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우룡

 


성명
엄우룡(嚴雨龍)
생몰
1900년 12월 30일 ~ ?
출생지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면 장풍리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엄우룡은 1900년 12월 30일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면 장풍리 출신이다. 그는 1918년 신흥군에 소재한 사립 영춘학교(永春學校)를 졸업한 후 1919년 2월 간도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서 면학 중 같은 해 8월 교관 신동천(申東天)으로부터 군자금 모집의 명령을 받고 입국했다. 이후 1919년 9월 안주, 평양 등지에서 군자금과 무관학교 학생 모집을 위해 활동했지만 그해 10월 4일 경찰에 체포되어 며칠간 고초를 겪었다.
1920년 7월 서울에서 의열단 단원 김상옥으로부터 상하이에 건너갈 여비 조달을 부탁받고 유득신과 함께 경기도 평의원 박완상(朴完相)에게 2천 원의 출금을 요구하며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후 1921년 1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제령 7호 위반 및 강도, 공갈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8.15 해방 후에는 한국독립당에 가담했지만, 1947년 6월 김구가 반탁운동을 전개하자 안재홍, 박용희, 조헌식, 이의식, 이승복, 장지필 등과 함께 미소공위를 지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며 한국독립당을 탈당했다. 이후 그는 신한국민당에 가담했고, 1947년 9월 신한국민당이 민주통일당, 민중동맹, 신진당, 건민회 등과 통합하여 민죽독립당을 결성할 때 선전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두달 후 유엔총회가 남한 단독 선거를 결의했을 때 민주독립당이 이에 반발하자, 그는 기자회견을 열어 유엔의 결의는 현실적으로 타당하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당내에서 비난의 대상이 된 그는 1948년 1월 민주독립당을 탈당했다. 그 후 6.25 전쟁 발발 후 북한군에게 납북되었으며,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엄우룡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