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사황후 하씨
[clearfix]
1. 개요
후한 영제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황후로, 소제의 어머니이다. 가족으로는 어머니인 무양군,[1] 이복형제 하진,[2] 이부형제 하묘가 있다.[3]
성은 하씨(何氏), 휘는 불명, 시호는 영사황후(靈思皇后), 속칭은 '''하태후'''(何太后).
2. 정사
키는 일곱 자 한 치(약 168cm)로 당시 기준으로 남자와 비슷한 장신이었다.[4] 백정 집안이었지만 조정에서 가구 조사를 나왔을 때 집안 사람들이 뇌물을 써서 하진의 여동생 하씨를 영제의 후궁으로 들이게 했다. (후한서 영사하황후전 주석 풍속통) 하씨는 영제의 아들 유변(소제)를 낳고 총애를 받았다. 하씨는 기가 세고 질투가 심했기 때문에 후궁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178년, 영제가 송 황후를 폐했다. (후한서 영제송황후전) 180년, 하씨는 후궁에서 황후로 신분이 상승했다. 하씨가 황후로 책봉될 당시 한고조, 광무제에게 제사를 치루지 못했기에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하씨가 황후가 되자 하황후의 가족들도 덩달아서 관직이 상승했다.
하황후는 영제의 후궁 왕영(왕미인)이 임신을 하자 약을 먹여 낙태시키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81년, 왕영은 유협(후일의 헌제)를 낳았고 하황후는 결국 왕영을 독살했다. 영제는 화를 내며 하씨를 황후의 자리에서 폐하려고 했지만 환관들이 말려서 가까스로 넘어갔다. 어머니를 잃은 유협은 할머니인 동태후(효인황후 동씨)가 길렀다. 동태후가 아들 영제에게 유협을 태자로 삼으라고 자꾸 권하자 하황후는 이를 한스러워했다. (후한서 효인동황후전)예전에 하황후가 새로 책봉되었을 때, 마땅히 이조(二祖)의 묘당에 아뢰려고 재계하려고 했으나 번번이 변고가 생겼다. 이와 같이 하기를 몇 번이나 했으나 끝내 이를 치르지 못했다.
당시에 뜻있는 선비들이 마음속으로 이를 괴이하게 여겼는데, 나중에 끝내 하씨로 인하여 한나라 황실이 기울어 몰락하고 말았다.
- 후한서 영사하황후전
영제가 죽고 소제가 즉위하자 하황후는 황태후가 되었다. 소제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인 하태후가 섭정했다. 동태후의 조카 동중과 하태후의 오빠 하진은 권력을 다투었다. 하태후는 시어머니 동태후를 정적으로 간주하여 낙양에서 추방하고 유살했다.
십상시가 내세웠던 동태후가 죽자 하진은 절대 권력을 장악하고 환관들을 죽이려고 했다. 한편 하태후의 여동생은 십상시 장양의 며느리였다. 환관들이 무양군과 하묘에게 뇌물을 바치자 하태후는 하진이 환관들을 죽이려하는 것을 반대했다. (후한서 하진열전) 하진의 우유부단과 마찬가지로 하태후도 이후 참변의 만악의 근원이 되었다.동태후가 정사에 참여하고자 할 때마다 번번이 하태후가 이를 금지했다. 이에 동태후가 화를 내면서 꾸짖어 말했다.
"네가 지금 제멋대로 횡포를 부리는 것은 네 오라비를 믿고 그러는 것이냐? 당장이라도 표기장군(동중)에게 칙서를 내려 하진의 머리를 베어오라고 할 수 있노라."
하태후가 듣고서 그 일을 하진에게 알렸다. 하진이 삼공 및 동생 거기장군 하묘 등과 함께 상주하여 말했다.
"(중략) 청컨대 영락후를 궁에서 옮겨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하태후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 이에 하진이 군대를 일으켜 표기장군부(驃騎將軍府)를 둘러싸고 동중을 사로잡아 관직을 박탈하니 동중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태후가 근심과 두려움 끝에 병을 얻어 갑자기 붕어했다. (중략) 백성들은 모든 허물을 하씨에게 돌렸다.
- 후한서 효인동황후전
189년, 십상시의 난에서 하진은 하태후와 하묘를 설득하려고 입궐하지만 십상시에게 암살당했고 분노한 원소, 원술, 조조 등이 군대를 이끌고 궁궐에 난입하여 환관들을 학살한다. 이 소동에서 하진의 남동생인 하묘도 형을 죽게 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지만 십상시 장양, 상서 노식 덕분에 하태후, 소제, 진류왕(헌제)은 무사히 피난했다.
동탁이 낙양에 입성하고 정권을 잡자 소제를 폐위해 홍농왕으로 강등시키고 진류왕 유협을 황제로 옹립했다.장양 등이 들어가 태후에게 아뢰기를 대장군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궁을 불태우고 상서(尙書)의 문을 공격하고 있다하고, 하태후와 천자와 진류왕을 대동하고, 또 궁궐 안의 관속들을 겁박하여 복도(複道)를 따라 북궁(北宮)으로 달아났다. 상서 노식이 각도(閣道)의 창문 아래에서 과(戈)를 잡고서는 단규(段珪)를 올려다보며 (그들의 죄를) 늘어놓았다. 단규(段珪) 등이 두려워 태후를 놓아주었다. 태후는 각(閣) 아래로 뛰어내려 (난을) 면하였다.
- 후한서 하진열전
또한 동탁은 하태후가 시어머니 동태후를 죽인 것을 문책하며 유폐시키고 독살했다.병주목 동탁이 부름을 받아서 병사들을 거느리고 낙양에 들어와 조정을 능멸하고 억압했다. 동탁이 끝내 소제를 폐하여 홍농왕으로 삼고 유협을 황제로 옹립하니, 그가 바로 헌제(獻帝)이다. 홍농왕이 부축을 받은 채 전각 아래에서 북면하여 신하를 칭했다. 황태후가 흐느껴 울고, 뭇 신하들이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으나 아무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 후한서 영사하황후전
하태후는 영제의 무덤인 문소릉에 합장되었지만 동탁이 하태후의 장례 도중 문소릉을 파헤쳐서 부장품들을 도굴했다. (후한서 동탁열전) 이듬해 아들인 소제도 독살당했다. 하태후는 영사황후(靈思皇后)라는 시호를 받았다.동탁은 황태후가 영락태후(永樂太后)를 핍박해서 근심해 죽도록 만들었으므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예를 거슬렀다는 의문을 올렸다. 이에 황태후를 영안궁으로 옮기고 짐독을 보내 시해했다. 황후에 오른 지 십 년 만이었다. 동탁이 황제로 하여금 봉상정(奉常亭)에 나가서 애도하게 하고, 공경들에게는 모두 흰 옷을 입고 조회하게 했지만, 끝내 상을 치러 주지 않았다.
- 후한서 영사하황후전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하태후가 동태후와 후계자 문제로 사이가 나빠지자 유폐시키고 독살했다. 정사에서 하태후가 동태후를 유폐시켜서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맞지만 동태후가 죽은 원인은 불명이다.
최후 장면이 정사와 약간 다른데 동탁이 이유로 하여금 감금 중인 소제, 하태후, 그리고 소제의 아내 당희를 독살하라고 시킨다. 그들이 독주를 거부하며 이유를 꾸짖자 이유는 화가 나서 하태후를 누각 아래로 떨어트려 죽이고, 당희는 무사에게 목을 조르게 하고, 소제에게 억지로 독주를 먹여 죽인다. 이유가 동탁에게 그들이 죽기 전에 저항했다고 고하자 동탁이 세 사람의 시체를 아무렇게나 묻어버리게 했다.
정사랑 비교해보면 하태후와 소제는 동시에 죽지 않았고 하태후가 독살되어 죽은 이듬해에서야 이유가 소제를 독살한다. 그리고 소제의 아내 당희는 아예 살해당하지조차 않았다. 또한 하태후는 아무렇게나 묻힌 게 아니라 영제의 무덤에 합장되었다.
4. 기타
소제가 즉위하면서 임조칭제[5] 하였는데, 후한시대에 임조칭제하였던 6번의 경우 중에 유일하게 황제와 황태후가 친생모자 관계에 있었다.[6]
하태후가 매우 하얀 피부를 가졌다는 설이 한국 인터넷상에 퍼져있는데, 이는 민희식 교수의 저서 '삼국지의 여인들'이라는 책에서 나온 내용으로 보인다.출처 민희식 교수가 무엇을 근거로 하태후가 뽀얀 피부라고 서술했는지는 불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