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준
1. 개요
楊俊
(? ~ 222)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계재(季才)
2. 생애
하내군 획가현 사람으로 변양에게서 학문을 배워 변양에게서 재능을 높이 평가받았다.
병란이 일어나자 하내군이 사방으로 통하는 요지라 곧 전쟁터가 될 것을 예견해 노약자들을 부축하여 경현과 밀현의 산간으로 향했는데, 따르는 자가 백여 호나 되었다. 가난하고 부족한 자를 구해주면서 있는 자와 없는 자를 서로 교류하게 했으며, 족인과 지인 중에 여섯이 포로가 되자 가산을 털어 그들을 구제하였다.
조조가 양준을 곡량현의 장으로 임명했다가 승상연속이 되게 했다.
무재로 천거되어 안릉현의 현령, 남양태수로 역임해 도덕과 교화를 선행하면서 학교를 세우자 관리와 백성들이 그를 칭찬했으며, 정남군사가 되었다가 위나라가 건국되자 중위로 옮겼다. 조조가 한중을 정벌할 때 위풍이 모반을 일으키자 조조가 있는 행재소로 가 자책하면서 조비에게 사직하는 편지를 썼으며, 마침내 평원태수로 좌천되었다. 조비가 즉위한 뒤에는 남양태수에 임명되었으며, 곧 왕상이 수도로 돌아오도록 추천했다.
양준은 어린 시절부터 인물 평하기를 스스로 임무 삼았는데[1] , 사마의가 16, 17세일 무렵부터 그 재능을 알아봐 비범함을 칭찬했고, 이미 유명했던 사마랑에 비해 명성이 없던 그의 족형 사마지의 재기에 대해서도 호평을 아끼지 않았을 정도로 인물 보는 눈이 탁월했다. 또한 병주로 피난가서 노예가 된 왕상이라는 자의 재능과 인품을 알아보고 그를 풀어주는 등 도움을 주기도 했다. 조정에 출사한 뒤로는 위순 등을 발탁했다. 한편 조조가 아직 태자를 세우지 않았을 때 조비와 조식에 대해서도 평하였는데, 조식을 아름답다고 하여 조비가 한스러워했다.
222년에 조비의 수레가 완에 도착할 때 저잣거리의 열기가 가득하지 않다고 생각해 화를 내며 양준을 잡아들였다. 사마의, 왕상, 순위가 양준을 구명하려 나섰으나, 조비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양준은 자살했으며, 사람들이 그의 억울한 죽음을 애통해했다.[2]
[1] 당시의 관직등용제에 안목으로 유명한 이들의 단평이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에 '인재를 발굴함으로써 나라에 보탬이 된다'는 식으로 인물평 그 자체에 사명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평판가들에 관한 설명은 허소 항목참조[2] 양준이 조비보다는 조식과 친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인물평을 했던 그의 성향상 서술중립을 유지하며 조식을 칭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차기 권력자가 되느냐, 실패하고 권력강화의 제물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느냐의 절체절명한 기로에 서있던 조비 입장에서 양준의 발언은 상당한 위기감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 일상에서도 타인과 비교하여 좋은 평을 얻지 못하면 기분이 상하는 법인데,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문제에서 조식에게 유리한 발언을 한 양준이 조비 눈에 고깝게 보이는 것은 당연지사. 양준이 평소에도 조식과 친했으니 아예 조식의 파벌이라 인지했을 수도 있고, 양준의 성품을 곰곰히 헤아려 중립적인 평가였다는 걸 이해했을 수도 있는데, 어느 쪽이든 조비 성격상 앙금이 남았을 테고, 결국 저잣거리의 열기가 어쩌고 하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어 억지핍박을 한 것으로 보인다. 양준이 자살을 선택한 데에는 황제의 심대한 원망을 사 궁지에 몰린 현실적인 좌절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한 인물평이 정치적 수작질으로 폄하받은 데에 따른 자괴감, 그리고 억울함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