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부흥운동

 

'''고구려부흥운동'''
'''高句麗復興運動'''
존속기간
669년 ~ 698년
901년 ~ 918년
정치체제
부흥운동(군주제)
주요 인물
'''검모잠'''
고안승
고연무
걸걸중상
걸사비우
'''대조영'''
'''궁예'''
'''왕건'''
주요 사건
668년 고구려 멸망, 안승 추대
670년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
673년 당에게 패배
→신라의 안승 보덕국왕 책봉
'''698년 발해 건국'''
901년 태봉 건국
'''918년 고려 건국'''
'''936년 고려의 후삼국 통일'''
멸망 이전
고구려
성공 이후
소고구려, '''발해''', 후고구려, '''고려'''
1. 개요
2. 목록
2.1. 일반적으로 말하는 고구려부흥운동
2.2. 발해
2.3. 후고구려와 고려
2.4. 최광수의 난
3. 기타 국가
3.1. 이정기의 제나라
3.2. 괴뢰국
3.2.1. 보덕국
3.2.2. 소고구려
4. 의의
5. 유사사례
6.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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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의 구성국 중 하나였던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다시 고구려를 부활시키려했던 정치적 움직임을 뜻한다. 국사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고구려부흥운동은 멸망 직후 고구려왕가를 중심으로 하는 운동을 말하나 대조영발해궁예후고구려, 왕건고려 그리고 무신정권 시기의 최광수의 난까지 그 범주에 포함할 수 있다.

2. 목록



2.1. 일반적으로 말하는 고구려부흥운동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며 고구려가 멸망했지만 당은 평양성 이외 각지에서 고구려인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먼저 고구려 3경 중 하나인 현재의 황해도한성을 지역기반으로 둔 검모잠, 안승, 고연무 등은 신라와 협력해 나당전쟁에 참여해서 고구려를 부흥시키려 했다. 이 황해도 지역은 고구려 멸망 당시 북진하는 신라군에게 전쟁 없이 항복했기 때문에[1] 오랫동안 싸워온 당나라에 대한 반당감정에 비해서 반신라감정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신라 역시 나당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지원세력 하나하나가 절실한 상황이었으므로 두 세력의 뜻이 맞았다. 그러나 나당전쟁 초기 내분으로 검모잠은 살해당하고 안승, 고연무 등은 신라에 항복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요동 일부 지역과 황해도 지역의 고구려 부흥군은 나당전쟁 초기에 신라군과 연합해 계속 싸웠지만 671년 7월 안시성에서 검모잠의 남은 무리가 고간#s-2이 이끄는 당군에게 패했고 672년 8월 석문 전투에서 고구려 부흥군과 함께 싸우러 북상한 신라군이 당군에 크게 패배하면서 신라는 더 이상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당군과 부흥군의 전투가 계속되다가 결국 673년 5월 호로하 전투를 끝으로 고구려의 옛 땅에 잔존해있던 고구려 부흥 세력은 고간이 이끄는 당군에 의하여 완전히 토벌되었고 남은 무리는 신라로 피난했다.

2.2. 발해



한편 일군의 고구려 유민들은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 영토인 요서의 영주(융저우)로 강제 이주되었는데 영주에서 거란족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킨 틈을 타 걸걸중상, 대조영 등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들이 만주 동부 동모산으로 도망가, 추격하는 당군을 천문령 전투에서 격파하고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여 698년 발해를 세웠다. 이는 고구려 멸망 후 30여년만에 이뤄낸 성공적인 부흥운동이었다. 동모산은 옛 고구려의 세력권인데다가 초기 발해 주민은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었고 배경 때문에 발해에겐 고구려 계승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발해에겐 당나라와 신라의 강력한 견제 탓에 국제 사회에서 고려로 행세하질 못한 뼈아픈 한계가 있었고[2], 이는 현대의 남북한에게 있어선 고려의 고구려 계승을 더 강하게 주장할 순 있게 되었으나, 발해에 대해선 연고권이 약해지는 상황이 되고 말았기에 역시 아쉬운 부분이다. 이 당시 대내외적으로 '고려'라 칭했다면 지금처럼 고구려계냐 말갈계냐 하는 논란 자체가 없었을테니 현대 한국인들 입장에선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3]. 후술하지만 이런 측면에선 고구려 계승성에서 고려에 비해 치명적으로 처졌던 건 부인할 수 없다. 후세의 누군가들이 보기 좋게 영토만 크게 차지한다고 장땡이 아니었다는 얘기.[4] 하지만 그만큼 통일신라의 삼한일통 주장이 당시 국제사회에선 더욱 큰 지지를 받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2.3. 후고구려와 고려




통일신라 내부에서 고구려 유민들은 한주, 삭주, 명주 (+패강진) 3주에 소속되었는데, 구백제 지역에 비해서는 비교적 신라 조정에 협조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9세기 초반에 일어난 김헌창의 난 당시, 구백제 지역 대부분에 원신라 지역 일부까지 난에 가담하며 조정의 권위가 흔들릴 때까지도 북부 3주는 반란에 동참하지 않고 굳게 방어한 데서 드러난다. 후속 반란인 김범문의 난 역시 원 고구려 지역으로 간주되었던 한산주에서 일어났으나 신속하게 진압한다. 신라 수도에서 거리가 멀어 자칫 통제하기 힘들 수 있던 북부 3주를 순조롭게 지배한 점은 통일신라 체제가 수백년을 안정적으로 존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9세기 후반들어 중앙의 행정력이 약화되자 북부 3주도 차츰 독립성을 띄기 시작한다.
결국 9세기 말, 통일신라에서 현재의 평안남도,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지방에 흩어져 살던 고구려 유민들이 궁예의 밑에서 규합되어 후고구려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궁예 본인은 비록 옛 고구려 땅에서 봉기하기는 했지만 본인의 연고지는 삼국시대부터 신라였던 지역, 즉 훗날의 경상도 계통이었고, 굳이 그에게 고구려 유민의식에 얽매일 이유는 없었다. 결국 건국 3년만에 국호를 고구려 계승의 의미가 강한 '고려'에서 불교적이고 추상적 명칭인 마진으로 바꾸며, 수도 역시 고구려 유민의식이 강했던 패서 지방 송악에서 고구려 유민의식과 연관성이 적은 철원으로 옮기고 아지태 등 청주 출신 백제계 호족을 중용한다. 이런 고구려색 빼기는 패서호족을 견제하기 위해서였고[5], 초기의 고구려 부흥 행보는 자신의 건국에 도움이 되니까 했을 뿐 궁예의 진심은 고구려 부흥에는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패서호족은 당연히 이에 반발했고 결국 패서호족의 대표자로 추대된 왕건의 쿠데타를 거쳐 918년 고려로 이어진다. 원신라 출신인 궁예와 달리 왕건은 대대로 패서 호족으로 고구려 유민의식에 완전히 귀속된 신분이었기 때문에 궁예와 달리 국명에서부터 엿보이듯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히 했다. 고려의 경우 통일신라의 영역을 대부분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하면서 고려의 고구려 계승성을 깎아서 보려는 견해가 있으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고려는 예전 통일신라 시대 때는 지배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대동강 영역은 물론 직접 손을 뻗치고 있었고, 그 이북 지역으로도 약간 올라간 영역에서 시작했다. 또한 고려가 혼인 정책을 적극적으로 편 건 사실이지만 이는 신라 구왕족 계열에 한정된 조치는 아니었고, 고려는 굳이 경순왕의 귀부가 아니더라도 그 전부터 신라에게서 대왕 인정을 받는 등으로 확고한 외교적 우위에 있었으므로[6] 이 혼인 정책을 통해 신라 왕실의 정통성을 흡수했다곤 볼 수 없다.

고구려 계승 의식을 주도한 서경파가 신라계인 주류 개경파가 대립했다는 것도 대단히 잘못 알려진 설이다. 서경 세력 자체가 왕건이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세력이었고, 개경의 정치 세력 자체가 신라계였다는 것도 잘못 알려진 설이다. 그나마 개경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내세웠다는 것도 결국은 "신라 계승"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삼한 계승"이었다.

고려가 건국되었을 당시까지는 성공한 고구려 부흥운동의 또 다른 사례인 발해가 엄연히 그때까진 엄존했으나, 발해는 고려와는 달리 국제사회에서 고구려의 후계자란 명분을 온전히 누릴 수가 없었던 데다가[7] 한반도에서 후삼국시대가 진행되던 당시에는 발해 역시 왕조말기 증상으로 힘이 약해져서,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일에 개입을 전혀 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발해는그 차지한 면적으로만 보면 현대 한국인들의 만주 애호 현상을 만족시켜주기 충분했지만 당나라와 신라는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사실 자체가 국가 위신과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이 두 나라는 발해를 도저히 고구려로 인정해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발해 또한 자존심만 내세우다가 국제 관계를 파탄으로 이끌 수가 없어서 이런 문제에서 자유로운 일본과의 관계에서만 '고려 국왕'을 자칭할 수있었고 당과 신라를 상대할 때는 결국 '발해'라는 새로운 국호를 사용할 수밖엔 없었다. 서양사의 불가리아 제국도 초반에는 로마 제국과 동등한 황제를 자칭할 권리를 인정받았을 정도로 성장했으나, 일단 로마에게 망한 후 부활했을 때는 로마 제국의 위신 문제 탓에 로마 제국은 처음과는 달리 도저히 불가리아 제국을 인정해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때문에 잠깐 재흥한 불가리아 제국은 로마 제국과의 계속된 분쟁 끝에 바실리우스 2세에게 망하고 만다. 발해는 신라와 당에 대해 계속해서 고구려의 후계자를 무리하게 국서에서 고집해서 벌어질 수 있는 이런 문제를 피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현대의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와의 관계 탓에 마케도니아 국명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대만 또한 중화민국이란 국호를 국제사회에서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과 비슷하였다.
반면 적어도 궁예와 왕건의 고려는 이 문제에 관련해서 매우 자유로웠다. 딴지를 걸 당나라가 당시엔 이미 오대십국시대의 개막으로 무너져 없었던 데다가,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또 다른 주역인 신라는 후삼국시대 들어서는 이미 왕건에게 압도당해 고려왕 왕건을 도리어 대왕으로 칭하고 신라왕 자체를 대왕 고려왕의 아래에 스스로 두는 굴욕을 자처하는 꼴이었다. 때문에 현대 한국인들의 기호일 만주 영토와는 전혀 별개로 명분에서 그다지 밀릴 형편은 아니었다. 만약 발해가 국력을 추슬러 중흥에 성공했다면 얘긴 달라졌겠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고려는 발해인들을 '형제'로 일컫는 여유를 보이면서 오히려 강자의 입장에서 호기롭게 포용할 수 있었다.

2.4. 최광수의 난


그러나 고려의 고구려 계승은 훗날 다시 한 번 내부에서 정면 도전을 받게 된다. 고려 무신정권기 무신들의 거듭된 권력쟁탈전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져 각지에서 반란이 빈발했는데, 서경에서 무인집권층에 반발해 최광수(고려)가 고구려흥복병마사 금오위 섭상장군(高勾麗興復兵馬使 金吾衛 攝上將軍)을 자칭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그가 자칭한 관직명은 고구려 부활이란 명분이 드러나 있다. 고려가 바로 고구려인데 어떻게 고구려 부흥운동이 따로 있을 수 있겠나, 라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후삼국 시기에 비해서 약해졌을망정 각 지방의 옛 삼국 유민의식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8] 당시 고려에서 고구려 유민 의식이 가장 강한 지역은 개경과 옛 고구려의 수도 평양인 서경 일대였다. 그러나 서경은 묘청의 난 진압의 여파로 대단히 대우가 박해져 있었던 터라 권력의 중심지인 개경에 대해 반항 의식이 강했고, 마침 무인 집권기에 접어들어 정권의 정통성이 극히 약화되자 개경은 이제 자격이 없으니 자기네야말로 새로운 중심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여 고구려 부흥을 내세웠던 것. (참고 자료: 고려 무인 이야기).[9]
하지만 그냥 생각해봐도 알 수 있듯 이런 식의 부흥 운동은 비슷한 시기의 신라 부흥 운동, 백제 부흥 운동에 비해 정권욕이 너무나도 강렬히 드러나 있는데다, 개경 자체는 그들이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관 별개로 고려(=고구려)의 수도라서 명분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고려 왕가의 출발점인 개경 호족 또한 서경 호족과 마찬가지로 신라 치하에서도 나름 어느 정도 독자성을 유지했던 고구려 유민들인 패서 계열 호족들이었고, 서경 세력 자체가 애초에 왕건이 집중적으로 황해도와 개경 일대의 호족들을 이민시켜서 육성한 게 시초였던만큼 고구려의 옛 수도가 근거란 이유만으로 고구려 계승성이 더 있다고 내세우기엔 명분에 하자가 있었다. 이 마지막 고구려 부흥운동(?)은 1217년에 최광수가 서경성을 빼앗고 고구려 부흥을 기치로 내세워 군사를 모으고 북계 지역에 격문을 돌리며 세력을 키웠지만 반란에 회의를 느낀 정의의 암살로 끝나는 결말로 막을 내린다. 이후 여몽전쟁이 일어나면서 전국토가 몽골군과의 전장이 되면서 부흥운동이 다시 일어날 여력이 없어졌고 이 시기를 거쳐 삼국유민의식이 사실상 소멸된 걸로 파악되고 있다.

3. 기타 국가



3.1. 이정기의 제나라



한편 8세기에 들어서 고구려 인근의 요서에서 산동으로 강제 이주된 이정기와 고구려 유민들이 산동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제나라#s-7를 세운 일도 있었다. 직접적인 고구려 계승의식은 확인되지 않으나 고구려 유민들이 제의 건국에 참여한 흔적들이 확인되며, 제도 또한 이전 고구려나 발해와 비슷한 면이 많이 보인다. 다만 이정기 일가의 제나라 정권은 고구려 유민들이 물론 정권의 수뇌부이긴 했으나 당나라 사람들 또한 당연히 제나라 정권에 협력자로 많이 참여했고, 이정기 일가의 속마음은 정확힌 알 수 없지만 제나라는 어디까지나 당나라의 여러 지방 절도사 정권 중 독립성이 보다 강한 정권에 불과했으며 국제 사회에서의 위치도 신라는커녕 발해와도 비교할 수가 없다. 이슬람 제국사에서도 아랍인들에게 멸망당한 페르시아 제국의 후손인 이란인들이 중심이 된 강력한 군사 정권들이 있었고, 이들이 내심 사산조 페르시아를 의식했던 게 사실이지만 적어도 사파비 정권이 등장하기 전까진 그 누구도 사산조의 군주 호칭을 가져다 쓰지 못했던 사례들과 비슷하다.

3.2. 괴뢰국


고구려 멸망이후에 신라와 당은 멸망한 고구려의 세력들을 모아 괴뢰국들을 만들었다. 부흥운동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고구려의 후신을 표방한 국가들이라 할 수 있고 신라와 당에 반기를 들기도 하였다.

3.2.1. 보덕국



황해도를 중심으로 이뤄진 부흥운동이 실패한 후 남하한 고구려 유민들을 신라 문무왕은 한반도 서남부 금마저에 정착해 살게 하고 일종의 고구려계 자치집단인 보덕국을 세우는 것을 허락해 신라의 부용국 노릇을 하게 했다. 보덕국왕은 과거 고구려왕으로 추대되었던 안승, 태대형(太大兄)에는 고연무가 취임했다. 이 보덕국은 신라의 속국이고[10] 그 영역도 신라 내부에 있는데다 어디까지인지도 명확하지 않아 제대로 된 고구려 부흥운동이라고 하기는 애매하지만 일단 보덕국에 정착한 고구려인들은 일본에 고려의 이름으로 사신을 주고 받기도 하고 옛 고구려와 동일한 5부와 관등 체계를 갖추었으며, 신라와 외국의 예로 국서를 주고 받는 형식을 취하는 등 고구려의 사직을 보전하고 기회를 보는 듯 했다.
그러나 보덕국을 허락했던 문무왕 이후 신라 신문왕은 옛 전쟁공신 세력에 대해 대대적인 숙청을 벌였으며, 구시대의 잔재인 보덕국도 신문왕의 제거 대상에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승서라벌로 불러 경주시 근방에 식읍을 내리며 살게 했고, 국왕이 경주로 떠나 보덕국이 없어질 걸 두려워한 고구려 유민들은 안승의 서자 혹은 조카 대문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계백에게 죽었던 화랑반굴의 아들 김영윤이 반란을 진압하다 전사할 정도로 반란은 거셌지만 곧 진압되었다. 이때 반란 진압에 투입되었던 신라 중앙군이 다름아닌 고구려인으로 구성된 벽금서당이었다는 것에 이들의 비극성이 있다. 벽금서당은 새로운 고향인 신라에서 살려면 신라 왕실에 충성하면서 같은 고구려인들을 학살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한편 이들에게 진압당한 보덕국인들은 당연히 벽금서당에게 심한 적개심을 품게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후 보덕국은 해체되고 보덕국인들은 일부는 서라벌, 다른 일부는 금마저, 즉 오늘날 익산 지역의 남부 지역에 뿔뿔히 흩어져 식민당한다. 즉 말하자면 오늘날의 경주, 익산 이남 전라남북도 지역에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 서라벌로 끌려갔던 보덕국인들은 적금서당으로 편재된다.
한편 삼국통일 후 고구려인들은 신라내에서 백제인들에 비해 대우가 좋았다. 백제의 지배층을 5두품에 편제한 반면 고구려 지배층들은 6두품까지 쳐주었고, 그 중 고구려의 왕족 안승진골까지 됐으니 백제에 비해선 대우가 좋은 편이었다.[11][12] 그러나 이들 또한 중앙 권력에 진입할 수 없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신라의 중앙 지배력이 붕괴된 상황이 되자 당나라의 지배에서 탈주한 유민들의 후손들은 고구려의 제2수도권이었던 황해도 일대에서 다시 한 번 부흥의 꿈을 꾸게 된다. 하지만 보덕국을 이뤘던 고구려인들은 뿔뿔히 흩어져 사민된 탓에 패강진 고구려 유민과는 완전히 상황이 달랐다. 패강진은 신라가 간접 지배하던 지역이었고 고구려 유민끼리 모여 살았기에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었으나, 보덕국을 이뤘던 고구려인들은 신라의 강력한 감시 아래 익산 이남 전라남북도 지역과 서라벌에 뿔뿔히 흩어져 살아야 했기에 정체성을 보존하지 못했다. 9서당도 훗날 전면 해체되어 중군, 우군, 좌군 등의 신라 중앙군으로 개편되는데 이 단계에서 9서당 특유의 정체성 또한 사라지게 된다. 때문에 보덕국인들의 후손은 익산 이남 전라남북도 지역의 지역 정체성에 동화되고 말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3.2.2. 소고구려



이와 별개로 요동에서는 당이 고구려인들을 위무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보장왕을 '조선군왕'[13]으로 봉해 요동을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보장왕도 생각보다 물이 아니라 나름대로 고구려 재건을 꿈꾸었다. 결국 발각되어 보장왕은 서쪽 멀리로 유배되고 당은 다시 보장왕의 손자 고보원을 '충성국왕'으로 봉했는데 고보원도 반당정책을 취하자 그를 폐하고 고덕무를 세웠으며 학자에 따라서는 고덕무 이후 요동은 독자적으로 자치권을 가졌다고 생각되는데 이를 소고구려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독립적인 지위가 아닌 당 관직 체제 내의 안동 도독으로 존재하는 이상 적어도 이 시기의 고덕무 체제를 독립국으로 보는 것은 무리다. 차라리 괴뢰국 내지 부용국이면 모를까. 그래서 부흥운동의 결과로 보긴 꽤 어렵다. 소고구려는 약 100년간 존속한 것으로 추정한다. 발해해동성국으로 만든 선왕요동을 차지한 점과 '고구려 승려'가 신라로 망명했다는 기사를 볼 때 발해 선왕시기 발해에게 멸망한 것으로 보이며, 발해도 대외적으로야 당과 신라의 압력 탓에 '''고구려 계승'''을 내세울 수가 없었지만 그들 자신의 입장으로 볼 때 어디까지나 고구려의 정통 후신은 발해였다. 때문에 적어도 대내적으로는 고구려 계승의 정통성을 내세우는 발해가 소고구려의 존재를 언제까지나 용납할 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4. 의의


고구려 부흥운동은 사실상 한민족의 정체성을 만든 계기가 되었다. 부흥운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고려왕조는 통합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각지의 유민의식을 희석시키게 되었고 뒤이어 나온 조선고려의 폐단을 개혁했다고 했지 고려 자체를 부정하진 않았다. 고려신라와는 체제계승성이 없었으나 조선고려와의 체제계승성이 있었다. 조선에게 고구려 계승의식이 있었음은 조선의 개국공신이 지은 한시인 안주회고에서 드러난다. 당시 명나라 사신인 축맹이 조준에게 오만방자하게 굴자 살수대첩 일화를 바탕으로 시를 지어 화답해주었고 축맹은 불쾌한지 입을 다물었다고. 한편 조선왕조는 고려(=고구려)라는 이름이 옛 삼국 중 하나의 이름인데서 정통성이 치우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 국명도 대과거인 고대왕국 고조선에서 따 오고 삼국의 시조묘 제사를 똑같이 우대하는 등 삼국 중 어느 나라만 계승하지 않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다만 고조선 계승의식은 고려왕조부터 시작되었다. 고려왕조는 비록 고구려 부흥 성격을 띄고 시작했지만 후삼국 통일 이후에는 백제나 신라의 전통행사를 잇거나 하는 식으로 고구려에 지나치게 치우치진 않도록 구삼국에 균등한 계승의식을 보이려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구삼국 유민의식을 희석시키는 한편 패서지방의 권위 강화 목적으로 고조선을 이전 시기보다 띄워주기 시작했다.[14]
또한 고구려부흥운동으로 인하여 생긴 고려로 인하여 한반도국가의 외국어 명칭인 코리아란 단어가 퍼지게 되고 중동을 넘어 유럽까지 넘어감으로서 대한민국의 외국어 국호 코리아가 지금도 한민족 사이에 남아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15]

5. 유사사례



6. 같이보기


[1] 668년 북진하는 신라군이 최초로 전투를 벌인 곳이 사천 전투, 즉 평양성 근교였다.[2] 이유는 간단했는데, 바로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발해신라에 비해 너무 북쪽에 있던지라 농업에 불리한 환경을 가진데다, 비옥한 한반도 중부 일대를 신라에게 다 뜯긴 터라서 경제력이 후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기에 가면 백두산이 분화할 조짐을 보이면서 발생한 각종 전조 현상때문에, 그나마 남아있던 농업의 기반도 완전히 개발살이 났다. 현대사를 봐도 김씨 일가의 폭정을 제끼더라도 독자적인 경제 발전에 한계가 있는 지리적 요건을 가진 북한이 좀더 유리한 조건을 갖춘 남한에게 밀리는 판국인데, 농업과 목축업이 국가 경제의 전부였던 전근대시대에 이런 불리함을 가진 발해가 비옥한 땅이 많은 신라를 이길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3] 사실 말갈계라도 고구려 계승을 주장할 수 있다. 말갈도 고구려의 일부였으니 그렇다. 이건 서양사로 치면, 로마 제국의 지배를 한 번이라도 받았거나, 그랬던 나라를 차지한 나라라면 아무나 로마의 후예라고 자칭할 수 있던 것과 같다.[4] 서강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한 '발해 국호 연구' 참조[5] 동시에 본인이 한때 불교승려였던 까닭에, 그가 정신병을 앓으면서 이상한 망상에 빠진 것과 합쳐져서, 고구려고 뭐고 자기 입맛에 맞는대로 나라를 재구축하려는 의도도 있었다.[6] 아이러니하지만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고려가 바로 신라와 이러한 관계에 있었다. 왕경 코앞과 전략적 요충지에 설치된 굴욕적인 군사령부의 존재도 그렇고, 신라 입장에서는 몇 백 년만에 다시 처하게 되는 역사의 반복이었다.[7] 발해의 중심지가 옛 고구려의 중심지완 달랐다는 점은 이 대목에선 전혀 관련 없는 사항이다.[8] 비슷한 시기 백제 부흥을 명분으로 내건 이연년의 난, 신라 부활을 명분으로 건 이비 · 패좌의 난이나 김사미 · 효심의 난도 일어났다.[9] 비슷하게 오스만=터키로 등치시키는 대중들의 인식과 달리 실제 터키 공화국의 건국은 단순히 오스만 제국을 공화정으로 전환한 게 아니라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하는 형식이었다. 오스만의 시작은 튀르크계의 국가였지만 확장을 거듭하면서 그저 황실이 튀르크계일 뿐인 범이슬람제국으로 성격이 바뀌었기 때문.[10] 신라가 일본에 사신을 보낼 때 보덕국 사신을 딸려 보내 보덕국이 신라의 부용국임을 분명히 했다.[11] 이 점은 진평왕~무열왕까지 신라를 가장 크게 위협한게 고구려가 아닌 백제인 탓이 큰듯하다.[12] 문무왕 때는 전과 같은 벼슬을 내리는 등 꽤 좋은 대우를 하였으나 계속 지속된 기조는 아니었으므로 신라의 일관된 정책으로 볼 수는 없다.[13] 당연히 고조선에서 유래.[14] 삼국은 미약하지만 고조선 계승의식이 있었고, 고조선의 중심지는 당시 패서지방이었기에 정권의 정당성에도 도움이 되었다.[15] 구한말에 코리아를 꺼림직 하게 생각해서 바꾸려고 시도를 했지만 코리아가 통용된 역사가 너무 길어서 포기하고 대한제국또한 코리아 엠파이어라고 외국어국명으로 표명하기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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