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단

 

1. 후한 말의 인물
1.1. 창작물에서
2. 북송의 명재상
3. 중국의 민주화 인사


1. 후한 말의 인물


王端
생몰년도 미상
왕빈의 장남. 왕영의 조카로, 헌제의 외사촌.
영제 시절에 왕영은 자신이 임신한 걸 알고는 약을 먹어 자신의 아기를 죽이려고 했는데, 하 황후가 두려워서였다. 그러나 실패해서 왕영은 황자 유협(헌제)을 낳았고, 하 황후는 짐독으로 왕영을 독살했다.
190년에 동탁이 조정의 정권을 장악한 후에 헌제가 어머니의 일족들을 찾았을 때 아버지 왕빈과 함께 장안으로 와서 저택과 농지를 하사받을 때 함께 왔으며, 아버지 왕빈이 헌제로부터 관직과 식읍 등을 받아 왕영을 황후로 추존하는데 성공한 뒤에 병으로 죽자 작위를 계승했다.
행적이 불분명해 알 수 없지만 고모 왕영이 독살된 뒤 한참 후에 헌제가 발견하기 전에는 하씨 일족의 세력이 두려워서 어디론가 숨었거나 하씨 일족에게 쫓겨난 것으로 보인다.

1.1. 창작물에서


삼국지 천도의 주인에서는 왕미인이 독살당하자 서량으로 피난해 한수의 보호를 받았고 양주의 난 때 한수가 유성에게 파견했는데, 왕단은 유성에게 옹현성을 깨뜨리는 것에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유성이 사신이 되어 한수를 투항시키고 낙양으로 향하면서 유성을 따르며, 유성과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된다.
흑산적의 난 이후에 유성이 순욱을 기주자사로 천거하면서 왕단은 하곡양령에 천거되었다.

2. 북송의 명재상



王旦
957년—1017년
자는 자명(子明)이며, 대명 신현(現 산둥성 랴오칭시)출신이다. 송진종 시절에 재상을 지냈으며 같이 일하던 구준이 황제에게 자주 왕단의 잘못을 보고하였으나 [1] 왕단은 오히려 구준의 장점을 황제에게 칭찬하였고, 임종에도 구준을 차기 재상으로 추천했다. 사실 구준은 지나치게 강직한 인물이어서 정적이 많았다.나마 왕단은 배포가 크고 유능한 인물이어서 이렇게 구준을 칭찬했지만, 결국 구준은 이런 정적들과의 충돌 끝에 말년에 유배되어 쓸쓸하게 생을 마쳤다.

3. 중국의 민주화 인사


王丹. 1989년 천안문 항쟁 당시 베이징대학 역사학과 1학년이었으며 시위를 주도한 학생 대표중 1명이었다. 1991년에 열린 재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는 1993년에 가석방되었지만 1995년에 체제 전복 기도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고 1996년에 열린 재판에서 징역 11년형을 선고받았다. 1998년에 빌 클린턴의 요청으로 병보석으로 가석방되어 질병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망명해,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대만의 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다가 2017년 미국으로 귀환했다. 왕단의 저서 중 <왕단의 중국 현대사>가 우리나라에 출간되어 있다.
코로나19 확진받기도 했다.#

[1] 어느 날 중서성이 안건을 추밀원에 이첩했는데 과거의 규정에 저촉되는 내용이 발견되자 추밀사 구준이 이를 문제 삼아 재상 왕단이 책망을 받았다. 얼마 후 추밀원에서 중서성으로 보내온 문건에도 규정위반 사실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왕단은 이 일을 불문에 부쳤다. 이 사실을 들은 구준이 심히 부끄러워 하였고 다음날 왕단을 만나 말하기를 “그처럼 큰 도량을 베풀어 주시니 참 고맙소이다.” 왕단은 그러나 일언반구도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