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르누아르
[image]
아버지가 그린, 어린 시절 장 르누아르
[image]
청년시절 장 르누아르.
[image]
노년의 모습
'''Jean Renoir'''
1894년 9월 15일 ~ 1979년 2월 12일
'''감독은 평생 동안 단 한 편의 영화만 만든다. 그는 그걸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반복할 뿐이다.'''[1]
A director makes only one movie in his life. Then he breaks it into pieces and makes it again.
1. 개요
프랑스의 영화 감독.
20세기에 활약한 프랑스 영화의 거장이자, 나아가 '''프랑스 영화를 대표하는 거장'''.
프랑스 뿐만 아니라 타 영화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생전엔 존 포드와 같은 할리우드 거장들도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2. 소개
프랑스와 미국을 오가며 활동했던 거장 감독.
시적 리얼리즘[2] 을 주도한 거장 중 하나이자, 희극과 비극을 오가는 뛰어난 실력으로 영화인들을 사로잡은 마성의 감독. 물 흐르듯이 유연하게 흐르는 카메라 움직임과, 화가로써 체득한 정교한 미장센 구성으로, 평면적인 영상을 찍어내던 당대 영화계에 혁파를 가했다.
동시대 프랑스에서 활약한 자크 베케르부터 시작하여, 누벨바그 세대인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클로드 샤브롤, 자크 리베트, 에릭 로메르, 아녜스 바르다, 자크 데미, 알랭 레네 등이 모두 장 르누아르에게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심지어 로베르 브레송조차 르누아르에 대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유럽의 루키노 비스콘티,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로베르토 로셀리니, 페데리코 펠리니, 비토리오 데 시카 등도 그를 거장으로 대우하고 뒤따랐으며, 또한 영미권의 오슨 웰스, 마틴 스콜세지, 로버트 올트먼, 스티븐 스필버그, 마이크 리조차 르누아르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다. 한국에서도 홍상수, 봉준호 등이 르누아르를 존경한다고 언급하였다.
정성일은 2004년 5월 dvd21에 기고한 '영화 그 자체를 보여주는 장 뤽 고다르' 도입부 에서 르누아르의 위대함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정성일 평론가 특유의 만연체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르누아르에 대한 다른 영화비평가들의 입장도 수식어구만 다를 뿐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하나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물론 고다르보다 영화적으로 존 포드가 훨씬 위대하다. 그건 '''안토니오니나 베르히만, 펠리니보다 장 르누아르가 훨씬 위대한 것'''과 같은 의미다. 그건 단지 존 포드와 장 르누아르가 그들보다 시간적으로 더 앞섰기 때문이 아니다. '''장 르누아르와 존 포드는 영화에서 두 개의 이름이다'''(혹시 존 포드의 자리에 앨프리드 히치콕을 놓을 수는 있다. 하지만 다른 이름은 그 누구도 안 된다). 아무도 이들을 넘어설 수는 없다. 이들을 넘어설 때 영화는 전혀 다른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 생각에 아마도 그런 일은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브레송과 오즈, 로셀리니, 그리고 부뉴엘 정도가 그 두 사람(혹은 세 사람)의 이름의 비슷한 자리에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역시 안 되겠다. 그들의 영화는 매 번의 쇼트가 세상에 대한 그 어떤 총체적 사유를 던진다. 혹은 샷을 연결하여 신을 만들 때 그 자체로 항상 완전하다. 그건 더 나은 그 어떤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신과 신이 만들어내는 세상의 시간에 대한 주름은 더할 나위 없이 깊다. 그 안에서 우리는 결국 영화를 생각하는 것이다...."[3]
그 업적과 영향력으로 영화 커뮤니티 등지에선 그냥 '''영화감독 끝판왕''' 취급을 받고 있다. #
3. 생애
1894년 9월 15일,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4] 어렸을 적부터 그림과 문학에 재능을 보였는데, 그래서인지, 어렸을 땐 화가를 꿈꾸었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에 비행사로 종군하게 되었는데, 기계설계나 정비를 배우며 자연스레 카메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1924년 영화 〈물의 딸〉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한 이후, 혁신적인 작품들을 내놓으며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허나 이때 당시엔 크게 주목받지 못해 고생을 했는데, 특히 자금난에 시달린 적이 많아, 종종 부족한 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해 '''아버지 그림을 많이 팔았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1941년,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떠나 [5] , 향후 얼마간 할리우드에서 다수의 영어 작품들을 내놓게 되었다. 이 시절은 그렇게 유명하진 않지만 남부 고딕에 관심을 기울여 늪지의 물 같은 수작들을 내놓기도 한다.
이후, 앙드레 바쟁을 위시한 영화 평론가들로부터 재평가 받아 '프랑스 영화의 선구자'라는 상찬을 받으며, 다시 유럽 영화계로 복귀하게 되었다. 1960년대엔 자크 리베트가 방송국에서 인터뷰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이 역시 상당히 중요한 자료로 남아있다.
영화를 만들면서도 타 분야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특히 '''아버지에 대한 저술과 증언을 많이 남겨서''',[6] 향후 프랑스 미술계에 큰 보탬을 주었다.
1979년 2월 12일, 캘리포니아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4. 기타
르누아르 생전 영화계는 조감독 제도를 운영하여 후대 영화인을 교육시키는 '장인-도제' 교육법이 유행했는데,[7] 르누아르에게서 조감독을 한 사람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루키노 비스콘티, 로베르토 로셀리니, 자크 베케르, 자크 리베트, 샤트야지트 레이[8] 등. 특히 이들 중 이탈리아 출신들은 향후 네오 리얼리즘의 기수가 된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도 젊은 시절 르누아르의 조감독 생활을 하였다.
첫 부인과 얻은 아들인 알랭 르누아르는 중세 영문학 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향후 영화계를 내다볼 줄도 알았는지, 〈미지와의 조우〉를 보고 "스티븐 스필버그는 시인"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
5. 대표작 일람
총 작품수는 '''40편'''이며,[9] 이곳엔 대표작들만 나열한다.
- 유성영화 시기 (장년)
- 할리우드 시기 (중년)[12]
- 유럽영화 시기 (말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