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

 

'''관등'''
'''대형(大兄)'''
'''본관'''
봉성 온씨
'''이름'''
온달(溫達)
'''국적'''
[image] 고구려
'''가족관계'''
아내 평강공주, 장인 평원왕[1]
'''사망지'''
아차산성
'''생몰년'''
? ~ 590
『삼국사기』, 제45권, 열전 제5, 온달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평강공주와 만나다
2.3. 왕의 사위가 되다
2.4. 최후
3. 의문점
3.1. 결혼과 출생
3.1.1. 추측1 - 하급 귀족 출신의 신흥 세력
3.1.2. 추측2 - 신흥 평양성계 남방귀족
3.1.3. 추측3 - 서역계 귀화인(소그드인)
3.2. 온달이 전사한 곳은 어디인가
4. 기타
4.1. 관련 사적지
4.2. 전설
4.3. 그 외에
5.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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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의 장수이자 봉성 온씨의 시조. 그리고 한국에서 바보의 대명사처럼 유명한 인물.
평원왕의 딸인 평강공주와 결혼하여 왕의 사위가 되었고 전공을 세워 벼슬길에 올랐으며 영양왕 대까지 활약했다.
전래동화로도 유명한 온달 설화의 주인공이며[2] 그야말로 여자 잘 만나 인생이 확 편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3] 이 때문에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남성 버전인 온달 컴플렉스라는 말이 생기기도 하였다. 다만 전자에 비해 잘 쓰이지는 않는다.

2. 생애



2.1. 초기


溫達 高句麗平原王時人也 容貌龍鍾可笑 中心則睟然

온달은 고구려 평원왕 때의 사람이다. 용모가 못생겨 우스꽝스러웠으나 마음은 순수하였다.

家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집이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거리를 왕래하니, 그 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온달’이라 했다.

삼국사기》 온달 열전

온달은 본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로, 그 생김새가 우스울 정도로 못생겼다고 전한다.
온달은 어릴 적부터 홀어머니와 살았는데 어머니가 두 눈이 멀어 일을 하지 못하였고 집안이 가난하여 먹고 살 길이 없었다. 때문에 사람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구걸하며 먹고 살았다. 어찌나 가난했는지 나중에 평강공주와 처음 만났을 때에는 나무 껍데기를 벗겨 먹으려고 산에 가 있었다.
그러나 온달이 추레하고 남루한 꼴로 매일 비럭질을 하고 다니다 보니 모습이 우스웠는지 평양성 사람들이 온달을 '바보 온달(愚溫達)'이라 불렀다고 한다.
바보라고 불린 것에는 다른 해석도 있다. 본문에도 '마음은 순수하였다.'라고 쓰여있듯이 '온달은 가난해서 산을 뒤져서 먹고 살았는데 귀한 약재를 발견해도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그의 형편을 감안해 그냥 주거나 적은 대가만 받았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를 두고 바보라고 불렀는데 온달은 별 말 하지 않고 웃어넘겨 더욱 바보 취급을 당했다.'는 설.
어쨌거나 모습 때문에 바보로 불렸든, 행동 때문에 바보로 불렸든 실제로 흔히 말하는 발달장애인이나 저지능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바보가 글이나 무예를 깨우쳐 전쟁 영웅이 되기는 어려웠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평양 백성들뿐만이 아니라 국왕까지 바보 온달의 소문을 듣고 딸에게 말했을 정도면 온달의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2.2. 평강공주와 만나다


당시 고구려의 왕이었던 평원왕에게는 평강공주라는 딸이 있었다. 평강공주는 어릴 적부터 자주 울었는데 그럴 때마다 평원왕은 "너는 너무 잘 울어서 시끄러우니 사대부들에게는 시집을 못 보내겠다. 아무래도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보내야겠는걸?"하고 우스개소리를 하며 놀렸다고 한다.
후에 평강공주가 결혼나이가 되자 평원왕은 딸을 상부(上部) 고씨(高氏)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평강공주는 "아버님이 옛날에 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했으니 그 사람에게 시집가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평원왕은 어이가 없었으나 평강공주는 "대왕께서는 항상 '너는 필시 온달의 아내가 되리라'라고 말씀하시더니 지금은 어찌 예전의 말씀을 고치십니까?"라며 고집을 부렸다. 결국 평원왕은 크게 실망하였고 화가 난 나머지 밖으로 나가버리라고 꾸짖었다. 물론 아버지 마음에 진짜 나가라는 것은 아니고 아빠 말을 들으라고 으름장을 놓은 거였겠지만 평강공주도 독이 올랐는지 금팔찌와 패물을 챙겨서 진짜로 궁을 나가버렸다.
평강공주는 그 길로 온달의 움막집을 찾아가서 온달의 어머니에게 대뜸 절하고는 온달이 있는 곳을 물었다. 이때 온달은 배가 고파서 산에 올라가 느릅나무 껍데기를 벗겨 먹으려고 하고 있었는데 평강공주가 산 위로 올라와 온달에게 청혼하였다. 온달은 처음에는 영문도 몰라 귀신에 홀렸다 생각하고 거절했지만 이후 그녀의 진심을 알고는 결혼한다. 평강공주는 궁 밖으로 나오면서 가져온 예물을 팔아서 , , 노비를 구입하여 살림살이를 갖추었고, 비루 먹은 을 사와서는 열심히 길러 훌륭한 말로 키웠다.[4]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해진 온달은 고구려에서 매년 개최하는 사냥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2.3. 왕의 사위가 되다


당시에 고구려에서는 매년 봄 3월 3일마다 낙랑의 언덕에서 사냥대회를 열었는데, 이때 산짐승의 고기로 하늘과 선천에 제사를 지냈다. 이에 평원왕과 여러 신료들, 5부(五部)의 병사들까지 모두 참석하였다.[5]
온달은 평강공주가 사와서 잘 기른 을 타고 대회에 나갔는데, 수많은 짐승을 사냥하며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평원왕은 대회에서 우승한 온달을 불러 그 이름을 듣고는 크게 놀랐으나, 아직 온달을 사위로 인정하려 하지는 않았다.
이후에 중국 후주무제[6]가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였는데,[7] 평원왕 역시 군사를 이끌고 이산(肄山)의 벌판[8]에서 맞아 싸웠다. 온달은 이때에도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선봉에 서서 수십 명의 적을 쓰러뜨렸다고 한다. 온달이 맹렬한 기세로 앞장서서 적을 무찌르자 뒤따르던 군사들도 사기가 올라 후주군을 공격하니, 결국 고구려 군대가 대승을 거두었다.

時, 後周武帝出師伐遼東, 王領軍逆戰於拜山之野. 溫達爲先鋒, 疾鬪斬數十餘級, 諸軍乘勝奮擊大克. 及論功, 無不以溫達爲策一.

이 때,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요동을 공격하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 들에서 맞아 싸웠다. 그 때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용감하게 싸워 수십여 명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이 기세를 타고 공격하여 대승하였다.

삼국사기


그 뒤에 주(周) 의 무제(武帝)가 지나[9]

북쪽을 통일하여 위염을 떨치고 , 고구려의 강함을 시기하여 요동에 침입해와서 배산(拜山)의 들에서 맞아 싸우는데, 어떤 사람이 혼자서 용감하게 나가 싸웠다. 칼 쓰는 솜씨가 능란하고 활 쏘는 재주도 신묘하여 수백 명 적의 군사를 순식 간에 목베었다. 알아보니 그는 곧 온달이었다.

조선상고사

이후에 평원왕이 사람들을 모아 전공을 평가하는데, 참전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온달의 전공이 최고라고 평하였다. 이에 평원왕은 '''"이 사람이 내 사위다!"'''라고 기뻐하였다. 평원왕은 예를 갖추어 온달을 맞이하였으며, 대형(大兄) 벼슬을 내렸다. 이후로 온달은 평원왕의 총애를 받아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위엄과 권세가 대단해졌다고 한다.

2.4. 최후


이후 590년, 평원왕이 승하하자 그의 아들이자 온달의 손위 처남인 영양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때 온달은 40여년 전 양원왕신라에게 빼앗겼던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한 출정을 허락해줄 것을 청하여 영양왕의 수락을 얻었다.
온달은 출전하기에 앞서 '''"죽령 이서(以西)[10] 땅을 되찾지 못하면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는 신라 정벌에 나서다가 그는 격전 끝에 신라군의 화살을 맞아 온달산성[11]에서 전사했다. 그후 기록이 없어서 결국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되찾지 못했다고 추정되었으나 연개소문이 신라에게 죽령 이북의 땅을 '수나라와 전쟁할 때 신라가 죽령 이북의 땅을 뺏었기 때문에 다시 회복하려는 것'이라고 하면서 달라고 요구했는데 이것은 온달이 사망한 590년에서 수나라와의 전쟁이 일어난 598년, 612-614년 사이에 고구려가 죽령 이북의 땅을 잠시 회복했었다는 말이 된다.
이후에 고구려인들은 온달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려 하는데 시신을 담은 관이 땅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자 평강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며 '''"생과 사는 이미 정해졌으니, 이제 편안히 가시옵소서."'''라고 애원하자 그제서야 땅에서 떨어져 움직였으며 한편 온달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영양왕은 크게 애통해했다.
어쨌든 이로 인해 고구려의 대 신라 감정이 더 좋지 않게 되면서 이후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는 계속 대 신라 협공을 한다.

3. 의문점



3.1. 결혼과 출생


평강공주가 유력한 귀족과 결혼하지 않고 하필이면 비천한 신분의 온달과 결혼한 사실을 두고, 평원왕이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내놓은 술책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며, 혹자는 평강공주의 가출이 집안 문제 때문이었다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현재에도 이런 결혼은 막장드라마판타지에서나 나올 법한 일. 현대로 치면 대통령이나 총리 등 국가원수도 배출하는 유력 정치인 가문의 딸이 노숙자와 결혼한다는 식인데,[12] 엄격한 신분제였던 고대에 당시 저런 식의 결혼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3.1.1. 추측1 - 하급 귀족 출신의 신흥 세력


보잘것 없던 하급 귀족으로 후주와의 전쟁에서 공훈을 세워서 부마가 되었다는 설이다. 이 때 온달은 대형(大兄)의 벼슬을 받았는데, 이것은 신당서에 나타난 고구려 12관등 중 6등급의 해당하는 관직이므로, 이렇게 대단한 전공을 세우고 관직이 이 정도에 그쳤다는 것은 온달이 하급 귀족이라는 유력한 증거라고 본다. 만약 귀족이 아니었다면 고구려 사회에서는 대형 관직조차 받지 못했을 것이므로, 하급 귀족이나 몰락한 귀족의 자손 정도는 될 것이다. 물론, 이것만 해도 입지전적 인물.
이렇게 등급은 낮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평원왕의 총애를 받고 부마가 되자,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고구려의 고급 귀족들이 이를 "바보와 울보의 결혼"이라고 뒤에서 비꼬면서 바보 온달 설화가 생겨났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또한 당시 평원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을 지지해줄 신진 세력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결탁했는데, 이들은 기존에 권력을 장악한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하급 귀족들 출신들일 수밖에 없었고, 온달도 그들 중 하나로 추정된다. 단순히 출신이 미천해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들과 대립각을 세우기 위해 관직을 받고 부마가 되었을 온달이 기존 세력들의 눈에 곱게 보였을 리가 없을 것이다.

3.1.2. 추측2 - 신흥 평양성계 남방귀족


온달은 평민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며, 평양성계를 대표하는 귀족이었을 확률이 높다는 설. 바보에 평민으로 설화에 나타나고 기록된 건 고구려 정계를 주도하던 귀족들이 국내성계 북방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왕족을 비롯한 국왕파 귀족들 즉 평양성계 남방귀족은 중국과 유목민족과 끊임없이 힘을 겨루며 존재감을 과시하던 국내성계열 귀족이 가지던 세력과 위상에는 미치지 못했다. 고구려가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중 가장 확실한 하나는 상류층의 세계가 실력 본위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고구려대성팔족이 국가 전반을 장악하고 좌지우지한 백제골품제로 얽매인 신라와 달리 평민이나 노예 혹은 이민족이라 할지라도 국가에 공훈을 세운다면 상류층으로의 진출이 가능했고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강등[13] 당하는 세계였다.
천도는 왕이 왕권이 강할 때 왕권과 반목하는 지배층들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좋은 수단이였다. 고구려는 천도를 두 번 했는데 첫 수도 였던 졸본성이야 그냥 산골마을로 사실 고구려의 위상에 어울리는 땅이 아니였고 고구려의 입지가 커짐에 따라 유리명왕이 수도를 옮긴 건 명분과 실리를 모두 가진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에 반해 두번째 천도에서는 결과가 다르게 나타났는데 장수왕 대에서는 장수왕 본인의 힘에 의해 국력이 최절정에 달하는 전성기였고 그런 왕권을 바탕으로 평양성으로 천도하는데에는 성공했지만 장수왕 후대에는 국내성으로 대표되는 북방귀족은 말갈과 거란족을 잘 아우르고 한족과 선비족과 맞선 싸움에도 국토를 잘 건사한 반면 평양성으로 대표되는 남방귀족은 광개토대왕, 장수왕 때 얻은 국토의 상당부분을 잃어버려 평원왕 대에서는 국왕과 국왕을 지지하는 남방귀족의 입지가 쪼그라져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안원왕 때 일어난 내전이 왕위계승분쟁을 빙자한 국내성계 vs 평양성계의 싸움이며 여기서 국내성계가 승리했다는 연구도 있을 정도이다.[14] 그런 상황에서 온달이라는 사람은 다시 한번 남방귀족의 위상과 왕의 입지를 탄탄하게 다져줄 인재로 평원왕에게 간택받았을 확률이 높다. 물론 북방귀족들은 그런 온달이 상당히 눈엣가시처럼 여겼을 것이고, 이런 반감이 온달에 대한 비하로 연결되었을 것이란 추측이다....
그러나 이건 잘못된 추측이다. 오히려 안원왕 때 일어난 내전은 '''세군이 국내성계, 추군이 평양성계'''라는것이 정설이며, 이후 양원왕 대에 평양성계가 정국을 주도하여 왕권이 약해졌다가 평원왕 대에 온달처럼 '''둘 중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세력'''을 끌어들여 왕권을 강화했다는 것이다. 온달은 평원왕의 온달에 대한 대우를 감안할 때 경제적 능력이 약한 중, 하급 귀족 출신으로 추측된다. 아니, 애초에 원래 고구려에서는 5세기에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왕권강화를 위해 전통적인 귀족 세력과 다른 장수왕의 남진정책을 도운 낙랑·대방 등 황해도 출신 토착 세력들이 등용되었으며,[15] 전술했듯이 장수왕 이후 많은 땅을 뺏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북방귀족의 부흥과 남방세력의 약화로 이어졌다는건 비약이다. 애초에 중국과 국경을 맞댄 요동 지역 세력과 집안을 중심으로 한 만주 중남부 세력, 즉 국내성 세력은 다른 세력이다. 또, 요동성 세력은 단 한번도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거나 중립을 깨트린 적이 없으며, 연개소문 집권 이후 안시성의 저항이 유일한 '정치적 중립을 깨트린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건이다. 물론 이후 당과의 전쟁 때 보면 연개소문이 그 이후로도 요동세력을 장악하진 못한 것 같고 요동세력도 연개소문을 딱히 좋아하지 않은 것 같지만, 그렇다고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요동세력이 정치적 중립성을 깨고 연개소문에게 불복한다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보장왕 항복 이후 끝까지 저항한 것이 다름아닌 요동세력이다. 그리고 연개소문을 위시한 국왕파 귀족의 반란? 연씨 가문은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가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다거나, 천리장성 축조에 기여한다거나, 그 계보가 샘〔泉〕에서 생겨났다는 독자적인 시조 전승을 가지는 등 그 자체로도 명문으로 꼽히고 있었다. 따라서 영양왕대의 연자유와 영류왕대의 연태조, 그리고 연개소문 등이 속한 연씨 세력은 당시 고구려 귀족 중에서도 손꼽히는 유력자였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연개소문을 입지가 약해진 국왕파 남방귀족으로, 그의 정변을 남방계의 쿠데타로 보는 것은 무리이다. 연개소문이 경계를 받았던 건 그의 아버지 연태조의 위상과 그의 성격 때문이다. 연개소문의 성격을 보면 알겠지만(...)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 소위 '돌출된' 인물이기 때문에, 평원왕 대에 왕권강화를 위해 갑툭튀한 온달 같은 사례가 또 나오는 것을 경계하던 집권 추군 세력의 견제라는 것이 정설이다. 다만, 평원왕 대에 친왕파 세력이 등용되었는데 왜 다시 추군이 집권세력이 됐냐고 할 수 있는데, 이건 수와의 전쟁 때문이다. 비록 수나라는 이겼지만 그사이 오늘날의 북한강 즈음으로 추정되는 땅을 무려 500리나 빼았겼고, 이것이 약화된 추군 귀족들에게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줬다.[16]

3.1.3. 추측3 - 서역계 귀화인(소그드인)


아예 온달이 토착 고구려인이 아니라 고구려로 귀화한 서역 출신 이민족이라는 설도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란계인 소그드인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 근거는 삼국사기의 내용인데, 고구려인들이 온달을 바보로 놀리는 이유로 덜떨어진 행동이 아니라, '못생긴 얼굴과 남루하고 비천한 옷 매무새'가 거론된다. 온달이 소그드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못생긴 얼굴'을 토착 고구려인과 완전히 다른 전형적인 백인 외모로, '남루하고 비천한 옷 매무새'를 소그드인의 전통의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온달이 바보로 놀림받은 또다른 이유가 소그드어 억양의 어눌한 고구려어 때문이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게다가 실제로도 고구려가 소그드인들과 교류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우즈베키스탄사마르칸트에 있는 아프라시압 벽화에 고구려 사신이 그려진 게 대표적이다. 신당서 또한 소그드인의 왕이 온씨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만약 온달이 진짜로 소그드인이었다면 소그드 왕족 출신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국에서 온씨 자체가 희귀성씨라는 점 또한 이러한 주장에 뒷받침이 되고 있다.[17] 굳이 이러한 사례가 아니어도 소그드인들은 동아시아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민족이기 때문에[18] 온달을 소그드인으로 추정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3.2. 온달이 전사한 곳은 어디인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영양왕 1년(서기 590년), 온달이 영양왕에게 청하여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찾고자 출정하면서 "'''계립현'''(鷄立峴, 현 조령 인근[19])'''과'''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다시 찾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하고 떠나, '''아단성(아차성[20])'''에서 신라군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온달이 전사한 장소가 문제인데, 서울특별시 아차산아차산성충청북도 단양군온달산성이 서로 온달과의 연고를 주장하고 있다. 이 두 장소 중에서 서울 아차산설을 주장하는 것이 이병도정약용으로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나, 서울은 온달이 되찾아오겠다던 죽령에서 너무 멀기 때문에 겨우 18km 북쪽에 위치한 단양군 온달산성이 맞다는 설이 대립한다.
아차산의 발굴조사에서 고구려 계통의 유물들이 출토되기도 하고, 또한 당시 고구려군이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진 돌로 지은 전초기지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문헌상으로도 광개토대왕 당시 아신왕을 털어버릴 때 수륙양면으로 공격하여 미추홀(인천)과 아단성을 함락시키고, 백제를 압박하다가 백제 아신왕이 계속 저항하려 하자 아리수(한강)를 건너 백제 위례성이 함락 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아차산성 쪽이 유력하다.[21] 또한 '계립현과 죽령 서쪽'이 단순히 그 인근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넓은 의미로 '한강 유역 전반'을 일컫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기에 참조 서울이 해당될 수도 있다. 다만 지자체들간의 싸움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확실하지는 않다' 정도지만.
그러나 아차산성의 발굴조사성과와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군의 발굴성과는 엄연히 다르다. 쉽게 아차산이라는 말이 나오니 둘 다 고구려 유적이구나라고 생각하지만 아차산성 출토 유물은 일부 백제 유물을 포함한 신라 유물 일색이었고, 아에 신라에 의해서 축조된 산성으로까지 추정되고 있다. 즉, 아차산성이 아단성이라면 광개토대왕아신왕대의 기록이랑은 맞지 않다는 반증이될 수도 있...었으나 2016년에 고구려 와당이 아차산성에서 확인되면서 이것도 복잡해지게 되었다.
이처럼 복잡한 온달의 격전지에 대한 쟁점은 서울교대 임기환 교수의 기고문에 잘 정리가 되어 있다.

4. 기타



4.1. 관련 사적지


  • 온달이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하는 아차산성에서는 고구려 관련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였으며, 온달과 평강공주동상이 세워져 당시의 전투를 기리고 있다.
  •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에 온달 장군이 쌓아 올렸다는 온달산성이 있다. 사적 제264호이며 1979년 지정되었다.

4.2. 전설


  • 단양군에 있는 온달동굴은 이곳에 온달과 평강공주가 함께 머물렀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 같은 위치에 온달이 쉬고 갔다고 하여 휴석동이라 불리는 인근 마을에도 온달의 흔적이 남아있다. 마을 뒷산에 놓인 윷판바위는 온달이 군사들과 윷놀이를 했다는 곳이다. 온달이 바위에 손으로 직접 말판을 그렸다는 것이다.
  • 충주 월악산에 가면 지름 1m의 돌이 있는데, 온달이 그 돌로 공기놀이를 했다는 전설이 있다.
  • 단양군 향산리에 면위실이 있다. 면위실은 면위곡이라고도 하며 온달이 이곳에서 위험을 면하였다하여 붙은 마을 이름이라고 한다.
  • 단양군 장발리에 있는 선돌에도 출처를 알 수 없는(?) 민간전설이 내려온다. 온달 누이동생에 대한 전설이다.
  • 충주 미륵리에는 마을 중심부를 말무덤이라고 부르는데, 옛날 온달장군이 적병과 싸우다가 그의 말이 창에 맞아 죽어 그 말을 이곳에 묻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 아차산에는 온달 장군이 태어났다고 하거나 또는 온달이 물을 먹어서 온달샘으로 불리는 민간전설이 채록된 약수터가 있다.

4.3. 그 외에


자주 쓰이는 표현은 아니지만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반대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로도 쓰인다. 즉, 잘난 여자가 자신을 빛내줄 거라 믿는 남자들을 빗대어 '''바보 온달 컴플렉스'''라 한다. 또다른 은어로 아예 '''온달'''이 있는데 '''여자친구 혹은 아내보다 못난 남자'''를 뜻한다.
충북 단양군의 온달산성과 석회동굴에 이름을 붙인 온달동굴에서 매년 10월초에 온달문화축제를 하고 있다.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산동리에 봉성 온씨를 위한 사현사가 있다.
고구려-당 전쟁에 참여한 고구려의 장수 온사문이나 신라인인 온군해[22] 등이 같은 온씨라는 점에서 온달과 혈연관계라는 이야기가 많이 퍼져있으나, 당대의 관련기록은 없고 사실여부는 불명이다.
무덤의 위치와 관련해 한때 단양군에 있는 방단적석 유구의 '태장이묘'가 온달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으나 발굴 조사결과 유품이나 매장과 관련된 시설도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다.[23] 북한 학계에서는 위치와 벽화를 보고 추정하여 평양 진파리4호고분을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합장무덤으로 주장한다. 중국 어디엔가 있다고 주장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학계에서는 그야말로 뜬구름을 잡고 있는 모양.

5.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신분 차이를 극복한 사랑이라든가 주도적인 여성상, 평민에서 귀족이 되었다가 전사하는 파란만장한 생애 등 여러모로 사극에 어울리는 요소를 가지고 있음에도 이상하게 드라마로 만들어지질 않는 인물. 아무래도 초창기 한국 사극이 조선시대 위주로 다루다가 고려,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원효(1986) 정도를 제외하면 삼국기태조 왕건처럼 왕이나 그에 권하는 권력자가 주로 조명되는 탓인 듯 하다. 다만 인형극 온달(1976)은 방송되었다. 일단 드라마의 주시청자층이 여성인데 여성에게는 온달 스토리가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것 같다. 그 반대인 신데렐라 스토리는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KBS에서 천추태후의 후속작으로 온달의 이야기를 다룬 사극을 기획 중이었으나 천추태후가 쪽박을 차는 바람에 엎어졌으며, 인건비가 증가하면서 제작비도 올라가고 PPL을 넣을 수 없는 구조적인 한계도 겹치면서 TV조선에서 저예산으로 만드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사극이 거의 제작되지 않고 있다가 2021년 KBS에서 온달과 평강공주의 사랑을 다루는 달이 뜨는 강이 제작된다.
다만 온달 설화를 모티브로 삼은 드라마는 여러 편 있었으며 개중에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작품도 있는데, 점프온달왕자들, 내조의 여왕, 천하무적이평강(KBS), 내일도 승리(MBC) 등이 대표적이다.
김은정의 만화 아스피린에서는 온달에게서 모티브를 따온 듯한 동명의 캐릭터 온달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역사상의 실존인물인 온달과 비교하자면 심히 고인드립에 가까울 정도의 막장 캐릭터이다.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어 관련된 영화가 몇 개 보인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는 1961년에 만든 이규웅 감독의 영화이다. 여고생 시집가기는 2004년에 만든 오덕환 감독의 코메디 영화이다. <온달전>은 1986년 북한에서 만든 영화이다.
KBS2의 1987년 '동화나라ABC'에서 국산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나온다. 어린이 영어 교육과 학습 목적으로 제작하였다고 한다.
최인훈의 희곡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에서는, 실은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것이 아니라 부관에게 살해당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 혼령이 되어 나타나서는 자신의 억울함을 평강공주에게 호소한다. 근데 원수를 갚기는커녕 평강공주도 흑막에게 살해당한다(…).
개그 콘서트의 코너 사마귀 유치원에 등장하는 쌍칼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낮에는 바보였지만 '''밤에는 바보가 아니었다'''고 한다. 얼굴이 김수현 스타일이라 바보라도 용서가 된다나 뭐라나...
디아블로 2에서는 '온달의 지혜'라는 이름의 유니크 스테프가 나온다. 그 온달이 온달인지는 모르나, '온달의 사랑' 헬멧[24]이나 '단군의 가르침'[25], '태백의 영광'[26], '해모수의 강직'[27] 같은 아이템들을 보아, 블리자드에서 노린 것으로 보인다.[28]
레진코믹스의 웹툰 나에게 온 달에서는 평강의 환생을 찾아 현대까지 살아 있다는 설정이다.
만화 신암행어사에서는 질병의 고통에 시달린 평강의 도피처로 만들어진 상상속의 존재로 본다. 다만 작가는 평강과 온달이 아주 행복했을 것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자신이 선택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메가드라이브 게임 '공작왕 2'가 국내정발될 때 온달장군으로 현지화가 되었다.
공승연 주연의 마이 온리 러브송 역시 평강공주 설화를 다루고 있다.
네이버 웹소설 달달 무슨 달에서는 전사한 후 신에 의해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귀족가의 자제 '나카무라 게이'로 환생. 그리고 같은 시대에 환생한 평강공주를 찾기 위해 조선으로 향하는데, 불행히도(?) 평강은 남자로 환생...[스포일러?]
다음 웹툰후크에선 주인공 세력인 서북의 바람 소속으로 등장한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1] 이때는 왕의 권력이 휘청거리던 시기여서 평원왕이 자기 편을 기르려고 신분은 낮지만 능력이 있는 온달을 사위로 삼았다는 것이 정설이다.[2] 정사삼국사기에 온달열전으로 수록된 이야기라 완전한 전래동화나 설화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3] 다만 본인이 무능한데 아내 덕과 빽으로만 출세한 것은 아니다. 일단 온달은 아내의 조언을 잘 귀담아들었으며 기마 실력과 무예도 충분히 갖춘 사람이었으며 전쟁에서 큰 활약을 세울 수준의 기량도 있었다. 온달이 부마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도 왕이 인정할 정도로 큰 무공을 그 자리에서 스스로 세웠기 때문. 숨겨진 천재 혹은 아내 밑에서 엄청 노력한 노력충.[4] 말 중에는 정말로 늙어서 털이 빠지는 재기 불능의 말도 있지만 단순히 먹을 걸 못 먹어서(말 주인이 키울 능력이 없어서) 싸게 파는 경우도 있었다. 이걸 알아보는 걸 보면 말을 보는 눈도 좋은 단순히 온실 속에서 자란 공주님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고구려라는 국가가 태생이 기마 민족 국가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왕족으로서 이 정도의 소양은 갖추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예를 들면 고구려의 건국 신화에서부터 국조(國祖)인 주몽(또는 어머니 유화부인)이 겉보기에는 비루먹은 준마를 미리 알아보는 재능을 지녔다고 한다.[5] 즉 나라의 주요 지배층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는 뜻인데, 이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 왕실에서 상당히 중요한 행사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6] 정황상 북제를 멸망시키고 북중국을 통일한 시기.[7] 북제 멸망이 577년이고 우문옹은 578년에 사망하니 대략 577년~578년 무렵으로 추정된다.[8] 배산(拜山)이라고도 한다.[9] 중국.[10] 사실상 이 지역은 죽령 이북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기에, 죽령 이북이라고 알려지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이북은 한강의 북부를 말하는 것이 아닌 한강의 상류지역 즉, 강원-경기도 경계 일대이다. [11]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는 아단성(阿旦城)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12] 혹은 지금도 군주제가 남아있는 나라의 왕실의 자녀가 빈민 집안의 자제와 혼인하는 격.[13] 실제로 세금을 내지 못하면 처형당하는 사례도 있었다. 강등 정도면 오히려 관대한 처벌인 수준.[14] 이는 종국에는 연개소문을 위시한 국왕파 귀족의 반란으로 이어진다.[15] 때문에 고구려 중, 후기 정치체제 연구에서 낙랑군이 꼭 낀다. [16] 출처: 최호원. "고구려 후기 국내정세와 신라관계." 국내박사학위논문 고려대학교 대학원, 2020. 서울 [17] 다만 고구려계 성씨 자체가 신라의 삼국통일 및 훗날의 발해 멸망을 거치면서 신라계 성씨와 중국계 성씨에 밀려 완전히 사라지거나 희귀 성씨로 전락한 경우가 많았음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18] 안사의 난을 일으킨 안록산 또한 소그드인과 돌궐인의 혼혈이다.[19] 정확히는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와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를 잇는 '하늘재'라는 고개다. 참조[20] 아단성의 '단(旦)'과 아차성의 '차(且)'의 한자 모양이 비슷해, 두 이름이 동시에 전해진다.[21] 단양이 아단성이라면 광개토대왕은 인천에서 바로 단양을 점령하고 송파구에 있는 백제왕을 압박하다가 다시 한강을 건너 송파구를 공격하여 점령했다는 뒤죽박죽인 동선이 나온다.[22] 단 사극에서 '''온군해'''가 온달의 아들로 나온 적이 없다. 연개소문에서 '''온군'''이라는 캐릭터가 온달의 아들로 서술된 적은 있었다.[23] 조선시대 불탑의 다른 형태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양말고도 안동이나 경북 북부에도 이런 시설들이 있다. 전 구형왕릉도 이러한 사례 중 하나다.[24] 딱 삼국시대 왕관이다.[25] 유니크 메이스[26] 앞에 괴물 얼굴이 새겨져 있는 유니크 워드[27] 삼국시대풍 갑옷[28] 저 유니크 4개가 한 세트다.[스포일러?] 한 게 아니라 여자로 환생했다. 이름은 해원으로, 독립운동가로서의 임무 때문에 남장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