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 노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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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賀典雄
1930년 1월 29일 - 2011년 4월 23일
1. 개요
일본의 기업가. 일본 기업 소니의 전 회장이자 성악가이며 지휘자. 모리타 아키오와 함께 소니를 세계적 기업으로 일군 주역이자 음악가다. 그는 소니를 가전 명문기업이자 세계적인 미디어 업체로 성장시킨 일등공신으로 평가받는다.
2. 성장과정
오가는 1930년 시즈오카현 누마즈시에서 태어났다. 어릴때 폐결핵을 앓고있던 중에 지인에게서 물리와 음악을 배우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음악도의 길로 들어선다. 오페라 가수가 되기를 꿈꿨던 오가는 도쿄예술대학 음악학부 성악과로 진학하고 1953년 졸업했다. 대학 재학시절, 소니의 전신이었던 도쿄통신공업사의 제품이었던 테이프리코더를 연습기재로 구매했다가 제품에 하자가 있음을 발견, 회사로 찾아가 항의했는데[1] 이것이 계기가 되어 '촉탁'이란 직책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게된다. 그후 국립 베를린예술대학 음악학부로 유학하게 된다. 유학을 마친 오가는 소니로 개칭된 회사로 다시 돌아와 광고부장및 디자인 실장이란 직함으로 정식 업무를 보게된다. 음악가로서의 탁월한 식견이 있었던지라 그가 기획한 제품들이 대박을 치고 그 업적을 힘입어 1964년 불과 34세의 나이로 중역의 자리에 오른다. 그 이후로도 계속 승승장구하여 사장, 회장. 이사회 의장을 거처 명예회장의 자리에 오른다. 그 후 2000년에 이데이 노부유키를 소니회장으로 임명한 후 물러나 있었다가 2001년 11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음악 페스티벌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중 뇌일혈을 일으켜 쓰러진 후 3개월을 혼수상태로 있다가 말을 할 수 있을정도로 기력이 회복되어진다. 그의 73번째 생일이던 2003년에는 이사회 의장과 명예회장 직에서 완전히 은퇴했고 이후에는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장으로 재직했다가, 2011년 4월 23일, 향년 81세로 타계했다.
3. 업적
1988년 미국 CBS사에게서 현 소니 뮤직의 전신인 CBS 레코드 그룹을 20억 달러에 인수했으며, 이듬해인 1989년에 코카콜라로부터 현 소니 픽처스의 자회사가 되는 컬럼비아 픽처스를 34억 달러에 인수한다. 아울러 플레이스테이션을 탄생시킨 주역이기도 하다.[2]
4. 여담
- 음악가였던 까닭에 지인들이 빵빵하기로 유명한데 그 중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는 절친으로 알려져있다. 국립베를린예술대학 음악학부에 유학중이던 시절에 알게되어 친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성격이 괴팍해 인간관계가 그리 원만하지 못했던 카라얀은 유일하게 오가 노리오와는 친했다고 한다. 흉금없이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는 사이일 정도로 친했다.[3] 카라얀이 사망할 당시 옆에 있던 사람도 오가 노리오였다. 카라얀은 그가 방문하자 심전도 검사를 하러 온 의사에게 중국 황제도 우리 만남을 방해할 수 없다면서 돌려보낸 뒤 아니프 근교의 카라얀 소유 부지에 CD 공장을 건설하는데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갑자기 카라얀이 심장마비에 걸려 옆으로 쓰러졌고 결국 사망한다. 바로 옆에 있던 오가 역시 이를 보고 심장 발작을 일으켜 수술을 해야 했다.
- 아울러 미국의 레너드 번스타인과도 친분이 두터웠는데 번스타인은 흥이 절정에 이르면 팬이나 아무 사람이든 붙잡고 뺨에 기습키스를 하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번은 일본으로 연주회차 온 번스타인을 연주회를 마치고 난 후 자신이 직접 자가용 비행기를 조종해 도쿄로 돌아오던 중 번스타인에게 기습키스를 당했다고 한다.
- 플레이스테이션을 탄생시킨 주역으로도 유명한데, 그 탄생과정 역시 명작이다. 닌텐도에게 배신을 당해 분에 차있던 구타라기 겐이 오가를 찾아가 "저희도 게임기를 만들어야겠습니다."라고 말하자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Just do it! (그냥 실행해!)"라고 외쳤다는 얘기는 유명하다.이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이 글을 읽어보자.
- 소니의 장점이었던 혁신성이 실종되는 세태가 나타나자 오가는 이데이 회장에게 "소니의 경영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상품을 만들어 왔다. 이부카 전 회장은 트리니트론을, 모리타 전 회장은 워크맨을, 나는 CD와 MD를 만들었다. 이데이군 자네는 도대체 뭐가 있나!?"라고 일갈했다고.
- 퇴임후 다소 엉뚱한 면을 보여줬는데 소니를 물러나면서 회사는 그에게 16억엔, 당시 한화로 150억원을 '퇴직 위로금'이라는 명목으로 그에게 주었다. 그는 이 돈을 자신이 요양했던 장소인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에 공공시설을 짓는 것에 사용했는데 문제는 그 공공시설이 다름 아닌 음악 홀이었던것.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오가는 그 금액을 자신이 아닌 가루이자와로 회사가 직접 송금하도록 요구하였다. 그 이유는 일본세법으로는 개인이나 기업이 지자체에 기부할 경우에는 면세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더 골치아픈건 현행 일본법에는 이런 경우는 퇴직 위로금으로 회계 처리를 할 수 가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회사는 당국에 특별 배려를 요청했으나 거부되었고 결국 4억엔이라는 세금을 지불해야 해서 예상보다 적은 액수를 받게된 오가는 자신이 직접 음악 홀 건설을 진두지휘하게 되었다.
- 다소 독특한 경력으로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한 적이 있다. 소니에서 지은 건물의 개관식에서였는데, 사실 아무리 오가가 음악을 배운 경력이 있어도 그 정도 급은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상 돈을 주고 사서 지휘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프로그램은 베토벤 교향곡 9번이었는데 음반으로도 제작되었다고...
[1] 항의가 아니라 대놓고 "이건 내가 봤을때 쓰레기나 다름없다"라며 깠다.[2] 아래의 링크에서도 자세하게 나와있지만 쿠타라기 켄이라는 인물과 오가 노리오의 지원이 없었다면 나오지 못했을 명품이었고 또한 소니에게 있어서는 신의 한수와도 같은 결정이었다. 현재 소니가 처한 상황을 빗대어 보고 플레이스테이션이 지금 가지고 있는 위상을 놓고 본다면 플레이스테이션이야말로 소니를 살린 역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3] 사실 카라얀이나 번스타인 등의 지휘자들은 소니 임원진과 사이가 꽤 좋았는데 아키오 모리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 광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