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골성

 

1. 개요
2. 역사
3. 기타


1. 개요


요동에 있었던 고구려의 옛 성으로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요녕성 단동시 동북쪽의 봉황산성으로 비정된다. 고구려 시대에는 대성의 성주인 욕살이 파견되었다.
규모가 워낙 큰 산성이다보니 후대에도 보존이 된 모양이다. 오골성으로 비정되는 봉황산성은 둘레 16km로 고구려 산성 중에서도 매우 큰 편에 속하며 내부에는 꽤나 넓은 평지와 식수원까지 있으며 구간에 따라 50m에 이르는 자연절벽까지 낀 험준함까지 갖추었다. 이렇다보니 요동지에 의하면 오골성은 10만대군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오골성은 요하 일대와 요동반도 중앙에 뻗어있는 천산산맥을 지나 압록강 방면으로 진입할 때 거치게 되는 곳으로 전쟁시에는 요동 방어선을 후방 지원하는 거점이었고 요동방어선을 피해 압록강을 타격하는 움직임을 감제하는 요충지였다.

2. 역사


고수전쟁 때는 수나라 맹장 설세웅이 답둔도 군을 이끌고 공략을 시도한 곳이 오골성이었으며 우중문도 이 일대에서 낙랑도 군을 거느리고 계책을 써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고당전쟁 중에는 645년에 백암성에 지원군 1만명을 파견하는데 여기 소속된 무장 고돌발이 당나라 맹장 계필하력과 일기토를 벌여 승리, 치명상을 입히기도 하였다. 당나라가 오골성을 공격하려는 시도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요동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해 오골성에 접근하지 못하였다.
647년에는 당나라가 요동 방어선을 우회하여 압록강 일대를 타격하자 장군 고문의 지휘 하에 오골성과 안시성에서 군대 3만을 내어 설만철의 압록강 상륙군을 영격한 기록이 있다.[1]
이후 666년에는 연남생의 반란 때 오골성을 치다가 여의치 않자 현도성으로 물러났다는 기록이 나오며 고구려 멸망 후 한성의 검모잠과 함께 고구려의 유민이었던 고연무에 의해 고구려부흥운동의 중심지로 자리잡기도 했다. 신라-고구려 연합군이 오골성 근처 개돈양에서 당군을 선제 공격해 나당전쟁이 발발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조선에서 요동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재활용되었고 러일전쟁이나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거점으로 활용된다.

3. 기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 일대에 연개소문에 대한 전승들이 남아있어 기행문 중에 종종 등장한다. 이 지역 사람들도 이 고장에서 난 인물 중 하나로 연개소문이 바위를 밟은 자국, 군사를 둔 자리, 살았던 성 등을 화젯거리로 삼았고 상을 만들어 모시기도 하였다. 여기에 더해 안시성이 근처에 위치한 유력한 후보지역 중 하나로 지목되기 때문에 양만춘, 추정국 등도 언급된다.[2]

[1] 설만철은 수나라의 맹장 설세웅의 아들이며 계필하력의 라이벌이었다.[2] 신채호조선상고사에는 안시성주의 이름으로 양만춘을, 오골성주의 이름을 추정국으로 기재하고 있다.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들은 둘 다 안시성주의 본명으로 언급되는 이름들이며 명나라 야사나 소설에서 인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