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폰 슈트로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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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ch von Stroheim'''
(1885. 9. 22 - 1957. 5. 12)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영화감독이자 배우. 작품들도 유명한 편이지만, 주로 기구한 생애로 더 유명하다.
슈트로하임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 젊은 시절에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와, 할리우드에 입성하여 배우, 스턴트맨 등으로 활약하며 그리피스 등과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 이 시기 그는 자신의 이름에 귀족의 성임을 나타내는 '폰 (von)'을 붙인다.[2]
1919년 <눈먼 남편들>을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후, 슈트로하임은 미국 영화계에서 가장 중요한 감독 가운데 하나가 되며 이 시기, 슈트로하임은 저명한 영화감독이자 배우로서 글로리아 스완슨 같은 당대의 유명한 배우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곤 했다. 그러나 상황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훗날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게 될 <탐욕>의 제작에 착수하면서부터였다.
프랭크 노리스 [3] 의 소설 <맥티그>를 원작으로 하여, 슈트로하임은 무려 462분이라는 경이로운 러닝타임의 영화 <탐욕>을 선보였고, 이 어난어마한 규모에 놀란 영화사 MGM의 임원들은 재빨리 영화를 대거 편집하기 시작했다. 결국 약 5시간 가량이 편집되어 사라졌고, 현재 이 사라진 분량의 필름들은 소실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그는 이런 고난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어갔다. 그는 <결혼 행진곡>에서 <탐욕>에서 부분적으로 시도했던 컬러의 실험을 보다 밀고 나갔으며, <메리 위도우>는 상업적으로 성공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퀸 켈리>에서 촬영 중에 주연이자 프로듀서였던 글로리아 스완슨에 의해 해고되고 이후 <워킹 다운 브로드웨이>에서도 역시 작업 도중에 해고되자 그는 결국 영화감독을 그만두게 된다.
이후 그는 아예 배우로 전업하게 된다. 대표적인 작품은 장 르누아르의 <거대한 환상> [4] , 빌리 와일더의 <다섯 개의 무덤>, <선셋 대로>[5] 등이다. 4~50년대 즈음 시네마테크의 활성화와 함께 점차 재평가받게 된 슈트로하임은 뒤늦게 세계 영화사의 거장으로 인정받기 시작하였지만 그 영광을 오래 누리지는 못하고 1957년 전립선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의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는 슈트로하임에게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그의 영화를 보고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할 정도이다. 이외에도 평론가 조너선 로젠봄, 감독 에른스트 루비치나 기예르모 델 토로도 슈트로하임에 대한 존경을 표현했다. 수전 손택은 <탐욕>을 최고의 영화 가운데 하나로 꼽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이자 가장 크게 손상된 작품인 <탐욕>은 원래는 2시간 조금 되는 버전만 남아 있었지만 1999년 터너 엔터테인먼트에 의해 4시간 가까이로 복원되었다. 복원을 총괄한 릭 슈미들린은 영화의 대본에 기초하여 사라진 장면, 등장인물 등을 복원했다. 그렇지만 이런 사라진 장면들의 필름은 아예 소실돼 버려서 주로 영화의 스틸샷 등을 활용했다. 실제로 이 버전을 보면 영화의 대부분이 스틸샷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rich von Stroheim'''
(1885. 9. 22 - 1957. 5. 12)
슈트로하임의 <탐욕>은 영화 중의 영화다.
-
- 장 르누아르
1. 개요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영화감독이자 배우. 작품들도 유명한 편이지만, 주로 기구한 생애로 더 유명하다.
2. 생애
슈트로하임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 젊은 시절에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와, 할리우드에 입성하여 배우, 스턴트맨 등으로 활약하며 그리피스 등과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 이 시기 그는 자신의 이름에 귀족의 성임을 나타내는 '폰 (von)'을 붙인다.[2]
1919년 <눈먼 남편들>을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후, 슈트로하임은 미국 영화계에서 가장 중요한 감독 가운데 하나가 되며 이 시기, 슈트로하임은 저명한 영화감독이자 배우로서 글로리아 스완슨 같은 당대의 유명한 배우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곤 했다. 그러나 상황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훗날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게 될 <탐욕>의 제작에 착수하면서부터였다.
프랭크 노리스 [3] 의 소설 <맥티그>를 원작으로 하여, 슈트로하임은 무려 462분이라는 경이로운 러닝타임의 영화 <탐욕>을 선보였고, 이 어난어마한 규모에 놀란 영화사 MGM의 임원들은 재빨리 영화를 대거 편집하기 시작했다. 결국 약 5시간 가량이 편집되어 사라졌고, 현재 이 사라진 분량의 필름들은 소실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그는 이런 고난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어갔다. 그는 <결혼 행진곡>에서 <탐욕>에서 부분적으로 시도했던 컬러의 실험을 보다 밀고 나갔으며, <메리 위도우>는 상업적으로 성공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퀸 켈리>에서 촬영 중에 주연이자 프로듀서였던 글로리아 스완슨에 의해 해고되고 이후 <워킹 다운 브로드웨이>에서도 역시 작업 도중에 해고되자 그는 결국 영화감독을 그만두게 된다.
이후 그는 아예 배우로 전업하게 된다. 대표적인 작품은 장 르누아르의 <거대한 환상> [4] , 빌리 와일더의 <다섯 개의 무덤>, <선셋 대로>[5] 등이다. 4~50년대 즈음 시네마테크의 활성화와 함께 점차 재평가받게 된 슈트로하임은 뒤늦게 세계 영화사의 거장으로 인정받기 시작하였지만 그 영광을 오래 누리지는 못하고 1957년 전립선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3. 기타
프랑스의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는 슈트로하임에게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그의 영화를 보고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할 정도이다. 이외에도 평론가 조너선 로젠봄, 감독 에른스트 루비치나 기예르모 델 토로도 슈트로하임에 대한 존경을 표현했다. 수전 손택은 <탐욕>을 최고의 영화 가운데 하나로 꼽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이자 가장 크게 손상된 작품인 <탐욕>은 원래는 2시간 조금 되는 버전만 남아 있었지만 1999년 터너 엔터테인먼트에 의해 4시간 가까이로 복원되었다. 복원을 총괄한 릭 슈미들린은 영화의 대본에 기초하여 사라진 장면, 등장인물 등을 복원했다. 그렇지만 이런 사라진 장면들의 필름은 아예 소실돼 버려서 주로 영화의 스틸샷 등을 활용했다. 실제로 이 버전을 보면 영화의 대부분이 스틸샷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 다만 프리츠 랑처럼 뿌리만 유대인이고 전형적인 카톨릭 집안이었다고 한다.[2] 이 시기 독일권 출신 예술가들은 자신의 이름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예명의 개념으로 '폰' 칭호를 붙이곤 했다. 조셉 폰 스턴버그 역시 미국에서 태어난 독일계 미국인이었지만, 이런 전통에 따라 폰이라는 예명을 붙였다.[3] 스티븐 킹이 존경하는 소설가로도 알려져 있다. 하층민을 주인공으로 사실주의적인 소설로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지금은 거장으로 칭송받고 있다.[4] 프랑스 영화 쪽에서도 활동했는데 프랑스 영화계의 지원을 받아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찰나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황급히 미국으로 귀국해야 했다.[5] 이 작품에서 그는 앞서 언급됐듯이 악연이 좀 있는 편인 글로리아 스완슨과 함께 주연격으로 출연했다. 참고로, 이 영화 속에서 상영되는 무성 영화가 앞서 말한 <퀸 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