 비롯한 가슴살부터 저며지기 시작한다. 집행인 집단에서 전해지던 비술에 의해 심장을 강타당해 반쯤 가사상태에 빠진것도 있고 애초에 성공하건 실패하건 무조건 사형이라는 걸 알고 저지른 짓이라 이악물고 버텨나가다가 고환과 음경을 적출당하고 나선 완전히 정신줄을 놓고 죽이려던 위안스카이에게 욕설을 퍼붓다가 집행을 참관하던 빡친 위안스카이에 의해 순서고 뭐고 혀를 뽑히게 되고 이로 인해 집행인이 상정하던 순서와 출혈량이 어긋나게 된다.[24] DVD에서 추가된 장면에서 감상 가능한데, 굳이 설명하면 회한의 눈빛으로 자신의 몸이 잘려나가는 걸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다. 청대 능지형도 보통 수십 도씩 잘라냈기 때문에 날이 안 설 때가 있으면 칼 현장에서 갈고 집행을 다시 하고 했는데 이 부분도 그대로 고증됐다. 그리고 집행인들이 칼을 가는 동안 사형집행에 입회한 청 관료 두 명이 뒤에서 쳐다보고 있다.[25] 장문상은 마신이의 제단 앞에서 다수의 관료들이 입회한 상태로 능지처사를 당했다. 반면 강오양은 그래도 비공개 처형되는 걸로 나온다.[26] 잔인한 이야기지만 능지형은 서서히 사람을 죽이는 형벌이기 때문에 죽이는 것까지 가지 않고 치명적이지 않은 부위의 살만 도려내는 고문이 서양이나 중국 모두 실제로 있었다.[27] 사망 당시 수천만냥의 금과 은을 몰수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당시 명나라 재정수입의 40배, 지금으로 치면 55조 원 정도였다고 한다. 관련기사[28] 집행은 수술칼로 하되 끊임없이 수혈을 시키고, 형이 끝난 후에는 살아있다는 조건하에 근육 조직을 재생하는 시술을 받기로 했다. 물론 죗값을 치러야 했으므로 형은 당연히 마취 없이 진행돼서 고통을 받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쇼크로 죽거나 스스로 자살하면 그건 자기 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