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안니스 6세
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는 팔라이올로고스 왕조의 2번째 내전이자 제국을 파멸로 이끈 내전의 스타트를 끊은 황제이다.
명문가 칸타쿠지노스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안드로니코스 3세 아래에서 메가스 도메스티코스를 역임했고 요안니스 5세의 장인이었다. 그는 제국의 상태에 심각한 무력감을 느끼며 황제에서 자진해서 퇴위한 후에 요아세프 크리스토둘로스(Joasaph Christodoulos, Ιωασάφ Χριστόδουλος)라는 이름으로 수도원에 들어간 후에 남은 생애를 역사가이자 수도자로 보냈다.
2. 생애
2.1. 제위에 오르기 전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1292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모레아의 지배자였던 미하일 칸타쿠지노스였다. 역사가 도널드 니콜은 그가 아버지 사망 이후에 태어났을 수 있고 아마도 고아로 자랐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의 어머니 였던 테오도라 팔레올로고나 앙겔리나가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일원이였기 때문에 팔레올로고스의 피도 섞여있었다. 또한 그의 아내였던 이리니 아사니나 역시 안드로니코스 3세의 육촌[1] 이였기 때문에 팔레올로고스 왕조와는 탄탄하게 혈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요안니스는 어려서부터 안드로니코스 3세와 친밀하게 지냈고, 안드로니코스 3세와 안드로니코스 2세간의 조손간 내전 당시, 손자인 안드로니코스 3세를 도와 큰 공을 세운다. 그는 안드로니코스 3세가 내전에서 승리한 이후 메가스 도메스티코스에 임명되었고 안드로니코스 3세의 치세동안 최고 행정 사무관이 된다.
1341년 6월, 안드로니코스 3세가 죽을 때 그는 요안니스 5세의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안드로니코스 3세가 숨을 거둘 당시 그의 아들 요안니스 5세는 고작 9살짜리 어린아이였다.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안드로니코스 3세 치세에 그의 여러 번의 공동황제 제의를 사양했으며 자신은 황제가 될 마음이 없다는 것을 황제에게 비추었다. 안드로니코스 3세 사후에도 요안니스 5세의 계승의 합법적 권리를 주장했으며 '''황제의 자리를 탐내지 않고''' 요안니스 5세가 성인이 될 때까지 행정 사무를 맡을 '''생각이었다. ''' 동로마 중후기에 대한 많은 책을 쓴 Donald Nicol의 'The '''Reluctant''' Emperor: A Biography of John Cantacuzene, Byzantine Emperor and Monk, C.1295-1383'라는 서적도 존재한다.
물론 그의 충성심이 진심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는 적어도 요안니스 5세와 그의 모후 안나를 위해 헌신을 다했다. 하지만 요안니스 5세의 모후 안나는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와 전 황제의 관계와 당시 요안니스가 쥐고 있던 권력에 요안니스 5세의 예전 후견인들 이었던 총대주교 요안니스 칼레카스(John Kalekas)와 알렉시오스 아포카코스(Alexios Apokaukos) 역시 시기심을 품고 있었다.
이들은 여러 번 그를 섭정의 자리에서 쫓으려고 시도하였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1341년 9월 요안니스가 펠로폰네소스의 십자군 공국들에 대해 원정을 나갔을 때 그를 섭정의 자리에서 쫓는데 성공한다. 그는 그들과 협상을 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는 거절당했으며 그에게 군대를 해산할것을 명령했다. 거기에 새로운 섭정단은 콘스탄티노플에 있었던 칸타쿠지노스의 친척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을 추방하거나 수감시켰다. 칸타쿠지노스의 어머니 테오도라는 가택연금을 당했다. 테오도라는 이후 고통받다 사망한다. 그의 군대는 새로운 섭정단을 부정하고 트리키아의 디비모티콘에서 칸타쿠지노스를 황제로 옹립한다. 더이상 잃을 것이 없었던 칸타쿠지노스는 이것을 수락했다.
내전은 6년 동안 지속되었다. 양측은 외국의 군대와 용병들을 고용하며 소모전을 계속했다. 이 내전은 제국을 개판으로 만들어놓았다. 처음에 칸타쿠지노스는 세르비아로 가서 스테판 두샨에게 자신의 안전과 발칸반도 장악을 위해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세르비아 제국은 칸타쿠지노스의 통수를 치고 새 섭정단쪽으로 갈아탔고, 칸타쿠지노스는 어쩔 수 없이 투르크인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요안니스는 오스만 투르크의 지도자, 부르사의 베이였던 오르한 1세에게 자신의 딸을 내주면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스-투르크 연합군은 요안니스 6세가 콘스탄티노플 입성하도록 도왔다. 아마 1346년, 아니면 1347년 칸타쿠지노스는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했다. 새로운 섭정단들은 모든 작위에서 해지되었으며 요안니스 6세는 공동황제가 되었다.
2.2. 치세
요안니스 6세의 치세동안 동로마 제국은 이미 충분히 몰락할대로 몰락했지만 모든 부분에서 붕괴하기 시작했다. 제노바 공화국인들은 동로마 제국과의 조약을 어기고 갈라타를 무장시키고 더욱더 요새화 시켰다. 그들의 행동은 비잔티움 제국의 재정의 크나큰 문제로 다가왔다. 제노바는 보스포로스 해협의 87%를 장악했고 이는 그만큼의 수익이 제노아인들에게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칸타쿠지노스는 9척의 제대로된 함선과 100척의 작은 배들을 건조해 함대를 재건했다. 그는 이 재건된 함대를 이용하여 제노아인들을 몰아내고 다시 해양을 장악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바램과는 다르게 재건된 함대는 1349년 초반에 제노바 함대의 공격으로 괴멸되거나 나포되었다. 제노바 공화국는 협상을 강요했다. 갈라타의 주요 창고등이 피해를 입은 후 이에 대해 협상을 요구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남아있는 것이라도 지키기위해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어 제노바에 대항하였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1350년에 베네치아 - 제노바 전쟁에 휘말렸다. 그러나 파가니노 도리아(Paganino Doria)는 이후 콘스탄티노플에서의 피로스의 승리로 요안니스 6세(그리고 그가 조력해온 12척의 배들)를 전쟁에서 이탈시켰다.
1351년, 칸타쿠지노스는 15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열었고, 이곳에서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Gregory Palamas)의 헤시카즘 신학은 칼라브리아의 발람(Barlaam)과 다른 동로마 철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해 정통으로 선언되었다.
그의 치세에 세르비아 제국의 스테판 두샨은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그리고 에페이로스를 정복했다. 이에 요안니스 6세는 투르크족의 지원을 요청했다. 한편 1354년 엄청난 지진이 칼리폴리스(갈리폴리)를 강타했고, 이때를 틈타 오스만 투르크는 보스포로스 해협을 넘어 갈리폴리를 합병했다. 이것은 투르크인의 동유럽 정복의 첫걸음이었다. 또한 그는 동년 여러 부채들을 부분적으로 상환하였다.
1353년, 그의 아들 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를 공동황제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부채상환을 위한 증세는 여러 반감을 불러왔고, 1354년 전임 황제였던 요안니스 5세는 그의 후견이이었던 요안니스 6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1354년,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는 퇴위하여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2.3. 말년
칸타쿠지노스는 수도자가 된 이후 요아세프 크리스토불리오스로 이름을 바꾼 후에 저술 활동에 집중했다. 그의 4권 분량의 책, 1320년부터 1356년까지 역사를 담은 역사서는 그의 행동에 대한 사죄를 위해 저술되었다. 물론 요안니스의 저서가 완벽하게 진실만을 담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의 역사서는 그 자신의 행동을 담고 있었기 대문이다. 이후 이 책은 니케포로스 그레고리아스에 의해 보완된다.
1367년, 칸타쿠지노스는 동방 정교회의 대표자로 임명되어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화해를 시도하기 위해 라틴 총대주교 파울과 협상했다. 그들은 교황과 대주교, 동방과 서방의 주교들이 참석할 대 에큐메니컬 공의회 소집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이후 우르바노 6세에 의해 거부되었고, 협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1383년 6월 15일, 칸타쿠지노스는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라코니아(Laconia)에있는 미스트라(Mistra)에 그의 아들들에 의해 묻혔다.
3. 가족
그의 아내는 이레네 아사니아였으며 그녀는 안드로니코스 아센(불가리아의 이반 아센 3세과 이레네 팔라이올로고나 -미카일 8세의딸- 사이의 아들)의 딸이였다. 요안니스는 그녀와 여러 자식을 두었다.
- 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 공동황제(1353-1357)로 제위, 이후 모레아의 공작 (1325 – 1383)
- 마누일 칸타쿠지노스, 모레아의 공작 (1326 – 1380)
- 안드로니코스 칸타쿠지노스 (1347)
- 마리아 칸타쿠지나 , 에페이로스의 니키포로스 2세 오르시니와 혼인
- 테오도라 칸타쿠지나, 오르한 1세와 혼인 (1332~1381년 이후)
- 헬레나 칸타쿠지나, 요안니스 5세와 혼인 (1333 – 1396)
4. 게임에서
파워업키트에서 추가된 1370년 시나리오에서 비잔틴 장수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좋지 못하고 고령이라 내정으로 돌리는 게 편하다.
1편과 2편에서 1337년 시나리오의 테살로니키 영주로 등장한다. 동로마 말기여서 영토는 적은데 그 중에서 절반이 요안니스 6세 혈족의 영토여서,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제정 정부체제가 선거 군주제의 변형 상속법임을 이용해서 안드로니코스 사후에 차기 황위를 노릴 수 있다.
5. 참고 자료
영문위키피디아 , 이탈리아 모데나 에스던스 장서고, 사이트: (Kavrako blog, Bizans İmparatorluğu 93| Paleologos Hanedanı)
[1] 아버지의 고모의 아들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