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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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열단 투쟁이야말로 수많은 독립 투쟁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감동적인 투쟁이었다. -언론인 고 송건호 선생-
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義烈團'''-'조선 혁명 선언'[2]
의 마지막 구절, 신채호 1923년-
1919년 11월 만주 지린성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 독립운동 단체. 쉽게 말해 대일 무장 단체였다.
이 단체를 발족한 약산 김원봉은 3.1 운동의 대중화 단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조선인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다. 이로써 의열 투쟁 결사대를 조직하여 '''암살ㆍ파괴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국내 동포들의 독립 정신을 환기'''시키고, 나아가 이를 통하여 국내외 한인을 중심으로 혁명을 촉발함으로써 '''민족의 독립과 조국의 광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 같은 구상 아래 김원봉은 1919년 11월 윤세주, 이성우, 곽경, 이종암 등의 동지들과 지린성(吉林省)에서 의열단을 발족하였다.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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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 당시의 단원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중심이었다. 그리고 단장을 비롯해 김대지, 황상규가 고문을 맡았고, 단원은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의 13명이었다. 단장은 김원봉이 맡았다. '이 13명은 광복 때까지 단 1명도 배신하지 않았다'는 표현으로 매우 유명하다. 하지만 사실 김원봉과 윤세주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은 의열단과 중국 공산당에서의 활동으로 인해 광복 때까지 생존은커녕 1920년대에 모두 사망했으며, 윤세주도 김원봉과 갈라선 후 조선의용군과 팔로군에서 활동하다가 광복 전에 사망했다. 때문에 맨 위에 나와 있는 사진에는 김원봉을 제외하면 여기에 있는 13인이 아무도 없다. 한편 이 13명 중 단장 김원봉을 포함해 5명이 같은 밀양 동화중학교[3] 출신으로, 서로 이웃사촌 관계였기도 하다.[4]
창단 직후 "공약 10조"와 뒤에 "5파괴", "7가살"이라는 행동 목표를 독립운동의 지침으로 채택하였다. 하지만 암살과 테러를 위한 전문 교육이나 훈련을 받지 않았던 탓에(사실 당시에는 가르쳐줄 사람이나 단체도 없었지만) 작전의 실행에 허술한 점이 많아 암살 대상의 자택 앞에서 귀가할 때를 기다리면서 술을 마시다가 졸아서 놓치는 등 실패할 때가 많았다. 이들 중에는 김시현 열사가 있는데, 그는 광복 후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되었다. 또한 '''시인 이육사도 의열단 단원'''이었다.
'''비밀 결사 조직'''인 탓에 단원이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2010년에 기밀 해제된 영국의 비밀 문서에 의하면 단원이 '''무려 2천여 명에 달했으며,[5] 도쿄에도 50여 명이 상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의 작가 님 웨일즈는 김산을 인터뷰해 저술한 <아리랑>에서 1927년까지 체포돼 '''처형당한 의열단원이 무려 700명'''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이 정도의 규모가 외부에 드러나지 않았다는 게 정말로 대단한 사실.
공약 10조
신채호는 1923년 1월에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 선언)>전문 링크에서 일부 독립 운동가들의 문화주의, 외교론, 준비론 등의 입장을 비판하고 민중에 의한 직접 혁명과 평등주의에 입각한 독립 노선을 제시하였다. 의열단은 창단한 얼마 뒤에 근거지를 지린에서 베이징으로 옮기고, 상하이 지방에서 단원들을 포섭하여 1924년경에는 약 70여 명의 단원을 이룰 수 있었다. 후일 한국 민족 운동사에 이름을 남긴 김구, 김규식, 김창숙, 신채호 등이 실질적인 고문 역할을 했고, 장제스 중국 국민당 총통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3. 알려진 독립운동들
1920년 3월부터 의열단은 곽재기,∙이성우,∙신철휴,∙윤세주 등의 핵심 단원들을 행동대원으로 국내에 잠입시켰고,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경성일보사를 폭파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마지막 실행단계에서 비밀이 누설되어 최초의 대규모 암살∙파괴 활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의열단은 1920년 9월 14일 박재혁을 파견하여 부산경찰서를 폭파하였고, 또 12월 27일에는 최수봉으로 하여금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게 하는 등 연쇄적으로 일제 식민통치기관을 공격하였다. 1921년 9월에는 김익상이 조선총독부 청사 폭파 의거를 성공시켰다.
그 외에도 1920년대에 지속적으로 일본 고관 암살, 관공서 폭파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23년 김상옥, 24년 김지섭, 26년 나석주 순).
4. 해체
김원봉 등 의열단 요인들은 소규모 투탄 행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좀 더 구체적이며 전략적, 군사적인 조직이 필요하다는 점을 느꼈다. 이에 1926년 1월 김원봉, 윤세주를 비롯한 의열단의 핵심 요인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였고, 이로써 의열단은 사라지게 된다.
의열단 요인들은 황포군관학교에 있던 시절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중국 공산당 출신 교관 및 사회주의 학생들을 통해 공산주의를 접하고 이에 심취하게 되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핵심인 폭력혁명론은 이들을 크게 매료시킨 것으로 보인다.
1926년 10월 황포군관학교 졸업 후 의열단 요인들은 1차 국공합작 상황 하에서 국민당 군대 장교로 복무하면서 동시에 중국 공산당에 동시에 발을 걸치며 활동하였다. 1927년 8월에 일어난 중국 공산당의 최초의 무장 봉기이자 중국 인민해방군의 기원이 된 난창 폭동에서 의열단원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김원봉과 윤세주만 살아남고 모두 사망'''하는 참극을 겪었다. 이로써 의열단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후 김원봉과 윤세주는 중국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에 참여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을 설립하였고, 1935년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김원봉은 장개석의 지원을 받아 조선의용대[6] 를 창설했고 군대 형태로 체재를 개편하게 된다.
5. 평가
의열단의 단장인 김원봉이 1926년 황포군관학교에서 저우언라이 등에게 직접 공산주의를 배운 이래 공산주의 활동을 해왔고, 1948년 월북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고 6.25 때 훈장까지 받았다. 또한 북한에서도 결국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하면서 남북 모두에서 의열단에 대한 깊은 연구나 평가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최근에서야 남한에서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약산과 의열단>의 저자인 박태원은 김원봉을 직접 만나 증언을 들었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책을 저술하였다. 저자 후기에서 의열단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아리랑>(The Song of Ariran)의 저자이며, 기자이기도 했던 미국인 '님 웨일스'(Nym Wales)는 1937년에 의열단원 김산(본명 장지락)에 대한 일대기를 기록하였다. 의열단에 가입한 김산은 당시 조선과 중국을 넘나들며 혁명가로 활동했는데, 1938년 중국 당국에 의해 '일제 스파이'로 몰려 34세에 처형되었다. 그에 대해서 '님 웨일스'는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선생이 지금은 이미 없는 옛 동지들의 이야기를 내게 들려줄 때, 나는 그들에 대한 선생의 뜨거운 애정을 내 자신 가슴 깊이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구경 나의 이 적은 기록은 선생이 옛 동지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 <약산과 의열단>의 저자 후기
또한, 김산이 속한 의열단에 대한 기록도 남겼다."그는 내가 7년 동안 동방에 있으면서 만났던 가장 매력적인 사람 중의 하나였다" - 님 웨일스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 따르면 의열단원은 '''언제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해, 살아있는 한 자유롭게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언제나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머리를 잘 손질하였으며,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 '''언제나 이번이 죽기 전 마지막 사진이라고 생각하면서 찍었다'''고 한다."의열단원들은 마치 특별한 신도처럼 생활하였고, 수영, 테니스, 그 밖의 운동을 통해 항상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매일같이 저격연습도 하였다. 이 젊은이들은 독서도 하였고, 쾌활함을 유지하기 위해 오락도 하였다. '''그들의 생활은 명랑함과 심각함이 기묘하게 혼합됐다. 언제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생명이 지속되는 한 마음껏 생활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기막히게 멋진 친구들이었다. 스포티한 멋진 양복을 입었고, 머리를 잘 손질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도 결벽할 정도로 말쑥하게 차려입었다."
- 님 웨일스
또한 의열단은 지나칠 정도로 호색을 즐기는 것으로 유명했고, 성병 등에 후유증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었다. 김원봉도 뻔질날 정도로 기생집을 드나들었는데, 오히려 영웅호색으로 칭송받았다. 김원봉의 첫째 아내와 둘째 아내가 모두 성병에 의한 감염으로 사망했다는 증언이 있다.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 단원들을 우리나라, 중국 기생들이 그렇게 좋아했다고.[7]
5.1. 비판
아이러니하게도 의열단은 독립운동계의 내부 분열을 초래하는 역할을 하며 거센 비판을 들었다.
대표적으로 1928년 10월, 의열단원 이구연이 베이징에서 박용만을 변절자라고 혼자 단정짓고 암살하는 촌극이 빚어진다.[8] 박용만은 암살당하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이끌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김원봉은 무장투쟁을 제외한 외교, 개화 등 다른 방식의 독립운동 형태를 매우 비판했고, 이러한 이유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해체를 줄기차게 주장했다. 이 때문에 1930년대 중반 임시정부가 큰 위기를 겪기도 했고, 김구, 조소앙, 신익희, 지청천 등 임시정부 핵심 요인들과도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비롯한 우파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은 대체로 의열단의 활동을 득보다 실이 많다고 생각했다. 일본인 한두명 암살하는 것으로는 독립운동에 효과가 거의 없으며, 오히려 테러로 비판받아 독립운동에 지장을 초래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았다.[9]
거기다 사회주의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있던 것도 우익으로 구성되어 있던 임시정부와 기타 독립운동가들한테 이질적으로 비춰졌다. 실제로 조소앙, 지청천, 김규식 등이 의열단과 기껏 자기네들이 이끌던 파벌을 합쳐서 민족혁명당을 결성해놓고는 주도권 뺏겼다는 이유로 두 달 만에 도로 뛰쳐나가버리기까지 했다.
6. 기타
- 한국근현대사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주로 3명 정도 대강 아는데(나석주, 김익상, 김상옥) 김익상에 대해서는 알아두자. 조선총독부를 폭파한 것은 교과서, 참고서에 자주 나와서 안다. 하지만 그 후가 중요하다. 보통 한번 거사를 하고 나면 잡혀서 고문+코렁탕+사형, 즉 죽게 된다. 위에서 언급했듯 옷을 잘 차려입고 사진을 잘 찍는 이유도 그러하다. 하지만 김익상은 조선총독부를 폭파시키고도 무사히 도주에 성공했다. 이렇게 돌아오자 의열단 내부에서는 "하늘의 도움으로 살아났으니 이제 자유롭게 살라"고 했지만, 김익상은 "다시 한번 더 의거를 하겠다"고 말한다! 그래서 상하이 황포탄 세관 부두에서 다나카 대장을 암살하기로 한다. 문제는 당시 총의 성능이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것. 몇 번 불발 후 발사가 되었는데, 하필이면 다나카 대장이 아닌 민간인이 맞았다. 그것도 외국인 기자의 아내. 한편 김익상은 다나카 대장이 총에 맞았다고 생각했다 한다. 다나카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총소리에 본능적으로 땅에 엎드렸고, 김익상은 이를 오해하여 총에 맞아 쓰러진 것이라 여긴 것. 이 사건으로 의열단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아내를 잃은 영국 기자 톰슨(기사에는 톱손)은 그 자리에서 김익상에게 총을 쏘고, 총상 입은 김익상은 도망을 못 가서 체포되었다. 그리고 김익상의 최후에 대해서는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25년 순국했다는 설과, 20년형을 살고 난 뒤 1943년 6월에 출소했으나 미행하던 일본인 형사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설이 있다.
7. 단원
- 김병추, 3인조 암살단, 보민회 습격, 친일파 조선인민회 정갑주 등 암살
- 김병현, 3인조 암살단, 보민회 습격, 친일파 조선인민회 정갑주 등 암살
- 김상옥,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및 일본제국 경찰과의 총격전
- 김시현
- 김원봉, 단장
- 김익상,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 김지섭, 일본 황거 앞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투척
- 나석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투척
- 박재혁, 부산경찰서 폭탄투척
- 박차정,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으로 무장투쟁에 참가
- 박희광, 3인조 암살단, 보민회습격, 친일파 조선인민회 정갑주 등 암살
- 오성륜, 이후 동북항일연군에서 '전광(全光)'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다가 1941년에 변절.
- 윤세주
- 이육사
- 정율성[10]
- 최수봉,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 황상규, 의백
- 이구연[11]
8. 등장매체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비밀결사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관련작품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조선혁명선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의열단이 아나키즘에.영향받았고, 급진좌파였던 데다가 중공군을 거슬러 올라가면 의열단에도 닿아 있어서[12] 의열단까지 도매금으로 빨갱이 취급당했던 게 원인이다.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도 광복 후 월북해서 활동했으니... 게다가 이 조선의용군 병력 중 일부가 국공내전 후 북한으로 귀국해 한국전쟁에 동원되기도 했다. 이게 의용군 대원들의 책임으로 보기도 힘든 게, 대원들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김일성이 남침을 위해 중국에 요청해서 북한으로 귀국시켜 북한군에 배속시킨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대원들이 단순히 부대를 이동한다는 명령을 받고 차량에 타서 도착해 보니 북한이었고, 북한군 군복으로 갈아입으라는 명령을 받고 나서야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았다고.
그래도 현대에는 긍정적으로 평가받으며, 암살이나 밀정 등 의열단을 소재로 한 영화가 속속들이 개봉하고 있다. 의열단 활동 자체가 비장미가 있고 숨겨진 역사인데다 직접적이고 순교적인 독립운동을 하는 등 드라마틱한 상황이 많고, 영화소재로 삼기 좋은 암살, 폭파 등의 활동을 했다는 점도 있다. 아울러 일제강점기의 어두웠던 역사가 아직까지 청산되지 않고 일제 부역자의 자손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호의호식하는 반면 독립운동가의 자손들은 어려운 삶을 살고 있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조차 일본 정부가 사과조차 않는 와중에 우리 정부조차 이에 동조하는 상황 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으므로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2019년에는 아예 의열단 100주년기념사업추진회를 출범하여 서울시청 광장 및 김원봉을 비롯한 많은 단원의 출신지인 밀양시에서 창설 100주년을 기념하였다.
8.1. 영화
- 아나키스트#s-4 - 한국영화계에서 처음으로 의열단을 소재로 삼은 기념비적 영화.[13] 위에서 묘사된 '멋진 옷을 빼입고 주색을 즐기며 목숨을 아끼지 않던' 불꽂처럼 살다 간 의열단원들의 행보등을 충실하게 묘사했으며, 독립단체 간의 파벌 싸움과 이권다툼 같은 어두운 치부 또한 그대로 고증했다. 다만 영웅본색을 연상시키는 액션신 탓에 홍콩 느와르의 아류작이라는 혹평을 받았고 흥행에는 실패했다.
- 암살(2015) - 극중 의열단장 김원봉이 등장하며 배우는 조승우가 맡았다. 영화상에서 김원봉과 함께하는 이들이 조, 단역으로 등장하는데 이들이 의열단일 가능성이 높다. 의열단 단원들답게 양복 맵시가 좋다. 사실상 한국 내에서 김원봉 본인에 한하는 경우이긴 하지만, 의열단을 제대로 그린 첫 케이스다. 영화에 등장하는 안옥윤, 추상옥(별명: 속사포), 황덕삼은 의열단원이 아니다.
- 밀정 - 의열단원 김지섭이 일본 황거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일제의 주요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경성으로 폭탄을 들여오려는 의열단과 이를 쫓는 일본제국 경찰 사이의 숨막히는 암투와 회유, 교란 작전을 그린 영화다.[14]
8.2. 드라마
8.3. 문학
- 아리랑
- 약산과 의열단 - 작가 박태원이 쓴 책으로, 의열단 단원 유자명의 '의열단간사'와 근근이 보존되어있던 의열단 단원들의 편지 및 당시의 신문기사를 참조하여 약산 김원봉의 구술을 받아 완성한 책이다.
9. 참고자료
[1] 당시 일본군에서 총사령부를 일컫던 말. '혁명의 중심', '혁명의 근원지' 정도의 의미로 읽으면 된다.[2] 의열단 선언이라고도 하나 '조선 혁명 선언'이 정확한 명칭이다.[3] 민족교육을 하다 일제에 의해 폐교 조치되어 지금은 없다.[4] 그래서 밀양시의 김원봉 생가터에 의열기념관이 세워졌다. 특히 핵심 멤버였던 윤세주 생가는 김원봉 생가에서 10m 거리에 있다. 그냥 태어날 적부터 바로 옆 집 친구였던 사람들끼리 만주에서 독립운동 뛰었던 셈이다.[5] 쉬운 비교를 위해 예를 들자면, 《기드온의 스파이》에 의하면 초기 모사드를 지휘하던 모사드 부장 등은 모사드의 적정 인원 수를 1,500명 내외라고 보고 그 전후한 범위 내에서 요원들을 양성해 작전에 투입하고 지휘했다. 물론 CIA와 같은 거대 정보기관이 수만 명에 달하는 인력을 운용하고 있는 예 역시 있으나, 적어도 의열단 역시 그 규모상으로는 최소한 한 국가 단위의 정보기관급에 달했다고 비교해 볼 수 있다.[6] 이 부대는 국민당 장개석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한국인 독립부대이다.[7] 사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기생들 중에 독립운동에 협력한 기생들도 많았다.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 협력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본 관료들의 술시중을 통해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술자리 등의 명목으로 독립 운동가들의 신분이나 활동 상황을 숨기기 좋았기 때문.[8] 사실 박용만 선생이 그 즈음 변절했다는 의심을 받고는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변절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 자세한 사항은 박용만(1881) 항목 참조.[9] 하지만 당시에는 우파라고 해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테러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김구 본인도 30년대 할 수 있는 활동은 테러 밖에 없어서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여 윤봉길, 이봉창 의거를 했고 이를 바탕으로 장개석의 지원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한편 한인애국단 활동을 본 김원봉은 다시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이르렀다.[10] 본명은 정부은. 광주 출신으로 1933년에 중국 난징으로 넘어가 의열단에 가입, 김원봉이 설립한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교했다. 여담으로 일설에는 '율성'이라는 이름을 김원봉이 지어줬다는 얘기가 있다.[11] 1928년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박용만을 살해하여 독립운동계에서 내부 분열을 초래한 원흉.[12] 의열단 → 민족혁명당 → 조선민족혁명당 → 조선의용대 →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 조선의용군 → 팔로군과 연합, 마오쩌둥의 중공군에 합류.[13] 그 밖에도 '최초의 한중 합작영화'라는 타이틀도 있다.[14] 마지막 장면에서는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파 의거가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