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오 카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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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ulio Caccini (Giulio Romano, 1551-1618)
이탈리아의 작곡가, 성악가, 연주자, 음악교육자
1. 소개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의 음악가. 음악뿐만 아니라 시와 문학에도 능했으며 음악 교육과 예술론, 비평 등에도 상당한 공헌을 했던 일종의 종합 예술가였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시대적으로는 르네상스기에 해당되지만 바로크 음악의 개척에 큰 공헌을 했기 때문에 바로크 음악가로 분류하기도 한다. 특히 르네상스 시기의 복잡한 다성양식대신 사람의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는 모노디(monody) 양식을 개척하였으며, 야코포 페리 등과 함께 오페라의 개척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후대에 중요한 음악적 표현수단이 된 레치타티보(recitativo)나 서정가곡의 원조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카치니이다. 다만 그의 음악은 현재 관점에서 다소 심심하게 느껴지는 탓인지 음악사적인 중요성에 비해 그리 자주 연주되지는 않는다.
그의 딸 프란체스카 카치니와 세티미야 카치니도 당대에 유명한 가수이자 음악가였다.
한동안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Ave Maria)'의 작곡가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
2. 생애
줄리오 카치니는 1551년 로마에서 테어났다. 아버지 미켈란젤로 카치니는 목수였는데, 피렌체의 유명한 조각가 조반니 카치니의 형이다. 나무위키에 항목이 있는 작곡가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줄리오 카치니도 일찌감치 음악에 재능을 드러냈으며 현악 연주자와 성악가로서 각광을 받았다. 피렌체의 대공이었던 프란체스코 메디치(Francesco Medici)는 소년 카치니를 일종의 음악유학 차원에서 피렌체로 데려와서 본격적으로 음악교육을 시켰다.[1]
피렌체로 유학온 카치니의 한동안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아마 음악공부와 메디치가문을 위한 음악활동을 병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카치니가 28세때인 1579년 경이 돼서야 메디치 가문의 전속 음악가이자 성악가(테너)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는데, 그는 이후에도 계속 피렌체에 머물면서 피렌체를 대표하는 음악가가 되었다.
카치니는 성격적으로 출세욕과 야심이 대단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부터 그는 귀족들의 결혼식, 종교행사, 축제 등에서 가수 역할을 도맡았으며, 특히 오페라의 전신에 해당되는 음악극 인테르메디오(Intermedio)에서 주역으로 활약하였다.[2]
한편으로 그는 피렌체의 예술 애호가인 조반니 데 바르디(Giovanni de'Bardi)백작의 저택에서 열리는 예술가들의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이 모임이 바로 피렌체 카메라타(Florentine Camerata)였다. 이들은 주로 고대 그리스에서 유행하였던 음악을 곁들인 드라마를 이상으로 삼아 극의 내용과 음악의 일치를 추구하였으며, 이를 위해 가사 전달이 어렵고 복잡한 다성양식(polyphony)을 지양하는 대신 단선율로 가사를 노래하고 여기에 간단한 기악반주를 곁들이는 모노디(monody) 양식을 발전시켰다. 자세한 것은 후술되는 카메라타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노래, 연주, 작사, 작곡, 음악이론 등 음악 전반에 모두 뛰어났던 야심가 카치니는 이 카메라타 모임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한편 후학 양성에도 힘을 기울여서 많은 음악지망생들에게 작곡과 연주를 가르쳤다. 카치니의 제자들은 이후 이탈리아 각지에 카메라타의 음악철학을 전파시켰으며, 그 덕분에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같은 차세대 음악가들이 카메라타의 철학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
1592년 40줄에 접어든 카치니는 바르디 백작의 공식 사절로 오랫만에 고향인 로마를 방문하였으며 여기서도 자신의 새로운 음악을 선보였다. 하지만 보수적인 성향의 로마에서는 그의 생소한 음악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로마에 새로운 음악양식이 정착하기 위해서는 17세기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1600년 10월에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오페라인 에우리디체(Euridice)가 프랑스의 앙리 4세와 마리아 데 메디치(Maria de' Medici)[3] 의 결혼식 축제때 공연되는데, 이 때 대본은 오타비오 리누치니(Ottavio Rinuccini), 작곡은 카치니의 카메라타 동료였던 야코포 페리(Jacopo Peri)가 담당하였는데, 이 때 카치니의 곡도 일부 사용하였다. 카치니는 이 오페라 공연의 연출을 담당하고 음악 공연시에는 가수로 무대에 섰다.[4] 한편 카치니는 이 오페라에 이어 공연된 목가극 체팔로의 강탈(Il rapimento di Cefalo)의 음악과 연출을 담당하였는데, 현재 이 체팔로의 강탈은 악보가 소실되고 마지막 합창곡만 후술되는 작품집 '새로운 음악'에 수록되어 있다.
이 오페라와 관련해서 카치니의 성격을 알려주는 몇 가지 일화가 있는데, 원래 에우리디체와 체팔로의 강탈은 카치니의 동료 에밀리오 데 카발리에리(Emilio de' Cavalieri)의 주도하에 진행될 예정이었다. 카발리에리는 이미 1600년 2월에 로마에서 일종의 오라토리오(또는 세미오페라)인 영혼과 육체의 궁극(Rappresentatione di Anima, et di Corpo)을 공연한 경험이 있었고 카메라타 음악인 가운데 가장 연장자였기 때문에 프랑스왕의 결혼식과 같은 중요한 행사의 감독으로는 제격이었다.[5] 그런데 함께 공연에 참여했던 카치니는 준비기간 내내 카발리에리에 대한 험담과 모함을 해 댔으며 카발리에리에게 매우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다. 카치니의 모함과 딴지에 넌덜머리가 난 카발리에리는 결국 공연을 포기하고 피렌체를 떠나버렸으며 다시는 피렌체로 돌아오지 않았다.[6]
이 오페라를 두고 카치니는 페리와도 잡음이 있었는데, 에우리디체가 공연된 후 카치니는 같은 대본을 바탕으로 독자적으로 오페라를 작곡하여 1602년 12월에 초연을 하였다. 그는 이 오페라의 악보를 페리보다 먼저 출판하기 위해 상당히 서둘렀으며 페리의 오페라 공연에 자신의 제자들이 참여하지 못하도록 회유하기도 했다. 결국 카치니는 페리보다 6주 정도 먼저 악보를 출판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출판된 페리의 에우리디체가 인기가 훨씬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카치니는 오페라와 별도로 1602년에는 자신의 모노디 양식의 작품집 '새로운 음악(Le nuove musiche)을 출판하였는데, 독창과 콘티뉴오 반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격적인 바로크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집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카치니 당대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7]
오페라 '에우리디체'의 출판 이후 1618년 사망할 때까지 카치니와 관련된 기록은 많지 않은데, 사망하기 얼마 전까지도 피렌체에서 계속 가수이자 연주자 및 음악교사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야심작 에우리디체가 라이벌이었던 페리에게 밀린데다 17세기 이후 바로크 스타일이 본격 대두하면서 쟁쟁한 음악가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작품활동은 많이 위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8] 말년에는 젊은 시절에 손대지 않았던 다성양식의 종교음악을 작곡 및 연주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현재 남아있는 작품은 없다. 다만 1614년 모노디 양식의 '새로운 음악' 2편이 출판되었는데, 이 때에는 '새로운 음악과 새로운 작곡법(Nuove Musiche e nuova maniera di scriverle)'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줄리오 카치니는 1618년 향년 67세에 피렌체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피렌체의 산타 아눈치아타(St Annunziata) 성당에 안장되었다.
3. 카치니의 음악
3.1. 카메라타(Camerata)
카치니 하면 반드시 떠오르는 단어가 '''카메라타'''일 것이다. 1573년, 피렌체의 백작 지오바니 데 바르디의 후원으로 그의 저택에 음악, 미술, 문학, 철학 등 각 분야에서 활약중이었던 피렌체의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서 일종의 모임을 결성했는데, 이 모임이 바로 카메라타였다. 이 카메라타는 피렌체 카메라타(Florentine Camerata) 또는 모임 주선자의 이름을 따서 바르디의 카메라타(Camerata de' Bardi)라고도 한다.[9]
일단 모임이 결성되자 피렌체의 유명한 예술가들이 속속 모여들었으며 그만큼 활동도 점점 활발해졌다. 카치니가 출판한 에우리디체 악보의 서문에는 이 카메라타의 중요한 멤버들의 이름이 실려 있기 때문에 오늘날 카메라타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데, 음악쪽에서는 카치니와 전술한 카발리에리를 비롯 피에트로 스트로치(Pietro Strozzi), 빈센초 갈릴레이(Vincenzo Galilei)[10] , 알레산드로 스트리지오(Alessandro Striggio)등, 당대의 쟁쟁한 음악인 상당수가 카메라타 회원이었다. 한편 야코포 페리는 1561년생으로 카메라타 창립 당시에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나중에 참여한다.[11]
이 카메라타는 1570년대 후반부터 본격 전성기를 맞이하였는데, 소속 예술가들은 이 카메라타의 철학을 바탕으로 활발하게 예술론을 전개하고 작품활동을 펼쳤다. 1582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활동이 약해졌지만 17세기에 접어든 후에도 카메라타 모임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12]
3.2. 모노디(Monody) 양식
이 카메라타는 젊은 예술가들의 모임 답게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파격적이고 전위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는데, 음악 분야에서 그들은 르네상스 다성양식의 복잡난해함을 배격하였고 인간의 솔직한 감정과 느낌을 드러낼 수 있는 고대 그리스의 극음악을 이상적인 모델로 삼았다. 이에 따라 말(가사)을 음악보다 우위에 놓았으며 음악은 말에 나타나는 감정과 느낌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말의 자연스런 표현과 억양을 최대한 살릴 수 있도록 노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음악이론에 의해 탄생한 음악양식이 바로 모노디였다.[13]
모노디는 독창에 기악반주를 곁들인 형태로 작곡/연주되었는데, 독창은 전술한 바와 같이 연극 대사를 읊을 때나 시를 낭송할 때의 리듬과 억양을 최대한 살리는 방식으로 음악의 선율과 리듬을 정하였으며, 애절한 감정이나 분노 등 다양한 감정과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장식음이나 바이브레이션 등을 많이 사용하였다. 한편 반주부는 별도의 리듬과 선율을 가진(주로 느린 속도의) 저음으로 독창부를 '''화성적으로''' 보조하도록 했으며, 이런 취지에 맞게 류트, 테오르보, 키타로네, 오르간 등 저음역을 구사할 수 있는 악기가 주로 사용되었다.
아래 동영상은 전형적인 모노디의 예제로 알레산드로 그란디(Alessandro Grandi)의 '오 신성함이여(O intermerata)'이라는 작품으로, 보다시피 이 모노디는 팔레스트리나로 대표되는 르네상스 다성양식과는 완전히 다른 음악을 구현하고 있다.
사실 기악반주가 동반된 독창은 모노디 이전에도 많이 있었으며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전세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일반적인 음악양식이다. 하지만 이 모노디가 특별한 것은 이러한 독창양식이 당시의 대세였던 다성양식에 예술적으로나 음악적으로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가치와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다. 또한 기법적으로는 감정표현을 위해 빠르기와 강약을 지속적으로 변화시키고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음의 도약이나 장식음을 도입했는데, 이런 방법들은 후대의 가창양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자세한 것은 아래 항목 참조.
다만 모노디 음악은 음악사적인 중요성에 비해 오늘날 자주 연주되지는 않고 있는데, 분명 모노디는 가사 내용과 감정을 전달하는 측면에서는 탁월하지만 음악을 가사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가사에 종속시키고 있기 때문에 음악 자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측면에서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재 음악팬들에게 이 모노디는 다소 심심하게 들리는데, 특히 이탈리어어에 익숙하지 않은 감상자의 경우 가사를 알아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물론 모노디에서도 유명한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카치니의 '새로운 음악'에 수록된 마드리갈 '아마릴리 내 사랑(amarilli mia bella)'은 카치니의 음악 뿐만 아니라 모든 모노디 음악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오늘날에도 자주 연주되고 자주 편곡되고 있다.
3.3. 오페라의 탄생
카치니가 활동하던 시절의 16세기 이탈리아에서는 앞서 생애 항목에서 설명한 음악극 인테르메디가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인테르메디는 진정한 의미의 극(drama)이라기보다는 볼거리(performance)에 더 가까웠는데, 깊이 있는 대사와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는 추구하기 보다는 경쾌한 음악과 춤, 말초적이고 우스꽝스러운 대사와 연기 등의 오락성에 더 치중하고 있었다.[14] 카메라타는 공연예술이 일종의 쇼로 전락하는 현상을 비판하고 그리스 비극의 미학과 예술성을 모델로 삼아 좀더 깊이 있고 통일성을 가진 공연예술을 만들고자 하였다. 여기서 오페라라는 장르가 탄생하게 된다.
카메라타의 초기 오페라는 모노디 양식으로 연극의 대사를 음악화 시켰으며, 통주저음 반주를 사용하였다. 대사 중간중간 짧은 기악곡인 파사지(passage)나 춤곡을 삽입하였다. 합창(coro)도 종종 등장하는데, 대위법에 의한 다성양식이 아니라 제창이나 독립적인 선율을 노래하는 중창 형식으로 구현하였다. 전술한 페리와 카치니의 오페라 에우리디체는 이런 카메라타 오페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카메라타 오페라의 모노디는 바로크 오페라의 성악양식으로 정착된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음악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하다. 아리아는 음악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동시에 가수의 가창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성악양식이고, 레치타티보는 음악적인 아름다움은 높지 않지만 일정한 음높이로 대사를 말하듯이 읊조리면서 극의 전개에 중요한 내용을 전달하는 성악양식인데, 모노디는 특히 레치타티보의 성립과 정착에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카메라타가 주장한 '극의 내용과 음악의 일치'는 오페라가 단순한 오락물의 수준을 넘어 수준높은 공연예술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이와 같은 카메라타의 이상은 후대에 글룩이나 모차르트 등에 의해 재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음악사적 가치와 인기는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 카메라타의 오페라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앞서 카메라타의 두 대표주자 카치니와 페리가 오페라와 관련해서 분쟁을 벌였던 내용을 소개했는데, 오페라의 원조라는 타이틀을 두고 치열하게 싸웠던 두 사람의 열정이 무색하게 오늘날에는 두 사람의 오페라가 사이좋게 연주가 잘 안되고 있다. 현재의 관점에서 카메라타의 오페라를 들으면 시종일관 지속되는 통주저음과 비슷한 분위기로 반복되는 노래 선율이 많이 단조롭게 느껴진다. 이런 평가는 이미 카치니와 페리 당대부터 있었는데, 1600년 페리의 오페라 에우리디체의 초연을 지켜본 바르디 백작은 '지루하다'는 평을 남겼다.
이런 상황에서 카메라타의 오페라와는 또 다른 음악적 실험을 시도한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오르페오'(1607년 초연)가 음악성과 흥행에서 모두 초대박을 치자 카메라타의 오페라는 완전히 유행에서 밀려나 버렸다(자세한 것은 몬테베르디 항목 참조). 그래서 많은 음악팬들과 전문가들이 진정한 오페라의 원조를 에우리디체보다는 오르페오로 보고 있는데, 오르페오 이후의 오페라 작곡가들이 모두 카메라타의 오페라보다는 이 오르페오를 창작의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고음악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묻혀 있던 옛음악들이 학구적인 연주자들을 중심으로 발굴되면서 이 카메라타의 오페라도 조금씩 관심을 받기 시작하고 있다. 카메라타의 음악론과 음악사적인 중요성을 생각하면서 이 오페라를 들어보면 나름 감상의 포인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4. 여담
4.1. 위작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
이 아베 마리아는 1987년 러시아의 메조소프라노 이리나 아르키포바(Irina Arkhipova)에 의해 대중들에게 처음으로 소개되었는데, 이 때 이 작품은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로 소개되었다. 그 후 라트비아 출신 소프라노 이네사 갈란테(Inessa Galante)가 1995년에 발표한 음반 '데뷔(Debut')에도 이 작품이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었는데, 이 때 이 음반이 대박을 치면서 이 아베 마리아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후 여러 유명 가수들이 공연이나 음반 녹음시에 이 곡을 레퍼토리로 넣었으며, 조수미도 공연에서 종종 이 곡을 노래했고 음반도 냈다. 한국에서는 드라마 천국의 계단 때문에 이 곡을 알게 된 사람이 많을 듯.
그런데, 들어보면 알겠지만 이 아베 마리아는 카치니의 음악 스타일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데다 카치니의 반주철학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관현악 반주가 동반되고 있다. 그리고 가사도 가톨릭 전례문에 의한 기도문이 아니라 '아베 마리아'만 계속 반복하는 사실상의 무가사(vocalise) 음악이다. 게다가 카치니 당시 아베 마리아는 독창이 아니라 종교음악에 적용되는 엄격한 다성양식으로 작곡되었으며, 무엇보다 카치니는 종교음악을 작곡한 적이 없다![15]
여러 음악 관련자들이 이런 의혹을 파헤치기 시작했는데, 결국 이 아베 마리아는 카치니가 아니라 블라디미르 바빌로프(Vladimir Vavilov)라는 러시아 작곡가가 1970년에 작곡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왜 하필 이 음악에 아무 상관도 없는 카치니의 이름을 도용했는지는 확실치 않은데, 작곡가가 1973년에 사망한 후 다른 사람들이 이 곡을 발표하면서 대중들에게 생소한 바빌로프 대신 나름 유명하면서도 명의 도용 시비가 걸릴 일이 없고 들킬 가능성도 적은 카치니의 이름을 빌린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정이 모두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2017년 현재까지도 인터넷에는 이 작품을 카치니가 작곡한 것으로 소개해 놓은 사이트가 많다.
4.2. 프란체스카 카치니
카치니의 딸 프란체스카 카치니(Francesca Caccini, 1587 – 1645?)는 카치니의 둘째 부인의 소생으로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카치니의 자식들은 모두 음악에 소질이 있었기 때문에 카치니 집안은 피렌체에서 음악집안으로 이름을 날렸는데[16] , 특히 프란체스카의 음악적 재능은 어려서부터 유명했다고 한다. 노래와 악기연주에 모두 능했던 프란체스카는1600년 앙리 4세와 마리아 다 메디치의 결혼식 축하 공연에서 13세의 나이로 가수로 활약했는데, 이 때 그녀의 노래솜씨가 인상적이었는지 그녀에 대한 찬사가 당시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다.
연주능력 뿐만 아니라 작곡능력도 일찌감치 인정받은 그녀는 부친에 이어 대를 이어 메디치가의 음악가로 활동하였다. 그녀의 능력은 정말 대단해서 이미 20살을 갓 넘었을때부터 실력과 명성 면에서 아빠의 후배이자 라이벌이었던 야코포 페리와도 견줄 수준으로 올라섰다고 한다. 1614년 경에는 메디치 가문의 음악가 가운데 가장 높은 급료를 받았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메디치 가문의 음악교육과 각종 음악행사의 연주, 작곡, 연출을 담당하는 등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냈다. 1618년에는 36곡의 통주저음 가곡집인 'Il primo libro delle musiche'[17] 을 출판하였는데,이 작품집은 기본적으로 모노디 양식에 충실하지만 부친의 작품에 비해 반주의 역할이 강화되고 리듬과 선율이 좀더 강조되는 특징이 있다. 아래의 동영상은 음악곡집 1권 가운데 '그 미소의 의미를 모르겠네(Non sò se quel sorriso)'라는 작품인데, 들어보면 알겠지만 부친의 모노디가 낭송(narration)의 분위기를 살리려고 했다면 Non sò se quel sorriso는 진정한 의미의 노래(song)에 가깝다.
그녀는 부친의 영향을 받아 오페라를 비롯한 무대음악에도 큰 관심을 보였는데, 특히 유명한 화가였던 미켈란젤로의 종손(조카의 아들)이었던 시인이자 극작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2세(Michelangelo Buonarroti the Younger)의 대본을 바탕으로 한 극음악을 많이 작곡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생전에 최소한 16개의 오페라 및 극음악을 작곡하거나 작곡에 참여했으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이 실전되어 버렸기 때문에 현존하는 그녀의 극음악 작품은 매우 적다. 불행중 다행으로 1625년에 폴란드 공작 라디슬로 지기스몬도(Ladislaus Sigismondo)의 피렌체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작곡된 희극 발레-드라마(comedy-ballet)인 '알치나 섬의 루지에로의 해방(La liberazione di Ruggiero dall'isola d'Alcina)'이 온전히 남아 있으며, 기타 몇몇 극음악의 작품 일부가 남아 있다.
프란체스카는 1607년 동료 음악가인 지오바니 바티스타 시뇨리니(Giovanni Battista Signorini)와 결혼하였는데 결혼 15년만에 첫 딸 마르게리타(Margherita)를 낳았다. 1626년 첫 남편과 사별한 후 이듬해인 1627년 루카(Lucca)의 귀족 토마소 라파엘리(Tommaso Raffaelli)와 재혼하면서 남편을 따라 피렌체를 떠나 루카에서 음악활동을 하였으며 이 때 아들 토마소 2세(Tommaso)를 낳았다. 그러나 두 번째 남편도 3년만에 사망해버렸으며, 이후 흑사병의 유행이 끝난 1633~4년경 두 자녀와 함께 다시 피렌체로 돌아가서 메디치가의 음악가로 활동하였다. 문헌에 의하면 그녀는 1641년 5월경 메디치가문의 음악가직을 그만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만둔 이후의 행적도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녀가 언제 사망했는지도 불확실하다. 다만 1645년 그녀의 아들 토마소 2세의 후견인으로 그의 외삼촌 지롤라모 라파엘리(Girolamo Raffaelli)가 지정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그녀가 1645년 또는 그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비록 현존하는 작품 수는 적지만 이 소수의 작품만으로도 부친 못지 않은(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부친을 능가하는)그녀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그녀는 오페라 분야에서 자기 부친이나 페리의 스타일보다는 당시 오페라의 대세였던 몬테베르디 스타일을 많이 차용하고 있으며 '루지에로의 해방'은 뮤직 드라마라는 장르에 대한 그녀의 탁월한 이해력이 돋보이는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4.3. 세티미아 카치니
세티미아 카치니(Settimia Caccini, 1591 – 1638, 또는 1640)는 프란체스카 카치니의 동생으로 세 남매중 막내이다. 세티미아 역시 어렸을 때부터 언니 못지 않은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일찌감치 가수로 이름을 날렸다. 작곡에도 꽤 재능이 있어서 10대에 자신이 작곡한 모노디를 직접 부르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는 부친 및 언니와 함께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서 활동했으며 18살인 1609년에 19살 위의 가수 알레산드로 기바찌니(Alessandro Ghivazzani)와 결혼했다. 결혼 후에는 만토바의 곤자가 공작 가문으로 이적(?)해서 남편과 함께 부부 가수 겸 작곡가로 활동했다. 1622년부터는 부부가 함께 파르마의 추기경 가문 소속으로 활동했으며 남편이 사망한 후인 1636년에는 다시 메디치 가문에 복귀해서 사망할 때까지 활동했다.
세티미아는 생전에 작곡가보다는 주로 가수로 명성을 날렸으며 결혼 후에는 항상 남편과 함께 음악활동을 했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여가수로 명성을 날리는 한편으로 작곡도 많이 했으며, 자작곡 대부분을 자신이 직접 불렀기 때문에 일종의 싱어송 라이터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언니와 달리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출판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현재 그녀의 작품 대부분은 유실된 상태이다. 다만 당시에 출판된 여러 악보집에 그녀가 작곡한 모노디가 8곡 가량 남아 있는데, 음악 스타일은 자신의 부친 및 언니와 많이 닮아 있다.
[1]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의 유명한 예술가들 중에 메디치 가문과 관련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메디치 가문의 예술에 대한 독점욕과 집착은 정말 대단했다. 소년 카치니도 꿈나무 육성 차원에서 피렌체로 데려간 것으로 보인다.[2] 이 인테르메디오는 오페라의 전신에 해당되는 일종의 음악극으로, 기본적인 전개는 연극 형태로 진행되지만 부수음악이 동반되고 막간에 발레나 노래가 등장하는 등, 음악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늘날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영화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3] 프랑스식 이름은 마리 드 메디시스(Marie de Médicis)이다. 프랑스 왕에게 시집갔기 때문에 현재는 주로 프랑스식 이름을 사용한다.[4] 리누치니와 페리는 에우리디체를 공연하기 3년 전에 이미 다프네(Dafne)라는 오페라 형식의 음악극을 합작으로 공연했다고 하는데, 현재는 공연했다는 기록만 있고 악보는 분실되었다.[5] 이 영혼과 육체의 궁극의 공연일자가 에우리디체보다 8개월 빠르기 때문에 최초의 오페라는 영혼과 육체의 궁극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이 작품은 본격적인 오페라라기보다는 오라토리오에 더 가깝다.[6] 다만 카발리에리는 피렌체를 떠난지 1년 반만에 사망했기 때문에 어차피 다시 돌아올 기회가 없었다.[7] 참고로 이 작품은 1602년에 출판되었으나 카치니는 로렌초 살비아티(Signor Lorenzo Salviati)라는 귀족에게 이 작품집을 헌정할 때 헌정사에 1601년에 출판되었다고 적어놓았다. 이 작품집은 원래 1601년에 완성되었으나 출판업자가 급사하는 바람에 출판이 늦어졌는데, 카치니가 출판년도를 1년 앞당긴 것은 이런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이 새로운 음악이 실제 배포된 것은 1602년이므로 오늘날에는 1602년에 출판되었다고 보는데 이견이 없다.[8] 참고로 페리의 경우 에우리디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들은 여러 작곡가들과 공동으로 작곡한 경우가 많다.[9] 카메라타의 어원인 카메라(camera)는 원래 방(room) 또는 닫힌 공간을 의미하며 주로 중요한 회의나 모임이 있는 장소를 가리킨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사진기(camera)의 이름도 바로 이 카메라에서 유래한 것이다.[10] 그 유명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부친이다.[11] 그런데 전술한 극작가 오타비오 리누치니는 무려 11살부터 카메라타에 참여했다.[12] 모임의 주선자 바르디 백작이 장수한 것도(1534~1612) 카메라타가 장기간 존속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13] 이 모노디는 최근에 음악학자들이 붙인 용어이며 카치니 당시에는 이 새로운 음악양식을 스틸레 레치타티보(stile recitativo), 또는 단순히 당시의 성악장르인 마드리갈(madrigal), 모테트(motet) 등으로 불렀다.[14] 그런데 사실 이런 점을 무조건 비판할 수만은 없는 것이 인테르메디같은 공연은 주로 지역 축제나 고관대작의 결혼식 등의 축하를 위해 열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여흥을 위한 행사에서 심각하고 비극적인 내용을 다루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사실 초기의 오페라도 상설극장이 생기기 전까지는 주로 이런 행사를 위해 공연되었다.[15] 전술했다시피 다성양식의 종교음악을 작곡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없다.[16] 프란체스카의 이복 오빠인 폼페오 카치니와 친동생 세티미아 카치니 역시 가수이자 작곡가로 활동했다.[17] 번역하면 '음악곡집 제 1권' 정도의 뜻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