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가논
1. 개요
오르가논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일군의 논리학 저작들을 가리킨다. 범주론, 명제론, 분석론 전서, 분석론 후서, 변증론, 궤변론(소피스트적 논박)으로 이루어져 있다.[1] 오르가논으로 서양 논리학의 기초가 세워졌다. 이 책은 고전 논리의 얼개를 이루며, 조지 부울 등이 등장하기 전까지 거의 도전을 받지 않을 정도로 확고한 위상을 자랑했다.[2]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오르가논은 일종의 도구적 역할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학문으로 들어가기 위한 도구, 예비지식으로 취급되었다.
2. 범주론
범주론은 범주에 대해 말한다. 범주론에서 말해지는 범주는 언어적인 면모와 존재론적인 면모가 강하다. 왜냐면 그것들은 논리학의 토대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범주론이 논리학에 속해야 할 저작인지에 대한 논란 역시 뿌리깊긴 하다. 이것에 관해선 포르피리우스의 이사고게와 암모니우스의 범주론 주석에서 논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범주론에 대해서 단어들을 분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3] 사물(존재하는 것들)을 대상으로 삼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4] 개념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5] 즉 문법, 존재론, 영혼론 곧 자연학적인 저작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인데 암모니우스는 셋 다 부분적으로 옳다고 말하며, 범주는 개념(단어)을 매개로 사물을 뜻하는 단어를 대상으로 한다고 말한다. 암모니우스가 말하길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적인 어떤 개체를 이 컴퓨터, 저 스마트폰처럼 지칭해서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범주를 통해서 보편자에 대해 말하고 싶다고 한다. 왜냐면 개별자들은 생성, 소멸하고 무수히 많아서 한정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지식의 대상에 속하지 않는다. 지식은 불멸하고 한정된 것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편적인 것에 대해 탐구해야 한다. 사물의 본성을 뜻하는 단어들은 결국 사람 영장류 생명체 실체 하는 식으로 종과 류를 거슬러 올라가 실체라는 최상위의 보편적인 범주로 귀속되게 된다.[6]
또, 참된 명제에서 술어로 자리잡는 10개의 범주 중 하나에 속하기 때문에 논리학의 첫 단계라고 말한다. 왜냐면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하기 위한 도구가 논증인데, 논증은 삼단논법이고, 삼단논법은 명제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명제는 명사와 동사 즉 주어와 술어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구조하에서 모든 술어는 반드시 10개의 범주 중 하나에 속한다는 것을 밝히므로 범주론은 논리학에 속한다고 말한다. 명제가 참과 거짓을 가른다면, 명제 가운데 술어 하나는 반드시 담당하게 되는 범주도 논리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사물과 언어를 구분하고 범주로 나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체(基體)라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 기체에 대해서 결합되어 지지 않은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대충 설명하면 문장이 결합된 말이고, 단어가 결합되어 지지 않은 말이다. 즉 문장이 아닌 단어가 기체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 기체라는 것도 4가지로 나누고 있다. 그 기준은 개별적이냐/일반적이냐, 실체가 있느냐/없느냐는 것이다. 즉 기체는 1)개별적인데 실체가 있고 2)일반적인데 실체가 있고 3)개별적인데 실체가 없고 4)일반적인데 실체가 없는 4종류가 있다. 먼저 개별적이냐 일반적이냐는 기체에 대해 말해지느냐 말해지지 않느냐와 관련된다. 기체에 대해 말해지면 개별적이다. 기체에 대해 말해지지 않으면 일반적이다. 다음으로 실체가 있느냐 없느냐는 기체 안에 있느냐 없느냐와 관련된다. 실체가 있는 것들은 기체 안에 있지 않다. 그러나 실체가 없는 것들은 기체 안에 있다. 예시를 통해 살펴보자.
개별적인데 실체가 있는 것은 특정한 무언가를 가리킨다. 말하자면 나무위키를 작성하고 있던 시점에 최근 변경 란에 떠 있는 카라멜_이란 인물은 개별적이다. 실체도 있다. 아만다 누네즈라는 인물도 개별적이고 실체도 있다. 온달이라는 인물도 개별적이고 실체가 있다. 반면 일반적인데 실체가 있는 것은 사람이다. 카라멜_, 아만다 누네즈, 온달 전부 다 사람에 속한다. 사람이라는 단어는 개별적이지 않고 일반적이다. 카라멜_, 아만다 누네즈, 온달과, 사람의 차이는 다시 말하지만 개별적이냐 일반적이냐다. 이 둘의 차이는 기체에 대해 말하느냐 말하지 않느냐로 구별된다. 예를 들어 카라멜_, 아만다 누네즈, 온달이라고 말한다면 카라멜_, 아만다 누네즈, 온달에 대해 개별적인 기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개별적인 기체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다음으로 실체가 없는 것들은 추상적인 대상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서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또 나무위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해 보자. 이런 것들의 존재는 좀 모호하다. 어쨌거나 위키라는 것들이 서버 안에 있다고 해 보자. 서버가 기체라고 가정해 보는 것이다. 또, 일반적인 대상인 위키의 경우 기체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위키라는 단어는 나무위키에 대해서 술어로서 기능하는 것이 가능하다. 위키피디아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술어로 기능하는 것이 가능하다. 기체에 대해 말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다시 말해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에 대해 술어로서 기술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위키란 것은 일반적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반면 나무위키라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해 보자. 이것은 여러 위키 중에서 개별적인 나무위키라는 것이다. 이 경우 나무위키에 대해서 얘기할 때 대충 생각해서 서버라는 기체 안에 있지만, 어쨌건 나무위키는 기체가 되는 서버 안에 있어서 실체가 없고, 또 위키라는 일종의 종류가 아니라 한 개체인 나무위키이기 때문에 개별적이다. 그래서 나무위키는 개별적이고 실체가 없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에 따르면 그렇다.
정리하면 개별적인 것은 카라멜_, 아만다 누네즈, 온달, 나무위키, 위키피디아 같은 것이다. 일반적인 것은 사람과 위키이다. 즉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개별적인 것, 사람과 위키처럼 일종의 정의, 종류, 분류, 범주 등에 속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일반적인 것들은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기체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반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더 이상 나눠질 수 없는 것이다. 카라멜_, 아만다 누네즈, 온달은 더 이상 나눠질 수 없는 존재이다. 그것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기체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연결될 수는 없다.[7] 실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추상적이냐/아니냐다. 나무위키, 위키피디아는 좀 애매하긴 해도 어쨌건 추상적인 대상이라고 한다면 카라멜_, 아만다 누네즈, 온달 등은 구체적인 것이다. 구체적인 것들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에 기체 안에 있을 수가 없다. 반면 나무위키나 위키피디아는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기체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논리학의 대상이 되는 것들을 구분하는 일종의 존재론적인 고려를 한다고 볼 수 있다.
카라멜_, 아만다 누네즈, 온달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람은 종에 속한다. 또, 사람은 동물에 속하는데 이 때 동물은 류에 속한다. 종끼리는 차이가 날 수 있다. 나무위키와 카라멜_은 여러 가지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데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 류 안에서는 차이가 나는 것은 서로 관계가 있다. 카라멜_은 인간에 속한다. 인간은 사람속에 속한다. 사람속은 사람과에 속한다. 사람과는 영장목에 속한다. 영장목은 포유강에 속한다. 포유강은 척삭동물문에 속한다. 척삭동물문은 동물계 즉 동물에 속한다. 카라멜_이 두 눈이 달렸다는 것을 나무위키와 비교해 보면 아무 상관이 없다. 나무위키가 서술규칙이 있다는 점도 카라멜_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카라멜_이 두 눈이 달렸다는 것은 거미와 비교해 보면 상관이 있다. 거미는 절지동물문에 속하는데 눈이 둘이냐 아니냐는 인간과 거미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이기 때문이다. 포유강이 두 눈이 달렸다고 한다면 카라멜_도 치타도[8] 두 눈이 달려있어야만 한다. 카라멜_과 치타는 다른 종에 속하지만, 같은 류에 속하기 때문에 같은 류의 특성은 공유해야만 한다. 그러나 포유강과 거미강은 척삭동물문과 절지동물문으로 서로의 문,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다시 말하자면 류가 다르다. 이렇게 볼 경우 포유강과 거미강은 특성을 공유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아예 다른 류에 속하는 카라멜_과 나무위키와는 다르게, 포유강과 거미강은 동물이라는 같은 류에 속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포유강과 거미강은 일부의 특성을 공유하기도 할 것이다.
이제 다시 결합되지 않은 말에 대해 얘기해 보자면, 그것들은 10가지의 범주로 나뉜다. 1. 실체. 2. 양. 3. 질. 4. 관계. 5. 장소. 6. 시간. 7 위치. 8. 소유. 9. 능동. 10. 수동으로 나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것들 단독으로는 명제가 될 수 없으며, 결합해서 문장 형태가 된 후에야 명제가 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달린다, 서울에서, 다섯 배, 황신혜 등은 참, 거짓이 없고 문장 형태가 되어야 참, 거짓이 있기 때문이다.
실체는 그리스어로 'ousia'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자주 나오며 본질로도 옮겨지고 하는 그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일 실체와 제이 실체를 말하는데 제일 실체는 앞서 말했던 기준으로는 개별적이고 실체가 있는 기체를 가리킨다. 제이 실체는 일반적이고 실체가 있는 기체이다. 제일 실체가 제일인 이유는, 제일 실체가 없으면 제이 실체는 있을 수가 없고, 그렇기에 제일 실체로부터 제이 실체가 딸려나온다는 것이다. 즉 카라멜_과 같은 개별자들이 없으면 사람과 같은 건 성립할 수가 없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다.[9]
어쨌거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따르면 제일 실체가 좀 더 본질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이 실체들 가운데에서도 류보다는 종이 더 실체에 가깝다. 카라멜_, 사람, 동물과 같은 순서로 실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즉 종과 류와 제일 실체냐 제이 실체냐에 따라 어떤 것들이 실체와 가깝고 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카라멜_은 아만다 누네즈보다 더 사람이라거나, 나무위키는 위키피디아보다 덜 위키라고 할 수는 없다.
또한 '''이것'''이라는 단어는 오직 제일 실체에만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이 제이 실체에 해당하지 않는 이유는, 제이 실체의 경우 기체가 하나이지 않고 여러 가지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카라멜_, 아만다 누네즈, 온달 등등을 가리킨다. 제이 실체는 사실 사람이라는 것을 판별시켜주는 일종의 질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동시에 사람이라는 실체를 가리키기도 한다.[10]
제일 실체는 변화가 가능하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서 카라멜_ 문서에 굵은 글씨로 강조되어 있는 것처럼 목소리가 달달하다고 하자. 이 특정 목소리의 성격을 ㄱ으로 치환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카라멜_의 목소리도 포함되는 ㄱ이라는 어떤 특성은 배중률에 의해 달달하면서 동시에 씁쓰레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카라멜_의 목소리는 예를 들어서 편도선이 부었다거나 하면 씁쓰레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제일 실체가 아닌 것들, 진술이나 생각도 이랬다 저랬다 변할 수 있는 것처럼도 생각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니라고 확고히 선을 긋는다. 진술이나 생각이 이랬다 저랬다 변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참과 거짓의 문제에 있어서이다. 어떤 진술이나 생각이 어떤 사태와 결합되느냐에 따라서, A의 경우 참이 되지만 B의 경우 거짓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제일 실체의 경우 앞서 말했지만 평소에는 목소리가 달달했다가 편도선이 부었을 경우 씁쓰레해지듯이 실체 스스로가 변화하면서 상반된 특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즉 사물이 말에 앞서서 있는 것이며, 또 말의 참 거짓이 변화하는 것은 전적으로 사물 의존적이다.
이후 각각의 범주에 대해 고찰한 후, 대립관계, 선행관계 등에 고찰하며 범주론은 마무리가 된다.
흔히 우리들은 명제를 논리학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천지는 큰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명제가 될 것이고 따져볼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명제라는 것의 구성요소인 천지는 무엇이고, 큰 것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말하자면 천지는 기체에 속할 것이다. 크다는 것은 10가지의 범주 중 관계 혹은 질에 속할 것이다. 천지는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때 큰 것으로 느껴지지만 사실 크다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천지가 좀 모호하지만 지구를 말하는 것이라고 가정해 본다면 태양과 비교해 볼 때 당연히 엄청나게 작은 것이다. 예를 다시 들어, '''터럭은 작은 것이다.'''라고 말해 보자. 이 터럭이 사람의 머리카락이라고 했을 때 당연히 작은 것으로 느껴지지만 원자와 비교해 본다면 당연히 엄청나게 큰 것이다. '''천지는 크고 터럭은 작다'''는 말은 장자의 추수편에 나오는 것이며, 장자에서도 천지가 크고 터럭이 작다고만 얘기할 수 없다고 한다.
사실 이런 내용은 장자 혜시편에도 나와 혜시도 말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장자는 전반적으로 이런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재미있는 우화로 풀이해서 썼으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은 강의 노트 비슷한 것이므로 비교적 딱딱한 분석의 형태로 남게 되었다. 장자가 혜시를 평가하길 지나치게 사물에 집착하고 큰 것을 놓치고 쓸데없이 시비를 판별했다고 한 바 있다. 혜시를 비롯해 몇몇 소피스트들의 착상은 분명히 아리스토텔레스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혜시의 사상을 비판하지만 동시에 혜시의 논변에게도 영향을 받은 장자의 수많은 우화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하지만 장자가 '''우물 안 개구리와 더불어 바다를 논할 수 없으며''', '''여름 벌레와 더불어 얼음을 논할 수 없다'''며, '''천지는 나와 더불어 생겼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하나이다'''와 같은 방향으로 혜시의 논변과 시비를 비판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던 헤라클레이토스나, '''세계의 중앙은 연나라 북쪽이거나 월나라 남쪽'''이라는 혜시처럼 순간적인 착상 및 영감을 통해 일상생활의 언어가 가지는 아이러니를 꿰뚫었던 것과는 달리, 철저히 분석적인 작업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모습은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의 도움이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즉 범주론은 명제를 이루는 요소들에 대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11]
3. 변증론
범주론 다음을 차지하는 오르가논의 다음 저작은 변증론이다.[12]
토포이에 대해 다루는데, 토포이란 곳은 장소를 의미한다. 이 토포이란 말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논의가 이루어지는 장소, 터전이라는 식으로 사용한다. 즉, 논의가 이루어지는 형식이나 각종 세부사항에 대한 분석이 바로 변증론이라 할 수 있다. 수백가지의 세세한 토포이를 제시하는데 중요해 보이는 것이 있는 가 하면 상당히 시시콜콜해 보이는 것도 많다.
전반적으로 쓸데없이 시시콜콜해 보이는 특성 때문에 오르가논 내에서 별로 중시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아바스 왕조에서는 여러 민족과 세력이 한 국가 안에서 경합하는 가운데, 이단 세력들과의 논쟁을 위해서 변증론이 강조되기도 했다.
3.1. 소피스트적 논박
변증론의 마지막 권으로 여겨지나, 또 독자적인 저작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소피스트들의 기술과, 그들의 기술이 펼쳐지는 전문적인 말싸움에 관해 다루고 있다.
4. 명제론
명제라는 것은 문장 중에서 참 거짓을 가릴 수 있는 문장을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논리적으로 판가름될 수 있는 문장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명제론에서 이 명제에 관해 문법적, 논리적인 분석을 실시한다.
5. 분석론
아리스토텔레스 오르가논의 주저라고 할 수 있으며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책이 바로 분석론이다. 전서, 후서로 나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 분석론 하나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어 번역 문제에 있어서 상당히 레전드적인 면모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김재홍이 한국어 번역에 도전하고 있다. 김재홍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해서 고전 번역을 적지 않게 발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시학을 70년대에 번역해서 발표했으니 상당한 업적을 세운 셈이다.
또한 분석론과 소피스트적 논박을 90년대 후반에 번역해서 발표했다.
문제는 그가 최소한 이 때부터 분석론 전서와 후서를 번역할 것이라 공언해 왔으며, 인터뷰필칭 분석론을 번역하겠다고 공언해 왔다. 놀랍게도 현시점은 2020년인데 분석론 전서와 후서는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김재홍이 번역하겠다고 공언해 왔던 이 분석론 전서, 후서야말로 대한민국 철학계 역대 최대의 베이퍼웨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 오르가논의 몇몇 부분들은 위서 논란이 있다.[2]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체계가 온전하게 조지 부울 시대까지 이어졌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논리학도 나름대로 상당한 발전과 개선이 있었으나, 조지 부울 전까지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웠던 얼개는 유지되었다는 것이다.[3] 말해지는 것들 중 일부는 결합하여 말해지고 일부는 결합 없이 말해진다.[4] 존재하는 것들 중 일부는 어떤 기체에 대해 말해지지만 그 어느 기체 안에도 있지 않다.[5] 유와 관련해서는 이런 것으로도 충분하다.[6] 즉 컴퓨터라고 말할 때 컴퓨터라는 말이 직접 지칭하는 어떤 하나의 대상은 실제 세계에 없다. 그러나 범주는 계산하는 기계와 같은 개념을 매개로 컴퓨터란 단어를 통해 내 앞의 컴퓨터와 같은 개별자를 뜻하게 된다.[7] 예외적으로 카라멜_, 아만다 누네즈, 온달처럼 구체적인 것들과 달리, 추상적인 것들은 더 이상 나눠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기체에 대해 말할 수 있기도 하다.[8] 그게 한국의 가수건 맹수건 무비 스타 침팬지건 간에 말이다.[9]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주장은 고대부터 논란이 있었다. 그의 스승 플라톤의 의견과 대비되는 면이기도 하다.[10] 지시대명사의 정의에 대한 고찰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이라는 것은 대충 사람인 것 같고 단 맛이라는 것은 대충 단 맛인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이라는 지시대명사, 이것이라는 단어는 사람이라는 단어나 단 맛이라는 단어에 비하면 과연 '''이것'''이라는 단어가, 이 세상에 있는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있는지 좀 모호한 것 같다.[11]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대화편이 장자처럼 멋진 이야기로 가득차 있는지, 혹은 혜시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날카롭고 분석적인 모습들을 보여줬는지는 그들의 문헌이 남아 있지 않으니 알 수 없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들의 저작이 그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면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12] 보통은 범주론 다음 명제론을 꼽는데 한국에 변증론을 번역한 김재홍이 변증론이 다음이라니까 그냥 다음으로 서술한다. 본래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이 많이들 그렇지만 오르가논 역시 나뉘어진 저작을 후세의 편집자들이 편집한 것이다. 그리고 후세 신플라톤 학파에 의해 범주론 다음 명제론을 공부하는 방식이 자리잡혔다고 알려져 있다. 반면 일부 소요학파들이 범주론의 다음 변증론을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일반적인 오르가논의 나열 방법에 대한 논증은 5~6세기 암모니우스가 남긴 것이 가장 처음인데, 암모니우스 역시 그의 논문에서 그의 스승과 스승의 스승 등의 영향을 밝히고 있다. 암모니우스는 포르피우스가 말하길, 사람들이 어떤 사물에 어떤 음성을 이름으로 붙이는 것이 1차적이며 그것이 범주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단어는 명사, 어떤 단어는 동사에 속함과 같은 문법적 지식을 사람들이 2차적이라고 깨닫는다고 말한다. 하나 더, 범주론은 보편적인 대상이 지식의 대상이자 명제의 대상이라고 밝히면서 끝나는데, 그 범주에 속하는 주어와 술어 가운데 어떤 주어와 술어의 결합이 참과 진리의 값을 가지면서 명제가 되는지를 밝히기 때문에 명제론이 범주론 다음에 오는 저작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