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노이라트
1. 개요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 1882.12.10 - 1945.12.22)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의 과학철학자, 사회학자, 정치경제학자이다. 고국을 떠나기 전(1934년 이전)에는 비엔나 서클의 주도적인 인물이었다.
2. 생애
비엔나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당시 저명한 정치경제학자였던 빌헬름 노이라트(1840 - 1901)이다. 그는 빈 대학교에서 수학 ·물리학 ·경제학 ·철학을 배우고 베를린대학에서 현대논리학을 배웠다. 이후 베를린 대학의 정치학과와 통계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안나 샤피르(Anna Schapire)와 1907년 결혼했으나 그녀는 1911년 아들 폴 노이라트를 낳다 세상을 떠났으며, 이후 절친한 친구였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올가 한(Olga Hahn)과 결혼하였다. 올가 한은 시각장애인이었고 마침 전쟁이 발발했기에, 아들 폴 노이라트는 비엔나 외곽의 보육원으로 보내졌다가 9살이 되던 해부터 다시 부모와 살게되었다.
노이라트는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노이에 비엔나 한더스아카데미(Neue Wiener Handelsakademie, 현 비엔나 비지니스 스쿨)에서 정치경제학을 가르쳤다. 나중에는 전쟁부(현재의 국방부)에서 전시경제부문를 총괄하기도 했으며, 1917년(혹은 1918년)에는 라이프치히 독일 전시경제 박물관의 디렉터가 되었다. 노이라트가 많은 글을 쓰기도 했던 뒤러연맹(Dürerbund)에서 그와 알게 된 볼프강 슈만은, 노이라트가 사회화 계획을 연구하고 해결하도록 강권했다. 1918-19년 노이라트는 독일사회민주당(German Social Democratic Party)에 가입하였고 중앙경제계획을 위한 사무실을 뮌헨에서 운영했다.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Bavarian Soviet Republic) 세력이 바이마르 정부군에게 패배했을때 투옥되기도 했으나, 오스트리아 정부의 중재로 오스트리아로 돌아왔다. 옥중에서 노이라트는 오스발트 슈펭글러의《서구의 몰락》을 비판하는 "안티-슈펭글러"를 저술했다.
붉은 비엔나[1] 시절에는 사회민주당에 가입했고, 주택 및 정원의 대지를 구성원에게 제공하는 자립협회의 모임인 오스트리아 주택정원협회(Verband für Siedlungs-und Kleingartenwesen)의 비서관이 되었다. 1923년에는 세틀멘트 박물관(Siedlungsmuseum)이라 불리는 주택 및 도시계획 박물관을 설립했고 이후 1925년 이름을 비엔나 사회경제박물관(Gesellschafts-und Wirtschaftsmuseum in Wien)으로 바꾸었다. 이름을 바꾸면서 노이라트는 도시행정부, 노동조합, 노동자협회, 은행원협회를 포함하는 고유 협회를 설립했고, 당시 시장 카를 자이츠[2] 는 이 협회의 첫번째 후원자가 되었다. 또한 시의회 보건복지 의원이었던 율리우스 탄들러가 다른 주요 사회민주당 정치인들과 함께 초대 이사회를 구성했다. 박물관은 도시행정부의 건물에서 전시장을 제공받았다. (그 중 주요 건물은 이후 비엔나 시청의 인민 홀이 된다.) 박물관의 전시 내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노이라트는 그래픽 디자인과 시각 교육에 공을 들였다. 일러스트레이터 게르트 아른츠(Gerd Arntz)와 마리 라이데마이스터(Marie Reidemeister)와 함께, 그는 손쉽게 해석되는 아이콘을 통해 양적 정보를 재현하는 시각 상징 방식인 아이소타입을 만들었다.
또한 노이라트는 1920년대에 열렬한 논리실증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비엔나 서클 선언문의 주저자였고, 통합과학(Unity of Science)운동과 통합과학국제백과사전(IEUS) 편찬의 숨은 원동력이기도 했다. 비록 아이소타입이 독립적 언어로 의도된 것이 아니었고, 소통할 수 있는 영역이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서신을 주고받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긴 했지만, 1930년대에는 성인 대상의 교육운동과 새로운 인공언어를 위한 국제주의자적 열정을 모두 연결하는 국제 그림 언어로서, 아이소타입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1934년 오스트리아 시민 전쟁 기간에는 모스크바에 머무르며 작업했다. (그가 이후 오스트리아에 돌아갈 때 위험해질 수 있었기 때문에 작업에 임하면서 노이라트는 암호화된 메세지를 받을 수 있도록 요청했다.) 이후 마리 라이데마이스터가 언급한 바에 따르면, "루돌프 카르납이 당신을 기다린다"는 전보를 받은 이후 노이라트는 오스트리아로 돌아가는 대신 자신의 국제적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헤이그로 향했다. 그의 비엔나 팀은 해체되었고 박물관 작업은 보류되었다.
그의 부인 올가 또한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부인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고, 이후 독일 공군이 로테르담을 폭격하자 노이라트는 마리 라이데마이스터와 함께 난민들을 실은 구명선을 타고 영국해협을 건넜다. 영국령 맨 섬의 온칸 난민 수용소에서 풀려난 이후 1941년이 되어서야 노이라트와 마리 라이데마이스터는 결혼했다. 부부는 옥스포드에 아이소타입 인스티튜트를 세웠고, 노이라트는 영국 울버햄튼 근처 블리스톤의 슬럼가 재건 프로젝트에서 아이소타입 차트 디자인 및 자문을 요청받았다.
오토 노이라트는 1945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 이후, 마리 노이라트는 아이소타입 인스티튜트의 작업을 지속했고, 유고를 출간했으며, 오토 노이라트가 시작했던 프로젝트들을 완성했고, 아이소타입 시스템을 사용한 많은 어린이용 서적을 집필했다. 마리 노이라트는 1986년에 세상을 떠났다.
3. 연구
노이라트의 연구와 노이라트에 관한 연구 대부분은 아직 독일어로만 이용가능하다.(그러나 그는 몇몇 연구를 베이식 잉글리시로 서술하기도 했다.) 오토 노이라트의 과학 논문들은 네덜란드 하를렘의 노르트홀란트주(州) 기록보관소(Noord-Hollands Archief)에 소장되어 있으며, 노이라트 부부의 아이소타입 콜렉션은 영국 레딩 대학교의 타이포그래피/그래픽 커뮤니케이션 학과에 소장되어 있다.
3.1. 과학철학과 언어철학
그의 후반기 작업이자 가장 중요한 작업인 물리주의(Physicalism)에서, 노이라트는 논리 실증주의에 의한 통합과학 프로그램의 논의를 새로운 차원으로 확대하고 있다. 노이라트는 실증주의적 프로그램 및 그 개념적 기초의 일반 원칙들과 자신의 이론과의 접점들을 상세히 기술하고 설명했다. 그것은
- 여러 과학들에 의해 배치된 지식을 모두 포괄하는 보편적 체계를 구축하고
- (검증 가능한 과학적 진술들로 변환 가능하지 않은 모든 명제라는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을 절대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먼저 노이라트는 (외부세계의 사물을 재현할 수 있는 단어와 문장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필요로 하는) 쓸모없는 형이상학적 사변으로서의 동형성(isomorphism), 즉 언어와 실재 사이의 동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대신, 노이라트는 언어와 실재는 일치한다고 제안한다. 그 실재란 그저 언어체계 안에서 먼저 입증된 문장들의 총체이며, 어떤 문장이 "진리"인지는 이미 입증된 문장들의 총체성과의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혹 어떤 문장이 이미 입증된 문장들의 총체와 "조화"하지(혹은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문장은 거짓이거나, 그 총체성을 구성하는 명제들의 일부가 어떤 방식으로건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로 그는 진리를 사실들이나 세계의 실체들과 관련된 어떤 것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언어적 주장의 내적 정합성(coherence)'으로 본다. 더욱이 증명의 기준은 개별 문장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시스템[3] 에 적용된다. 이러한 사유는 W.V.O. 콰인의 전체론적 검증주의(holistic verificationism)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언어와 과학적 증명의 전체론적 본성을 '이미 바다 위에 있는 배를 개조하는 것'과 비교한 노이라트의 비유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콰인의 <단어와 대상>(1960)이었다.
심리학자 키스 스타노비치(Keith E. Stanovich)는 밈(meme)과 밈플렉스(memeplex)의 맥락에서 이 은유를 논했으며, 이를 노이라트의 배(Neurath's boat)라 칭하기도 했다.우리는 스스로의 배를 재구축해야 하지만 바닥부터 새롭게 개조할 수 없는 선원들과 같다. 하나의 대들보를 빼내는 순간 다른 대들보를 동시에 넣어야하며, 또한 이러한 작업을 위해 선체의 나머지 부분을 지지대로 사용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래된 대들보와 유목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배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낼 수는 있지만, 그 과정은 점진적인 구축일 수밖에 없다.
노이라트는 과학이 감각 자료(sense data)를 기반으로 재구축되어야 한다는 개념에도 반대했는데, 과학의 형식적 재구축을 위한 유효한 기반을 정초하기에는 지각 경험이 지나치게 주관적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대부분의 실증주의자들이 강조하던 현상학적 언어는 수리물리학적 언어로 교체되어야 했다. 이러한 언어는 시공간 좌표에 기반하기에, 객관적 공식화를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여지를 준다. 과학에 대한 물리주의적 접근방식은 여러 학문들을 '물리적 사실들에 관련된 주장들의 체계'로 환원하도록 허용하므로,그러한 접근방식은 형이상학의 모든 잔여물들을 제거하는 것을 촉진한다.
마지막으로 노이라트는 언어 또한 소리나 상징의 정돈된 연쇄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언어 그 자체도 하나의 물리적 체계라고 제안하였고, 언어를 통해 언어 자신의 구조를 설명하는 것은 모순없이 가능하다고 간주했다.
이러한 노이라트의 사상은 오늘날 형이상학(특히 심리철학)에 관한 지배적 관점인 물리주의의 기반을 정초하는 데에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
3.2. 경제학
경제학 분야에서, 노이라트는 (통화 시스템과 구별되는) 현물 경제 회계와 같은 시스템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20년대 '완전한 사회화' (Vollsozialisierung, complete socialization), 즉 한낱 부분적인 사회주의 경제가 아닌 완전한 사회주의 경제의 지지자였다. 그가 제안한 경제체제의 변화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사회민주당 주류로부터 지지받는 의견들보다도 급진적이었고, 1920년대 노이라트는 이와 관련된 논쟁을 사회민주당의 주도적인 이론가들(사회주의 경제에서 자본의 필요성을 고집했던 카를 카우츠키 등의 이론가들)과 이어나갔다. 그는 전쟁 중 정부의 경제학자로 일하면서, "전쟁의 결과로 현물 배분은 이전보다 더욱 체계적이고 자주 적용되었고, 전쟁은 돈과의 싸움이 아니라, 탄약과 식품공급과의 싸움이라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다는 점을 관찰하면서 이러한 견해를 드러내게 된 것이다. 또한 노이라트는 통화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경제체제, 즉 명시된 상품 및 서비스의 양적 측면에서 계획되는 경제체제의 실현가능성을 믿게 되었다. 이것은 루드비히 폰 미제스가 쓴 저명한 에세이 <사회주의 국가의 경제적 계산 문제(Economic Calculation in the Socialist Commonwealth)>(1920)의 논지에 대한 응답이었다. 노이라트에게 있어 전시경제는 결정과 실행의 빠른 속도, (군사적)목적과 관련된 재화의 최적화된 분배, 독창성의 합리적인 평가와 활용의 측면에서 장점을 가진 것이었다. 중앙집중화된 의사결정의 결과물이라는 측면에서 그가 인지했던 두가지 단점은, 생산성이 축소될 것이라는 점과 간단한 경제적 교환에 의해 발생하는 이득이 상실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는 생산성 축소가 작업흐름 등에 관한 분석[4] 에 바탕을 둔 "과학적" 기법을 통해 완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노이라트는 사회경제이론과 과학적 방법이 당대의 관행에 함께 적용될 수 있다고 믿었다.
노이라트의 사회경제 발전에 관한 시각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처음으로 정교화된 사적 유물론과 유사하다. 특히 노이라트는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5] 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사회주의의 부흥과 함께 부각된 과학적 사고 및 경험주의/실증주의의 부흥과 연관된 것이다. 과학적 사고와 경험주의/실증주의 모두 "마술적 사고"나 (관념철학과 연관되어 반동적 목적에 봉사하기도 하는) 신학과 같은 낡은 형식의 인식론과 충돌한다. 과학적 관점의 지지자들은 과학을 능가하는 그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으며, 모든 형태의 형이상학을 거부한다. 역사의 사회주의적 진행단계 상, 노이라트는 과학적 세계관이 지배적인 사유의 형식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4. 간행물
저서
- 1913. Serbiens Erfolge im Balkankriege : eine wirtschaftliche und soziale Studie. Wien : Manz.
- 1921. Anti-Spengler. München, G.D.W. Callwey.
- 1926. Antike Wirtschaftsgeschichte. Leipzig, Berlin : B. G. Teubner.
- 1928. Lebensgestaltung und Klassenkampf. Berlin : E. Laub.
- 1933. Einheitswissenschaft und Psychologie. Wien.
- 1936. International Picture Language; the First Rules of Isotype. London : K. Paul, Trench, Trubner & co., ltd., 1936
- 1937. Basic by Isotype. London, K. Paul, Trench, Trubner & co., ltd.
- 1939. Modern Man in the Making. Alfred A. Knopf
- 1944. Foundations of the Social Science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 1944.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Unified Science. With Rudolf Carnap, and Charles W. Morris (ed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 1946. Philosophical Papers, 1913–1946. Marie Neurath and Robert Cohen, with Carolyn R. Fawcett, eds.
- 1973. Empiricism and Sociology. Marie Neurath and Robert Cohen, eds. - 칼 포퍼와 루돌프 카르납이 편집한 전기적/자서전적 개요. "안티-슈펭글러"가 요약된 형태로 번역되어 있다.
- 1912. The problem of the pleasure maximum. In: Cohen and Neurath (eds.) 1983
- 1913. The lost wanderers of Descartes and the auxiliary motive. In: Cohen and Neurath 1983
- 1916. On the classification of systems of hypotheses. In: Cohen and Neurath 1983
- 1919. Through war economy to economy in kind. In: Neurath 1973 (a short fragment only)
- 1920a. Total socialisation. In: Cohen and Uebel 2004
- 1920b. A system of socialisation. In: Cohen and Uebel 2004
- 1928. Personal life and class struggle. In: Neurath 1973
- 1930. Ways of the scientific world-conception. In: Cohen and Neurath 1983
- 1931a. The current growth in global productive capacity. In: Cohen and Uebel 2004
- 1931b. Empirical sociology. In: Neurath 1973
- 1931c. Physikalismus. In: Scientia : rivista internazionale di sintesi scientifica, 50, 1931, pp. 297–303
- 1932. Protokollsätze (Protocol statements).In: Erkenntnis, Vol. 3. Repr.: Cohen and Neurath 1983
- 1935a. Pseudorationalism of falsification. In: Cohen and Neurath 1983
- 1935b. The unity of science as a task. In: Cohen and Neurath 1983
- 1937. Die neue enzyklopaedie des wissenschaftlichen empirismus. In: Scientia : rivista internazionale di sintesi scientifica, 62, 1937, pp. 309–320
- 1940. Argumentation and action. The Otto Neurath Nachlass in Haarlem 198 K.41
- 1941. The danger of careless terminology. In: The New Era 22: 145–50
- 1942. International planning for freedom. In: Neurath 1973
- 1943. Planning or managerial revolution. (Review of J. Burnham, The Managerial Revolution). The New Commonwealth 148–54
- 1943–5. Neurath–Carnap correspondence, 1943–1945. The Otto Neurath Nachlass in Haarlem, 223
- 1944b. Ways of life in a world community. The London Quarterly of World Affairs, 29–32
- 1945a. Physicalism, planning and the social sciences: bricks prepared for a discussion v. Hayek. 26 July 1945. The Otto Neurath Nachlass in Haarlem 202 K.56
- 1945b. Neurath–Hayek correspondence, 1945. The Otto Neurath Nachlass in Haarlem 243
- 1945c. Alternatives to market competition. (Review of F. Hayek, The Road to Serfdom). The London Quarterly of World Affairs 121–2
- 1946a. The orchestration of the sciences by the encyclopedism of logical empiricism. In: Cohen and. Neurath 1983
- 1946b. After six years. In: Synthese 5:77–82
- 1946c. The orchestration of the sciences by the encyclopedism of logical empiricism. In: Cohen and. Neurath 1983
- 1946. From Hieroglyphics to Isotypes. Nicholson and Watson. - 책의 소개문을 쓴 폴 로사(Paul Rotha)는 이 책이 일정 부분 노이라트의 자서전이라고 주장했다. (해당 링크에서 책의 일부분을 살펴볼 수 있다.#)
[1]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이 시의회에서 여당이 되었던 1918년에서 1934년까지의 비엔나.[2] 이후 카를 자이츠는 오스트리아 연방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3] 더욱 자세한 논의는 의미론적 전체론(semantic holism)을 참고.[4] 여기서 노이라트가 언급하는 '분석'은 프레드릭 윈슬로 테일러가 도입한 테일러 시스템을 의미한다.[5] 스코틀랜드의 인류학자로, 신화와 종교에 관한 책 <황금가지>를 저술했다. <황금가지>에서 프레이저는 인간의 문명이 미신과 주술에서 종교로, 그리고 종교에서 과학으로 진행되어 왔다고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