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패러다임
research paradigm
어떤 연구를 하는 데에 있어, 연구방법을 정할 때 그 주제에 해당하는 선행연구의 것을 빌려오는 경향. 학계에 구어적으로 돌기는 할지언정, 크게 확립된 표현은 아니다. 특히 실험을 금과옥조로 여기면서도 이론적 조망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사회심리학에서는 문헌상 확인이 가능한 용어다.[1]
모든 논문들은 연구방법(method) 단락에 자신의 연구를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해야 한다. 이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연구자들은 기존의 연구가 갖고 있는 한계점을 탐색하고, 자신이 확인하고자 하는 가설에 가장 잘 어울리고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연구설계를 직접 구상하게 된다. 그래서 각 논문들의 관심과 주제가 다양한 만큼, 각 연구방법 역시 다채로워지게 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주요 키워드 별로 해당 개념을 측정하는 척도나 실험의 디자인 자체가 서로 동일해지더라는 것이다. 특히 그 주제를 처음 발견/주창한 사람이 제안한 초기 연구설계는 금과옥조처럼 여겨진다. 후속연구를 희망하는 학자들은 앞서 연구에서 활용한 설계를 '''고스란히 빌려다가''' 자신의 연구를 진행한다. 이것이 연구 패러다임이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회사 내 직원들의 협동(cooperation)에 대해서 연구한다고 가정하자. 여러분은 물론 협동적 행동을 측정하고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을 직접 만들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내 협동의 메커니즘에 대해 처음으로 규명한 주요 논문의 그것을 고스란히 가져온다면 어떨까? 내가 직접 만든다면 동료평가 때 "그 부분은 왜 그렇게 설계했죠? 근거가 있습니까?" 라는 곤혹스러운 주장에 답하기 힘들어질 수도 있지만, 잘 검증되고 인정받은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온다면 "저 아무개 교수님이 일찍이 직접 디자인한 선례를 따랐습니다." 라고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타당도도 꽤 잘 보장될 것 같고, 재현성도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셈이 될 것이다.
물론 어떤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단 하나의 패러다임만이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다. 간혹 어떤 연구주제들은 꽤 많은 연구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심리학의 인지부조화의 경우,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패러다임의 수만 합쳐도 무려 네 가지다. 사람들이 20달러 받을 때보다 달랑 1달러만 받았을 때 더욱 동기화가 된다는 연구와, 컬트 집단에서 예언한 지구멸망일이 되어도 멸망을 하지 않자 도리어 응집력이 더 강해졌다는 연구는, 얼핏 보면 같은 주제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치고는 너무나도 상반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그 설계와 방법은 다를지언정, 둘 다 똑같이 인지부조화라는 하나의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연구 패러다임의 존재는 후학들의 노고를 크게 줄여주고 일련의 연구의 연속성을 보장한다. 또한 단일 연구가 반증된다는 칼 포퍼의 생각보다는 "일련의 연구들" 이 반증된다는 임레 라카토슈의 생각을 연상시키는 면도 있다. 특히 자신의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그 분야 학자들이 그 주제를 어떻게 연구했는지 연구 패러다임을 단 하나도 알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논문을 쓰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석사 시절에 학위논문을 쓰면서 절절히 깨닫게 되는 것 중 하나.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아무렇게나 무신경하게 남의 설계를 가져오는 것은 문젯거리가 될 수 있다. "아무개 교수님 연구랑 당신 연구랑은 상황이 다른데요?" 라고 반박을 받을 여지가 있는 것이다. 즉 이에 대해서도 어쨌거나 해당 연구방법을 계승하기 위한 최소한의 근거는 있어야 한다. 또한 "그렇다면 그분은 왜 그렇게 설계하셨대요?" 라고 질문했을 때 자기가 쓴 논문에 대해 답하는 것처럼 능수능란하게 답할 수 있는 배경지식도 필요하다. 연구 패러다임의 또 다른 문제점으로는, (당연하지만) 하나의 주제에 대해 다각도로 접근하려는 동기가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창의적인 접근이 억압될 가능성도 거론되곤 한다.[2]
일부 연구들은 서로 다른 두 주제를 통합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 서로 다른 두 연구 패러다임을 가져와서 함께 뒤섞기도 한다. 많은 연구들은 사실 "고스란히" 베껴온다기보다는 "일부 손질하고 다듬으면서" 차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질문지법을 사용하는 사회과학 연구가 있을 때, 앞서 연구가 포괄적인데 자신의 연구는 좀 더 특정적이라면 앞 연구의 질문지 문항 중 일부만을 가져올 수도 있다. 또한 주제가 달라졌다면 문항의 표현을 부정형으로 바꾸고 역채점을 하는 방법도 있다. 오래 된 연구라면 현대사회의 연구윤리와 정치적 올바름에 맞도록 갱신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비판적인 문헌에서는[3] 이 연구 패러다임이라는 것이 토머스 쿤의 개념화만큼 확고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연구의 파벌(faction)이 느슨한 형태로 모여 있는 것에 가까우며, 특정 진술이나 지식을 공유하는 '패러다임' 이 아니라 특정 규율(discipline)이 옳을 것이라는 생각 이상으로는 접점이 없는 연합체에 불과하다고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계의 중론은 이것이 그 시절에는 과학자사회에서 불명확하게나마 관찰되는 동향을 설명하기 위해 용어만 먼저 나왔지만, 오늘날에는 실제로 학계 연구자들에게 상당한 규범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실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연구를 하는 데에 있어, 연구방법을 정할 때 그 주제에 해당하는 선행연구의 것을 빌려오는 경향. 학계에 구어적으로 돌기는 할지언정, 크게 확립된 표현은 아니다. 특히 실험을 금과옥조로 여기면서도 이론적 조망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사회심리학에서는 문헌상 확인이 가능한 용어다.[1]
모든 논문들은 연구방법(method) 단락에 자신의 연구를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해야 한다. 이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연구자들은 기존의 연구가 갖고 있는 한계점을 탐색하고, 자신이 확인하고자 하는 가설에 가장 잘 어울리고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연구설계를 직접 구상하게 된다. 그래서 각 논문들의 관심과 주제가 다양한 만큼, 각 연구방법 역시 다채로워지게 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주요 키워드 별로 해당 개념을 측정하는 척도나 실험의 디자인 자체가 서로 동일해지더라는 것이다. 특히 그 주제를 처음 발견/주창한 사람이 제안한 초기 연구설계는 금과옥조처럼 여겨진다. 후속연구를 희망하는 학자들은 앞서 연구에서 활용한 설계를 '''고스란히 빌려다가''' 자신의 연구를 진행한다. 이것이 연구 패러다임이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회사 내 직원들의 협동(cooperation)에 대해서 연구한다고 가정하자. 여러분은 물론 협동적 행동을 측정하고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을 직접 만들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내 협동의 메커니즘에 대해 처음으로 규명한 주요 논문의 그것을 고스란히 가져온다면 어떨까? 내가 직접 만든다면 동료평가 때 "그 부분은 왜 그렇게 설계했죠? 근거가 있습니까?" 라는 곤혹스러운 주장에 답하기 힘들어질 수도 있지만, 잘 검증되고 인정받은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온다면 "저 아무개 교수님이 일찍이 직접 디자인한 선례를 따랐습니다." 라고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타당도도 꽤 잘 보장될 것 같고, 재현성도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셈이 될 것이다.
물론 어떤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단 하나의 패러다임만이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다. 간혹 어떤 연구주제들은 꽤 많은 연구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심리학의 인지부조화의 경우,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패러다임의 수만 합쳐도 무려 네 가지다. 사람들이 20달러 받을 때보다 달랑 1달러만 받았을 때 더욱 동기화가 된다는 연구와, 컬트 집단에서 예언한 지구멸망일이 되어도 멸망을 하지 않자 도리어 응집력이 더 강해졌다는 연구는, 얼핏 보면 같은 주제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치고는 너무나도 상반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그 설계와 방법은 다를지언정, 둘 다 똑같이 인지부조화라는 하나의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연구 패러다임의 존재는 후학들의 노고를 크게 줄여주고 일련의 연구의 연속성을 보장한다. 또한 단일 연구가 반증된다는 칼 포퍼의 생각보다는 "일련의 연구들" 이 반증된다는 임레 라카토슈의 생각을 연상시키는 면도 있다. 특히 자신의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그 분야 학자들이 그 주제를 어떻게 연구했는지 연구 패러다임을 단 하나도 알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논문을 쓰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석사 시절에 학위논문을 쓰면서 절절히 깨닫게 되는 것 중 하나.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아무렇게나 무신경하게 남의 설계를 가져오는 것은 문젯거리가 될 수 있다. "아무개 교수님 연구랑 당신 연구랑은 상황이 다른데요?" 라고 반박을 받을 여지가 있는 것이다. 즉 이에 대해서도 어쨌거나 해당 연구방법을 계승하기 위한 최소한의 근거는 있어야 한다. 또한 "그렇다면 그분은 왜 그렇게 설계하셨대요?" 라고 질문했을 때 자기가 쓴 논문에 대해 답하는 것처럼 능수능란하게 답할 수 있는 배경지식도 필요하다. 연구 패러다임의 또 다른 문제점으로는, (당연하지만) 하나의 주제에 대해 다각도로 접근하려는 동기가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창의적인 접근이 억압될 가능성도 거론되곤 한다.[2]
일부 연구들은 서로 다른 두 주제를 통합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 서로 다른 두 연구 패러다임을 가져와서 함께 뒤섞기도 한다. 많은 연구들은 사실 "고스란히" 베껴온다기보다는 "일부 손질하고 다듬으면서" 차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질문지법을 사용하는 사회과학 연구가 있을 때, 앞서 연구가 포괄적인데 자신의 연구는 좀 더 특정적이라면 앞 연구의 질문지 문항 중 일부만을 가져올 수도 있다. 또한 주제가 달라졌다면 문항의 표현을 부정형으로 바꾸고 역채점을 하는 방법도 있다. 오래 된 연구라면 현대사회의 연구윤리와 정치적 올바름에 맞도록 갱신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비판적인 문헌에서는[3] 이 연구 패러다임이라는 것이 토머스 쿤의 개념화만큼 확고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연구의 파벌(faction)이 느슨한 형태로 모여 있는 것에 가까우며, 특정 진술이나 지식을 공유하는 '패러다임' 이 아니라 특정 규율(discipline)이 옳을 것이라는 생각 이상으로는 접점이 없는 연합체에 불과하다고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계의 중론은 이것이 그 시절에는 과학자사회에서 불명확하게나마 관찰되는 동향을 설명하기 위해 용어만 먼저 나왔지만, 오늘날에는 실제로 학계 연구자들에게 상당한 규범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실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1. 관련 문서
[1] Steiner, I. D. (1986). Paradigms and groups. In L. Berkowitz (Ed.), Advances of experimental social psychology Vol.19 (pp.251-289). Academic Press.[2] 애초에 이런 식으로 가자면 한 주제당 하나의 연구 패러다임 외에 더 이상은 나올 수가 없다.(…)[3] Elms, A. C. (1975). The crisis of confidence in social psychology. American psychologist, 30, 967-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