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페오(몬테베르디)
대본
오르페오 이전에도 오페라의 원형으로 불릴만한 작품들이 여럿 있었으나 오르페오는 역사상 '제대로 된' 최초의 오페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1]
이탈리아의 귀족들은 행사나 잔치에서 연극을 자주 공연하였는데, 무대장치를 바꾸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노래나 음악을 수반하는 춤(발레) 등을 공연하였다. 그것을 인터메디오(Intermedio) 또는 인터메쪼(Intermezzo)라고 불렀는데, 점차 연극 자체에도 노래와 음악을 도입하려는 시도가 행해졌으며 이 시도가 나름 성공을 거두면서 연극에서 음악의 비중이 점차 높아졌다. 나중에는 연극에서 음악이 필수요소로 자리잡았고 종종 대사보다 노래의 더 비중이 큰 연극이 공연되기도 했는데, 이런 분위기에서 아예 음악만으로 구성된 악극(樂劇)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악극형식을 최초로 시도한 사람은 야코포 페리(Jacopo Peri)로서 1597년[2] 음악만으로 구성된 '다프네(Dafne)'를 공연하였다. 이 작품은 현재 악보 대부분이 사라져서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1600년을 기점으로 이 양식으로 된 작품이 대거 나온 것을 보면 당대의 음악가들에게 이 다프네의 음악적 실험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현재 남아 있는 오르페오 이전에 작곡된 소위 초기 오페라들로 야코포 페리의 에우리디체(Euridice), 줄리오 카치니(Giulio Caccini)의 에우리디체(Euridice), 에밀로 데 카발리에리(Emillo de' Cavalieri)의 영혼과 육체의 상징(Rappresentatione di Anima et di Corpo) 등이 있는데, 여기 열거된 작곡가들은 모두 16세기 말에 피렌체에서 결성된 이탈리아의 예술동호회 카메라타(Camerata)의 회원이었다.
이 카메라타 소속의 음악가들은 가사와 감정의 전달이 어렵고 형식적이라는 이유로 르네상스의 다성양식을 배격하고 모노디(monody) 작법을 사용하였는데, 말과 선율을 일치시키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억양에 최대한 맞추어 선율을 만들고 여기에 간단한 반주를 곁들여 가사와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려고 하였다. 쉽게 말하면 가락과 운율이 있는 낭송형식을 추구했던 것이다.[3] 한편으로 이 카메라타의 멤버들은 당시에 유행했던 인테르메디(intermedi)같은 음악극들이 지나치게 오락과 볼거리에 치중하고 있는 점을 비판하고 연극은 통일된 구성과 깊이 있고 일관된 스토리를 갖추어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는데, 전술한 초기 오페라들은 바로 이런 음악/공연철학에서 나온 작품들이다. 따라서 카메라타의 초기 오페라는 대체로 연극의 대사를 모노디로 구현하고 대사중간중간 짧은 파사지(passage, 기악음악)또는 춤곡을 삽입한 형태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모노디는 짧은 곡에 적용할 때는 상당히 효과적이었지만. 오페라처럼 긴 작품에서 초지일관 단선율로 일관하게 되자 극 전체가 너무 단조로워지는 문제가 생겼다. 게다가 극의 통일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발레, 화려한 아리아, 다성합창 등의 볼거리와 들을거리들도 거의 배제하였으니 이 모노디 악극은 더더욱 지루해질 수밖에 없었다.
카메라타 회원은 아니었지만 몬테베르디 역시 그간 극음악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오르페오를 공연하기 10년쯤 전에 만토바궁에서 조반니 바티스타 과리니(Giovanni Battista Guarini)의 연극인 Il pastor fido(충성스런 양치기)의 부수음악을 작곡한 적이 있었으며 1604년 만토바궁전 축제를 위해 발레극 디아네와 엔디모네의 사랑(Gli amori di Diane ed Endimone)을 작곡하기도 했다.
몬테베르디는 이처럼 그간 극음악을 다루었던 경험을 살려 카메라타의 음악철학을 나름 수용하면서도 기존의 공연요소들를 버리지 않고 이를 극음악에 흡수시켜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의 악극을 창조하였는데, 이 악극이 바로 오늘날 진정한 오페라의 효시로 인정받고 있는 오르페오(l'Orfeo)이다. 이 오르페오에는 칸쪼네, 아리아, 레치타티보, 발레, 다성 합창, 막간음악(기악곡) 등 기존의 공연요소가 모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이 요소들이 따로 놀지 않고 대단히 절묘하게 융합되어 있다. 예를 들면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를 교대로 배치하여 단조로움을 없앴으며 리토르넬로(ritornello, 주제 선율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것)로 곡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하였다. 또한 종종 등장하는 르네상스 다성양식의 합창은 엄숙하고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이처럼 오르페오는 기존에 이미 존재하는 양식들을 모아서 만들어진 '새로운' 음악으로, 온고이지신의 대표적인 예제로 삼을만한 작품이다.
오르페오 공연에는 음악 '연주회'로써는 매우 큰 규모인 40여명의 관현악단을 동원하였다.[4]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현악기, 금관악기, 통주저음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기타, 하프, 북과 같은 악기도 포함된다. 이처럼 오르페오는 대규모 관현악을 편성한 덕분인지 기악음악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5]
오르페오의 대본은 당시 외교관이자 작가였던 알레산드로 스트리지오(Alessandro Striggio: 1573-1630)가 작성한 것이다. 이 대본의 스토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오 이야기와 거의 같은데, 다만 축제를 위한 작품에 걸맞게 비극으로 끝나는 원래 신화의 결말부분을 해피엔딩에 가깝게 바꾸었다. 이 스트리지오의 대본은 1607년 만토바에서 발간되었으며 몬테베르디의 악보는 2년 후인 1609년 베네치아에서 발간되었는데, 스트리지오의 대본에는 맨 마지막에 오르페오가 연회를 열면서 끝나도록 되어 있으나 몬테베르디가 수정한 대본에는 아폴로가 슬픔에 빠진 오르페오를 구원하여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애초에 스트리지오도 막판에 아폴로를 등장시켜 오르페오를 하늘로 올려 보내려고 구상했으나 초연 당시 만투아 공작궁의 무대의 공간이 좁아 오르페오가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기계장치를 설치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엔딩으로 대체했던 것인데, 악보를 출판할 때에는 그런 문제를 신경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원래의 구상대로 끝나게 했던 것이다.
2막은 세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오르페우스와 양치기의 기쁨에 찬 모습, 에우리디체의 죽음을 고하는 사자와 에우리디체를 찾으러 저승으로 떠나는 장면이고 무대 위에 남은 배역들이 서로 얘기하는 장면이다.
2막뿐 아니라 이 오페라의 가장 슬픈 장면은 당연히 에우리디체의 죽음과 오르페우스의 동요이다. 여기서 몬테베르디는 마드리갈 작곡가로 발휘한 감수성을 오페라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낸다. 단순한 모노디 레치타티보에 불협화음, 반음계 등을 교묘하게 뒤섞는다.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야 말로 지금은 사라진 예술의 유일한 예인걸작이다.'''
―로맹 롤랑
1. 개요
오르페오 이전에도 오페라의 원형으로 불릴만한 작품들이 여럿 있었으나 오르페오는 역사상 '제대로 된' 최초의 오페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1]
이탈리아의 귀족들은 행사나 잔치에서 연극을 자주 공연하였는데, 무대장치를 바꾸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노래나 음악을 수반하는 춤(발레) 등을 공연하였다. 그것을 인터메디오(Intermedio) 또는 인터메쪼(Intermezzo)라고 불렀는데, 점차 연극 자체에도 노래와 음악을 도입하려는 시도가 행해졌으며 이 시도가 나름 성공을 거두면서 연극에서 음악의 비중이 점차 높아졌다. 나중에는 연극에서 음악이 필수요소로 자리잡았고 종종 대사보다 노래의 더 비중이 큰 연극이 공연되기도 했는데, 이런 분위기에서 아예 음악만으로 구성된 악극(樂劇)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2. 역사
2.1. 모노디
이 악극형식을 최초로 시도한 사람은 야코포 페리(Jacopo Peri)로서 1597년[2] 음악만으로 구성된 '다프네(Dafne)'를 공연하였다. 이 작품은 현재 악보 대부분이 사라져서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1600년을 기점으로 이 양식으로 된 작품이 대거 나온 것을 보면 당대의 음악가들에게 이 다프네의 음악적 실험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현재 남아 있는 오르페오 이전에 작곡된 소위 초기 오페라들로 야코포 페리의 에우리디체(Euridice), 줄리오 카치니(Giulio Caccini)의 에우리디체(Euridice), 에밀로 데 카발리에리(Emillo de' Cavalieri)의 영혼과 육체의 상징(Rappresentatione di Anima et di Corpo) 등이 있는데, 여기 열거된 작곡가들은 모두 16세기 말에 피렌체에서 결성된 이탈리아의 예술동호회 카메라타(Camerata)의 회원이었다.
이 카메라타 소속의 음악가들은 가사와 감정의 전달이 어렵고 형식적이라는 이유로 르네상스의 다성양식을 배격하고 모노디(monody) 작법을 사용하였는데, 말과 선율을 일치시키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억양에 최대한 맞추어 선율을 만들고 여기에 간단한 반주를 곁들여 가사와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려고 하였다. 쉽게 말하면 가락과 운율이 있는 낭송형식을 추구했던 것이다.[3] 한편으로 이 카메라타의 멤버들은 당시에 유행했던 인테르메디(intermedi)같은 음악극들이 지나치게 오락과 볼거리에 치중하고 있는 점을 비판하고 연극은 통일된 구성과 깊이 있고 일관된 스토리를 갖추어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는데, 전술한 초기 오페라들은 바로 이런 음악/공연철학에서 나온 작품들이다. 따라서 카메라타의 초기 오페라는 대체로 연극의 대사를 모노디로 구현하고 대사중간중간 짧은 파사지(passage, 기악음악)또는 춤곡을 삽입한 형태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모노디는 짧은 곡에 적용할 때는 상당히 효과적이었지만. 오페라처럼 긴 작품에서 초지일관 단선율로 일관하게 되자 극 전체가 너무 단조로워지는 문제가 생겼다. 게다가 극의 통일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발레, 화려한 아리아, 다성합창 등의 볼거리와 들을거리들도 거의 배제하였으니 이 모노디 악극은 더더욱 지루해질 수밖에 없었다.
2.2. 몬테베르디
카메라타 회원은 아니었지만 몬테베르디 역시 그간 극음악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오르페오를 공연하기 10년쯤 전에 만토바궁에서 조반니 바티스타 과리니(Giovanni Battista Guarini)의 연극인 Il pastor fido(충성스런 양치기)의 부수음악을 작곡한 적이 있었으며 1604년 만토바궁전 축제를 위해 발레극 디아네와 엔디모네의 사랑(Gli amori di Diane ed Endimone)을 작곡하기도 했다.
몬테베르디는 이처럼 그간 극음악을 다루었던 경험을 살려 카메라타의 음악철학을 나름 수용하면서도 기존의 공연요소들를 버리지 않고 이를 극음악에 흡수시켜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의 악극을 창조하였는데, 이 악극이 바로 오늘날 진정한 오페라의 효시로 인정받고 있는 오르페오(l'Orfeo)이다. 이 오르페오에는 칸쪼네, 아리아, 레치타티보, 발레, 다성 합창, 막간음악(기악곡) 등 기존의 공연요소가 모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이 요소들이 따로 놀지 않고 대단히 절묘하게 융합되어 있다. 예를 들면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를 교대로 배치하여 단조로움을 없앴으며 리토르넬로(ritornello, 주제 선율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것)로 곡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하였다. 또한 종종 등장하는 르네상스 다성양식의 합창은 엄숙하고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이처럼 오르페오는 기존에 이미 존재하는 양식들을 모아서 만들어진 '새로운' 음악으로, 온고이지신의 대표적인 예제로 삼을만한 작품이다.
3. 편성
오르페오 공연에는 음악 '연주회'로써는 매우 큰 규모인 40여명의 관현악단을 동원하였다.[4]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현악기, 금관악기, 통주저음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기타, 하프, 북과 같은 악기도 포함된다. 이처럼 오르페오는 대규모 관현악을 편성한 덕분인지 기악음악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5]
4. 대본
오르페오의 대본은 당시 외교관이자 작가였던 알레산드로 스트리지오(Alessandro Striggio: 1573-1630)가 작성한 것이다. 이 대본의 스토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오 이야기와 거의 같은데, 다만 축제를 위한 작품에 걸맞게 비극으로 끝나는 원래 신화의 결말부분을 해피엔딩에 가깝게 바꾸었다. 이 스트리지오의 대본은 1607년 만토바에서 발간되었으며 몬테베르디의 악보는 2년 후인 1609년 베네치아에서 발간되었는데, 스트리지오의 대본에는 맨 마지막에 오르페오가 연회를 열면서 끝나도록 되어 있으나 몬테베르디가 수정한 대본에는 아폴로가 슬픔에 빠진 오르페오를 구원하여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애초에 스트리지오도 막판에 아폴로를 등장시켜 오르페오를 하늘로 올려 보내려고 구상했으나 초연 당시 만투아 공작궁의 무대의 공간이 좁아 오르페오가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기계장치를 설치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엔딩으로 대체했던 것인데, 악보를 출판할 때에는 그런 문제를 신경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원래의 구상대로 끝나게 했던 것이다.
5. 해설
5.1. 2막
2막은 세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오르페우스와 양치기의 기쁨에 찬 모습, 에우리디체의 죽음을 고하는 사자와 에우리디체를 찾으러 저승으로 떠나는 장면이고 무대 위에 남은 배역들이 서로 얘기하는 장면이다.
2막뿐 아니라 이 오페라의 가장 슬픈 장면은 당연히 에우리디체의 죽음과 오르페우스의 동요이다. 여기서 몬테베르디는 마드리갈 작곡가로 발휘한 감수성을 오페라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낸다. 단순한 모노디 레치타티보에 불협화음, 반음계 등을 교묘하게 뒤섞는다.
6. 여담
- 2015년 7월에 서울시오페라단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오르페오를 공연하였다.
7. 관련 문서
[1] 참고로 오르페와 같은 음악극을 오페라라고 부르게 된 것은 몬테베르디가 사망한 후에도 한참이 더 지나서부터이다. 그 전까지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는데 몬테베르디는 자신이 작곡한 오르페오를 음악적 우화(favola in musica)라고 불렀다.[2] 또는 1598년[3] 후에 오페라에 흡수된 레치타티보(recitativo)가 바로 이 카메라타가 남긴 유산이다.[4] 단순히 군악대나 궁정 행사들로만 봤을 때 큰 규모는 아니다.[5] 다만 몬테베르디는 당시의 관행대로 악보에 정확하게 악기를 지정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반주에 동원되는 악기는 공연 담당자의 재량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