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지

 


司馬芝
(? ~ ?)
1. 개요
2. 행적
3. 창작물에서


1. 개요


후한 말 위나라의 법학자. 자는 자화(子華). 하내군 온현 사람. 사마랑, 사마의의 족형 즉 친척형뻘이며, 사마기(司馬岐)의 아버지.

2. 행적


젊어서 서생이 되어 노모와 함께 전란을 피해 형주로 갔는데, 노양산에서 도적을 만나 함께 가던 다른 모든 사람들은 노약자를 버리면서 도망쳤지만 사마지만은 노모 옆에 앉아 있었다.
도적이 와서 칼을 들이대자 사마지는 고개를 숙이면서

저의 어머니는 늙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오직 당신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 말에 도적은 효자를 죽이는 것은 의롭지 못하다면서 그를 놔주었으며, 사마지는 작은 수레에 어머니를 태우고 남방으로 가 10년 동안 농사를 지으면서 보냈다. 그리고 형주에서는 배잠에게 어찌 유표 따위를 섬기냐는 말도 듣는다.
208년에 조조가 형주를 평정하자 사마지를 제남군 관현의 장으로 임명했으며, 그때 유절이라는 호족이 여러 식객들을 거느리면서 도적질을 하자 사마지는 왕동을 비롯한 그의 빈객들을 징병하려고 했다. 사마지의 부하가 그렇게 하면 왕동 등이 다 도망칠 것이라고 하자 유절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그들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그 편지를 받은 유절은 오히려 왕동 등을 모조리 숨겨주어 징병을 관리한 관리가 숫자를 채우지 못해 자신이 직접 가겠다고 할 정도였다. 사마지는 이 실패에 절망할 법도 했지만 사실 다 이걸 노리고 한 거였다.
자신의 오랜 친구 제남 태수 적광에게 유절의 죄목을 낱낱이 적어 보내 벌로 유절을 징병해달라고 했으며, 적광은 그의 말대로 죄목을 읊으면서 유절을 징병하겠다고 하자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게 되어 오랜 골칫거리를 해결해준 사마지를 백성들은 찬양하게 된다.
유훈#s-2이 사마지와 조조와의 친분만을 믿고 그의 친족들까지 법을 어기면서 날뛰자 사마지는 그들을 모두 법대로 처리하는데,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아 유훈과의 관계 파탄도 막으면서 법대로 처리했다는 명성을 얻어 유훈이 불법을 저질러 처형될 때 대리정으로 승진한다. 범인을 고문하는 것은 단지 고문받는 사람이 죄를 뒤집어 쓸 뿐이라 여겨 고문을 하지 않았으며, 그 시간에 범인이 도망치게 하지 못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해 조조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된다.
감릉, 패, 양평태수를 역임하면서 재임하는 곳마다 강자를 누르고 약한 사람을 도와주면서 사사로운 청탁을 받지 않았는데, 한 번은 내관이 사마지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차마 직접 부탁을 하지 못해 사마지의 아내의 백부 동소에게 부탁을 했다. 동소 또한 사마지가 두려워서 부하지 못했으며, 직접 교령을 만들어 배포를 했다.

군주는 교령을 세울 수 있지만, 관리들로 하여금 반드시 범하지 못하게 할 수는 없고 관리는 교령을 범할 수는 있지만 군주로 하여금 반드시 알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 교령을 만들었지만 위반한다면 군주가 못난 것이고, 교령을 범해 군주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은 관리의 화인 것이다. 군주는 위에서 열등하고, 관리는 아래에서 화를 만나니, 이것은 정사에 이치가 없는 원인이다. 각자 힘써야 한다.

또 순행이라는 직위에 있던 관리가 다른 문간이라는 직위에 있는 관리에게 비녀를 훔쳤다고 의심해 옥에 가두자 사마지는 또다시 교령을 발표한다.

무릇 사물은 서로 유사해 구별하기 어려우므로 이루[1]

가 아니면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 일이 사실 문간의 행위라면 순행은 어떻게 비녀 하나를 아주 아까워하면서 동료에게는 경솔하게 상처를 주는가! 이 일은 다시 문제삼지 마라.

이렇게 통치를 하자 가는 곳마다 공적이 있었으며, 황초 연간(220 ~ 226년)에 중앙으로 들어가 하남윤이 되었다. 그는 임지에 도착하여 강자를 누르고 약한 사람을 도와주고, 사사로운 청탁은 받지 않았다. 마침 내관이 사마지에게 일을 의뢰하려고 하였지만, 감히 직접 말하지 못하고, 사마지의 아내의 백부동소에게 전하도록 했다. 동소 또한 사마지를 두려워했으므로 그를 알리지 않았다. 사마지는 교령(敎令)을 만들어 아랫사람들에게 주며 말했다.

군주는 교령을 세울 수 있지만, 관리들로 하여금 반드시 범하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 관리는 교령을 범할 수는 있지만 군주로 하여금 반드시 알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 교령을 만들었지만 위반한다면 군주가 못난 것이고, 교령을 범하여 군주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은 관리의 화인 것이다. 군주는 위에서 열등하고, 관리는 아래에서 화를 만나니, 이것은 정사에 이치가 없는 원인이다. 각자 힘써야 한다.

그래서 휘하의 관리들은 스스로 힘을 기울이지 않는 다가 없었다.
부하인 순행(循行: 관직명)이, 문간(門幹: 관직명)이 비녀를 훔쳤다고 의심하였다. 문간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관리가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다. 사마지가 교령을 발표했다.

무릇 사물은 서로 유사하여 구별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므로 이루(離婁: 고대에 시력이 좋았던 사람)가 아니면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드물다. 이 일이 사실 문간의 행위라면, 순행은 어떻게 비녀 하나는 아주 아까워하면서 동료에게는 경솔하게 상처를 주는가! 이 일은 다시 문제 삼지 마라.

조예#s-2가 즉위하자 동탁 등에 의해 화폐의 공신력이 바닥을 쳐버려서 폐지했던 오수전을 다시 발행하자고 하기도 했다. 당초 조비가 221년 초에 후한말 난리로 인해 폐지된 오수전 사용을 회복시켰다가 위나라에서 곡물값이 너무 비싸니까 다시 오수전을 폐지하고 곡식과 비단(穀帛)을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이를 교묘하게 속이는 방법이 점차 많아졌다. 서로 다투어서 곡식을 물에 적셔서 이익을 보려 하였고, 얇은 비단을 가지고 교역을 하여서, 비록 엄한 형벌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금지시킬 수 없었다. 사마지 등이 조정에서 크게 토론을 벌이며 생각하길 "전(錢, 돈)을 사용하는 것은 나라를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형벌을 줄일 수 있으니, 지금 오수전을 만들어서 편하게 하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227년 여름, 4월 을해일에, 다시 오수전을 통용하게 하였다.
그러나 화폐경제를 어느 정도 복구시킨 촉한 외 중원에서는 이런 현물거래가 계속 성행했다. 하후현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장제#s-2가 호군으로 있을 때 아문(牙門)에서 자리를 얻고 싶으면 1천 필(匹)을 바쳐야 하며, 백인독이 되고 싶으면 5백 필을 바쳐야 한다는 말이 떠돌았는데 사마의는 장제와 가까워서 어느 날 그를 불러서 그 사실을 물어 보았다. 장제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못하고, 농담으로 낙양의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는 1전(錢)이라도 부족하면 안 되는 법이라고 했으며 사마의도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후현이 장제를 대신하여 호군이 되었지만 이러한 인사를 막지 못했다가 사마사가 호군이 된 후 이런 폐단을 없었다. 즉, 당시 중원에서는 '필(匹)'과 '전(錢)' 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었으며, 조예 대 사마지 등의 건의로 화폐를 재건하기 위해 오수전이 발행되었음에도 포백(布帛)의 화폐 기능을 제거할 수 없었다는 걸 보여준다.
또 조예 즉위 후 관내후의 작위를 받아 조홍의 유모(乳母), 이 임분공주[2]의 시녀와 함께 무간산(無澗山)[3]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다가 옥에 갇혔는데, 무선황후는 황문을 사마지의 관소로 보내 뜻을 전했지만 사마지는 통보하지 않으면서 낙양의 옥리에게 칙령을 내려 심리하도록 하고 상서를 올려 말했다.

사형에 처해야만 되는 사람은 모두 먼저 상주해 사형 집행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전 칙령에는 사악한 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금지해 풍속을 바르게 했습니다. 지금 당 등이 범한 것은 음란한 죄행으로서 사어(辭語)가 비로소 정해졌는데, 황문 오달이 신을 찾아와 태황태후의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신은 감히 이 명령을 받지 못하고, 명령 주에 범인을 돕거나 보호하라는 내용이 있을까 두려워했습니다. 성상께서 빨리 알도록 했다면 부득이 범인을 불쌍히 여겨 그녀들을 보호하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일찍이 없었던 것이 원인이지만 이것은 신의 죄입니다. 때문에 통상적인 규정을 무시하고 즉시 낙양현에 칙령을 내려 심리를 하도록 했습니다. 신이 독단적으로 처형을 시행했으니 엎드려 처벌을 기다리겠습니다.

조예는 이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표를 살펴보니 그대의 지극한 충성심은 분명해졌소. 그대가 조서를 받들려고 임기응변으로 일을 처리한 것은 옳소. 이것은 그대가 조서의 취지를 받든 것인데, 무엇을 사죄한단 말이오? 지금 이후로 황문이 다시 그대에게 간다면 일을 신중히 처리하고 그들을 만나지 말도록 하시오.

사마지는 그 관직에 11년 동안 지내면서 여러 차례에 거쳐 법조문의 불합리한 점에 대해 논의했으며, 공경들 사이에서 곧은 태도로 행동했다. 여러 왕이 입조해 금령을 어겨 수도 사람들과 교류했을 때 왕들과 연결된 사람들을 모두 면직시켰다.
후에 사마지는 대사농이 되어 관리와 서민들이 농업보다 상공업에 기운을 쏟자 이것을 염려하는 상소를 올렸다.

왕이 된 자의 정치는 근본(농업)을 숭상하고 말업(末業: 상업)을 억제해야 하며, 농업에 힘쓰고 식량에 치중해야만 합니다.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3년간의 식량이 저장되어 있지 않으면, 그 나라는 나라 구실을 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관자(管子) 구언(區言: 任法ㆍ明法ㆍ正世ㆍ治國ㆍ內業 5편을 가리킴)에서도 식량을 축적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했습니다.

지금 의 두 적국이 소멸되지 않았고, 전쟁은 부단히 이어지고 있으므로,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곡식과 비단에 있습니다. 무황제(태조)께서는 특별히 둔전의 관직을 개설하여 농사와 양잠을 본업으로 하여 전문적으로 종사하도록 했습니다.

건안 연간, 천하의 창고가 꽉 차 있어서, 백성들도 은근히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황초 이래로 농정을 담당하는 제관들이 각기 부하들을 위한 계책을 생각했는데, 이것은 진실로 국가의 큰 본질로부터 마땅함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무릇 왕 되는 자는 천하를 집으로 하여야만 하기 때문에 전에서 ‘백성들이 부족한데, 어찌 군주가 풍족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풍족의 근원은 하늘의 때를 잃지 않고 땅의 힘을 다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 상업으로 추구하는 것은 비록 두 배나 되는 현저한 이익을 있을지라도 천하를 통일하는 계획에 있어서는 이미 셀 수 없을 정도의 손실이 있는 것이니, 밭을 개간하여 한 이랑의 땅의 수확을 증가시키는 것만 못합니다. 농민들이 밭에서 일을 하는 것은 정월부터 밭을 갈고 파종하며 호미로 잡초를 제거하고 뽕잎을 자르고, 화전을 일구어 보리를 심고 벼를 베고 작업장을 공고히 하고, 11월이 되면 일을 완결시킵니다. 그런 연후에 창고를 다스리고 교량을 설치하여 부세를 운반하고 도로를 반듯하게 닦고 다리를 수리하며 집 담장과 창문을 꾸미는데, 이로써 1년을 마치게 되니 하루라도 농사를 짓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지금 농정을 담당하는 모든 관리들은 각기 ‘남아 있는 자가 상업으로 떠난 자를 위해 농사 계획을 세우고, 힘을 다해 농사를 지으니, 형세가 부득이 할 뿐입니다. 농업이 조금이라도 황폐화하지 않으려면, 국가는 평소 여력이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들이 다시는 상업의 일로써 농업을 어지럽게 못하게 하고, 전적으로 농업과 양잠에 힘쓰게 하여 국가의 계책에 편리하게 해야 됩니다.

조예는 이에 따랐으며, 매번 상관이 불러서 물어보려고 하면, 사마지가 항상 먼저 연사를 만나 의도를 판단하였다. 그가 승낙하고 반대할 때의 상황은 모두 예상한 바와 같았다. 사마지는 천성이 밝고 정직하였지만, 품행을 바르게 하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빈객과 의논할 경우, 그의 생각에 수긍할 수 없으면 곧 정면에서 그 사람의 단점을 지적하지만, 물러난 후에는 비난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관직에 있을 때 세상을 떠났는데, 집에는 남아 있는 재산이 없었다. 위나라로부터 진나라 시기에 이르기까지 하남윤을 지낸 사람 중에서 사마지에 미치는 자는 없었다.

3.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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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4 일러스트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14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통솔력 18, 무력 16, 지력 61, 정치력 86, 매력 81이며 일러스트는 두 손을 펼치고 있다. 개성은 독려, 법률, 농정, 주의는 왕도, 정책은 지역진흥 Lv 4, 진형은 방원, 전법은 고무, 진정, 친애무장과 혐오무장은 모두 없다. 생년은 168년, 몰년은 232년까지 되어있다.

[1] 離婁, 중국 전설상의 인물로 백 보 바깥에서도 멀리 볼 수 있었다는 인물이다.[2] 임분공주는 이 기록에서만 한번 언급되는 신원을 전혀 알 수 없는 공주이다.[3] 배송지가 보건대 무간은 산의 이름으로 낙양의 동북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