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 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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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룸 술탄국은 오늘날 터키가 소재한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1077년 ~ 1308년까지 존속한 이슬람 왕조이다. 룸(روم)은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로마라는 뜻으로, 동로마 제국의 핵심 영역이었던 아나톨리아에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지방 이름과 나라 이름을 그대로 룸이라고 하였다. 이란의 셀주크 제국에서 갈라져 나온 왕족이 세운 나라였기 때문에 룸 셀주크라고도 하며, 본가 셀주크 왕조와 마찬가지로 튀르크계 유목민이 시초이지만,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현대 터키어로는 아나톨리아의 셀추크 일족의 왕국이라는 의미의 아나돌루 셀추클루 데블레티(Anadolu Selçuklu Devleti)나 룸 술탄국(Rum Sultanlığı), 터키에서의 셀주크 왕조 시대라는 뜻의 튀르키예 셀축룰라르(Türkiye Selçukluları) 등이 쓰인다.
2. 역사
2.1. 초창기(1077 ~ 1095)
1071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로마노스 4세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패배하고 그 전부터 소아시아 동부를 왕래하던 튀르크족은 군사적 공백과 로마 내부 분열을 기회로 본격적으로 아나톨리아 동부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이후 튀르크족은 아나톨리아를 사실상 장악하다시피 했고 셀주크 제국 왕족인 쿠탈므시의 아들 쉴레이만(سليمان بن قتلمش, Kutalmışoğlu Süleyman)이 1075년 아나톨리아 서부의 니케아를 동로마 제국에게서 빼았고, 2년 후인 1077년에 본국인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이 때가 룸 술탄국이라 부르는 튀르크 정치체의 시작점이다. 이 시기에 니케아가 이즈니크(İznik)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다른 터키 도시들도 그렇지만 그리스어 발음을 자기식에 맞게 고친 것이다.
다만 초창기의 룸 술탄국은 애매한 정체성과 독특한 외교관계를 가진 불안정한 국가였다. 우선 쉴레이만 1세는 '샤'를 칭했을 지언정 '술탄'을 칭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셀주크 술탄 알프 아르슬란과의 계승 전쟁에서 패배한 쿠탈므쉬의 아들이다보니 본가 혹은 본국이라할 수 있는 셀주크 제국의 궁정과 사이가 나빴다. 또한 룸 술탄국 내부에는 피정복민인 비잔틴-로마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들이 상대적으로 다수였고 권력의 근간인 튀르크-무슬림인들은 이방인인데다가 상대적으로 소수였다. 정교회를 믿는 튀르크인이 수두룩했고, 이교도와 통혼하는 사람도 많았으며 심지어 튀르크 엘리트들이 동로마 제국에 투항하기도 했다.[1] 때문에 룸 술탄국은 셀주크-튀르크 제국(諸國)의 일원으로 볼 수는 있어도 셀주크 제국(帝國)으로 무작정 포함시키기에는 어렵다.
특히 쉴레이만 1세는 적국이었을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니키포로스 3세-알렉시오스 1세와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는데, 때문에 니케아의 튀르크 군주를 로마 황제의 반독립적인 봉신-동맹 혹은 두루뭉술하게 '친구', '대리인'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독특한 관계 덕에 로마 황제는 기존 제국령이었던 룸령 아나톨리아에 관리를 파견하고 유목민을 통제하여 제국 경제권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유사시에 튀르크군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2] 불안정하고 두 제국 사이에 끼인 국가였던 룸 술탄국 역시 동로마 제국과의 협력을 통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셀주크 제국의 장군 보잔이 니케아를 포위하자 로마가 니케아의 아불 카심을 도와 포위를 이겨내게 협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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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오스 1세와 맺은 드라콘 조약(1081)으로 정해진 대략적인 세력권
1086년, 쉴레이만이 시리아에서 사망하자 룸 술탄국은 대단히 불안정해졌다. 아들 클르츠 아르슬란은 셀주크 제국의 포로가 되었고, 니케아에는 로마 황제와 적대적인 비혈연 후계자가 들어섰다. 셀주크 왕족인 쉴레이만의 카리스마도, 원주인인 로마 황제의 빌려온 권위도 없게 된 아나톨리아는 유목민과 튀르크 족장들이 날뛰어 대단히 혼란스러워졌다. 협력관계였던 동로마 제국 정부도 페체네그와의 전쟁으로 국력이 한계에 달하자 이제는 이스파한의 셀주크 술탄 말리크 샤와 협력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적대적인 두 제국 사이에서 소멸할 뻔 했던 룸 술탄국은 1092년 말리크 샤가 죽어 셀주크 제국이 혼란스러워지고, 쉴레이만의 아들 클르츠 아르슬란이 풀려나 니케아로 돌아오면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2.2. 십자군 시대와 동로마 제국의 역습(1095 ~ 1180)
그러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클르츠 아르슬란은 아버지처럼 로마 황제와 협력하지 않고 반대로 적대했는데, 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아나톨리아 수복 여론이 높아지는 와중 자신의 지위까지 불안정해지자 국력이 부족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교황과 짜고 서유럽 세력을 불러들였다. 바야흐로 십자군 전쟁의 시작이었고, 그 여파를 얻어맞을 대상은 룸 술탄국이었다. 클르츠 아르슬란은 1096년 민중 십자군을 성공적으로 격파하였으나, 본대라 할수있는 1차 십자군에게 패배하여 수도 니케아를 잃고 도릴라이움 전투에서도 패퇴하여 아나톨리아 서부를 상실하였다. 그러나 1차 십자군이 통과한 이후 이코니온에 천도한 룸 술탄국은 십자군 후발대를 격파해가며 살아남았다. 이후 십자군이 통과한 공백을 차지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과 경쟁하여 잠시 동안 우세함을 보였으나, 요새화 전략으로 일관하는 제국을 아나톨리아에서 완전히 몰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국력을 추스른 동로마 측이 야전을 걸어온 1117년의 필로밀리온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요안니스 2세 시절의 동로마 제국에 대해서는 수세를 취하며 중부 아나톨리아에서 국력을 수습하였다.
마수드 1세와 클르츠 아르슬란 2세 시절에는 서쪽의 동로마 제국과 동쪽의 다니슈멘드 왕조 사이에서 끝끝내 수성에 성공하였고, 소아시아 내륙을 장악했다. 특히, 마누일 1세 시절의 동로마 제국이 서부 아나톨리아의 요새화를 대강 완료하고 중흥기를 달리자 국력차를 인정하고 1161년 사실상의 봉신행세를 하는 등 와신상담의 시기를 보냈다. 이후 제국의 관심을 피해 약체화 된 다니슈멘드를 공격하여 세를 불린 다음, 1176년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의 공세를 격퇴해내고 봉신 신세에서는 벗어났다. 그러나 국력차를 극복하지는 못해서, 이어진 전쟁에서 패배하자 열세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필로밀리온 전투 이후 콤니노스 왕조 시대의 룸 술탄국은 쉴레이만 1세 시절보다는 자주적이지만, 정도가 다를뿐 여전히 로마 영향권내의 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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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일 1세 사망시의 1180년대 무렵 지중해 세력권
2.3. 짧은 전성기(1180 ~ 1225)
그러나 이러한 소아시아의 정세는 1180년 마누일 대제의 사망을 기점으로 격변하기 시작한다. 마누일 대제 사후 즉위한 무능한 동로마 황제들 덕분에 룸 술탄국은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우세를 보였고, 1190년 제3차 십자군 원정때 잠시 패퇴하였지만 금방 국력을 복구하였다.
1204년 동로마 제국이 4차 십자군으로 몰락하자 룸 술탄국은 재확장을 시작한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잔존 세력인 니케아 제국과 트레비존드 제국이 아나톨리아 서부와 흑해 연안에 각각 버티고 있어 아나톨리아를 완전히 손에 넣진 못했지만,
1207년 안탈리아를 점령하여 지중해를 통해 이집트와 교역할 수 있게되었고, 흑해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트라페준타 제국을 공격하여 1214년 시노페를 점령하고 트라페준타 제국을 거의 복속시켰다. 이때 룸 술탄국의 국력은 절정에 달해 프리기아에서 아르메니아에 이르는 넓은 땅을 지배하였고 크림 반도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2.4. 몽골 제국의 침공과 속국화(1243 ~)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인 13세기 중반엔 당시의 절대 강자 몽골 제국의 침략을 받아 세력이 크게 약화되고 이는 동로마 망명 세력들이 한숨 돌리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해 주었다. 1242년 몽골 제국은 에르주룸을 점령하였고, 룸 술탄국은 1243년 쾨세다 전투에서 대패하고 몽골의 속국이 되었다.
몽골 제국의 분열 이후에는 일 칸국의 칸들이 룸 술탄국에 대해 종주권을 행사했다. 이런 과정에서 룸 술탄국 각지의 가지와 토후들이 사실상 독립함에 따라 내부 분열로 인해 룸 술탄국은 점점 위상을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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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수복 이후 지중해 세력권(1263년)
2.5. 소멸
이렇게 룸 술탄국이 유명무실해지는 와중에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은 룸 술탄국의 일부 영토를 점령했으며 1270년대에는 잠시 맘루크 왕조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그 와중에 고질적인 튀르크족의 내분이 심화되어 왕족끼리 죽고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와중에 각지의 토후들은 통제를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했다. 그야세틴 케이휘스레브 3세(1265 ~ 1284 재위)의 치세 말에 술탄이 다스릴 수 있는 영역은 이코니온 인근에 불과했다.
중간에 일 칸국이 개입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술탄을 내치고 자신들이 원하는 술탄을 복위시키기도 하였다.그 후 룸 술탄국의 마지막 술탄이 죽자 일 칸국은 신임 술탄을 임명하지 않고 총독을 파견한다.
룸 술탄국의 해체는 숙적인 동로마 제국 입장에서도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튀르크인들이 아나톨리아에 정착한지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나있었고, 기동력을 살려 약탈을 일삼는 골칫거리인 튀르크 유목민들을 통제하는 룸 술탄국은 동쪽의 완충지대이자 외교대상으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었다. 유럽 영토에도 여력을 할애해야 했던 제국 입장에서는 차라리 룸 술탄국이 존재하는 것이 나았던 것이다.
결국 룸 술탄국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13세기 말에 동로마 제국과 맞닿은 북서부 국경에 가까운 비티니아 지방에 위치한 가지 군후국의 족장 오스만 1세의 세력이 강성해지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오스만 제국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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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0년 분열된 아나톨리아
3. 역대 술탄
여기 기록된 이름/발음들은 아랍문자를 터키어 알파벳으로 직역하고 현대 터키어 식으로 읽은 것이다.[3] 물론 당시에도 튀르크인들은 중세 튀르크어를 썼지만, 르네 그루세에 따르면 당시 코냐(또는 콘야)[4] 의 궁정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언어는 페르시아어였다. 특히 룸 군주의 이름으로 자주 등장하는 카이후스라우(كيخسرو), 카이쿠바드(كيقباد), 카이카우스(كيكاوس) 따위의 인명들은 이란의 전설에서 따온 것이다.
[1] 이러한 경향은 룸 술탄국 정부가 건재하던 13세기 중반까지 이어져서, 후기에 들어서면 술탄 중 콘스탄티노플에서 세례받은 자도 있을 정도였다. 로마-룸의 관계는 일반적인 기독교-이슬람 관계와는 달랐다.[2] 로베르 기스카르가 동로마 제위를 노리고 그리스를 침공했을 때 알렉시오스 1세가 베네치아와 룸 술탄국의 지원을 받아 이를 격퇴해낸 것이 대표적인 예시이다.[3] 터키어는 어말에 유성음이 오더라도 무조건 무성음으로 발음한다. 아랍식으로 İzz-ed din 이라고 쓰든 izzeddin 이라고 쓰든 İzzettin 이라고 쓰든 발음은 이젯틴으로 동일하다.[4] 튀르크족들이 들어오기이전엔 콘야는 그리스식으로 '''이코니온''', 라틴어로는 '''이코니움'''이라고 읽었다.[5] 동로마 제국의 독립 인저은 108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