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6세

 


<colcolor=#fff> '''이름'''
루이 오귀스트 드 프랑스
(Louis Auguste de France)
'''출생'''
1754년 8월 23일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사망'''
1793년 1월 21일 (38세)
프랑스 제1공화국 파리 콩코르드 광장
'''장례식'''
1815년 1월 21일
파리 생 드니 대성당
'''재위'''
프랑스 왕국의 왕
1774년 5월 10일 ~ 1792년 9월 21일
'''배우자'''
마리 앙투아네트 (1770년 결혼)
'''신체'''
193cm
'''자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루이 조제프
루이 17세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
'''아버지'''
프랑스루이 왕세자
'''어머니'''
작센마리아 요제파
'''형제자매'''
마리 제피리느
루이 18세
샤를 10세
마리 클로틸드
엘리자베트
'''서명'''
[image]
1. 개요
2. 개인적인 면
2.1. 가정적인 남편
2.2. 아예 무능한 건 아니었는데
2.3. 문제는 리더십 부족과 분별력 없는 성격
3. 위태로운 재위기간
4. 혁명 발발
5. 폐위와 처형
5.1. 참형으로 인한 여파
6. 기타
7. 평가
8. 21의 저주?
9. 가족관계
10. 대중매체에서
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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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국왕. 루이 15세의 손자. 루이 15세의 왕세자 루이 페르디낭과 마리 조제프 드 삭스[1]의 삼남이다.[2] 아버지인 왕세자 루이(1729 ~ 1765)가 사망한 후 루이 16세가 루이 15세의 후계자가 된다. 할아버지 루이 15세가 사망한 후 즉위했다.
프랑스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비운의 왕이다.

2. 개인적인 면



2.1. 가정적인 남편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한 이후, 그때까지의 프랑스 왕들의 '''일반적인''' 관례와는 달리 애인을 들이지 않고 아내하고만 금슬 좋게 살았다. 결혼하고 나서 왕위에 올라서도 7년 동안이나 부부관계가 없었는데, 이에 대해서 무수한 소문[3]이 돌았다. 이런 소문에 걱정한 루이 15세가 자신이 직접 저명한 의사를 데려다가 진찰했던 기록이 나중에 공개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성적 능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또한 당시 스페인 대사의 보고에서도 성적 불구는 아닌 것 같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즉, 결혼 초기에 자식이 없었던 것은 본인이 부부관계를 피했기 때문.[4]
이 때문에 즉위하고 난 뒤에도 이 소문을 걱정한 요제프 2세가 여동생과 루이 16세를 만나러 직접 프랑스로 온 적도 있다. 하지만 나중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사이에서 다산하여 2남 2녀를 보았다. 단 장남과 차녀는 일찍 죽었다. 차남 루이 17세는 혁명 시기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학대받다시피 하다 요절했고 장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만이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5]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아름다운 애인을 탐닉하고 무수한 여자들을 농락하길 즐기던 루이 14세, 루이 15세와 비교해보면 루이 16세의 성생활은 대단히 '''왕답지 못한''' 것이라, 당시 프랑스에서는 루이 16세의 성적인 능력을 의심하는 루머가 많이 퍼져 있었다. 당시 사회분위기는 남자가 마초적인 성향이 짙은 분위기였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는 그러한 기질이 더욱 심했다. 심지어 루이 15세가 젊은 시절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했을 때 전쟁터에서 여자와 뒹굴다 병들었을 때도 백성들이 왕에게 빨리 나으시라고 기도하여 인기가 올라갔을 정도(...) 그런 상황 속에서 루이 16세의 성향은 국민들에게 비호감을 살만했다. 그리고 이는 국민들의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반감으로도 이어졌다. 마침 마리 앙투아네트는 조용히 안방 내조만 하던 전통적인 프랑스 왕비들과는 달리 대단히 활동적이었고 각종 연회, 무도회 등의 사교계 행사를 직접 주최하고 전면에 나서길 좋아했다.
그리고 이 점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스러운 여자'라는 루머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도 되었다. 본래 이런 사교계 행사의 주최는 왕의 공식 첩인 총희(후궁)가 맡는 게 보통이었다. 당연히 이 연회를 보고 백성들이 가지는 반감 또한 총희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첩을 두지 않았으니 왕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직접 행사 주최를 맡아야 했다. 즉 마리 본인이 이런 행사를 맡는 걸 즐기지 않았다고 해도 의무적으로 행해야 하는 상황인데 마리가 이 주최 자체를 매우 즐기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반감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집중된 것. 궁중에서 아예 이런 행사들을 하지 않았다면 재정도 아끼고 반감도 줄일 수 있었겠지만, 당시 궁정 사회에서 이런 행사는 높으신 분들이 모여서 비공식적인 회담을 나누는 중요한 정치 행사의 성격도 있어서 그만두는 게 불가능했다. 물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런 행사 자체를 열더라도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사치를 부리거나 하지는 않았고 당대 평균 수준이거나 오히려 조금 더 검소하게 치루는 편이었다. 하지만, 행사 자체로 인한 여론의 반감 문제는 둘째치고, 당시 프랑스의 경제 사정은 왕실에서 약간 검소하게 돈을 쓴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도 직접 프랑스에까지 온 큰처남 요제프 2세의 특훈(?)을 받아가며 결혼 7년 만에야 부부관계를 제대로 갖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한 마리는 결혼 8년 만에 첫 딸을 출산했다. 마리의 이미지가 좋지 않은 데다 공교롭게도 첫 임신 무렵에 페르젠 백작을 알게 됐기에 항간에는 공주의 생부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루이는 첫 딸에게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듬뿍 주며 소문을 불식시켰다. 뿐만 아니라 난산을 겪은 아내에게 "자연 속에서 편히 쉬어라"라는 뜻으로 별장인 트리아농 궁전을 선물했다고 한다.
물론 신혼 때 마리는 사내 구실을 제대로 못 하는 남편 때문에 답답해하며 친정으로 보내는 편지에도 그 부분을 언급했지만 딱히 큰 불화는 빚어지지 않았고, 전술했듯 부부관계가 제대로 시작되고 나서 아이들이 연달아 넷이나 태어나며[6]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자녀들에게 엄격하게 예절교육을 시킨 아내와는 달리, 아이들의 청을 모두 들어주는 자상한 아버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를 더 따랐다고. 이렇게 자녀들에게 다정했던 것은 루이의 조부인 루이 15세나 현조부인 루이 14세도 보여준 면모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아이를 4명 입양했다.

2.2. 아예 무능한 건 아니었는데


프랑스 혁명을 막지 못한 만큼, '''무능하고 어리석은 인물'''로 흔히 평가되고 있다. 사실 무능한 군주란 이미지도 재평가받은 것이, 90년대 학습만화 같은 것을 보면 단순히 무능한 왕이 아니라, 군대와 비밀경찰을 동원해서 국민들을 탄압하는 사악하면서도 영리한 폭군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2010년대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사실 이미지처럼 정말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악한 폭군도 아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곤 한다. 프랑스 최초로 전기를 일으키는 기계를 들여왔고 라틴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했으며, 지리, 철학, 수학은 물론 시계나 가구를 만드는 시시한 취미라고 평가된 것도 과학에 대한 그의 조예를 보여주는 증거로 보인다. 오늘날에야 시계는 흔하디 흔한 걸로 평가받지만, 쿼츠 시계가 없던 당시에 시계는 고도의 기술력이 총동원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특히 기계공학적인 면에서 높은 수준의 기술력이 시계를 통해 나타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루이 16세의 시계제작에 대한 관심은 달리 말하면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라고도 볼 수 있다.[7]

▲ 단두대의 칼날 부분의 문제를 지적하는 루이 16세(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1989년 영화 <프랑스 혁명>의 한 장면)
근데 이게 재평가 되면서 또 생각해 봐야 되는 지점이, 이 시계·자물쇠 취미가 그렇게 시시한 것이 아닌 만큼이나 거대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책상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게 아니라, 궁전 안에 꽤 대규모의 대장간을 마련해놓고 즐기는 본격적인 취미였다. 흔히 '자물쇠가 취미'라고만 들으면 생각나는, 왕실에 걸맞은 사치를 부리지 않았다는 느낌과는 거리가 있다. 게다가 위에 언급했듯이 당시로선 첨단 기술을 동원하는 작업이어서 비용 자체도 상당히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왕실 일화 또는 야사에 따르면 현존하는 단두대 칼날도 루이 16세가 새로이 디자인해준 것이었다. 원래 단두대의 칼날은 반월형이었는데, 루이 16세가 그 모델을 보고는 "'''칼날이 이런 모양으로 생긴다면 목뼈에 칼날이 걸려서 사람이 쉽게 죽지 않아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다.''' 그러니까 칼날을 대각선으로 세워야 고통 없이 보낼 수 있다."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그는 자기가 개량한 단두대에서 참수당한다.[8][9] 그래도 그 덕분에 죽음은 조금 덜 고통스러웠을지도.
그 외에도 영국의 역사가 데이비드 흄과 만난 경험으로 역사에 관심이 많았으며,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를 손수 번역하기도 하였던 만큼 상당한 지식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리학 등의 학문에도 능통했으며, 가족을 사랑하는 자상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2.3. 문제는 리더십 부족과 분별력 없는 성격


'''허나 그는 좋은 '사람'이었을 뿐, 좋은 '군주'가 되진 못했다.''' 군주로서 제일 중요한 덕목이 크게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인데, 리더십과 카리스마, 결단력이 부족했고, 그가 바보가 아니라 지성인이라는 건 주변에서 인내심을 갖고 이해하고 배려해 줘야만 발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냥 일반인으로 살아도 이런 사람은 바보 취급을 받는데, 군주였으니 설명이 필요없다.
지독한 근시였기 때문에 눈앞에 있는 사람도 제대로 구분할 수 없었고, 가족을 제외하곤 다른 사람들을 대하기를 매우 어려워했을 정도였다. 운동을 즐겨 건장한 체구를 가져 외형적으로 딱히 하자는 없었지만 근시 때문에 평소 자세와 걸음걸이가 매우 초라하여 사람을 대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대인기피증과 사회공포증으로 이어졌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제대로 된 말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평소에도 국정 운영은커녕 의사소통마저도 힘든 상황이었고, 이런 상황이 반복되어 국민들과 신하들에게 '''천치, 머저리''' 등의 인식을 심어주었다.
아내인 마리 앙투아네트마저도 친정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루이 16세를 그 딱한 사람이라고 언급하며 동정할 정도였다. 직접 루이 16세를 만나본 오스트리아요제프 2세 또한 그를 '''"인내심이 필요하지만, 이야기를 해 보면 의외로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평했다. 그 말인즉, 평소에는 영락없는 바보 천치로 보였다는 말이다. 인내심을 발휘해서 오래 이야기한 후에야 '''의외로''' 뛰어난 지성인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말. 한마디로 말해 학자로서는 흙 속의 진주 같은 인물이지만, 통치자로서는 최악의 성품이었다.[10]
사실 당대 귀족들이나 다른 나라 군주들도 별반 교양없는 건 마찬가지였으니 교양이 없는 것이 크게 흠 잡힐 것은 없었지만, 이리저리 휘둘리는 건 다른 문제다. 왕권을 강화시킬 후계자 생산에 대해서도 진지한 고려가 없었던 듯한데, 결혼하고 거의 10년이 되도록 부부관계를 기피해서 성불구자라거나 진성포경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나중에는 이 소문이 거의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다.[11] 보다 못한 장모 마리아 테레지아가 장남 요제프 2세를 파견해서 설득한 후에야 마리의 임신과 출산이 이뤄지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자식을 당대 기준으론 매우 늦게 보게 되었다. 이 당시 요제프는 이미 신성 로마의 황제가 된 이후였고 동생을 위해 가명[12]을 사용하면서까지 타국에 방문했다. 이렇게 후계자 생산이 늦어지는 바람에 결국 프랑스 왕위계승권자들 간의 권력 암투를 불러와 남동생들인 프로방스 백작아르투아 백작, 또 제2왕족가문인 오를레앙 가문이 우유부단한 왕 아래에서 통제되지 않고 세력을 키우는 기반이 되었다. 이렇게 분열된 왕실은 혁명이 일어나자 똘똘 뭉치기는커녕 서로 다른 편 아래에서 으르렁대며 루이 16세의 가장 큰 적이 되고 말았다. 예컨대 오를레앙 공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하는 데 가장 적극적이었으며, 프로방스 백작 루이는 루이 16세가 처형되자마자 조카인 루이 17세를 무시하고 스스로 섭정-왕세자를 자처했다. 아르투아 백작 샤를 또한 장인인 사르데냐-피에몬테 국왕을 등에 업고 자신의 왕위계승권을 주장했다.
루이 16세의 가장 큰 문제는 우유부단하고 주변의 분위기에 잘 흔들리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혁명기에는 혁명파들에게 둘러싸이면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거나 혁명 기념에 함께 참가하기도 하는 등 유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상황이 진정되고 보수파들에게 둘러싸이면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고 반동적으로 회귀하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차라리 한쪽으로 치우쳤다면 지지층을 얻을 수라도 있었겠지만 오락가락하는 행보 때문에 귀족과 시민 양측의 지지를 잃는 결과를 불러왔다.
이러한 태도는 지극히 '기만적'인 행동으로 보였고, 많은 국민들이 루이 16세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고 국왕은 귀족만 편들고 서민층은 외면하고 거짓 약속만 한다면서 분노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루이 16세가 아무리 호구, 바보, 천치 취급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진짜 지능이 낮은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지적장애나 이상이 딱 보이는 자폐성 장애는 인권개념이 막장이던 이 시기에도 사형을 면해주는 것이 오히려 상식이었으며, 엄연한 정상인이던 그의 호구 행각은 주변에는 오히려 호구의 가면을 쓰고 신뢰를 무시하는 위선자로 여겨지게 했다. 즉 어설프게 상식인이고 어설프게 호구인 것도 문제였다. 차라리 상식인이면 제대로 상식인이든가 호구라도 제대로 호구라면 전자의 경우 일을 이렇게까지 만들지 않았을테고 후자라면 동정론 때문에라도 사형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13] 암만 국왕이 미워도 진짜 바보면 "그래도 왕은 못나고 싶어 못난 게 아니라 그냥 원래 못난놈인데 어떻게 사형을 함" 이라며 사형은 면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루이 16세는 분별력 없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자기 성격 때문에 대가로 목숨을 잃게 된다. 애초에 혁명이 일어난 후에도 몇년간 살아 있었던 걸 보면, 혁명군과 타협해 헌법 준수 잘하고 중산층과 서민들을 결단력 있게 돌보려고 노력하는 모습만 보였어도 목숨 보존은 물론이고 실권은 약해도 왕위도 수호했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3. 위태로운 재위기간


왕 본인이 무능하더라도 시스템이 안정되어 있거나 뛰어난 인재의 보좌를 받아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행히도 루이 16세는 '루이 14세에게 있어서의 콜베르'같은 인재를 찾아내지 못했다. 정확하게는 경제학자였던 '론 남작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Anne Robert Jacques Turgot, baron de l'Aulne, 1727년 5월 10일 ~ 1781년 3월 18일)'라는 인재가 있었지만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스스로 잘라버렸다. 더불어 당시의 프랑스는 큰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루이 14세 때부터 심각하게 불균형화된 프랑스의 경제구조가 백여 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더욱 고치기 힘들게 된 것이다.
루이 14세 시절부터 프랑스 왕실에는 계속해서 부채가 쌓여가고 있었다. 루이 14세와 루이 15세는 강국 프랑스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의 지불능력 이상의 돈을 여기저기서 빌려다 썼다. 당연히 빚이 쌓일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의 재무장관들은 더 많은 돈을 빌려서 이 부채를 충당했다. 그나마 루이 14세 치하는 식민지 개척과 중상주의, 수출위주의 경제 정책으로 프랑스의 국부가 절정에 달한 시기였기에 국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그의 말년에 거의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 아니, 사실 루이 15세 시절에 이미 바닥이었다. 루이 14세가 죽은 1755년쯤에 프랑스 빚은 20억 리브르였고 반면 한해 세입은 1755년 5백만 리브로, 1756년 1천만 리브르였다. 루이 14세 사후 루이 15세는 800만 리브르를 써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결국 채권자들에게 이자 갚을 돈 등을 포함한 3천만 리브르를 또 빌렸다. 이걸 때워야할 후계자인 루이 15세는 정확히 59년이나 되는 긴 재위기간 중 친정을 펼친 것이 대략 11년 정도밖에 안 되고, 치세 동안 또 전쟁질을 했다.
그렇게 쌓여온 빚은 루이 16세 치세에 와서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러 국가 예산의 60% 이상이 100년 동안 루이 14세와 15세가 빌린 돈의 '''이자'''를 갚는 데에 쓰였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 상태로도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기에, 루이 16세의 즉위와 함께 재정총감이 된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가 개혁을 시작한다.
우수한 계몽주의자이자 경제학자인 튀르고는 우선 모든 부서의 지출을 재정총감의 권한으로 일일이 검사하여 정부의 재정 적자 폭을 줄이고, 미국독립전쟁에의 개입을 반대하며 위기에 빠진 프랑스를 살려낼 대대적인 개혁을 준비한다. 1776년 1월에 왕실에 제출한 6개 포고령이 그것인데, 부역에 대한 귀족적 특권을 폐지하여 공평한 과세를 매기면서 길드의 독점권을 금지하여 백성들에게 경제적 자유를 주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런 튀르고의 노력 덕분에, 그해에 프랑스 정부는 네덜란드의 은행으로부터 4%라는 낮은 이자율로 돈을 빌릴 수 있게 될 정도로 국가 신임도가 높아졌다.
그러나 기득권을 침해받게 된 귀족들이 반발하였고, 자신은 물론 왕실의 지출을 일일이 검사받게 된[14]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까지 튀르고를 싫어하게 되면서, 결국 바로 그해 5월, 튀르고는 사임하고 개혁은 끝장나버린다. 또한 튀르고가 그토록 반대하던 미국 독립전쟁에까지 지원과 개입이 시작하면서 프랑스의 재정문제는 끝장나버린다.[15]
결국 시간이 꽤 지나서야 루이 16세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전까지 면세특권을 누리고 있던 귀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려고 했다. 이 귀족들의 재산이라는 것은 정말로 어마어마해서 그들이 조금만 양보해서 세금을 낸다면 '''국가의 빚을 한번에 갚고도 남았다'''.[16] 당시 프랑스에서 면세특권을 누리는 귀족의 대부분은 루이 14세와 15세 시절 왕의 허가 아래 관직을 구입한 부르주아 계층[17]으로서, 인구의 3%라는 '''무지막지하게 많은 수'''에 달했다. 거기다 일부 지방의 귀족들은 납부되는 세금을 자신들이 착복하기도 했다.
사실 이 부채 문제는 루이 16세가 절약-증세 라는 정상적인 방법을 썻다고 해도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었다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이 막대한 부채는 프랑스 혁명 정부에게도 상속되어 혁명 정부의 재정을 압박하는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급기야는 교회 재산을 털어버리거나, 훗날 나폴레옹디폴트를 선언하고 '''배째버리는''' 바람에 처리되었다. 사실 전통적으로 프랑스 왕실은 재정도 풍부하지 않은데 빚을 내면서까지 무리하게 써대는통에 재정 상태가 꾸준히 안 좋았고, 역대 프랑스 왕들은 이 부채 문제를 마찬가지로 '''그냥 배째거나''' 성전기사단이나 교회 같은 만만한 놈들을 '''탈탈 털어서''' 해결했었다.[18]
하지만 기가 약하고 신앙심이 깊은 루이 16세가 이런 방법을 쓸 수 있을 리도 없고, 귀족들에게 세금 내라고 하려니 '''귀족들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다'''. 프랑스의 귀족은 루이 14세 치하에서는 기가 꺾였으나 무능한 루이 15세가 즉위한 뒤부터는 서서히 세를 불려나가, 당시에는 국왕의 명을 거부할 정도로까지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19] 실은 루이 14세가 그렇게 군대를 강화하고[20] 대외활동에 올인하며 사치를 부린 것은 전부 귀족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즉 후대의 왕들은 그로부터 '강력한 왕권'와 '막장 재정'이라는 유산과 부채를 동시에 물려받은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유산은 다 까먹고 부채는 불려나갔다. 참고로 루이 15세는 위에서 언급했듯 친정 자체를 10여 년 정도만 했고 그것도 애첩인 퐁파두르가 죽은 뒤에야 했다. 문제는 애첩에게 정치를 맡겼다가 노년에 들어서야 나라를 통치한다고 온 왕이 정치를 못하니 실권을 얻어가던 귀족들이 지지할 리가 없었다.[21] 결국 왕의 권력도 낮아지고 귀족들의 실권만 높아지고 빚더미만 잔뜩 생긴 꼴이 되었다.
특히 프랑스의 절대왕정자체는 국왕 스스로 강력한 군사력과 뛰어난 능력으로 이루거나 명시된 법으로 왕권의 강화를 꾀하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나 길드, 귀족 등의 긴밀한 협력체제에 의하여 성립되는 것이었는데, 하물며 세력을 회복해가던 당시의 귀족들은 루이 16세에게는 버거운 상대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왕의 권위가 매우 강력한 절대왕정 국가였으며, 부르주아 계층 역시 강력하게 성장해 있었으므로 왕이 그들의 지지를 확보하면서 관료들이 제시하는 정책을 강력하게 밀어준다면 충분히 능력을 발휘하여 개혁에 도달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군대도 부르주아 출신 장교들이 많아지면서[22][23] 사실상 부르주아들이 군대를 장악한거나 다름없는 상황인지라 부르주아들을 지지세력으로 끌어들이면 귀족은 충분히 제압할수 있었다.[24]
하지만 튀르고 같이 우수한 인재가 무슨 정책을 내더라도 보수파 귀족들이 반발하면 루이 16세는 그들을 제압하거나 달랠 생각은 안 하고 뒤로 물러서기 일수였으니, 개혁 시도→반발→퇴보가 반복되면서 도무지 개혁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개혁파들에게는 왕에 대한 실망감만 커지게 되었다. 튀르고의 후임으로 재무총감이 된 자크 네케르도 유사한 개혁안을 제출했다가 1781년에 파면되었고, 후임으로 온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 역시 개혁과 증세를 통해서 적자를 해소하려 했고, 루이 16세가 적극 찬성했으나, 귀족들과 가톨릭 교회 측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개혁안은 좌초되고 드 칼론은 쫓겨난다. 그리고 1788년에 다시 복귀한 자크 네케르는 드 칼론의 개혁안대로 하려고 했으나, 또다시 반발에 부딪치는 바람에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렇듯 루이 16세의 이런 우유부단한 성격과 답없는 현실에 진절머리가 난 자크 네케르는, 당시 프랑스 연간 국가예산안을 공개하고는 1790년에 장관직으로 물러난 뒤 '''아예 은퇴를 선언한다'''. 우리가 당시 프랑스의 경제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는 건 이 네케르의 덕.
1789년 5월 5일, 삼부회가 175년 만에 소집되었다. 그러나 제3계급인 브루주아 계급이 머릿수에 따른 표결권을 주장하면서 폐회되고, 6월에 제3계급들의 국민의회세워졌다. 그리고 그해 7월, '''혁명이 일어났다.'''

4. 혁명 발발


이렇게 모순점들을 계속하여 해결하지 못하고 뒤로 미루기만 하니, 쌓이고 쌓이다가 결국 터진 것이 프랑스 혁명이었다. 항간엔 루이 16세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루머도 도는데, 혁명 당일(1789년 7월 14일) 루이 16세의 일기장에는 '''사냥감을 잡지 못했다. 특별한 일 없음'''이라고 써 있었다.
그 외 바스티유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시종장이 가져오자 "반란인가?"라고 물었는데, 시종은 "아닙니다 폐하. 혁명입니다!"라고 답했다는 일화도 있다. 다만 이것도 실체 여부에 논란이 많은 편인데, 우선 혁명이 지금의 의미가 된 것은 프랑스 혁명이 처음이다. 본문에도 언급되지만, 원래 혁명은 점성술이나 천문학에서 별의 순환을 의미했다. 단적으로 Revolution이란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것으로 언급되는 인물은 코페르니쿠스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프랑스 혁명 이전에 사용된 것은 영국의 명예혁명이나 올리버 크롬웰이 사망한 이후에 '''왕정복고'''되는 상황 등이다. 때문에 우선 저 문건 자체가 의심스럽고, 실제로 사용되었더라도 지금의 혁명이란 표현과는 전혀 다른 의미일 것이다.[25]
사실 대혁명 초반만 해도 오히려 루이 16세는 파리에 삼색 모표를 달고 오면서 '''혁명에 대한 지지'''를 천명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프랑스의 분위기는 영국명예혁명 같은 입헌군주제 혁명의 분위기였다.[26] 하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는데, 왜냐하면 루이 16세가 혁명의 원인은 비교적 정확히 판단했던 반면, 국민의회가 주장한 입헌군주제는 내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27] 그는 외국의 지원을 받으면 혁명세력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여 헌법을 잘 준수하려고 하지 않았고, 정확히는 혁명 이후 극심한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고 대부분의 일을 아내에게 의지했다. 이러던 중 돌아온 네케르를 또 해임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국민의회는 반발하며 국왕한테 헌법을 지키라고 경고하며 안 그러면 가만 안 둔다고 협박했다. 이에 루이 16세는 의회의 협박에 분노해 군대에 동원령을 내려 국민의회를 전복시키려 했다. 하지만 파리 시민들이 전부 의회 편을 드는데다 이미 군대조차 혁명의 분위기가 널리 퍼져서 왕명을 거부하는 바람에 실패하여 충격을 받는다.
특히, 1791년 6월, 처가인 오스트리아와 가까운 곳으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실패하면서 신뢰성은 결정적으로 추락했다. 한마디로 국왕이 나라를 버리고 달아났다는 얘긴데 어떻게 쉴드가 불가능한 병크였다. 게다가 하필이면 오스트리아로 망명해 그 군대를 이끌고 돌아올 계획이었기 때문에, 급속하게 악화된 여론은 되돌릴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민 중 다수가 국왕은 옹호하고 있었으나, 이후로는 급진파가 득세하게 된다. 더불어 계획을 주도했던 왕비는 남편처럼 잘못된 처신을 하여 그야말로 국가의 적이 되었다. 원래는 도망갈 생각이 없었으나 혁명이 진행됨에 따라 의회가 왕을 쥐고 흔들다보니 권위와 신변에 위기를 느꼈고, 결국 왕비의 의견을 받아들여 파리를 떠나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지대[28]로 도망갈 계획을 짜게 되었으나 실패로 돌아가면서 루이 16세의 입지는 위태로워진다.

5. 폐위와 처형


짐의 피가 프랑스 백성의 축복을 위해 흐르게 하소서! - 처형되기 직전에 남긴 유언

결국 1792년 4월, 혁명군에 위협을 느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그와 왕비가 오스트리아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태는 벼랑 끝으로 달려갔다. 입법의회와 시민들은 궁전을 점거한 다음 국왕 부부를 감금하고 왕정을 정지시켰고, 9월 21일에 혁명정부의 제1공화국이 출범했다. 그리그 11월에 루이 16세가 오스트리아와 내통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드러나면서 "시민 루이 카페(Louis Capet)"[29] 신분으로 재판을 받고 '''반역죄'''로 1793년 1월 21일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사실 일반적인 상식과 다르게 루이 16세는 프랑스 국민에게 인기가 폭망한 군주까진 아니었기에,[30] 여론이 악화된 가운데서도 투표에선 총 투표수 700여 표 중 반대가 300표를 넘었을 정도로 루이를 죽이는 데 반대하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허나 이를 이용해 루이 16세의 사형에 찬성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형식적인 사형 선고 이후의 집행유예를 지지했고, 아예 국왕 폐하를 재판하는 것 자체가 무엄해서 투표할 수도 없다는 식으로 기권표를 던진 사람들도 상당수였다는 식으로 팩트를 곡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정확하게 따져보면 국민 공회에서 루이 16세에 대한 투표는 '''총 721명 중 즉시 처형 361표, 사형 판결에는 찬성하되 집행유예[31] 23표, 처형 반대-종신 금고형 319표, 기권 18표'''였다.[32] 과격파 생 쥐스트가 주장한 즉시처형[33]이 361표로 정확하게 과반수가 뜨면서 루이 16세는 처형되고 만다. 즉시 처형 361표 중에서 '''단 한 표'''만 집행유예나 종신금고형으로 바뀌었으면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처형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프랑스 좌우파 구분의 시발점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는데[34], 동서양 어디든 시민이 왕의 목 자르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어지간히 부담스런 판단일 수밖에 없었다. 당장 물건너 영국에서 찰스 1세를 처형하자 당시 프랑스는 왕 모가지 치는 과격한 놈들이라고 디스했던 과거가 있었고, 그 영국마저도 올리버 크롬웰이 찰스 1세를 처형한 후 독재정치를 시행하자 그가 죽고 난 이후 다시 왕정을 복고하였다. 그리고 크롬웰은 부관참시되었다. 이를 반영하여 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편에서는 처형을 반대하는 지롱드당 위원이 "어떻게 우리가 영국의 야만적인 행위를 따라해야 하는가?" 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 적도 있었다.[35] 그러다 보니 온건한 사람들은 왕을 죽이는 대신에 살려서 입헌군주제로 가자고 했고, 급진적인 사람들은 시민과 대의, 장 자크 루소 사상 같은 것들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왕의 목을 잘라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 바로 이 점에서 왕을 죽이자고 하는, 한 체제의 완전한 단절에 준하는 결정에 찬성표를 던진 사람들이 대체로 좌파, 그래도 어떻게 왕을 죽이냐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바로 온건파, 우파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36]
사실 혁명파는 루이 16세를 죽이지 않는 한 프랑스의 왕정은 언제든지 복고될 수 있다고 봤기에 없는 죄라도 만들어서 루이 16세를 처형시켜야 국민국가제를 이룩할 수 있다고 여기는 판국이었는데[37], 이러다보니 혁명세력들 중에서도 급진파의 한명이었던 생 쥐스트는 "왕이 받은 혐의 중 무죄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혁명이 유죄일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왕에게 죄가 없다면 혁명이 죄가 된다." 라고 할 정도였다.[38] 심지어 자코뱅 강경파들은 재판도 필요없이 그냥 죽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지롱드 당원들의 강력한 반발로 마지못한 정치적 재판을 거행했다.
물론 상기했듯 루이 16세는 프랑스 특히 혁명파 입장에선 아예 죄가 없는 건 아니라, 루이 16세가 기소된 가장 핵심적인 죄목은 '오스트리아와의 내통' 혐의였고, 이는 루이 16세 자신이 오스트리아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탈출하려다 붙잡혔으니 사실관계 자체는 명확하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문제는, 루이 16세와 왕당파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정당한 왕권을 혁명파(반란세력)에게 빼앗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혼인동맹국인 오스트리아의 도움을 요청하려던 시도였으니 범죄라고 할 수 없다는 것. 결국 생 쥐스트의 발언은 '''구체제-왕권신수설의 논리와 신체제-국민국가의 논리가 충돌하는 지점을 짚어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생 쥐스트나 마라도 인정한 것처럼 루이 16세 자신은 꽤 도덕적 품성을 갖춘 인물이었고, 자의로 범죄를 저지른 인물도 아니었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구체제-왕권신수설의 논리에 따라 정당하게 행동했지만, 이 행동은 혁명의 사상적 기반이던 국민국가의 논리에 따라 보면 '반역행위'라는 것. 말하자면, '어떤 논리에 따라 보면 왕의 행동은 분명 무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논리에 따르면 (설령 왕을 존중하며 입헌군주제를 지향한다 하더라도) 왕의 권력과 권위를 침해한 혁명세력의 행동은 유죄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인 것. 아래에도 상세히 서술되어 있지만, 이 부분은 루이 16세 스스로 혁명세력 내에서 왕에게 우호적인 세력의 정당성을 파괴한 것으로, 정치적 패착에 가깝다.
결국 재판정에 선 루이 16세는 겸손한 태도로 자신에게 가해진 50여 가지 혐의에 대해 항변했으며, 최대한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여담으로 루이 16세는 '국민의 피에 미친 폭군'이란 죄목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39] 그는 재판정에서 자신의 모든 행동은 국민을 위한 일이라고 조용히 항변했다. 이 모습을 본 자코뱅파 내의 과격파 리더인 장폴 마라조차도 "저 사람이 유죄만 아니었다면[40] 정말로 존경스러운 사람이다."라는 평을 내릴 정도였다고 한다. 하여튼 루이 16세의 변호인들은 열심히 변호했음에도 애초부터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나아가려는 시대적 한계가 있었기에 국민공회는 즉각 표결에 들어가 처형이 가결되고[41] 루이 16세의 사형이 집행된다. 여담으로 그를 변호했던 변호사, 유리하게 적용될 수 있는 증언을 한 증인들도 이후 반혁명파로 몰려 단두대로 끌려갔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말하자면, 루이 16세를 '무고한 피해자'로 보는 관점에서 그의 사형 판결과 집행 역시 '피에 굶주린 극단적 과격 혁명세력의 만행' 정도로 폄훼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 역시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굉장히 편협한 서술일 수 있다. 물론 이후의 혁명군이 자기들 안위도 걸린 문제니 귀족 계층의 씨를 말리기 위해 잔인한 숙청 작업을 진행한 것은 사실이나[42], 루이 16세의 처형은 어찌됐든 국민공회의 표결을 통한 재판을 거쳐 결정된 것이고, 해당 표결의 경우 사형 찬성표와 반대표가 거의 반반으로 대립할 정도로 각자의 의견에 따른 자유로운 투표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또한 변호인들에게 변론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 당시의 사법 제도라는 것이 현대 재판처럼 피고의 변호권이 철저히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현대 이전의 모든 재판은 다 부당한 재판이다. 무엇보다도 루이 16세 재판의 경우 범죄사실의 소명여부가 중요한 재판은 아니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루이 16세의 혐의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오스트리아와의 내통' 혐의였고, 이에 대해서는 루이 16세가 현행범으로 체포된 이상 사실관계의 증명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다만 '''"왕이라고 해도 반역행위에 대해서는 사형으로 처벌받아야 한다"'''는 입장과 '''"그래도 왕인데 사형은 지나치다"'''는 입장 사이의 충돌이 있었을 뿐이다. 결국 이 재판은 일반적인 형사재판이 아니라 왕을 형사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가에 대해 국민국가의 논리와 왕권신수설의 논리가 대립한 정치적 문제였다는 것.
이는 말하자면 프랑스 혁명을 단순히 '민주주의의 시작'으로 이상화하고 그 과정에서 처형된 루이 16세를 사악한 폭군이나 나라를 말아먹은 암군으로 비하하는 것에 대한 반론으로 그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꽤 괜찮은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고, 의도적으로 악행을 자행하는 인물은 아니었음을 주장하는 것까지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지만, 이 관점에 너무 이입하여 루이 16세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었는데 정신나간 극단주의 과격파들이 이유도 없이 그를 처형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사실을 지나치게 곡해한 측면이 있다. 문서 전체에서 여러 번 설명된 것처럼 근대국가, 국민국가의 논리로 보면 루이 16세의 행위가 반역(현대 한국 형법을 기준으로 보면 외환의 죄)에 해당한다는 점은 명확하며, 그의 처형에 대해 벌어진 논란은 국가 그 자체가 주권을 가진다는 국민국가의 정치적 논리와 국가는 왕의 소유이므로 왕은 반역을 저지를 수 없다는 왕권신수설, 전제왕권의 논리 사이에서 벌어진 정치적 충돌로 봐야 한다. 인격적으로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범죄(최소한, 혁명세력과 국민국가의 입장에서는 범죄)를 저지를 수는 있고, 인격적으로 존경받을만한 것과는 별개로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핵임을 스스로 져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억울하다면 차라리 공포정치기에 처형된 다른 귀족들 중에 억울한 사람이 있었다면 모를까, 루이 16세의 처형이 억울하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보아야 한다. 애초에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이거나 아님 적성에도 안맞는 왕을 포기하고 후임에게 물려준 뒤 망명이라도 해 아내, 자식들이랑 알콩달콩 살았다면[43]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
위의 재판이 끝난 다음 날 루이 16세는 감옥을 나서면서 자식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죽더라도 복수할 생각일랑 하지 말거라!"'''

단두대 앞에서, 그는 예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수갑도 차지 않고 코트도 벗지 않으려고 했으나 절차이므로 어쩔 수 없다는 말에 받아들였다. 다만 가장 좋은 의례용 옷을 입고 왕만이 타는 금장 마차를 타고 단두대로 실려갔다. 유언은 '''"짐의 피가 프랑스 국민의 행복을 강화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44]였다. 혁명 정부는 그가 죽기 싫어서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등 추한 모습을 보였다고 선전했다고 하나, 루이 16세를 처형한 샤를 앙리 상송은 '루이 카페'는 스스로 코트를 벗고 묶으라고 자신의 손을 내밀며 입시해 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의연하고 지엄한 태도로 죽었다고 했다. 물론 상송이 루이 16세를 좋아한 것도 있긴 했는데, "루이 16세만큼이나 가톨릭 신앙의 원칙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고 그를 칭송했다고 한다.[45][46] 혁명 초기 파리의 시민들이 왕궁으로 난입했을 때나(1792년 8월 10일 봉기), 죽기 직전 등에서 나름대로 위엄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이 그의 운명을 바꿀 순 없었다.
이런 모습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전기소설을 쓴 슈테판 츠바이크는 루이 16세를 '''"품위있게 죽는 법만 알았다"'''고 평했다. '상송가회고록'이나 왕의 목을 친 남자'란 책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상송은 처형 직전까지 그를 살리려 했고 그가 사형된 이후에는 위험을 감수하고 그를 추모하는 미사를 드리기도 했다.[47] 처형 당시 루이 16세의 나이는 아직 한창 나이인 3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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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8세 때 석곽묘로 조성된 무덤(왼쪽)과 기념물(오른쪽)
처형 직후 마들렌 성당에 잠시 매장되었던 루이 16세의 유해는 동생 루이 18세에 의해 1815년 1월 18일에 발굴되어 사흘 뒤인 1월 21일 프랑스의 역대 국왕과 왕비들이 잠든 생 드니 대성당으로 아내와 함께 이장되었다. 그리고 2004년 6월 8일 루이 17세의 심장이 부모의 곁에 안장되어 사후 2백 년이 넘게 흐른 뒤에야 일가가 영면에 들었다.

5.1. 참형으로 인한 여파


귀족이나 다른 왕족의 반란, 또는 외세의 침략도 아닌 자국 민중들이 봉기로 몰아낸 것도 모자라 왕의 목을 자른 이 전무후무한 사건은 주변의 다른 군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이후 많은 유럽의 군주들이 프랑스 혁명에 적대적인 태도로 나오게 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인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몇 년 전에 푸가초프의 반란을 겪은 경험 때문에 프랑스 혁명에 적대적이었으며 주변국의 군주들에게 국서를 보내어 프랑스의 폭도들을 진압하고 루이 16세를 다시 옹립하자는 국서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루이 16세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쓰러져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 안 되어 사망하고 만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도 동서양 할 것 없이 군주가 반란으로 폐위되고 시해당한 예는 무수히 많았으나[48] 루이 16세의 처형이 주변 유럽 국가들의 군주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 이유는 귀족이나 다른 왕족도 아닌 '''하찮은 평민'''들이 그들 스스로 재판관인양 법을 집행해서 군주를 무슨 형사사건의 죄인 취급하고 재판하여 처형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새 군주를 옹립하거나 신 왕조를 개창한 게 아니라 아예 군주제를 폐지하고 군주가 지배하지 않는 '''공화제를 수립'''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군주가 반란으로 폐위될 경우 반란을 일으킨 대상은 귀족이거나 아니면 다른 왕족이었으며, 폐위된 군주가 형사법을 적용받은 예도 없었다. 왕정 시절 로마의 타르퀴니우스 왕, 제정 시절 폐위된 수많은 로마 제국의 황제들, 중국사의 걸왕, 주왕, 수양제, 영국존 왕, 한국사의 봉상왕, 진지왕, 연산군, 광해군 등도 어디까지나 귀족 또는 사대부 계층의 반란으로 폐위되었고 백성들이 직접 나서서 폐위된 군주를 죽인 예는 없었다. 비록 폐위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때는 엄연한 군주였기 때문에 백성이 직접 죽이는 건 옳지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49] 게다가 다른 군주를 옹립하거나 아예 역성혁명을 일으켜 본인 스스로 찬탈 하여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고 군주가 되어 군주제를 유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대 로마 같은 경우는 비록 왕정을 없애고 공화정을 수립했어도 타르퀴니우스 왕을 민중이 직접 죽이지는 않았으며 현대의 네팔도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했지만 전 국왕이었던 갸넨드라와 그의 일가족들을 죽이지는 않고 폐위시키는 선에서 그쳤다. 예외가 있다면 올리버 크롬웰찰스 1세를 처형한 경우인데 청교도 혁명을 주도했던 크롬웰과 그의 지지/추종 세력들은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 내 혁명 세력들처럼 평등주의자도 아니었고 그가 왕정 폐지 이후에 만들려던 공화정 체제는 시민이 직접 이끄는 나라가 아닌 기독교 근본주의 신정국가였다.
반면에 프랑스 혁명은 이전과는 달리 역성혁명으로 새 왕조를 개창한 게 아니라 '''아예 왕정 자체를 없애버렸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도 고대 아테네로마에서 왕정이 폐지된 예는 있어도 까마득한 고대인 데다가 프랑스 혁명과는 그 성질이 꽤나 달랐다. 게다가 영국은 청교도 혁명으로 혁명 지도자였던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잠깐 왕정이 폐지되었지만 올리버 크롬웰 사망 후 크롬웰파 세력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비크롬웰파 세력들에 의해 참형당한 찰스 1세 전 국왕의 장남인 찰스 2세 전 왕세자[50]를 새 국왕으로 옹립시키면서 다시 왕정이 복고되었다. 프랑스 혁명 직전 벌어진 미국의 독립도 그것 자체가 세계사에 남을 만한 대사건이긴 했지만, 애초에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북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일이었고 심지어 영국에 적대적인 나라 입장에선 영국의 주요 식민지 중 하나가 떨어져나가는 거라 쌤통이라는 반응까지 나올 정도였다.[51]
하지만 프랑스 혁명은 미국 독립과는 달리 왕의 직접통치에서 멀리 떨어진 식민지에서 일어난 게 아니라 왕이 직접 다스리는 군주국인 유럽의 프랑스 본토 한복판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이는 당연히 프랑스 왕정의 폐지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게다가 미국인들은 영국으로부터의 식민지 독립을 원했을 뿐, 영국 본토로 쳐들어가 조지 3세를 죽이겠다는 수고는 할 생각도 할 능력도 없었지만, 프랑스 민중들은 자신들의 군주를 자신들의 손으로 사형시킨다. 게다가 더 충격적이게도 '''군주가 없는 새로운 나라를 유럽 한복판에 건국'''했다. 미국 독립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유럽의 절대 군주들이 프랑스 혁명에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군주가 하극상으로 폐위된 예는 고대부터 무수히 많았지만 군주가 없는 새로운 정치체제의 출현은 주변 군주들 입장에서는 군주의 처형보다 더 큰 위협으로 비쳐졌으며 자신들도 그 꼴이 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루이 16세의 처형은 필연적으로 유럽 군주들의 대불(대프랑스)동맹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6. 기타


시계 말고도 왕태자 시절부터 자물쇠 덕후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궁 안에 전용 대장간이 있었다고... 미국에서는 독립전쟁을 지원했기 때문에 다른 국가에 비해서는 '의외로' 인기가 있었다. 그 때문에 프랑스 재정을 말아먹었지만 뭐, 미국인은 프랑스 재정 문제는 알바 아니니까... [52]
식탐이 많은 대식가였다. 갑갑한 궁중에서의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해소한 듯. 사실 식탐 자체는 루이 14세를 보면 알겠지만 부르봉 왕가의 전통(?)이었다. 오죽하면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전적 특징이 주걱턱이라면 부르봉 왕가는 과한 식탐으로 인해 살찐 둥근 턱이 유전이었다. 루이 16세는 자신이 사형당하는 날 아침에 최후의 만찬으로 커틀렛 6인분과 큰 치킨과 달걀, 프랑스산 와인과 스페인산 와인을 실컷 먹었다고 전해진다.
루이 16세 일가가 프랑스를 탈출하려다가 혁명군에게 잡힌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족발이다. 루이 16세의 탈출 마차가 생트메누(Saint-Menehould)[53]이라는 작은 도시에 이르렀을 때 그는 시장기를 느꼈다. 루이 16세는 그 도시의 특산품이 돼지족발찜(Pieds de porc à la Sainte-Menehould)이라는 것을 알고는 마차를 멈추게 한 후에 돼지족발 요리를 먹고 가자고 고집했다. 왕이 명령했기 때문에 신하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돼지족발찜의 조리시간이 매우 길다는 것이었다. 먼저 돼지를 잡아서 족발을 채취한 후에 끓이고 끓여 삶은 족발을 또 건져내서 살짝 구운 후 또 슬라이스해서 빵과 같이 내어야 하기 때문에 조리시간이 최소한 4시간은 되었다. 물론 국왕 일행이 생트메누 도착 후 바렌까지 가는데 걸린 시간은 실제 조리에 걸린 시간인 4시간까지는 아니었으며 식당에서 한창 만들고 있거나 미리 준비하고 있던 요리를 주문하였다든지 하여 약 1시간 안팎으로 지체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1시간 정도 지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이 16세는 기어이 돼지족발찜으로 식사를 마친 후 다시 길을 떠났다. 요약해 이야기한다면 루이 16세는 족발을 먹고 탈출길에 오르느라 탈출이 늦어져 욕보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렌 사건 항목을 보면 알겟지만 다른 요인들도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므로 단순히 맛있는 요리"만"이 원인은 아니다.
전설에 의하면 루이 16세의 처형 장면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손수건으로 왕의 피를 닦아 호리병에 보관했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한 부호가 소장하고 있던 그 호리병을 발견했는데 손수건은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호리병 속에 들어있는 말라 굳어진 피를 분석한 결과 실제 루이 16세의 것이 맞는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규명됐다. 루이 16세의 조상 앙리 4세의 머리에서 추출한 유전자와 대조했다고. 관련 기사 다만 기자가 영어로 된 원본 기사를 그대로 번역했는지 앙리 4세를 헨리 4세라고 썼다
귀족들이 하도 세금을 안 내자 도박으로 세금을 거뒀다고 하는데, 그 도박은 스페이드의 여왕에 나오는 파로(Faro)다.
당시로서는 물론, 현대 프랑스인들까지 포함해서도 보기 드문 영어 능력자였다[54]. 에드워드 기번의 책인 로마제국 쇠망사의 원서를 직접 번역했다고. 영어는 물론, 고대 그리스어라틴어 등의 여러 외국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7. 평가


참고로 몹시 다정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해서 수감되었을 때는 교도관의 가정사정까지 신경을 써주거나 프랑스 국내에서 고문을 금지하기도 했다. 살짝 백치미가 있는 건지, 새벽 기도를 하다가 꾸벅꾸벅 졸기도 했으며, 개인적으로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전통 가톨릭 계열 단체에서는 프랑스 혁명과 혁명의 산물[55]을 부정적으로 여기기 때문에 루이 16세에게 동정적이다.
루이 16세는 어찌 보면 구시대가 남긴 숙제를 풀지 못해 희생된 임금이지만, '''국가의 군주로서 국가의 쇠퇴를 막지 못한 것은 변명이 불가능한 실책'''이다. 어떤 문제에 봉착하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결하여 국가와 왕가를 존속시키는 것이 국왕의 의무, 통치자란 그걸 위해 앉혀놓는 자리고 못 해낸다면 왕조와 함께 멸망하는 수밖에 없다. 달리 만민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다.
'다정한 성격'이나 '오랜 기간 교분을 가지면 알 수 있는 의외의 지성'은 한 개인에게는 덕목이 될 수 있으나, 왕을 위한 덕목은 아니다.[56] 루이 16세에게 직접적인 죄가 있다면 '왕으로서 국가의 위기를 해결할 능력을 가지지 못했던것' 정도를 들 수 있다. 물론 바렌느 사건으로 해외로 도주하여 혁명 진압에 외세를 끌어들이려 한 것은 어떻게 변명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말이다.
일본 서브컬처산 프랑스 역사물[57] 등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의의를 잘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58] 루이 16세를 무고한 죽음이라고 묘사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해석이 일부 불까들을 중심으로 한국에도 이래저래 확산되었는데, 사실 루이 16세는 선량한 사람이었고, 그의 치세에 상황이 악화된 것도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면 루이 14세부터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이 좀 무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처형당한 것은 이런 정치의 문제라기보다는, 직접적으로는 오스트리아와 내통했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로 도주를 시도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민들과 자코뱅파들은 '그래도 정말 나쁜 놈은 아니니까 뭐' 하면서 감금 정도만 해놓은 상태였으나, 스스로 겁을 먹어서 군대를 파견해서 공격을 가한 오스트리아로 도주하려 했다는 것은 누가봐도 엄연한 '''반역죄'''였다. 만약 루이 16세가 오스트리아로의 도주를 성공했으면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 침공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를 얻게 되고, 프랑스 내부적으로도 반혁명파를 결집시킨 후 봉기시켜 프랑스 내전으로 이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사실 이것만 아니었어도 루이 16세는 사형은 당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고, 외국인인 왕비처럼 지지세력이 거의 없어서 엉뚱한 죄를 뒤집어씌워도 문제가 안되는 상황도 아니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러시아 혁명 이후 처형당한 니콜라이 2세도 마찬가지였지만, 루이 16세는 적국과 내통하고 적국의 군대를 끌어들이려했다는 점에서 당시 프랑스 법상으로도 사형 선고를 하는 게 맞았고, 처형당할 이유가 니콜라이 2세보다도 훨씬 많았다. 오히려 진짜 억울한 건 그의 아내인 마리 앙투아네트 쪽이다.[59]
루이 16세가 처형당한 것이 정당한지에 대한 의견 차이는 근본적으로 국가를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하는가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에 기인한다. "군주제적 가치관"에서 혁명파는 왕권을 제약하는 역적이고, 루이 16세가 외국(오스트리아)의 힘을 빌려서라도 왕권을 회복하는 것은 정당하다. 게다가 오스트리아는 루이 16세의 처가집이다. 유럽에서 군주끼리 서로 힘을 빌려주는 일은 흔했다. 처가집의 힘을 빌려서 반란을 진압하고 왕권을 회복하는 것은 군주제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것이었지만, 국가주의 입장에서 보면 반역죄였다.
사실 이 시기 유럽의 군주들은, '''자국의 평민보다는 다른 나라의 군주와 더 가까운 사이'''였다. 서로서로 결혼으로 맺어지거나, 형제 자매끼리 왕위를 나누면서 상당히 가까운 친척 지간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친척이다보니 서로 연락도 자주 하고 지내는 사이니까 당연히 더 친밀할 수밖에 없고, 신분과 입장이 완전히 다른 평민과는 달리 '같은 군주'라는 점에서 입장과 신분이 동일하기 떄문에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여지'도 많았다. 물론 때때로 전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 전쟁조차도 '친척들 간의 재산 다툼'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공화제적 가치관"에서 이 시도는 시민과 그 대표들을 역적으로 몰아서 외국 군대의 힘을 빌려서 죽이려 하는 사악한 적대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루이 16세가 명분을 부여해서 끌고 온 오스트리아 군대가 파리에 입성하면 무수한 사람들이 역적으로서 살육당할 것이 분명했다. 정치적 가치관과 권력 투쟁을 논하기 전에 프랑스 시민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가 되었다. 사형판결이 굉장히 신속하게 결정된 진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프랑스 백성들은 아직 전통적인 권위와 관습의 영향으로 루이 16세를 "우리들의 왕"으로 여기고 있었다. 루이 16세가 선대 국왕인 루이 15세만큼 개막장도 아니었고, 미국독립전쟁에 참전해 앙숙인 대영제국에도 한 방 먹인 터였으며, 가난한 인민들에게 그렇게 가혹하지 않았으며, 아내가 영국 다음으로 앙숙인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이지만 '''어쨋든 그리 폭군도 아니고 성격은 착한 왕이니까''' 자코뱅부터 말단 시민까지 그래도 '''살려두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그들의 신뢰를 배신하고 학살을 시도하려다가 걸린 셈이니 학살 목표로 지정되었던 시민들과 대표의 감정이 폭발할 수밖에 없고, 생쥐스트는 "국왕이 무죄라면 혁명이 유죄"라 주장했다. 말하자면 '어떤 논리(군주제, 왕권신수설의 논리)에 따르면 왕이 무죄일수도 있지만 그 논리에 따르면 혁명은 반역이다. 반면 혁명이 정당하다면 같은 논리에 따라 왕은 유죄다' 라는 논리이며, 생쥐스트는 왕이 오스트리아군의 힘을 빌리려 시도한 것 때문에 왕의 정당성과 혁명의 정당성이 양립할 수 없다는 이유로 루이 16세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우유부단한 성격인 루이 16세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의의를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는지는 사실 의문스럽지만, 당시 시민들은 "왕의 배신"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물론, 루이 16세에게는 파리 시민들보다는 차라리 처남[60]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더 친근하고 믿음직한 사람이었겠지만 말이다. 그런고로 억울한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안타까운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그도 막장스러운 시대의 피해자인 것이다. 애초에 프랑스 혁명의 계기가 된 재정파탄도 루이 14세의 무모한 원정과 전쟁 그리고 사치로 이미 국고가 파탄난지 오래고 조부인 루이 15세도 이를 해결하지 않고 더 악화시킨 상태로 루이 16세에게 물려준 것이며 귀족들의 힘도 상당히 강해서 이들에게도 세금을 징수하지 못하게 된 탓이 크다.
진짜 큰 문제는 루이 16세의 실제 행동 자체도 구시대의 문제 해결은커녕, 문제를 심화시키는 짓만 했다는 거다. 예를 들어 국가 수익은 별로인데 쓸데없이 전쟁에 끼어든 걸 그대로 따라했다.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걸 끼어들면서 그렇잖아도 적자였던 재정을 더 말아먹었고, 그 망한 재정을 개혁하려고 재무총감인 네케르나 튀르고와 같은 인물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지만 기득권의 저항에 번번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똑같이 선대에서 있는대로 말아먹은 숭정제가 비판받지 않는 이유는 실책이 있긴 했어도 망해가던 명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눈물나게 노력했고 실제 성과도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 16세는 과세 문제에서 몇가지 시도는 했었지만, 결과적으로 성과를 보인 것은 전혀 없었다.
이 부분에서 생각해야 할 점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건전한 재정, 즉 <수입의 규모에 맞추어 적절한 수준에서 지출을 조절하는 것>은 중세 후반~근세 유럽의 귀족, 특히 절대왕정기의 국왕에게는 미덕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런 규모있는 재정관리와 지출은 시민, 부르주아 계급의 덕목이었고 국왕이나 대귀족에게는 과시적인 소비를 통해 스스로의 권위를 입증하고 과시해 보일 것이 요구되었던 것. 특히 절대왕정기의 국왕에게는 더욱 그러했던 것이,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왕권신수설이나 절대왕정으로 유명한 근세 유럽의 왕권은 실제로는 그리 공고한 것이 아니었기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과시적인 소비나 대외군사활동 등을 통해 끊임없이 권위를 과시해 보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런 재정 규모로 감당하기 힘든 과시적인 소비를 계속할 경우 필연적으로 국가(및 왕실) 재정이 파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지만... 이 문제는 과시적 소비를 통해 강화된 왕권으로 해결하는 것이 당대의 일반적인 해결책이었다.
일단 돈이 필요하면 금융업자에게 돈을 빌리든, 징세청부업자에게 징세권을 팔아치워서 일단 땡겨오든 돈을 마련해서 일단 쓰고, 이렇게 진 빚이 위험한 수준까지 쌓이면 돈 갚으라는 금융업자에게 "안 갚을 건데 니가 어쩔? 왕 배 한번 째볼텨?" 하든지, 교회 재산을 탈탈 털고[61] "교황님한테 일러서 저 왕 파문시켜달라고 해보든지 ㅋㅋㅋ" 하든지 만만한 귀족을 족쳐서 재산을 몰수하는 등의 방법으로 땜빵하여 해결해왔던 것이다.
이 점에서, 종종 '겉보기에만 화려했을 뿐, 실상은 프랑스(왕실)의 내실을 좀먹고 있었다' 는 나쁜 평가까지 받는 루이 14와 루이 15세의 과시적인 사치 역시 정치적으로 의미없는 행위는 아니었다. 루이 14세나 15세가 돈 계산도 할 수 없는 바보라 국고를 탕진해가며 베르사유 궁전을 짓고 대외 전쟁에 골몰했던 것이 아니라, 호화로운 건축과 과시적인 대외원정을 반복함으로써 국왕의 권위를 과시하고, 그를 통해 왕권을 강화했던 것이다. 루이 14세의 경우 이 수법으로 귀족들의 세력까지 제대로 찍어눌렀고, 루이 15세의 경우는 14세보다 정국 통제력이 좀 약한 편이라 귀족들의 세력 확장을 막지는 못했지만 왕권 강화의 끈 자체는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루이 16세의 차례는 말하자면 선대 2대에 강화된 왕권으로 그 부산물인 재정난을 처리할 턴이었던 셈이다.
물론 이 짓거리를 무한정 반복할 수는 없다. 프랑스라는 국가자체의 역량이 그 루틴을 한 턴 더 유지할 수 있느냐의 문제에서도 그렇고, 변화하는 시대가 그 루틴을 한 번 더 허용할 것인가의 문제에서도 그렇다. 당시 프랑스의 체제가 어떤 한계에 봉착했던 것은 사실이고, 루이 16세에게 주어진 미션이 단순히 '선대 왕들이 하던 거 한 번 더 해라'보다는 훨씬 어려웠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요점은 루이 16세가 그것을 맨몸으로 해야하는 것도 아니었고 아무런 선례 없이 해야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 주어진 왕권과 체제는 한계도 명백하지만 충분히 강력하고 활용성 있는 도구였다.
결국 루이 16세의 경우 선대로부터 재정난+빚이라는 막대한 똥더미를 물려받은 처지였기는 하지만, 강화된 왕권이라는 형태로 그 똥을 치울 넉가래도 함께 물려받았던 셈이다. 문제는 루이 16세의 성격이 똥 치우는 일에 영 걸맞지 않았던 것에서 시작됐다. 세력이 강해진 대귀족들이 왕의 권위를 무시하기 시작했다곤 하지만, 2대 백 년간 양성된 왕권(특히 군사력)이 어디 간 것도 아니니 정말 작정하고 찍어누른 채 세금을 물리거나 재산을 몰수한다면 정말 군사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정도의 세력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려다 먼나라 이웃나라에도 나온 "하느님도 세금을 내시나?"는 성직자들의 조롱을 들었다고 하지만, 그 이전 시대에서 서유럽의 절대군주들은 돈이 모자라면 교회에 세금을 부여하는 수준을 넘어 교회 재산까지 잘만 몰수했다.[62] 따라서 루이 16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던 <국민국가 개념의 형성>은, 그가 조금만 더 결단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오히려 유용한 무기가 될 수도 있었다. 교회의 범국가적 영향력이 강력했던 중세 초중기였다면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거나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다가 교황과 사이가 틀어지고, 그래서 교황이 쏜 파문빔 한방 맞을 경우 설령 국왕이라도 상당한 정치적 위험에 처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국민국가 개념이 어느 정도 형성된 근세 절대왕정기의 프랑스 국왕이라면 설령 파문을 당하더라도 데미지 컨트롤이 훨씬 용이했다. 당장 또한 탈기독교(특히 탈가톨릭)적 경향이 강한 계몽주의 지식인들을 끌어들여 그 영향력을 이용했다면 교회나 대귀족과 척지게 되더라도 정국 장악력을 유지하기가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말하자면, 교회 과세에 대해 교황에게 압박당할 경우 "교황이 뭔데 프랑스 국내 문제에 참견해서 프랑스 왕을 협박하냐!" 하는 국내 여론을 이끌어내어 교황의 압박을 버티기 쉬웠을 것이다.). 당장 헨리 8세성공회 창설만 보더라도 권력을 장악한 국왕이 충분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자국의 교회를 교황청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고, 헨리 8세에게 영국 국교회 창설을 뒷받침해줄 종교개혁세력이 있었다면 루이 16세에게도 계몽주의 지식인들과 갈리아교회주의가 있었다. 물론 이 쪽으로 따지면 프랑스의 경우 영국이나 북유럽보다 가톨릭의 교세가 크고 영향력도 강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하지만, 가톨릭 교회 역시 종교개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것을 생각하면 핵심 가톨릭 국가 중 하나인 프랑스를 잃는 것까지는 도저히 감수할 수 없었고, 따라서 루이 16세가 교회 과세 정책을 강경하게 밀어붙였다면 끝까지 저항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대귀족과 교회의 반항을 제압하지 못하여(=세금을 물리지 못하여) 재정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시민+지식인 세력[63]이 주축이 된 혁명으로 인해 몰락했다. 연 세입의 60%가 이자 갚는데 들어갔다는 것 역시 당시 프랑스 국왕이 빛 못갚겠다고 디폴트를 선언해 버리면 변제를 강요할 무슨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루이 16세 특유의 선량하고 온화, 또는 우유부단한 성격상 저런 강경책을 쓰지 못했기에 확실한 돈줄을 내버려두고 과세 문제 정도나 만지작거릴 수 밖에 없었으며, 그나마도 재정상황을 확실히 개선할만큼 강력한 개선책은 대상 집단의 반발때문에 쓰지도 못하고 흐지부지 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루이 16세는 분명 선대로부터 크나큰 난관을 물려받은 처지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 난관을 극복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안타깝다기보다는 하려면 어떻게든 할 수는 있겠지만 본인의 성격이나 적성는 영 걸맞지 않은 입장을 요구받았고, 이 때문에 몰락했다는 점에선 안타까운 인물인 셈이다.
그래도 인간적인 면만 보면 동정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루이는 왕위 계승순위에서 멀었으나 맏형인 왕세자가 결핵으로 죽자 왕세자가 된 것이었고, 본인 스스로도 왕이 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64] 할아버지가 죽고 자신이 왕이 된 것을 알았을 때는 두려움과 중압감에 아내와 껴안고 울었다고 한다. 어떻게 본다면 이쪽도 '''군주제의 엄연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신이 군주제를 증오하던 시민들에게 처형되었지만 국왕의 지위는 시대상 그에게 너무나 과분하였다. 차라리 평범한 왕족이나 귀족으로 태어났다면 학식이 깊고 기술자에다가 검소하고 소박한 귀족으로서 존경받았을테니 말이다.
설득력이 낮긴 하지만 루이 16세가 첩을 뒀더라면 혁명까지는 가지 않았을 거라는 떡밥도 있다. 모든 힐난이 그 첩에게 집중되고 국왕, 왕비 자신들은 비교적 큰 비판은 듣지 않을테니.

8. 21의 저주?


루이 16세는 사실 저주 때문에 죽었다는 설이 있다. 도시전설이기는 하나 저주받은 다이아몬드, 21의 저주가 유명하며, 특히 21의 저주는 2015년 8월 9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링크 해외에서도 기막힌 우연으로 다루고 있는 모양인데 이를 다룬 서적도 있다. 저주받은 다이아몬드 이야기는 믿거나 말거나는 자유이긴 하지만 21의 저주는 정말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루이 16세의 불운과 일치한다.
루이 16세는 숫자 21에 대한 강박증이 있어 21시 전에 잠들거나 21일에는 외출을 삼갔으며 심지어 먹는 반찬의 숫자도 21개가 되지 않게 했다. 루이 16세가 이렇게 21의 강박증을 가지게 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루이 16세는 어린 시절 잔병치레를 많이 했고 2살 되던 해에는 결핵으로 죽을 뻔했다. 그러자 손자를 걱정한 루이 15세는 점성가를 불러 점을 쳤다. 점성가는 '''"루이 16세는 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숫자 21을 조심해야 한다'''"고 예언을 했다. 왕이 되려면 아버지와 형이 살아 있는데 어떻게 왕이 될 수 있나 생각했지만, 이후 루이 16세의 아버지와 형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루이 16세는 점술사 말대로 왕이 됐다.
점술사의 말이 사실로 드러나자 루이 16세는 숫자 "21"에 대한 극도의 공포심에 사로잡혔고 왕이 된 후에도 강박증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루이 16세에게는 계속해서 21의 저주가 따라붙었다. 루이 16세가 대관식을 하기로 결정된 때는 그의 나이 '''"21살"''' 때였다. 그러자 루이는 21세에 어쩔 수 없이 대관식을 했으나 매우 불길한 징조를 직감한 루이 16세는 왕위 대관식이 열리고 왕립학교에서 열린 축하식에 어쩔 수 없이 참석했는데, 그날 따라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거센 빗줄기가 몰아치자, 학생대표가 축사를 낭독하는 도중에 그냥 왕궁으로 되돌아와버리고 만다.[65] 불길한 숫자 21을 크게 의식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루이 16세는 학생대표가 낭독하는 축사를 외면한 채, 축하식이 끝나기도 전에 왕궁으로 돌아와버린 거다.
왕위 대관식은 그 나라에서 가장 중대한 행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축사낭독 도중에 새로 부임한 왕이 그냥 왕궁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축하식에 참석했던 수많은 대신들과 귀족들, 그리고 축사를 낭독했던 학생대표에게 심한 모욕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옹졸하고 졸렬한 왕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느끼게 했다.
또 특이하게도 왕족들이 루이 16세에게 자신들이 큰 빚을 졌는데 빚갚을 능력이 없으니 프랑스 정부가 그 돈을 대신 갚아줄 수 있느냐고 요구해왔다. 근데 그 왕족의 숫자가 '''"21명"'''이였다. 이에 또다시 공포심에 사로잡힌 루이 16세는 21명 왕족들의 빚을 갚기 위해 세금을 올렸고 이로 인해 국민들이 점점 불만이 쌓여졌고 결국 프랑스 혁명을 일으켰다.
왕궁이 전부 무력화되고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자 루이 16세는 가족들을 데리고 몰래 베르사유 궁전을 빠져나가 프랑스국경 부근 바렌느 숲속으로 도망가다가 결국 혁명군에 체포되고 만다. 그런데 루이 16세가 혁명군에게 체포된 날이 하필이면 1791년 6월 '''"21일"'''이였다. 또한 혁명세력인 국민공회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하는데 그 날이 바로 1792년 9월 '''"21일"'''이였다.
결국 1792년 9월 '''"21일"''' 루이 16세는 국민들에게 공개 재판을 받게 되며 1793년 1월 '''"21일"''' 사형을 당한다.
루이 16세의 사형을 주장한 사람은 바로 17년 전 비를 맞아가며 루이 16세에게 환영사를 낭독한 그 학생대표였다. 당시 로베스피에르는 루이 16세가 숫자 21에 대한 불안함에 환영사를 듣지 않고 자리를 떠나자 모욕감을 느꼈고 결국 그의 사형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또 루이 16세를 사형 당하게 한 단두대가 만들어진 날도 1790년 1월 '''"21일"'''이었다. 그 당시 왕이었던 루이 16세가 단두대 사용을 허가해 주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루이 16세는 자신이 허가했던 단두대에서 자신이 참수형당하는 신세가 된다.

9.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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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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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팽(왕세자) 루이 조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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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팽(왕세자) 루이 샤를, 일명 루이 17세


10. 대중매체에서


  • 베르사유의 장미에 등장했다. 온후하고 소박하면서도 선량한 인품의 소유자로 나온다. 하지만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보다 강력한 개혁적인 변화가 요구되는 당대 사회의 상태와 어려운 민중들의 처우 개선 등에 대해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한, 당대 지배계층이 지니는 명확한 한계 역시 뚜렷이 드러내는 인물로 묘사된다. 이런 점에서 실제 역사에서의 루이 16세처럼 개인적으론 착해도 난세의 지도자감엔 알맞지 않은 사람이라는게 여실히 드러난다(...)
아내인 마리와의 사이는 그냥저냥 원만하지만 여기서 마리가 사랑한 것은 페르젠이기 때문에 비중은 적은 편. 마리와의 첫대면에서도 수줍음에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 해서 결혼과 남편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던 마리는 내심 실망했다. 마리를 사랑했으나 아름답고 매력적인 아내에 비해 자신은 볼품없다고 여겨 표현하지 못 했고 마리와 페르젠의 사이를 알고는 있었으나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못했다.[67] 원작에서는 처형 전 자신들을 구하러온 페르젠에게 최후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며 사양하고 그가 마지막까지 보여준 우정에 감사를 표한다. 이후 가족들과 작별하고 처형당하는 마지막 모습이 그려지며 마리는 불타는 사랑은 아니었으나 루이와의 사이에 분명히 부부의 애정은 존재했다며 그를 위해 기도를 올린다.
원판 성우는 야스하라 요시토. 가장 먼저 나온 비디오판은 박상일, KBS판은 홍승섭, EBS판은 홍범기.
  • 1989년 작 영화 <프랑스 대혁명>
프랑스 배우 장 프랑수아 발머가 루이 16세 역을 맡아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실제 역사처럼 혁명의 광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휘둘리다 처형당하고 마는 루이 16세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루이 16세의 처형 장면. 보면 알겠지만 여기서 루이 16세의 처형 집행인을 맡은 배우가 크리스토퍼 리이다.
현실의 루이 16세가 모티브… 아니, 그냥 루이 16세 본인이다. (일단 브리타니라는 가상의 국가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브리타니가 사실상 프랑스다) 이 쪽은 자신이 무능하다는 걸 자각하고 있지만 절망했다! 바꿀 수 없는 현 실정에 절망했다! 를 외치고는 방구석에서 당시 총사대장이었던 아르카르나제(얀 지스카드)와 함께 주석으로 만든 병정 인형을 이용한 미니어쳐 게임이나 하고 있는 히키코모리였다.
이후 혁명이 터지고, 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까지 몰리지만 아르카르나제가 스스로 핏값을 지불. 데스틴 몽트뢸에 의해 나폴레옹으로 탈바꿈한다. 이후 포병 운용 + 아르카르나제에게 전수받은 보병사격전술[68](일명 '대천사의 무지개')에 의해 승승장구. 이후 사브리나를 손에 넣으려 하나 실패한다. 이후 행적은 실제의 역사와 거의 같다. 나폴레옹 참고.
스테레오 타입의 루이 16세의 모습을 보여준다. 처형 당일에 푹 자고 일어났고, 죽음을 앞두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단두대에 목을 거치하자 긴장된 모습을 보여준다. 목이 잘리면 담겨지는 바구니를 보고 "저 더러운 바구니에 목이 떨어지는구나"라고 생각한 순간에 목이 떨어진다.
어린시절 때와 청년기 때로 등장. 망나니 가문의 당주인 샤를 상송과 친구관계이면서 동성애 연인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관계로 묘사가 된다.
애덤스가 특사 자격으로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을 때 잠깐 등장했다. 애덤스에게 말을 건넸는데 프랑스어를 모르는 애덤스가 못 알아듣고 멀뚱히 있자 영어로 "Don't speak french(프랑스어를 모르나)?"라고 물어본다. 영어에 능통했다는 설정을 반영한 듯. 가만 보면 살짝 촐싹대는 이미지로 등장한다. 이후 프랑스 혁명정부에서 파견한 대사가 조지 워싱턴을 만나러 미국에 왔을 때 단두대에서 루이 16세의 인형을 목 자르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어 처형당했음을 암시한다.
플레이어의 점수 기준으로 네번째로 못한 점수일때 루이 16세의 수준이라고 해준다 참고로 그 위가 G.하딩인걸 보면 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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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2] 왕세손이었던 큰 형 부르고뉴 공작 루이(1751 ~ 1761)와 작은 형은 유년기에 사망함.[3] 고자라거나, 자연포경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 역대 부르봉 왕조의 왕들 가운데 아이를 갖지 못하면 이런 소문이 자주 돌았는데, 대표적으로 루이 14세의 아버지 루이 13세가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자 이와 같은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은 그의 왕비 안 도트리슈가 루이 14세를 낳고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안 도트리슈가 리슐리외 추기경과 외도해 루이 14세를 낳았다는 괴소문이 돌기도 했다.[4] 성교육이 안 돼서 성관계를 할 줄 몰랐다는 말이 인터넷에 간혹 돌기도 하는데 후사 생산이 의무였던 당시 왕족들은 성교육을 필수적으로 받았다. 특히나 손이 귀한 프랑스 왕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는 매일 밤 동침에 실패한 이유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모후에게 보고하기도 했다.[5] 물론 평탄한 인생을 살지는 못했지만[6] 출산은 네 차례 이뤄졌으나 임신은 다섯 번 했다. 첫딸을 낳고 한 두번째 임신은 마차 문을 닫는 과정에서 문에 배를 부딪히는 바람에 유산됐다고 한다.[7] 실제로 여전히 기계식 시계 형식을 따르는 고가의 무브먼트 손목시계들은 무진장 비싸고 엄청난 기술력이 들어간다.[8] 단두대를 개발하자고 법안을 제출한 기요탱 의학박사가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는 낭설이 있었고(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편에도 이 설이 잘못 인용되어 있을 정도로 나름 유명한 낭설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제안한 단두대에 자신이 죽었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 기요탱 박사는 천수를 누리고 자연사했다. (애초에 기요탱 박사는 사형제 폐지론자로, 그래도 사형제가 유지되어야 한다면 당시 기준으로 그나마 죄수들이 덜 고통받고 죽게 하자고 단두대를 고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단두대의 발명자는 단두대에서 사형당했다'는 말의 주인공은 사실 루이 16세일 수도 있는 것.'''[9] 참고로 아무리 사형수라도 좀 곱게 죽여주자 혹은 명예롭게 죽게 해주자는 생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있었다. 현대에도 사형 집행을 하는 국가 중 인권이 아무리 시궁창인 국가라 해도 적어도 사형수만큼은 일반적으론 수면제나 마취제 투여 등 최대한 덜 고통스럽게 죽을 권리는 준다.[10] 속빈강정이라도 카리스마만 있다면 큰 실패를 저지르기 전까진 존경받는 지도자로 남을 수 있겠지만, 이 경우는 아예 자신의 특기와 강점을 본인이 감추고 다니니 답이 없다.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와도 비슷한 구석이 많다.[11] 조부인 루이 15세가 저명한 의사들을 불러 진찰한 결과 성적 능력에는 문제가 없다고 진단했고, 훗날 방문한 처남 요제프 2세도 어머니에게 '고자는 아닌듯 함'이라는 보고를 한 적도 있었다.[12] 이라지만 자신의 작위 중 하나를 가명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알았다.[13] 다른 나라 다른 시대의 사례지만 옆나라 스페인카를로스 2세가 딱 이랬다. 최전성기는 끝났어도 여전히 강대국이었던 스페인 제국을 순식간에 열강들의 장기말 신세로 전락시킨 차원이 다른 규모의 암군이었지만 누구나 딱봐도 금치산자급 장애인이란게 보였기 때문에 동시대나 후대에나 딱히 왕을 탓하진 않았다(...).[14] 왜냐면 재정적자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왕실의 사치에 있었기 때문이다.[15] 튀르고는 중상주의자인 콜베르보다 더 진보된 경제관을 갖춘 인물로서 최소한 재정 부문에서는 콜베르보다 더 나은 성과를 거둘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중상주의 이후 근대적인 경제학자들은 한결같이 중상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며 더 나은 대안을 모색했기 때문이다. 튀르고를 포기한 것은 루이 16세가 스스로 목을 친 격이다.[16] 하지만 그때 당시 성직자(당시엔 이들도 귀족이다.)들은 '''"하느님도 세금을 내시나?"'''라는 말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 댓가는… 프랑스 혁명 항목 참고. 프랑스 혁명 당시 귀족들이 얼마나 잔혹하게 갈려나갔는지를 보면 성직자들(을 비롯한 귀족들)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 수 있다.[17] 법복 귀족이라고 부른다. 구 봉건 귀족은 대검 귀족.[18] 물론, 프랑스 왕들이 몽땅 이랬다고 보면 곤란하다. 어떤 일에나 예외라는 게 있기 마련이고, 저질 금화를 발행한 선왕들과는 달리 양질의 금화를 발행하여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 한 샤를 5세 같은 경우도 있다.[19] 위에서 나온 귀족의 면세특권 해제의 건이 그렇다.[20] 프랑스는 루이 14세 때 상비군이 40만으로 증가하여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했다.[21] 게다가 루이 15세는 못말리는 호색한이라서 귀족들에게도 평판이 나빴다.[22] 사실 이건 부르주아 집안 자제분들이 돈으로 계급을 산 경우가 많아서지만.[23] 이 때문에 귀족들이 불편해져서 1781년 부터는 '''4대 이상 귀족'''인 집안의 아들이거나 생 루이 훈장(루이 14세가 만든 무공 훈장) 수여자의 아들만 장교로 임용될 수 있게 법이 만들어진다.[24] 실제로 프랑스 군대는 부르주아들 편을 들었고 혁명 이후 귀족들 편을 들지 않았다.[25] 루이 16세가 언급한 것이 Revolt인데 이건 한국어로 제대로 된 의미 전달을 하자면 대충 상위 권력에 대한 저항 혹은 반란 등으로 해석된다. Riot은 닥치고 때려부수는 걸 의미하는 것이고 Revolt는 아래에서 뭔가 요구를 하면서 저항하는 것에 가깝다. 가장 그럴 듯한 번역은 폭동인가?란 물음에 혁명입니다 라고 해석하는 것이다.[26] 사실 이때만 하더라도 혁명군 역시 왕에 대한 불만보단 프랑스 귀족 세력에 대한 불만이 더 팽배한 상황이었다. 즉, 혁명군을 뒤에서 선동한 주동자들인 부르주아(평민 자본가, 지식인 계층) 계급이 귀족 계급을 프랑스 권력층에서 몰아내려는 성격이 강했던 것.[27] 3권분립 원칙으로 국왕은 행정부의 수장으로 격하되었고 뭘 하든지 간에 의회의 승인이 있어야 할 수 있었다.[28] 이곳 군사령관인 프랑수아 클로드 드 부이예 장군이 왕당파였기 때문에 여기서 군대를 모아 왕권을 되찾을 속셈이었다.[29] 참고로 카페(Capet)는 부르봉 왕조의 본가인 카페 왕조의 시조인 위그 카페의 남자 후손의 본래의 성이다. 여태까지는 자신의 영지의 지역명을 성으로 쓰고 있었기 때문에 본래의 성을 부를 일이 없었다.[30] 루이 16세가 150년 만에 삼부회를 소집한 덕에 프랑스 일부에선 루이 16세를 자유를 회복해주신 임금님이라고 칭송하는 세력도 있었다. 왕에 대한 비난은 익히 알다시피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을 현혹하는 외국년이라며 거의 모두 뒤집어썼고, 그마저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실상은 괜찮은 일도 제법 한 왕비였기에 상당 부분은 억울한 점도 있었다.[31] 당시 프랑스 형법상 사형 집행유예가 선고된 이후 10년이 지나면 무기징역으로 감하고, 만 60세가 되는 해 부활절가석방하도록 했다.[32] 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 편에선 반대 334표, 찬성 387표라고 나온다. 사형 집행유예를 사형에 포함한 듯하다. 반대에는 기권을 포함하고. 그래도 3표가 에러지만.[33]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조르주 당통조차 처음에는 사형에는 찬성하지만 집행유예를 하자고 제안했는데 생 쥐스트가 "군림하는 것 자체가 유죄다. 루이 16세를 처형하지 않으면 혁명이 유죄가 될 것"이라고 연설한 게 분위기를 즉시 처형으로 바꿔버렸다.(...)[34] 사실 루이 16세가 처형당한 이면엔, 자꾸 왕권을 회복하려고 하는 왕당파의 씨를 말리려는 반대파들의 속셈도 있었다.[35] 개정판마다 세부적인 내용 차이는 좀 있어보인다.[36] 물론 오늘날엔 좌파 내에도 강경, 온건파가 있고 우파 내에도 강경, 온건파들이 있기 때문에 강경, 온건 이런 식으로 좌우를 나누는건 어불성설이긴 하다. 애초에 이 좌우파란 것 자체가 영국 의회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고.[37] 쉽게 말해서 신분제가 다시 탄생하고 자기들은 노예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현대인들이라면 이걸 두고 보겠는가? 그나마 입헌군주제 정도라도 받아들였으면 모를까 루이 16세는 그것도 거부하고 혁명파 입장에선 오스트리아와 내통한(왕당파 입장에선 혁명 반란군을 쓸어내려 원조를 요청한) 상황이었다.[38] 일설에 위하면 생 쥐스트를 루이 18세가 매수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건 가능성이 낮은 것이 진짜 매수당했으면 무조건 죽이라고 하면서 최소한의 정당성도 없는 폭군으로 몰아붙이지, 혁명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어떻게 보면 루이 16세에 대한 옹호가 될 수 있는 발언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39] 혁명파 입장에선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자국민인 혁명세력을 진압하려고 했으니 어찌보면 맞는 말일 수도 있다. 단지 루이 16세의 평소 행실이나 성품을 볼 때 자신의 행동이 자국민에 대한 학살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행한 일은 아닐 것이라 애써 짐작하는 것뿐이다.[40] 이미 탈출하다가 현행범으로 잡힌 터라 무죄 가능성은 희박했다.[41] 혁명 과격파와 합세하여 루이 16세 이후의 왕위를 노린 일부 군주정 지지자들의 반란표도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입헌군주제를 지지한 왕의 먼 동생도 사형에 찬성하는 표를 던졌고 순간 공회장 안에서는 신음소리가 울렸다고 한다.[42] 웃긴건 이런 잔인한 숙청에 대한 내부 반발과 혁명군을 못마땅하게 여긴 외부 왕정 세력과의 전쟁이 빌미가 되어 프랑스에 나폴레옹이란 새로운 황제 혹은 독재자를 불러온다.[43]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오스트리아 황제의 친동생이었다.[44] 혹은 "프랑스 인들이여, 짐은 무고하게 죽는다."[45] 사실 당시 사형을 깔끔하게 끝내주는 단두대는 사형자뿐만 아니라 사형 집행인의 고통을 덜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사형 집행인들은 현대에도 육체적 스트레스 뿐만 아니라 정신적 스트레스도 상당한 3D 직종으로 분류된다.[46] 그리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대 진영 인사들을 처형하면서 자리를 지킨 사형 집행인도 적지 않았다. 당연한 게 말 그대로 사형 집행인들은 선고 나오면 그냥 하라는 대로 처형 집행만 할 뿐이고, 가뜩이나 안 하려고 기피하는 사형 집행인인데 마음에 안 든다고 함부로 죽여봐야 좋을 게 없다.[47] 그땐 혁명정부에 충성을 선언한 이른바 '''선서사제'''들만이 합법적 활동이 가능했는데 이들은 혁명정부에 의해 처형된 루이 16세의 추모미사를 집행할 리가 없었다. 때문에 혁명정부에 대한 충성선언을 거부하고 은둔생활 중인 신부들, 이른바 '''비선서사제'''들을 직접 찾아갔다.[48] 프랑스 혁명에 매우 강하게 반발했던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본인도 남편인 표트르 3세를 폐위하고 차르가 된 케이스다.[49] 루이 16세만 해도 처형 여부를 정하는 투표에 “감히 평민 따위가 어디 왕의 목숨을 이런 투표 따위에 올려 논할 수 있나”라며 기권표를 던지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50] 찰스 2세는 사실 위에 형이 있던 차남이었으나, 형이 어린 나이에 사망하여 사실상 장남의 위치에 있었다.[51] 당장 프랑스만 해도 이때 미국에 어마어마한 지원을 해줬다. 때문에 재정이 악화되어 왕정이 무너졌다는게 웃픈 포인트지만. (사실 사상적으로도 프랑스 혁명이 미국 독립에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나폴레옹 대엔 이 재정을 메꾸기 위한 일환으로 루이지애나 땅도 미국에 헐값에 넘기게 된다. [52] 다만, 명나라 입장에서도 조선이 무너져서 일본이 중국 내륙까지 찌르고 들어오는 것은 막아야 했기에, 조선 지원 자체의 명분은 충분히 있었다. 다만, 만력제가 국정을 정말 '''안 해서'''(못 해서가 아니라) 조선에 원조를 해주고도 흘러넘치는 재정을 '''안 써서''' 망했다. 진짜 충신들이 모여 병력을 모아 청나라와 싸우든, 재정 확장을 하든, 매번 만력제는 이유도 없이 못하게 막고 그렇다고 본인이 뭘 하기는 게을러서 맨날 놀고 먹는 게 일상이었다. 주원장 때부터 명나라 황실의 권력은 간신들의 폭주를 막기 위해 황제에 권력이 집중되어서 황제의 인가 없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사실 지금 와서는 개인의 실책보다 시대 흐름에 휩쓸린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은 루이 16세와 달리 만력제는 자국인 중국에서는 옹호의 여지 없이 나라에 망조를 씌운 나쁜 군주 취급을 받는다.[53] 생 므느울이라고 읽기도 한다.[54] 정작 비슷한 시기의 사람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다른 여러 외국어에 능했음에도 오직 영어만 몰라서, 세인트헬레나 섬에서의 귀양 생활 중에 틀린 영어 문법으로 정신승리하기도 했다. [55] 자유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속화'''.[56] 조선의 태종도 동생 둘을 죽이고 형을 귀양보냈지만 아들 세종과 함께 조선 초기의 명군으로 남았다.[57] 대표적으로 라 세느의 별, 베르사이유의 장미진정남 나폴레옹 등. [58] 일반화하기는 약간 성급할지 모르지만, 보통 루이 16세랑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동정적인 작품들은 대체로 대중운동을 우발적 혹은 우연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59] 처음에는 오스트리아 출신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주도한 게 아닌가 했지만, 확인 결과 루이 16세가 직접 저지른 게 맞았다. 왕비는 간첩죄가 무죄가 되었기에 다른 죄를 적용해야 했는데, 사형에 해당하는 게 거의 없어서 결국 근친상간죄를 거짓으로 날조해 사형시켰다.[60]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 레오폴트 2세[61] 헌금이나 기부금등으로 재산이 계속 유입되는 데 비해 성직자들이 결혼하여 자손을 만들지는 못하므로 상속 등으로 유출되지는 않는 특성상 가톨릭 교회에는 필연적으로 재산이 축적된다.[62] 성전 기사단이 악마 숭배집단으로 몰려 해산된 것도 기사단의 돈을 당시 국왕인 필리프 4세가 노렸기 때문이다.[63] 유럽의 많은 절대왕정기 군주들은 시민+지식인 세력을 '''양성하여''' 대귀족과 교회의 세력을 억제했다.[64] 따지고 보면 루이 15세 역시 왕이 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즉위했고, 리더쉽 부족이 심각한 문제점으로 지적받았다는 점에서 16세와 비슷한 케이스이기는 하다. 이 점에서 보면 상기된 내용에서는 <루이 16세의 치세는 이전 2대동안 강화된 왕권으로 그 부산물인 재정문제를 처리할 턴> 이었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실상은 루이 15세 시기가 재정문제를 처리할 최적의 턴이었다고 볼 여지도 크다. 루이 14세 시기에 강화된 왕권으로 15세 시기에 재정문제를 처리해 버렸으면 16세의 치세는 훨씬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 15세 역시 재정문제를 처리하기에는 영 걸맞지 않은 성격이었고, 이 때문에 자기 턴에 부여받은 필수 미션을 처리하지 않고 내버려둔 상태에서 턴 종료를 눌러버린 것이다. 결국 이 필수 달성과제는 루이 16세의 턴으로 그대로 넘어왔고, 따라서 루이 16세는 15세 당시보다 훨씬 어려운 조건(14세 시대에 이미 파탄에 이른 재정이 15세 시대에 더 망가졌으며, 14세 시대에 확 찍어눌러두었던 귀족들의 세력은 15세 시기에 어느 정도 다시 확대되었다.)에서 이 필수미션을 수행하지 못하여 게임 오버에 이르렀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65] 이때 학생대표가 나중에 프랑스 혁명에 불을 지피고 루이 16세를 처형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로베스피에르였다. 결과적으로 예언은 틀리지 않은 셈.[66] 왕으로 즉위하지 못하고 죽은 루이 16세의 형 루이 조제프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리고 그 역시도 혁명 직전에 세상을 떠났다.[67] 그래도 그에 대해 대놓고 뭐라 하지 않는 대인배. 게다가 은인에 대한 고마움도 확실히 표현하는 사려깊은 성품을 지녔는데, 작중 페르젠 백작이 국왕 일가의 탈출을 도왔을 적에도 페르젠의 안위를 걱정해 중도에 헤어질 것을 권하기까지 할 정도다.[68] 보병을 2열로 배치시킨 후, 전의 1열이 사격하고 재장전하는 시간적 공백 사이에 후의 1열이 사격. 이것을 반복하면 그 당시에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연사가 가능해진다. 사실 활이나 석궁 등에서 활용되었던 전술이며, 정확한 제식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