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적 조망
'''theoretical perspective''' / theoretical framework물리학적 이론들은 '''데이터들이 그안에서 이해 될 수 있는 틀'''을 제시한다. 물리학 이론들은 하나의 '개념적 게슈탈트(Conceptual Gestalt)'를 형성한다. 하나의 이론은 관찰된 현상들로 짜 맞춰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상들을 특정한 종류의 것으로 그리고 다른 현상들과 연관된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이론은 현상들을 체계적으로 만든다. 이론은 '역으로(in reverse)' 형성된다.
...철학자들은 때때로 물리학을 일종의 수학적인 사진술로 여기며, 물리학의 법칙들을 규칙성의 형식적인 도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물리학자들은 자신들이 관찰한 것들에 대한 일반적인 기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이 관찰한 것이 이해 가능하게 되는 현상의 일반적 패턴을 추구한다.''' 그래서 관찰은 체계적으로 일관되게 잘 들어 맞는다. 그러나 우리는 관찰 사실을 질서짓는 기본 공식에서도 마찬가지의 동일한 일관성과 이해 가능성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노우드 러셀 핸슨 <과학적 발견의 패턴>-
이론적 조망, 이론적 틀(이론적 프레임워크), 연구의 인식론적 렌즈라고도 한다. 관찰의 이론의존성이란 용어와도 맥락이 닿아 있다.
1. 설명
어떤 관찰된 자연현상이나 사회현상을 연구자가 설명함에 있어서 자신의 논거를 빌려오기로 결정하는 토대. 쉽게 말해서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이 관점에서 이해하겠어!" 라고 결정할 수 있게 하는 조망을 의미한다.
잘 확립된 이론은, 물론 그 자체만으로도 그 필요성이 처음 제기된 현상에 대해서 강력한 설명력을 갖는다고 과학 공동체의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론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당초 a, b, c 현상에 대해서 반복검증을 통해 입증된 가설이 이론이 되었다면, 이제 그 이론은 새로운 이해의 체계를 형성함으로써 a, b, c와 유사해 보이는 d, e, f, g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가설이 이론의 지위를 얻게 된 순간, 이제 그것은 '''더 많은 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인식의 틀을 제공한다.'''
즉 흔히 생각하듯이 이론에 대해서 단순히 "가설보다 더 반박하기 어려워서, 반복검증을 통해 입증되어서" 만으로 그 가치를 고평가하는 것은 오히려 지나친 과소평가다. 실제 학계에서 이론은 그것을 조망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엄청난 효용성''' 때문에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학계에 괜히 이론가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물론 과학자들에게 실험이란 금과옥조이고, 실험을 통해 얻어진 데이터의 중요성이 크기는 하지만, 이론이 없다면 논의는 중구난방의 산발적 발견 소식들만이 오갈 뿐 일체의 진전을 보일 수가 없다. 나중에는 마침내 보다못한 누군가가 나서서 '''이론 주도적 연구'''(theory-driven research)를 내놓게 된다.
2. 분야별 비교
자연과학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확고한 이론적 조망이 바로 '''진화론적 조망'''이다. 아니, 오히려 이 경우는 그 범용성과 설명력이 정말 미칠듯이 강해서 사회생물학이니, 진화심리학이니 하는 식으로 학제 간 경계를 죄다 허물고 다닐 정도다. 그래서 일부 논자들은 간혹 진화심리학 같은 것에 대해서 "비록 학문분야라는 이름을 얻기는 했지만 본질은 하나의 이론적 조망이라고 봐야 하지 않느냐" 고 평하기도 한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연과학에서 이러한 경향이 돋보이는 걸 또 들자면 물리학에서 대역적 대칭성(global symmetry)을 국소적 대칭성(local symmetry)으로 확장하는 것으로 새로운 상호작용을 기술하는 방식을 들 수 있다. 용어가 어렵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이 방법을 통해 중력장과 전자기장이 '''이론적으로 유도되며'''[1] 이 방법을 통해 그전까지 뭔지도 잘 모르던 강한 상호작용과 약한 상호작용을 다루는 방정식도 찾을 수 있었다. 기본 상호작용에 있어서 범용성과 설득력이 엄청난 설명 방식으로, 현재도 표준 모형 너머의 이론을 기술할 때 널리 써먹는 방법이다.
사실 물리학에서 이보다 더 범용성이 큰 걸 들자면 자발적 대칭성 깨짐(spontaneous symmetry breaking)을 들 수 있다. 초전도체를 설명하는 근본적인 이론 중 하나인 Ginzburg-Landau 이론(그 레프 란다우이다)으로부터 시작해서 골드슈타인(Goldstein)이 입자물리에 이를 적용하기 시작하고, 곧 힉스(Higgs) 등이 전자기약력을 기술하는데 사용됐으며[2] , 여전히 다양한 응집물리 분야, 특히 상전이(phase transition)를 기술할 때 자주 쓰이는 등, 응집물리부터 입자물리까지 여러 방면에서 활용되는 기술 방식이다. 범용성도 뛰어나지만 그 설명력은 현존하는 물리 이론들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강력하면서도 우아한(...) 이론이다.
사회과학에서는 이론적 조망의 문제가 자연과학보다 더 골때린다. 예를 들어, 어떤 집단 간에 심각한 갈등이 초래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에 대해 정치학의 거버넌스(governance) 이론의 조망을 취해 설명하는 것과, 심리학의 사회 정체성(social identity) 이론의 조망을 취해 설명하는 것은 엄연히 서로 다른 논의를 초래한다. 똑같은 국제정세 이슈라 할지라도 정치현실주의적 조망과 구성주의적 조망은 서로 너무나 다르다. 즉, 동일한 사안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이론적 조망들이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고, 너무나도 동떨어진 서로 다른 분석, 진단, 처방을 내놓는다. 게다가 "이론적 조망" 에서 미묘하게 이론보다는 "조망" 쪽에 더 방점이 찍히는 모양새인데, 예컨대 사회학에서 즐겨 쓰이는 여성주의적 조망의 경우 그것이 분명 조망의 기능을 완벽하게 수행하기는 하지만 그걸 하나의 이론으로 보아야 할지는 불분명하다.[3]
3. 중요성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간에 공히 중요한 것은, 이론적 조망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어찌보면 전문가와 입만 나불대는 좆문가의 구분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론적 조망이 없으면 반박이 들어올 때 크게 흔들린다. 대부분의 경우는 재빨리 다른 방향(자신이 덜 반박받을 만하다고 자신하는 방향)으로 도피하는데, 이 경우 앞서의 조망과는 기실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앞뒤가 안 맞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관찰 A에 대한 처방과 관찰 B에 대한 처방이 서로 앞뒤가 안 맞고, 현상 C에 대한 설명과 현상 D에 대한 설명이 서로 모순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리고 정작 본인은 그걸 모른다.
이론적 조망을 갖추고 있다면 하나의 거대한 조망 속에서 전체 관찰대상, 즉 자연의 본질과 사회의 흐름을 이해하게 되므로, 반박이 들어오더라도 전체 틀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반격하는 것이 가능하다. 게다가 자신의 논거에 대한 근거를 이론에 의존하므로, 이미 학계에서 닳고 닳도록 검증된 바 있기에 어지간해서는 흠집내기도 불가능하다.
흔히 사회과학 분야의 학부생들이 4년 전공과정을 마치고 졸업한 후 "도대체 4년 동안 내가 뭘 배웠는지 기억이 안 난다. ○○학과 출신이라고는 하는데 내가 ○○학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라고 푸념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이론적 조망을 체득하기보다는 그 학문분야에서 발견된 사실들 위주로 교육하는 사회과학 학부강의의 특성 때문일 수 있다.[4] 대학원생들은 상대적으로 그런 경향이 덜한데, 2년 넘도록 지도교수의 갈굼(…)을 먹어가며 그 학문분야의 조망을 직접 체득하는 훈련을 받기 때문이다.[5] 이게 없다면 그들도 일반인에 비해 "단지 그 학문 연구자들의 연구성과에 대해 조금 더 많이 알고 있을 뿐"인 비전문가, 그나마 잘해봐야 딜레탕트와 다를 것이 없다.
동료평가로 운영되는 많은 사회과학 저널들에게 있어서 이론적 조망은 투고된 논문의 게재 승인과 게재 거절을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치명적이다. 보통 "어떤 이론을 배경으로 하겠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거나 "이론적 바탕과 무관한 가설이 포함되어 있다" 는 비평이 있으면 당신의 이론적 조망과의 연결성을 다시 체크하라는 얘기다. 보통 이런 답변을 주면서도 수정 후 재투고 기회를 주는 에디터는 거의 없는 편.
4. 기타
흔히 뉴스나 언론매체에서 전문가를 초빙하여 자문을 구하는 것 역시, 그들이 갖고 있는 지식을 요청할 것 같지만, 실상은 이론적 조망을 빌려서 대상에 대한 이해를 넓히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누차 강조하지만 이론적 조망의 핵심 가치는 '''기존에 잘 확립된 지식을 통해 새로운 이해의 체계를 만들고, 이를 가져다가 새롭게 발견된 현상에 비추어 보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새로운 사회적 이슈가 나타났을 때 관련 전문가들을 모셔다가 이걸 어떻게 해석하고 설명하고 이해해야 할지 묻는 것은 곧 그들의 이론적 조망을 빌리겠다는 의미다.[6]
또한 독서를 하라는 말도 이론적 조망과 관련이 있다. 평소에 독서를 많이한 사람은 다른 사람 앞에서 주장을 펼때 자신이 읽었던 관련분야 책의 저자의 이론적 조망을 빌리게 될수 있게되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역시 강력한 이론적 조망이기는 하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일 뿐...[7] 그러나 이론적 조망으로서 갖고 있는 장점들을 모두 갖고 있어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있고, 그 때문에 프로이트는 거의 연례행사 급으로 지식인들에게 학문적 부관참시(…)를 꾸준히 당하는 운명이다. 사실 프로이트가 제안한 조망들은 그 설명의 범용성이 사실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큰 편이다.
이론적 조망에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실문제에 밀접한 분야일수록 이론만 따지고 드는 것은 학문이 상아탑 속에 갇혀 유리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현실 설명력을 높이는 데 기여하지 못하고 그들만의 신선놀음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그리고 인식론적 수준에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자칫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협소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간혹가다 학계에는 뛰어난 석학인데도 이상하게 편협해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대개는 특정 이론에 잘못 골몰하다 그만 흑화해 버린 경우다.(...)
[1]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칭성을 확장했더니 새로운 장이 필요하다는 걸 알 수 있고, 이 새로운 장의 방정식을 찾다 보니 정확하게 중력장(아인슈타인 장방정식)과 전자기장(맥스웰 방정식)의 장방정식이 튀어나오더라는 것이다.[2] 여기서 그 유명한 힉스 입자가 예견된다.[3] 물론 페미니즘 내에서도 앨리스 이글리(A.Eagly) 등의 "사회적 역할 이론"(social role theory)의 경우는 이미 훌륭한 이론적 조망이다. 이 바닥에선 이리가레, 버틀러, 보부아르 등의 특정 인물 위주로 조망을 선택하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페미니즘 자체를 이론화하려는 시도는 그 성질상 힘들다.[4] 사회과학에서 제대로 각잡고 이론적 조망을 가르치려면 한 하위 분과당 10~20가지의 서로 다른 이론들을 철두철미하게 숙지시켜야 한다. 당연히 대학원생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자연과학에서는 이론적 조망 자체는 그렇게 많지는 않으나, 대신 하나하나의 조망이 워낙 강력하여 학부수준에서도 적극적으로 소개되는 편이다.[5] 커뮤니케이션학이나 정책학 등등 종합응용학문의 경우에는 더욱 답이 없어진다. 자기 이야기보다 남(인접학문)의 이야기가 더 많은 특성상(…) 이론적 조망은 한도끝도 없이 많아지고, 정말 다양한 주제에 능통해야 한다.[6] 일베를 예로 들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의 상호작용에 관련된 대인관계 이론, 혹은 이를테면 집단사고 관련 이론을 가지고 일베라는 새로운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론을 통한 조망의 도움이 없다면, 마치 장님 코끼리 만지듯이 더듬거리면서 일베에는 이렇게, 메갈리아에는 이렇게, 오유에는 저렇게 등등 되는 대로 자기 썰만 풀다가 끝날 것이다.[7] 이는 이론가의 역할이 제 아무리 중요할지라도, 자료주도적 연구를 배제한 이론주도적 연구는 인정받지 못함을 보여준다. 인정받는 이론을 만들려면 좋은 자료가 필요하고, 좋은 자료가 빛을 보려면 인정받는 이론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