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1세
1. 개요
오스만 제국의 실질적인 창업자이자, 오스만 왕조의 초대 군주.
다만 오스만 제국의 초대 황제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는데, 일단 본인 대에서는 황제는 고사하고 술탄으로도 칭하지 못해 베이라 칭했던 사정이 있었기 때문으로, 오스만 왕조의 군주가 술탄을 칭하게 된 것은 3대인 무라트 1세 때부터고, 황제를 칭한 것은 7대인 메흐메트 2세부터다.
2. 즉위 이전
아나톨리아 반도 서북부 비티니아 지방의 쇠위트(Söğüt)에서 에르투으룰(Ertuğrul)의 아들로 태어났다. 에르투으룰의 아버지이자, 오스만의 할아버지인 쉴레이만 샤(Suleyman Şah)는 본래 중앙아시아 지역의 오우즈족에 속하는 카이으(kayı) 부족의 족장이지만 칭기즈 칸의 몽골군에게 쫓겨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이르렀다고 하며,[1] 에르투으룰은 당시 아나톨리아 반도의 튀르크계 국가였던 룸 술탄국의 신하로 있으면서 쇠위트와 그 주변을 영지로 받아 동로마 제국과 싸움을 벌이며 영토를 확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스만이 태어날 무렵 룸 술탄국은, 몽골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이며 쇠퇴해가고 있었다. 에르투으룰부터가 룸 술탄국에게 신세를 진 것은 사실이지만 충성스러운 신하라기보다 자신의 세력을 넓히는 데에 골몰하고 있었으며, 1250년에 이미 독립해나온 카라만 공국(Karaman Beyliği)[2] 을 비롯하여 룸 술탄국에서부터 튀르크계 소국들이 하나둘씩 떨어져나오고 있던 상황이었다.
한편 이와 같은 무렵, 아나톨리아 반도 바깥에서는 튀르크계 부족들이 동쪽에서부터 피난을 오고 있었다. 당시 한창 맹위를 떨치던 몽골군의 칼날을 피해, 서쪽으로 도망쳐오고 있던 것. 그리고 그들이 단순한 피난민이었다면 그들에게 주목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당시 그들 가운데에는 일단 몽골을 피해 도망치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본래 소명은 이슬람의 세력을 방어하고 더욱 확장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던 전사들인 가지(Gazi)[3] , 학자, 당시에는 의료와 교육까지 담당하고 있던 성직자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 정착할 땅과 재산을 필요로 하고 있었고, 1281년에 에르투으룰이 죽자 그의 세력을 이어받은 오스만은 그를 빠르게 파악하고 동로마 제국과의 성전(聖戰, Cihat)을 선포하는가 하면 스스로 가지를 칭하는 등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게다가 오스만은 젊은 시절부터 전사로서는 탁월하다는 명성을 얻고 있었고, 결국 가지와 성직자, 학자들은 오스만의 영토에 정착하여 새로운 나라 체제를 갖추어나가는 데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4] . 그리고 마침내 1299년, 오스만은 자신은 더 이상 룸 술탄의 신하가 아니며 독립국의 군주임을 선포하게 된다. 훗날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삼대륙에 걸친 대국을 지배하며 유럽 국가들을 떨게 했던 오스만 제국은 이렇게 탄생했다[5] .
3. 재위
1299년부터 1326년까지 27년간 재위했지만, 오스만 1세 시대에는 큼직큼직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시대에 오스만국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한 점에 불과했기 때문. 다만 동로마 제국과의 '성전' 을 계속한 것은 확인되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기할 만한 전투 두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바페오스 전투(Battle of Bapheus, 1302): 현존 기록상 오스만국과 동로마 제국의 첫 번째 싸움. 다만 오늘날 터키의 이즈니크나 이즈미트 부근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전투 현장은 알 수 없으며, 동로마 제국에 고용된 용병들이 소극적인 자세로 싸움에 임하는 바람에 오스만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당시 로마군은 2천 명, 오스만군은 5천 명.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 가지와 성직자, 학자 등 피난민들의 눈은 오스만국에게로 완전히 쏠리게 되고, 이로써 오스만은 신생국으로서의 기반을 완전히 다질 수 있게 된다.
부르사 공방전(Siege of Bursa, 1326): 오스만국이 동로마 제국의 도시 프루사(Prusa)를 공격한 전투. 오스만국은 이전에도 니케아(Nicaea, 오늘날의 이즈니크(İznik))나 니코메디아(Nicomedia, 오늘날의 이즈미르(İzmit)) 등 동로마 제국의 깃발이 꽂혀 있는 도시들을 공격했지만, 본래 유목민족인 튀르크인답게 기병이 주축이었기에 이렇다 할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6] . 하지만 1326년에 프루사가 함락됨으로써 오스만국은 마침내 동로마 제국의 대도시 가운데 하나에 입성하게 되는데, 당시 오스만은 이미 고령이었던 관계로 아들인 오르한이 지휘를 맡았다.
오스만은 부르사 공방전이 벌어진 것과 같은 해인 1326년, 향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부르사 함락이라는 소식을 듣고 죽었는지 그전에 죽었는지는 불분명하며, 부르사를 정복한 오르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2대째 베이가 되어 부르사를 오스만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새로운 나라를 창건하고 조금씩이나마 영토를 확장한 것만으로도, 오스만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에 충분한 군주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가 통치하던 나라는 아직 본격적인 법이나 제도가 마련되지는 못해서 나라라기보다 부족전사집단 같은 느낌이 강했으며, 관료들을 대표하는 최고 관직인 재상직조차 아직 없었다. 오스만의 초대 재상은 2대 군주 오르한의 동생인 알라딘 베이. 초보적으로나마 관료제와 군사 조직을 마련하고 국법을 제정하여 나라 체제를 갖추어나가는 것은 오르한의 과제로 남게 된다.
4. 오스만의 꿈
젊은 시절에 이슬람 지도자(셰이크) 에데바리의 딸을 흠모하고 있었지만 에데바리의 반대로 인해 결혼이 불가능했는데, 어느 날 오스만은 이상한 꿈을 꿨다.
밤이 되자 둥근 달이 에데바리의 가슴에서 떠오르는 것이 보였으며, 떠오르는 둥근 달이 나중에 자기 가슴으로 지는 것이었다. 그 달은 자기 가슴으로 들어오자마자 큰 나무가 쑥쑥 자라 하늘을 뒤덮었으며, 나무의 뿌리는 네 갈래로 갈라져 강물을 이루다가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나일 강, 도나우 강이 형성되었다. 나무의 잎들은 콘스탄티노플로 향했으며, 그 꿈을 꾼 오스만은 에데바리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그는 세계를 제패할 꿈이라면서, 자신의 딸을 오스만과 결혼하게 했다.
다만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확인할 수 없으며, 후대 오스만 제국의 작가들이 시로 재창작하여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5. 여담
오스만 제국을 세운 민족으로 제국 초창기(엄밀히는 메흐메트 2세 이전까지)에 지배층이었던 튀르크인은,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스스로를 '튀르크인' 이라 하지 않고 '오스만인(人)' 이라 불렀다. 1893년 덴마크의 언어학자 톰센이 오르혼 江 비문을 현대 터키어로 해독을 함으로써 터키의 기원에 대한 수많은 논쟁을 종식시켰다. 터키 민족이 오늘날의 터키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은, 이로부터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집권 이후. 한편 오스만 제국의 역대 군주들은, 즉위할 때 오스만의 검을 허리에 차는 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1] 쉴레이만 샤가 유프라테스 강을 도하할 때 거기서 사고로 익사해버리자 쉴레이만의 아들 둘이 각각 부족을 나누어 서로 갈 길을 갔으며, 그 중 에르투으룰이 이끼는 부족이 아나톨리아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쉴레이만 샤는 지금의 시리아 북부에 묻혔는데, 21세기 들어 IS에게 파괴될 위기에 처하자 터키가 군대를 보내 쉴레이만 샤의 무덤을 터키 내로 이장했다.[2] 이들은 오스만국이 강성해지기 이전까지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으며, 여러 튀르크계 소국들 가운데 가장 마지막까지 오스만과 경쟁하다가 1483년에 메흐메트 2세에 의해 멸망했다.[3] '수호자'라는 뜻으로 이슬람판 십자군이라고 보면 이해가 빠를지도. 터키의 도시 가지안테프의 앞자 가지가 같은 뜻이다.[4] 이후 이들의 후손들은 콘스탄티노플 함락 때까지 오스만국의 지배층으로 군림한다. 오스만의 군주도 새로운 정책을 추진한다거나 할 때 이들의 눈치를 반드시 살펴야 했으며, 이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보기 위해 도입한 것이 바로 예니체리와 그들을 징집하는 제도인 데브시르메(Devşirme, 이후 데브시르메는 관료선발제도로 확장되었다). 즉 조선의 훈구파에 해당하고, 데브시르메 징집자가 사림파에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5] 다만 오늘날 터키에서는 에르투으룰의 세력도 오스만 제국의 역사 가운데 일부로 보고 있다. 다소 억지로라도 한국의 역사에 비유하자면 태봉과 고려의 관계라고 할까.[6] 이는 몽골을 갓 통일하고 금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한 몽골군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르다. 당시의 몽골군이 초원 지대에서의 싸움에는 익숙했지만 성벽을 두른 도시를 공격하는 데에는 서툴렀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스만 시대의 오스만군은 야전에서는 동로마군을 떡바르고 다녔지만 공성전에서는 영 맥을 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