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제 궁전
1. 개요
'''Le Palais de l'Élysée''' (l'Élysée)
엘리제 궁전은 파리 8구에 위치한 프랑스 대통령의 집무처 겸 관저로 프랑스 정치의 중심이다. 프랑스의 중요한 정책 결정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많은 정치 뉴스가 이곳을 중심으로 나온다.
2. 연혁
엘리제 궁전은 프랑스 건축가 아르망‒클로드 몰레(Armand-Claude Mollet)에 의해 설계된 건축물로, 1718년 에브뤼 공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에게 이 땅을 매각하면서 에브뤼 공의 저택을 지어주기로 한 계약에 따라 건축되었다. 1753년 주인인 에브뤼 공이 죽었을 때, 이미 엘리제 궁전은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저택'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 후 엘리제 궁전은 여러 귀족과 왕실의 저택과 별장으로 사용되었다. 1787년에 루이 16세의 사촌인 부르봉 공작 부인이 새 주인이 되면서 이 건물은 '오텔 드 부르봉(부르봉 관저)'이라고 불리다가, 프랑스 혁명 발발로 부르봉 공작 부인이 체포된 후 관보출판소, 입법송달위원회 관청 등으로 사용되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서 이 건물은 근처의 샹젤리제 거리 이름을 따 '르 팔레 드 렐리제(Le Palais de l'Élysée/엘리제 궁전)'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 불리는 샹젤리제(Champs-Élysées) 거리의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엘리시온 또는 엘리시안 정원의 프랑스어식 표기로, 그리스 신화에서 엘리시온은 신과 영웅들이 사후에 가는 세계로 하데스(Hades)와 상반되는 의미이다. 엘리제 궁전은 180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황제로부터 나폴리의 왕으로 임명된 뮈라 장군이 '엘리제‒나폴레옹 궁전'이란 이름으로 황제에게 헌납했고, 이 때부터 엘리제 궁전은 점점 프랑스 역사의 중심으로 들어섰다.
제2공화국 임시정부 하에서 엘리제 궁전은 '엘리제 나시오날(국유 엘리제 궁전)'이란 이름을 얻었고 그 정원도 대중에게 개방되었다. 1848년 12월 12일 국회는 법령을 공포하고 국유 엘리제 궁전을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의 관저로 정했다.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는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지만 쿠데타로 의회를 해산하고 1852년 헌법을 제정해 제2제정의 황제로 즉위한다. 나폴레옹 3세는 튈르리 궁전을 얻기 전까지는 엘리제 궁전에서 살았고, 자신의 약혼녀인 외제니 드 몽티조에게 엘리제 궁전을 선물하기 위해 1853년에 건축가 조제프‒외젠 라크루아(Joseph-Eugène Lacroix)를 시켜 전면 개축을 하였고 1867년에서야 끝난 대공사 결과, 오늘날 프랑스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제정 붕괴 후에는 엘리제 궁전이 다시 대통령 관저로 회복되었다. 1873년 대통령으로 선출된 마크 마옹 대원수가 이듬해 엘리제 궁전에 정착한 이후, 엘리제 궁전은 줄곧 프랑스의 모든 대통령들이 거주하고 집무를 보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다.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대통령 권한이 강해지면서 엘리제 궁전은 프랑스 정치 1번지로 부상하게 된다.
3. 내부 모습
4. 역대 영부인들과 엘리제 궁
한편 프랑스의 퍼스트레이디들은 대체로 엘리제 궁전과 좋은 인연을 맺지 못했다.
국민 영웅과 함께 살았던 이본 드골은 특히 그랬다. 엘리제 궁전을 마뜩잖게 여긴 남편의 불 같은 성격을 군소리 없이 받아내며 그림자처럼 살았다. 1969년 드골이 엘리제를 떠나 귀향하고 나서야 크게 숨을 쉴 수 있었다고 한다.
클로드 퐁피두에게 엘리제는 최악의 장소였다. 희귀병으로 급서한 반려자를 잃은 삭막한 기억만이 남았다. 이후 숱한 초대에도 단 한 발짝도 엘리제에 들여놓지 않았다.
아네이몬 지스카르 데스탱은 아예 엘리제에 들어가길 거부했다. 네 자녀와 살 만한 공간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엘리제에는 사무실만 마련해 두고 필요할 때마다 출퇴근했다. 덕분에 자유로워진 대통령은 혼자 페라리를 몰고 애인 집을 드나들었다.
다니엘 미테랑 역시 엘리제에 들어가지 않았다. 열렬한 사회주의 운동가여서인지 엘리제 궁전은 제약이자 장애물일 뿐이었다. 어쩌면 엘리제의 주인이 되기 전부터 두 집 살림을 해온 남편과 떨어져 있을 수 있는 훌륭한 기회였을지도 모르겠다.
세실리아 사르코지는 가장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엘리제 궁전이 나를 짜증나게 한다”고 대놓고 말했다. 엘리제보다 남편이 더 싫었는지 6개월 만에 짐을 싸 애인 곁으로 떠나버렸다. 대신 들어온 브루니 사르코지는 나름대로 엘리제를 즐겼다. 하긴 2층에서 결혼식까지 올렸으니 추억이 남다를 터다.
엘리제 궁전에서 가장 행복했던 퍼스트레이디는 누가 뭐래도 베르나데트 시라크였다. 엘리제 궁전에 딸린 정원을 자신의 기호대로 가꾸며 역대 대통령들 중 엘리제를 가장 좋아했던 남편의 내조에 최선을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