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홍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안재홍
安在鴻 | An Jae-hong

<colbgcolor=#0047a0> 출생
1891년 12월 30일
경기도 수원군 종덕면 계루지부락
(現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 두릉리 646)
사망
1965년 3월 1일 (향년 75세)
[image] 북한 평양직할시[1]
묘소
평양직할시 룡성구역 재북인사릉
국적
조선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조선대한민국북한
본관
순흥 안씨

민세(民世), 우헌(又軒)
직업
독립운동가, 언론인, 교육자
역임 지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미군정청 민정장관
미군정청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조선일보 제6대 사장·부사장·주필·발행인
중앙고등보통학교 학감
신간회 총무간사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교육부 간사
시대일보 이사·논설위원
조선기자대회 부의장
재만주동포옹호동맹 위원장
한국독립당 중앙위원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부위원장
한성일보 제1대 사장
좌우합작위원회 위원
학력
한성부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 졸업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 졸업
종교
유교(성리학) → 개신교(장로회) → 대종교
1. 개요
2. 생애
3. 친일파 논란
4. 수감 이력
5. 선거 이력
6. 기타
6.1. 성격
6.2. 생활 습관
6.3. 글씨체
6.4. 생가
7.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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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정치가, 언론인, 역사가, 만화가.
일제강점기 당시 국내에서 활동한 몇 안되는 중도 우파,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 신간회 창립에 간여했으며 광복여운형, 김규식, 조만식 등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했으나 한국전쟁납북되었다.
조선일보 제6대 사장을 지냈으며 1950년 경기도 평택군 지역구 무소속으로 제2대 제헌의원에 당선되었다.

2. 생애


경기도 수원군(현 평택시) 종덕면 계루지부락에서 순흥 안씨의 2남으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집안 대대로 '근왕주의'를 추종하였던 분위기에 영향을 받고 사마천의 사기를 읽고 감명을 받아 '조선의 사마천'[2]이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17세부터 본격적으로 신학문을 접하여 단발하고 황성기독청년회학관 중학부에 입학해 졸업하고 1911년 21세의 나이에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를 다니면서 책읽기를 즐겼다고 한다. 민족주의적인 재일 유학생들 모임에서 활동하였으며 이 때 조만식, 송진우, 장덕수, 이광수 등과 교류하였고 유학생들의 이름, 주소, 번지를 줄줄 외우고 다녔다고 한다. 와세다대학을 다니다가 3학년 중에 휴학하고 상하이망명해 '동제사'에 가담하여 신채호와 교류하면서 민족주의 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3] 한편 동제사에서 활동하면서 해외 민족주의자들의 생활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을 보고 해외 활동보다 국내 활동에 전념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국내로 돌아와 중앙고보 학감[4]으로 재직하다 조선총독부로부터 불온언동 선동 혐의로 찍혀서 조선총독부 압력으로 학감직을 사퇴하고 조선기독교청년회(YMCA)에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민족 운동에 뛰어든 것은 1919년 3.1 운동 이후이다. 안재홍은 정작 3.1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안재홍 스스로 회고하기를 자신이 운동에 참여하기에 너무 비루한 처지였다고 한다. 하지만 민족 운동을 해야겠다 다짐하여 사건을 벌이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하는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이라는 비밀결사 총무를 맡았다. 조직이 경상도에서 발각되자 검거되고 대구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5] 징역 3년을 구형받아 대구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20년대 일본 제품이 국내에 유입되자 조만식, 김성수, 송진우 등과 함께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고 '민립 대학 설립 기성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안재홍은 언론, 경제, 문화 부분에서 각종 활동을 전개하는데 최남선 등과 함께 '시대일보'를 창간에 참여해 논설위원을 지냈다가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주필이 되었다. 조선일보에서 주필 활동을 하는 중에 게재 논설 내용이 문제가 되어 수시로 구속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1928년 1월 조선일보 사설 "보석 지연의 희생"[6]이 문제가 되어 감옥에 간 것이고 1928년 5월 조선일보 사설 "제남 사건의 벽상관"[7]이 문제가 되어 감옥에 간 것. 특히 2번째 사건 때문에 조선일보가 무기정간 처분을 받게 된다.[8] 뒤에 무기정간에서 풀리면서 안재홍은 조선일보로 복귀하고 이후 조선일보 부사장과 사장을 거치게 되었으며 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는 객원 논설가가 되는 등 조선일보에서 많은 활동을 하게 된다. 1920~1930년대에는 "각종 모임의 간부로 바쁘게 활동하는 조선일보 사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9]
1931년경 경영권 문제에 따른 신구파 갈등이 일어나 조선일보는 매우 어지러웠고 안재홍은 조선일보 사장에다가 신간회 간부까지 맡았는데 이 무렵 신간회는 해소론이 나오고 있는 판국이었다. 1920년대에 민족주의자들은 '자치운동론', '민족개조론'을 주장하는 '타협적 민족주의자'(이광수, 최남선)와 절대 독립을 주장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안재홍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 민족유일당운동의 일환으로 사회주의자들과 힘을 합쳐 좌우 합작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였다. 1931년경 신간회가 일제의 압력으로 해소론이 나오자 안재홍은 신간회 해소를 크게 반대했다.
1932년 재만주동포구호의연금 유용사건[10]일제가 조선일보를 때려잡으려는 명분으로 딱 걸려서 조선일보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안재홍은 또다시 구속되었다.[11]
1936년부터 계속 수감되고 출옥하는 상황이 반복되며 1940년대에는 태평양 전쟁으로 시국이 어지러워지자 대외 활동을 줄이고 주로 두릉리 고향 집에 은거하면서 학술 연구에 집중했다. 이 때 신민족주의 사학을 주장하는 역사관을 확립하고 민족 주체적 사관을 내세우면서 식민사관에 맞섰으며 주로 <조선상고사감>을 저술하면서 고조선 연구에 몰두하였다. 1944년경 여운형으로부터 지하 조직에 참가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안재홍은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지하 조직은 그만둔다.'고 정중히 사양했다. 안재홍은 국내에 남으면서 마지막까지 조선총독부 당국에 협력하지 않은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12]
1945년 8.15 광복 직후 여운형이 결성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과거에도 여운형으로부터 조선건국동맹 참여를 제안받은 바 있으나 그때는 민족주의 진영이 건국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서 좌파로 분류되던 여운형의 협력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민족주의 진영을 결집하려는 노력이 좌절되자 여운형과 가까워지게 됐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게 된다. 1945년 8월 1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자격으로 경성중앙방송 라디오에 출연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건국 구상에 관한 대국민 연설을 발표한다. 그러나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s-3 등 좌파 세력이 대거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며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좌경화되자 여전히 민족주의 세력이 건국을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안재홍은 김병로, 원세훈 등을 영입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내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다.[13] 그러나 이들의 영입이 불발되고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등 좌경화가 가속되자 1945년 9월 초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탈퇴 후 국민당을 창당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지 선언을 하게 된다.[14] 국민당이 한국독립당(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 정당)에 흡수되자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내용이 국내에 보도되자 그는 김구, 이승만이 극렬한 반탁을 주장한 것과 의견을 달리하였다.(신탁통치 오보사건 참고) 1946년 2월 미군정 자문 기관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에 참가했다. 이 무렵 안재홍은 김구, 신익희랑 함께 북한에 테러단을 보내기도 해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협상 때 배제되었다고도 한다. 소련군 정보 보고서에 의하면 '김구, 신익희, 안재홍의 경우에는 이들이 북조선 지도자들에 대한 테러를 조직하였고 이를 입증할만한 문서 자료가 존재한다'고 기술하였다. 1946년 5월 무렵 여운형과 김규식 등이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자 여기에 참여하였는데 안재홍은 '만일 적정 타당한 합작으로 하루빨리 통일 정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우리의 조국에는 중대한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고 주장하며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했다.[15]
1946년 12월 김규식과 함께 미군정의 '남조선 과도입법위원회' 의원으로 참여하였고 1947년 중도파로 미군정에서 '남조선 과도 정부'를 세우고 안재홍을 민정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러자 한국민주당은 중도파 인사가 미군정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것에 몹시 못마땅하여 안재홍을 맹렬히 공격하였고 인사 발령도 거부하였다. 또한 안재홍이 친일파 처단을 주장하자 안재홍을 '용공분자', '골수 친일파'라고 해괴한 논리로 비방하는 삐라와 벽보가 곳곳에 나붙었고 괴한들이 안재홍 사무실을 습격하여 반탁과 반과도입법위원회를 주장하는 삐라를 살포하기도 했다.[16] 하지만 치안을 담당하던 경찰은 한국민주당 비방 삐라를 유포한 사람을 체포하는 것에 비해 민정장관을 음해하는 벽보와 삐라가 돌아다녀도 그냥 수수방관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 안재홍을 궁지로 내몰았다. 안재홍은 훗날 실의에 빠져버려 '나는 최초에는 찬탁 매국노요, 다음에는 애국 운동 저해자요, 또 다음에는 극악무도한 탐관오리로 허다한 비방을 당하게 되었다'고 개탄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2표를 얻는데 그쳐 낙선하였는데 이 때 이승만이 당선되었고 김구도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출마 자체를 하지 않았다. 이후 대한민국 국기를 시정하는 민간위원으로 참여하고 우파 신문인 한성일보 사장을 지냈으며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평택군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안재홍 외에 9명의 후보가 후보 등록했으나 그 중 8명의 후보가 사퇴하면서 그 결과 안재홍은 97%에 육박하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제2대 제헌의원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한강 철교와 인도교 등이 폭파되자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있다 돈암동 자택에서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였지만 이 때문에 남한에서 한동안 이름이 거론되지 못하고 남한에 남은 가족들의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후 재북평통(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최고위원으로 있다가 1965년 사망했고 장례위원장은 홍명희가 맡았다.

3. 친일파 논란


동아일보, 뉴데일리 같은 곳에서 안재홍을 여운형과 더불어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들이 안재홍을 '친일파'로 몰아붙일 때 항상 '여운형과 같이 부일 활동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하는 것들은 과거 한국민주당과 친일파들이 주장하는 논리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실제로, 한국민주당은 안재홍을 친일파라고 엄청 몰아붙였다. 이 책에 자세히 나와있다. 특히 가장 몰아붙인 인물들이 조병옥, 김준연, 이인인데, 이들 3인방은 회고록을 통해 안재홍을 여운형과 같이 친일활동했다고 싸잡아서 기술해놨다. 대표적인 예시를 들어, 김준연이 있는데, 김준연은 '안재홍은 여운형과 같이 식자계층들 끌어모아 민족유신회라는 어용단체를 조직했다'고 떠들고 다녔다. (단, 이인과 조병옥, 김준연은 3사람은 독립운동가출신으로 한민당 인사들이다.) # 그러나, '민족유신회'라는 단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식으로 조병옥과 이인도 역시 김준연이 지어낸듯이 쓴 것들이 엄청많다.[17]
1970~80년대 군사독재정권 치하시절에도 안재홍도 거의 금기의 대상이였다.[18] 1982년에 대한민국 제5공화국 당시 정보당국에서 고용한 익명의 필자(저자가 실존인물인지 자체가 불명)가 '추적 여운형'이라는 책을 지었는데, 이 책은 여운형에 대해 어떠한 사상을 주입시키고 '마녀사냥'식으로 몰아붙이려는 의도로 지어진 책인데, 이 책에 따르면 안재홍도 친일파라고 크게 기술해놨다.#
그러나, 안재홍은 거짓말 한마디도 안 보태고 그의 비타협 민족주의적 행보 때문에 감옥을 제 방처럼 드나들었고 본인 스스로 '순정우파'라고 노선을 밝힌 적이 있을 정도로 확실히 민족주의 우파이므로 정신나간 수구꼴통이 아닌 이상 기존 평범한 사람들이나 우파 입장에서 친일파라고 깔 수도 없고 좌파라고 깔 수도 없는 인물이다.
심지어 안재홍의 경우, 조선일보 주필과 사장을 지낸 경력이 있기 때문인지 조선일보도 웬만해선 안재홍을 잘 안깐다. 조선일보 입장에서는 자폭이나 다름없기 때문. 다만 안재홍을 신채호, 조만식과 더불어 띄우면서 자신들도 민족정론지라는 식으로 홍보하는 기사를 쓴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단독정부 수립을 찬성한 한국민주당[19] 기관지라 그런지 안재홍을 깐다(...)

4. 수감 이력


안재홍의 민족주의적 사학은 총독부의 감시 대상이었으며, 이 때문에 감옥을 제 집 안방같이 수시로 감옥을 드나들어야했다.
  • 1919.11 - 청년 외교단 사건으로 수감, 징역3년형 구형 (제1차 옥고)
  • 1928.1 - 조선일보 사설“보석지연의 희생”으로 투옥 (제2차 옥고)
  • 1928.5 - 조선일보 사설“제남사건의 벽상관”으로 투옥 (제3차 옥고) 옥고를 치르면서 조선일보가 무기 정간처분을 받았다. 뒤에 무기정간에서 풀리면서 안재홍은 조선일보로 복귀하고 조선일보 사장에까지 올랐다.
  • 1929.12 - 신간회 광주학생사건 진상보고 민중대회 사건으로 투옥 (제4차 옥고)
  • 1931.5 - 조선일보 사장 옥중 취임
  • 1932.3 - 만주 동포 구호 의연금 관련으로 투옥 (제5차 옥고)
  • 1936.5 - 군관학교 사건으로 투옥 (제6차 옥고) 중국 난징군관학교에 두 청년의 밀파 입학을 알선한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내통한 것이 발각되어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아 1938년 풀려났다. (그 해에 첫 부인 이정순이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
  • 1938.5 -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투옥 (제7차 옥고) 장남 안정용의 결혼식 때 서대문경찰서에 수감중이라 참석할 수 없었다. 함경남도 흥원경찰서에 수감되어 3개월만에 불기소로 풀려났다.
  • 1938.10 - 군관학교 사건 형확정으로 투옥 (제8차 옥고)
  • 1942.12 -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 (제9차 옥고)
1919년 이후 9번에 걸쳐서 총독부에 체포되어 7년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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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의 안재홍 [20]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48
제1대 대통령 선거
무소속
2(1.03)
낙선 (3위)
간접선거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경기도 제17선거구[21])
무소속
14,549(96.98)
당선 (1위)


6. 기타


  • 와 관련돼서 세간에 회자 되었는데, 평소에 코막힘 증상이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코가 빨갰다고 한다. 그래서 한 잡지사에서 어떤 기자가 인터뷰하는데 안재홍에게 왜 코가 빨갛느냐고 물었더니, 안재홍은 취독이나 약독도 아니고 어려서부터 그런 거라 그냥 몸에서 자연히 생긴 병인 줄로 알고 있다 한다.
  • 입버릇은 "어~"를 자주 붙이는 것이었다고 한다. 언젠가 회사 문제로 동아일보로 전화를 걸었는데, 들려오는 말투에서 "어~"를 자주 붙이는 걸 듣고 단번에 전화 건 사람이 조선일보 사장 안재홍임을 알아차렸다는 증언도 있다.
  • 걸어다닐 때는 하늘을 쳐다보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6.1. 성격


성격은 전형적인 학자타입으로, 책벌레라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독서에 열중하였으며 자기 연구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한편 매우 가부장적이어서 집안일에 까딱도 안 했다고 한다. 대신 아내, 며느리, 맏아들 안정용은 정말 힘들었다고 한다. 특히, 안정용의 삶은 그야말로 안습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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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어느 글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분은 요순시대 때의 양반, 정거장 대합의자 위에다가 우비(雨衣)와 옷보퉁이를 놓고 「저기 청년회좀 갔다옵시다」 「이 보퉁이들은 어떻게하구」 「그대로 두고가지!」 「누가 집어가면 어떻게 하우」 「으응 남의걸 누가 집어가? 」 하는 어수룩한 양반님!

이는 호인, 중망(衆望)이 두터운 사람 당대 조선의 덕망있는 졂은 인격자「김기연(金起纏)군과의 쌍벽」 이 분은 일생중에 그 시골 마나님 이외에는 남의 수색씨 손목 한번 못잡어본 양반― 담배도 먹지 못하고 남에게 거짓말도 못하고 남의 뺨 한번 쳐보지도 못한 사람, 총명절인(聰明絶人)―동경 유학당시 4, 5백명 유학생의 번지―하숙, 전화, 번지까지 모조리 외어가지고 다니던 괴총명가(怪聰明家), 아호가 번지박사.

그러나 요새 와서는 그 입에서 어쩌다가 「으응 망할 자식!」 하는 어설픈 어조의 욕이 나오는데,"「아무개! (필자를 가리킴)」 이것은 내가 신문쟁이 노릇하는 가운데서 배운 욕이야 하하하하" 조선의 험상궂은 현실은 이 양반으로 하여금 그 입에서 오히려 이런 욕이 나오게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퍽 눈물겨운 일이다.

이분은 정객으로서는 동적인물이 아니다. 그는 앉아서 인망을 꺼려 남에게 추대받아 끌려 나갈사람 무엇을 만들고 어쩌고 하는 솜씨는 없다. 그러므로 그이는 송(宋:송진우)씨와 같은 책사(策士)는 못된다. 그이는 그저 살림꾼! 이 점이 송씨와 정반대이다.

필자는 안씨를 후일의 호재상(好宰相)이라 한다. 현재에 있어서 안씨는 신문논객으로의 정론가로서는 조선제일의 문장님일까 한다. 그러나 이이는 남의 잘못을 곧 자기가 부족하게 생각한 것으로서 일단 그 수첩 위에 한번 오른다면 몇 10년이 되어도 그것으로 쉽게 잊어버리지 않는 모양. 여간 무서운 꼼바리(마음이 좁고 지나치게 인색한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샌님이 아닌 점도 있다. 이만 ―


6.2. 생활 습관


취미는 등산과 산책이었다. 특히 등산을 좋아해서 경성 일대에서 안 다녀본 산이 없다고 하며, 마니산, 백두산도 등정했다.
백두산의 경우 후에 등정기를 남기기도 했다. 이 글은 나중에 정민 선생이 쉬운 말로 번역하여 <<백두산 등척기>>라는 책으로 나오기도 했다. #
평소에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는데, 유명인사의 건강법을 소개하는 잡지 기사에 자신의 건강법을 "정력(精力)[22]의 절약(節約)"으로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 정력의 절약, 집중을 주의로 일정한 규칙을 지킵니다. 담배 안피기(不烟), 술 안 마시기(不酒), 노름 안하기(不雜技)를 원칙으로 하고 장시일을 독신자(獨身者)처럼 지냅니다.

1. 여가를 얻으면 등산 산책에 취미를 붙이어 기분을 전환시킵니다. 경성도 인왕, 백악, 금화, 종남 등 산들은 여러 번 씩이요 관악, 삼각 등 산도 모두 올러다녔습니다.

1. 예수(耶), 부처(佛), 노자(老), 장자(莊) 등 세속에서 벗어난 문장을 완미(翫味:시문의 의미를 잘 생각하여 맛봄)하여 되도록 심신의 막힘을 풀어 버리기로 유의합니다.


6.3. 글씨체


그의 글씨체는 잡지 <삼천리>의 교차점 코너의 묘사에 따르면 이러하다.
"...안재홍(安在鴻)씨는 어떤 글자는 한다 하는 명필도 못 따르게 잘 쓰고 어떤 글자는 소학교 1년생 만도 못하게 쓰는데 통틀어 말하면 원고글씨는 지저분하게 또 치외법권을 주장하듯이 밖으로 자꾸 뻗어져 나가는 글자를 쓰는 편이며..."
글씨를 원고지 칸 안에 맞추지 않고 마구잡이로 쓴다는 뜻이다(...).
(실제 글씨체)

6.4. 생가


평택시에 생가가 있는데, 현재 안재홍의 며느리인 김순경 여사께서 관리하시는 중. 생가를 중심으로 역사문화테마공원이 조성된다. 이 집 향나무를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탐을 내었으나, 가족들이 팔기를 거절해서 정원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고(...)... #

7. 외부 링크



[1] 6.25 전쟁 당시 납북되었다.[2] 안재홍은 정말 사마천처럼 한국 역사 통사서를 저술하려고 했지만 해방된 뒤 정치 활동을 하느라 저작이 고대사에서 그쳤다.[3] 안재홍은 상하이에서 신채호를 만나 그를 존경하게 되었고 신채호-정인보 라인을 잇는 민족주의 역사가가 되었으며 조선일보 사장 시절에 신채호의 '조선상고문화사'를 연재하도록 하기도 했기 때문에 극단적인 환까들에게는 까이기도 한다.[4] 현재로 치면 교감의 직위이다.[5] 이 때 척추를 다쳐서 평생 허리 문제로 고생했다고 한다.[6]사회주의 운동가가 보석이 지연되어 옥사하자 이를 비판한 사설[7] 중국 제남(지난) 지역에서 중국군일본군이 충돌한 사건에 대해 일본군이 파병을 결정하자 이를 비판한 사설[8] 일제강점기에는 광고료보다 구독료가 신문사 자금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정간되면 신문사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이후로 조선일보의 경영난은 더욱 심화된다.[9] 한편 당시 동아일보 사장은 송진우, 중앙일보 사장은 노정일이었다. 중앙일보는 재정난과 경영진 문제로 휴간되었다가 사장이 여운형으로 교체.[10] 만주사변으로 인해 만주 지역 조선인 동포들이 일본군에 의해 집중 포격을 당하자 마을을 버리고 피난을 가는 등 생활이 크게 어려워지자 조선일보에서 동포를 돕자고 의연금을 모았는데 조선총독부에서 의연금 유용을 포착했다고 조선일보 간부들을 대거 구속했다.[11] 이 사건 뒤에 조선일보는 여러가지 풍파를 겪었다. 안재홍은 구속당했을 때 사장 후임으로 1932년경에 석방된 여운형을 조선일보 사장으로 영입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홍증식, 조동호 등이 여운형을 중앙일보 사장으로 추대시켜 조선일보는 사장직이 한때 공석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33년 사장이 조만식에서 방응모로 바뀌고 그 뒤에는 친일 언론으로 변질되었다.[12] 1920년대생 이상 원로들은 '일제강점기 때 합법적 활동과 비합법적 활동하면서 절대 변절하지 않은 인물은 안재홍과 여운형이다.'라고 한결같이 말씀하신다.[13] 안재홍은 여운형 등 중도 좌파가 민족주의 세력이 이끄는 건국 작업의 보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14] 하지만 안재홍은 한국민주당이 주장하는 '임정봉대론'(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절대 숭배한다는 의미)과는 개념이나 격이 상당히 다르다. 안재홍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동격으로 놓고 서로 같이 협력해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었다.[15] 좌우합작운동은 미군정의 후원하에 이루어졌고 미군정의 속내는 좌우 합작을 통해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을 고립시키려 했던게 목적이었다. 그러나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했던 안재홍, 여운형, 김규식 등 중도파들은 미군정의 의도도 모른채 이용만 당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들은 분명히 미군정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고 자신들의 원칙과 주장도 분명했었다.[16] 이러한 벽보나 삐라들 살포를 주도한 인물은 다름아닌 한국민주당원 김준연이었다. 해방 정국 상황을 정확히 기억했던 강원용 목사에 따르면 한국민주당은 안재홍에 대해 '그가 일본인에게 뇌물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적산 회사의 재산을 착복했다.' 등 근거없는 소문을 내서 온갖 정치 테러를 가했다고 한다. 이어 강원용 목사는 한국민주당원 김준연이 특정 정치인에 대한 악의적인 내용의 벽보를 붙이거나 삐라 유포를 주로 하고 다녔다고 한다.[17] 본 내용과는 무관한 말이지만, 조병옥은 일제말 '임전대책협회'에 나서 시국강연을 1차례 발표한 적이 있기도 한다. 이렇게 본다면 오히려 조병옥 같은 경우 '기회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거 1~2건 활동 가지고는 '친일파'라고 규정짓지 않는다. '수십여차례 기고했다거나 강연하는등 지속적 활동했느냐?' 판단여부를 따지지...[18] 이건 당시 납북된 정치인들이 겪었던 일들이다. 납북된 정치인 가운데 특히 조소앙은 아예 '빨갱이'취급 당했던 시절이었다.[19] 이들 한민당 세력들은 전체에 4분의 3 가량이 친일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집단 그자체였다.[20] 사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1] 평택군, 현 평택시[22]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정력은 2번의 의미보다 1번의 의미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