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6.4 항쟁

 



'''1989년 톈안먼 사건'''
(六四事件)
1989 Tiananmen Square prote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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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하이대 학생들이 베이징에 연대한다는 뜻의 현수막을 내건 모습.
'''날짜'''
1989년 4월 15일 ~ 1989년 6월 4일
'''지역'''
베이징을 포함한 중국 전역 400개 도시
'''결과'''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리펑의 지시에 따라 1989년 5월 20일부터 1990년 1월 10일까지 베이징 시 특정 지역에 계엄 실시
무력진압으로 인한 유혈사태 발생, 민간인 및 군경 사상자 다수 발생
• 무력진압에 대한 항의시위 전국적으로 발생
• 시위 주도자 및 민주인사 망명 혹은 투옥
자오쯔양이 중국 공산당 중앙 총서기 및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에서 축출됨
장쩌민덩샤오핑에 의해 총서기 및 최고지도자로 승격됨
• 중국에 대한 제1세계 국가의 경제 제재 및 무기 금수조치 실시됨
• 카나리아 작전(Operation Yellowbird) 실시(홍콩 반환으로 종료)
• 시장 개혁 연기
• 미디어 통제 강화
• 표현의 자유 제한
• 정치 개혁 중단
'''주도 세력'''
정부
시위대
<강경파>
덩샤오핑
리펑
장쩌민
리시밍
야오이린
천시퉁
츠하오톈
류화칭
<온건파>
덩리췬
자오쯔양
옌밍푸
완리
후치리
바오퉁
쉬친셴
<학생 지도부>
웨이징성
우얼카이시
왕단
차이링
쿵칭동
선퉁
류강
펑충더
리루
<식자층>
류샤오보
왕후이
왕쥔타오
첸리췬
다이칭
허우더젠
<기타>
왕웨이린
'''충돌 세력'''
중국 공산당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인민해방군 제27집단군
대학생들
홍위병 일부 잔당[1]
공장 노동자들
베이징 시민들
지식인들
덩샤오핑 반대 세력
일반 시위자들
혁신주의자들
친중화민국 세력
'''피해규모'''
군인 10명, 경찰관 13명(중국 정부 발표)
218명(중국 정부 발표)
2,600~10,454명[2]
1. 개요
2. 상세
3. 사건의 배경 및 발단
3.1. 개혁개방으로 인한 사회적 모순
3.2. 당내 보수파와 개혁파의 갈등
3.3. 일당독재 및 빈부격차에 대한 반발
3.4. 후야오방 총서기의 죽음
5. 결과
6. 영향
6.1. 국제적 제재의 타격
6.2. 화교들의 동요
6.3. 대만에 끼친 영향
6.4. 교육과 문화적인 충격
6.5. 정치적 영향
7. 언론의 보도
8. 중국 지도부의 대응
8.1. 강경진압주장
8.2. 온건대응주장
9. 각종 매체에서의 천안문 항쟁
9.1. 다큐멘터리
9.2. 음악
9.3. 영화
9.4. 문학
9.5. 만화
9.6. 애니메이션
9.7. 인터넷
9.8. 예능
10. 평가
10.1. 중화인민공화국
10.3. 기타
11. 관련 링크
12.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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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9년 6월 4일 당시 MBC 뉴스특보. 앳된 모습의 손석희 앵커와 박광온 기자의 모습이 나온다.
'''천안문 6.4 항쟁'''은 1989년 6월 4일 중화인민공화국 천안문광장에서 벌어진 대규모의 민주화운동이다.
일반적으로 천안문 사태라고 말하면 이 항쟁을 말한다. 인민해방군과 시위대의 충돌로 최소 500명이 사망하였다. 공식적인 표기는 주로 '''천안문 사태'''이지만 이는 민주화운동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위해 쓰인다는 비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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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광장에 모인 시민들. 자세히 보면 칭화대, 난카이대(南开大学) 등의 대학 깃발도 섞여있는 것으로 보아 대학생들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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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4월 말부터 계엄령이 선포된 5월 20일까지 천안문 광장에는 2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민주화와 부정부패 척결을 외치며 수많은 사람들이 단식투쟁에 참여했고, 이것에 자극받은 시민들이 천안문 광장으로 점점 몰려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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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공안들도 시민과 학생의 민주화 시위를 지지한다는 뜻에서 상당수 행렬에 참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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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시위대는 인민해방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연이은 단식시위와 군중시위로 녹초가 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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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인민의 군대'가 인민을 향해 포신을 겨누며 광장으로 들어왔다.'''

'''"피해는 최소화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의 피는 반드시 봐라!"'''

덩샤오핑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총리 리펑에게 무력 진압 명령을 내리면서. 리펑 본인의 회고록에서 나오는 내용이다.



2. 상세



탱크맨이 탱크를 막고 서 있다.
1989년 6월 4일,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 및 시민들의 시위를 중국 공산당이 중국 인민해방군을 동원해 유혈 진압한 사건이다. 구글 등의 사이트에서 이 사건을 검색하면 희생자들의 끔찍한 사진[3]도 상당히 나오니 심약자나 보기 싫은 사람들은 주의하자.
지식인, 대학생들이 주도했지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각계각층의 시민들도 많이 참여했다. 개중에는 상인도, 노동자도, 언론인도, 의사도, 대학 교수도, 심지어는 공안에 법조인, 공무원도 있었으며 적게는 9살짜리 아이에서 많게는 백발의 노인까지 참여한 범대중적 평화 시위였다. 거기다 1980년대 말 세계는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동구권에 불기 시작한 자유화의 물결로 넘실대던 시기였고, 천안문 항쟁의 소식이 전세계 언론으로 보도되자 미국, 유럽은 물론 개방화가 진행되던 소련 매체에서도 이 시위를 지지했다.
따라서 학생 지도부, 베이징 시민, 그 누구도 인민해방군의 무자비한 유혈진압을 예상하지 못했다. 대부분 진압봉과 최루탄 정도를 사용한 강제해산 정도로 끝나고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본 것이다. 실제 학생 지도부 중 "천안문 광장이 피로 얼룩져야만 민중들이 각성할 것이다."라고 끝까지 저항을 계속한 강경파 차이링도 훗날 "기껏해야 강제해산일 줄 알았다."라고 회고하였다. 하지만 '''덩샤오핑을 비롯한 원로들이 이끌던 중국 정부는 인민을 진짜 총칼과 전차로 깔아 뭉개버렸다.''' 당시 덩샤오핑은 텔레비전 등에 나와 이들을 난동꾼이라고 비난하면서 확고한 진압을 주장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그의 확고한 의지였나 아니면 보수파의 위협적인 부상을 무마하려는 것이었나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으나 결론적으로 덩샤오핑은 이 사건에 대한 평가를 이후에도 뒤집지 않았다. 특히 인민을 해방한다는 군대가 일당독재와 부정부패로부터 해방을 부르짖던 인민을 짓밟았다는 점은 큰 충격이자 아이러니였다.
반중 인사들은 이 사건을 ''''중국피의 일요일' 혹은 '베이징 대학살(Beijing Massacre)''''이라고 부른다. 학자들은 한국의 5.18 민주화운동 등에 빗대어 '천안문 민주화 운동'이나 '1989년 톈안먼 광장 저항(Tiananmen Square Protest of 1989)'이라고 부른다.[4] 또 1976년의 1차 사태와 구분하는 뜻으로 '2차 천안문 사태'라는 명칭도 제법 네임드. 중국 당국 측에서는 '반혁명폭란'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바꿔서 '1980년대 말 춘하계 정치풍파'라 부르지만 애초에 언급 자체를 안 하고 하더라도 중국 내 언론에는 실리지 않는다.
중국 관변학자들은 '톈안먼 광장 사건(Tiananmen Square Incident)'이나 '6.4 사태(June Fourth Incident)'라는 용어를 쓴다. 좀 더 과격하게 표현할 때엔 '1989년 반정부정치폭란', '1989년 정치풍파'라고도 한다. 또는 '1989년 춘하지계 정치풍파'라고 순화하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중화권에서는 무력 진압이 일어난 6월 4일에서 따와서 류쓰(六四), 육사사건(六四事件)이라고 부른다. 중국 인터넷에서는 六四를 그대로 썼다가는 바로 검열을 받아서 그런지 "5월 35일" 정도로 부르는 모양이다.
1989년 톈안먼 사건은 '''현대 중국의 운명을 결정한, 그리고 1980년대 말 세계를 놀라게 한 충격적인 사건'''이자 '''중국 민주주의 역사에 주요한 이정표로 남게 된 미완의 가능성'''으로 평가받는다. 학생과 노동자가 연대하여 반체제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는 점, 투쟁과 시위 와중에 락 페스티벌을 방불케 할 만큼의 자유와 창발이 구현되었다는 점, 당시 각 세계의 정치, 사회, 경제적 모순의 격화로 인해 조성된 정국 하에 촉발되었다는 점 등에서 68운동과 교집합을 이룬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사건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면 중국은 한국과 같이 민주화를 하여 현재의 중국보다도 훨씬 발전하였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게다가 이 운동의 실패로 중국 내의 여러 교수와 학생들, 유학파 출신의 사람들이 잡혀들어가 고문 후 투옥당하거나 사형까지도 당했다.

3. 사건의 배경 및 발단



3.1. 개혁개방으로 인한 사회적 모순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화궈펑이 집권했으나 10년간 지속된 문화대혁명의 후유증을 수습하기에는 한계가 명확했다. 결국 당/정/군의 광범위한 지지를 바탕으로 덩샤오핑이 치열한 권력투쟁 끝에 화궈펑을 밀어내고 대권을 장악하였다.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을 청산하고 개혁개방을 추진하였으나, 개혁개방 초기에 있었던 개혁 조치는 여러 불만을 야기하였다. 특히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하면서 민영화와 자율화로 인한 이권 때문에 하급관료의 부패는 날이 갈수록 커졌으며, 초유의 인플레이션과 더불어 실업 문제도 가중되었다.
특히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지방정부와 기업에 자율권을 부여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중국의 경제력을 급속히 끌여올리는데에는 효과가 있었으나 한편으로 '''꽌시'''라고 불리는 부정부패가 폭발하였고, 개혁개방의 과실은 당간부 및 그들과 결탁한 소수만이 모조리 차지하면서 개방특구와 대도시에서 빈부격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에 그동안 사람들을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옥죄던 철권통치를 완화하고 사회적 분위기를 느슨하게 옮기자, 그동안 억눌렀던 데 대한 반작용이 일면서 범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러자 덩샤오핑은 다시 강경노선으로 돌아서서 1983년부터 "엄타(嚴打:준엄하게 처벌한다)"를 모토로 반부패운동을 포함한 중국판 범죄와의 전쟁을 개시하였다. 이 당시 웬만한 범죄는 모조리 사형선고를 받았고, 체포에서 처형까지 이르는 시간도 1주일로 단축되었다. 엄타 기간 중에 처형자 수는 1년에 2만 명에 달한다는 설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강력-신속한 처벌도 형사범죄에만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지 부정부패는 전혀 다스릴 수 없었다. 특히 엄타운동 속에서도 부정부패를 저지르던 당간부들과 유력자들은 빠져나가면서 오히려 꽌시와 유전무죄 무전유죄만 부각되었다. 당연히 겉으로 표출하지는 못했지만, 공산당에 대한 불만은 계속 쌓여만 갔다.

3.2. 당내 보수파와 개혁파의 갈등


1988년 5월 30일 중앙정치국이 확대회의를 소집해서 가격 개혁과 임금 개혁 시행이라는 '난관 돌파책'을 결정했다. 이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에 따라 높은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이후 당내의 개혁에 관한 의견이 명확히 갈렸다. 정국은 덩샤오핑의 지지 아래 더 강력한 개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면서 지속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자오쯔양 당 총서기를 중심으로 하는 개혁파와, 덩샤오핑과 동급의 권위를 가졌다고 평가되는 천윈의 지지 아래 개혁을 잠시 멈추고 정비와 조정을 통해서 체제내부 통솔에 힘써야 한다는 리펑 국무원 총리 등의 보수파로 나뉘었다.
그러던 중 리펑은 국무원 총리로 취임한 뒤 1988년 9월 공산당 13기 3중 전회에서 "경제 환경을 정비하고 경제 질서를 조정하고 개혁을 전면 심화하자."라는 정책 조정안을 제기했는데, 이것은 표어와는 달리 사실상 자오쯔양의 개혁 노선을 수정하고 나아가 개혁파의 영향력을 줄이겠다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깔려있는 내용이었다. 중앙당의 이 결정으로 사회 전반에서 보수파의 부상에 대한 염려와 우려가 일어났다.

3.3. 일당독재 및 빈부격차에 대한 반발


4인방의 실각 이후 공산당 내는 물론이고 사회 전반에 강력한 성찰이 일었다. 그 결과 문화대혁명의 재난이 중국의 일당독재 정치 제도에서 온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사회 전반에서 사상 해방을 요구하고 민주화를 추진하고 정치개혁을 하자는 목소리가 줄곧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정부의 정책에 실망한 대중들은 서서히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개혁개방을 실시한 중국 정부에 대한 대중들, 특히 대학생 층의 불만이 늘어났다.
여기에 개혁개방으로 서서히 들어오는 외국의 문물을 보고 대중은 각성하기 시작했다. 같은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다당제를 보장하고, 자유를 확대하는 조치를 내놓는 등 이런 사회적 배경 하에 학생과 시민들은 중국공산당에 '''전면적인 민주화 조치'''와 '''대대적인 부정부패 척결'''을 주장하며 대내외적으로 활발한 학생운동을 벌였다.
여기에 마오쩌둥 시절에는 대학 등록금과 기숙사비, 식비 모두 무료였는데, 개혁개방 이후 대학이 기숙사비와 등록금을 받기 시작하면서 집안의 경제사정이 좋지 않던 대학생들은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만 갔다. 당시는 개혁개방 초기였지만, 벌써부터 부동산 투기와 같은 막장 자본주의 행각으로 떼돈을 번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대다수는 개발 정보를 독점하고 부정부패한 관료들 혹은 관료의 친인척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빈부격차가 눈에 띄게 늘어나자, 대학생들은 점점 정부에 사회정의를 요구하게 되었다.

3.4. 후야오방 총서기의 죽음


덩샤오핑의 심복이었던 후야오방(胡耀邦) 당총서기는 이러한 민주화 요구에 매우 동조적이었다. 이전부터 후야오방은 당 고위 간부들과 그 친인척의 부패에 재갈을 물리려고 해 원로들이 불만을 가졌는데, 민주화 요구에 동조적인 것에 원로들이 반발한 것을 계기로 1987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5] 이 자리를 덩샤오핑의 다른 심복이었던 자오쯔양[6]이 이어받았다. 자오쯔양도 후야오방과 마찬가지로 개혁파였지만, 학생운동은 더욱 격렬해졌고, 전국 각지의 대학교에서는 민주화 서클이 활발히 활동하였다. 마치 1980년대 초반의 한국의 대학교들과 비슷한데, 실제로 당시 시위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우얼카이시는 한국의 1987년 6월 항쟁이 천안문 저항의 모델이었다고 술회했다.
1989년 후야오방은 정치국 회의 도중 발언을 막 끝내고 자리로 돌아오던 중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4월 15일 사망했다. 후야오방의 사망을 기점으로 베이징에서는 지식인들과 대학생[7], 노동자들을 주축으로 하여 민주화 요구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는 단식투쟁으로 시작하여 그 모습에 자극받은 각계 각층의 시민들이 참여하고, 마침내 전국에서 올라온 대학생들이 합류하면서 천안문 광장에는 10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리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중국의 미래를 결정한 천안문 6.4 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4. 사건의 진행 상황




5. 결과


천안문 사건 일주일 뒤, 시위를 주도한 자들에게는 당초 약속한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건을 뒤집고 대거 '''수배령'''이 떨어졌다. 특히 다수의 학생 시위대를 겨냥한 21명의 블랙 리스트가 언론 매체에 퍼졌다. 많은 지식인들이 이 시기에 잡혀들어가 중형을 언도받거나 국외로 추방되었고, 혹은 외부 세력의 도움을 받아서 국외로 망명했다. 이들을 돕기 위한 망명 작전이 바로 '카나리아 작전'이다.
카나리아 작전은 서방 국가나 홍콩, 대만 시민들과 민주화에 찬성하는 일부 중국 시민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많은 수의 해외 인권운동가, 저널리스트, 중국 학자들과 뜻있는 시민들이 이 시기 반체제 지식인들을 위해 비자를 발급해주고 비행기나 배 등의 수단으로 망명할 수 있도록 도왔다. 후술할 우얼카이시와 차이링 또는 탱크맨 등이 이 작전의 수혜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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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수배 1호였던 베이징대 역사학과 1학년 '''왕단(王丹)'''은 1991년에 열린 재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는 1993년에 가석방되었지만 1995년에 체제 전복 기도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고 1996년에 열린 재판에서 징역 11년형을 선고받았다. 1998년에 빌 클린턴의 요청으로 병보석으로 가석방되어 질병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망명해,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대만의 국립타이완대학의 정치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교단에 서게 되었다. 현재는 동오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참고로 미혼이며, 친중단체에서는 이걸 빌미로 동성애자가 아니냐며[8] 시비를 걸기도 했다. 더불어 덩샤오핑의 강경진압은 사정없이 비판하지만, 경제정책에는 어느정도 긍정적인 면을 보이며, 나아가 덩샤오핑 파벌에서 싫어하는 마오쩌둥의 업적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2017년 6월에 대만 내 활동을 마치고 미국으로 복귀하였다. 2019년에는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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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수배 2호였던 베이징사범대학생이자 위구르족 출신인 외르케슈 될레트(ئۆركەش دۆلەت/Örkesh Dölet)[9] 중국명 '''우얼카이시 둬라이티(吾尔开希 多莱特)'''는 상당한 강경파 성향으로 학생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 리펑 총리가 직접 찾아오자 그에게 대화 주제는 자신들이 정할테니 듣기만 하라는 식의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했으며, 조영남 교수는 이를 '건방진 태도'였다고 표현했다. 시위 이후 홍콩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해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하지만[10] 졸업은 하지 못했다. 이후 대만에서 거주하며 라디오 DJ와 작가생활을 하면서 여생을 보내는 중이다. 여러번 홍콩을 거쳐 고향에 있는 부모님을 찾아보려 했지만, 중국 정부의 거절로 번번히 실패했다. 이후 2016년 군소 정당 소속으로 대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위구르족이면서도 근현대 중국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흔치 않은 사례인데 이걸 뒤집어보자면 '''위구르족이 다른 한족과 함께 중국이라는 나라의 미래를 향해 의견을 개진한 것이다.''' 물론 중국 정부 입장에선 그저 반체제 집단의 일원이라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하나의 중국'''에 걸맞는 인물인 셈이다. 여담으로 시위를 이끌 당시에는 제법 잘생긴 대학생이었던지라 연설을 하는 자리마다 여자들이 눈을 부릅뜬 수준으로 집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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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두 사람과 더불어 3인방이라고 불린 베이징사범대 대학원생 '''차이링(柴玲)'''은 사태 직후 배를 타고 홍콩과 프랑스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미국에서 하버드대 MBA를 졸업하고 미국의 컨설팅회사 ‘베인 & 컴퍼니’에서 컨설턴트로 일했다. 미국에서 미국인과 결혼한 차이링은 남편과 함께 ‘젠제이버(Jenzabar)’란 교육용 소프트웨어 기업을 운영 중이다. 현재 세 아이의 엄마인 차이링은 미국에서 세례를 받고 개신교 신자로 살고 있다. 차이링은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 직후 미국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류샤오보와 나는 톈안먼에 탱크가 밀려들 때 마지막까지 같이 서있었다”며 “기념비적인 일이며 노벨위원회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차이링은 현재 ‘올 걸스 얼라우드(All Girls Allowed)’란 비영리 단체를 만들어 중국의 강제낙태와 여아(女兒) 인권문제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차이링은 미국 현지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중국에서 매일 3천 500여 명의 여아가 강제낙태되고, 500여 명의 여성이 자살을 선택한다”며 중국의 여성 인권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2012년에는 학살의 주범인 덩샤오핑과 리펑, 그리고 천안문 광장에 쳐들어온 군인들 모두를 용서한다고 밝혔다. 차이링 스스로가 기독교적 신앙에 따라 원수를 용서하겠다는 취지인데, 당연히 왕단과 우얼카이시 등 다른 중국 민주 진영에 항의를 받자, 개인적인 용서일 뿐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바둑기사장주주 九단 역시 장주주가 민주화 요구 피켓을 들고 “기수”에 섰다는 이유로 수배령을 받았다. 이에 장주주와 연인 루이나이웨이는 1989년부터 한국기원에 오게 되는 1999년까지 홍콩, 대만, 일본, 미국을 거치며 중국 공산당의 감시를 피하는 도피생활을 하였다. 1992년 제2회 응씨배 때는 장주주루이나이웨이한테 참가권을 줬다는 이유로 중국 바둑기사들이 단체 기권을 할 정도로 마찰이 컸다. 참고로 이 대회에서 루이나이웨이는 '''여자기사로 유일무이하게 세계 바둑대회 4강'''에 올라가는 기염을 토했다.[11](오타케 히데오 九단한테 패해서 결승행은 실패) 1993년에 4강전 종료 직후 장주주 - 루이나이웨이는 결혼을 하였다. 1999년부로 한국에 정착하였다가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루이나이웨이가 중국 국적 대표로 참가하게 된 것을 계기로 후진타오 중국 주석2011년 특별사면했다. 루이나이웨이가 먼저 2011년에 중국으로 귀국하고, 장주주는 2012년에 중국으로 귀국했다.
중국 공산당에서는 폭도들을 진압한 인민해방군 측에 공로를 치하하며 인민해방군 1,000명이 희생되었으나 폭도들은 고작 27명이 죽었다고 당초 보도했지만, 이후에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가 1990년 7월 10일 제5차 국무원 보고에서 정식 발표한 것에 의하면, 민간인 사망자는 875명, 민간인 부상자는 약 14,550명이었으며, 인민해방군과 무장경찰은 56명이 사망, 7,525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다만 뉴욕 타임스 지에서는 400명에서 800명, NSA에서는 약 1,000명, 중국적십자에서는 2,600명, 시위대의 주축을 이룬 학생들은 7,000명이 넘게 죽었다고 하며, 부상자 수는 진압에 나선 중국 인민해방군을 포함해 약 7,000명에서 10,000명으로 추산된다.
정치권에서는 시위 진압 명령을 하달한 총리 리펑이 덩샤오핑을 이을 후계자로 부상하는 듯 했으나, 정작 덩샤오핑은 당시 상하이 시장이었던 장쩌민을 중앙 정계로 진출시키고 실제로 후임 주석으로 취임하게 된다.
천안문 민주화 시위 사태에 참여해온 정치범 가운데 마지막까지 복역해온 먀오더순 씨가 27년만에 2016년 10월 15일에 출옥한다고 보도했으며, 석방 일시를 공식 확인해주지는 않고 있다.
2018년 12월 13일에 당시 정부 대변인으로서 터무니없는 축소 발표로 거센 비난을 받았던 위안무(袁木) 전 국무원 연구실 주임이 사망했다.
이후 인민해방군 안에서도 징계받은 인원이 사병 중에서만 천 명 단위로 있었다는 내부 문건이 폭로되었는데, 탄을 허공에 다 쏴버리고 빈 총 들고 다니다 걸린 인원, 총기를 일부러 고장내다 걸린 인원, 못 본 척 하거나 빠져나갈 길을 트여주다 걸린 인원, 아예 무전 꺼놓고 버티다 걸린 인원, 그냥 이게 뭐하는 짓이야 하고 울다가 걸린 인원, 일부러 제 발에 총 쏘고 후방으로 후송되다 걸린 인원 등등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6. 영향


개혁, 개방 개시 이후 서구, 일본 등의 선진국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여 경제성장을 꾀하던 중국 공산당에게는 이 사건은 대내외적으로 큰 충격을 몰고 왔다. 이후 중국 공산당은 먼저 선린우호 전략을 내세워서 아시아의 주변 국가와 국교를 맺는 전략을 취했다. 1992년의 한-중 수교도 바로 이러한 중국 전략 변화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내부적으로 중국은 국가 내 사회영역을 확실하게 장악하여 국내 역량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으며 체제 안정과 제도의 정비를 국내 정책의 최우선으로 삼게 된다.

6.1. 국제적 제재의 타격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과 일본은 이 사건을 비인도적인 민주주의 탄압 행위로 규정하고 비난 성명을 냈다. 미국은 먼저 정부 및 민간의 대중 무기수출 중지와 양국 간 군사 관계자들의 상호방문 정지를 첫 제재 조치로 내세웠다. 그리고 재중 중국인 유학생들의 비자신청을 연장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무력진압으로 부상당한 사람들에게 국제적십자를 통한 의료 원조도 계획하고 있다고 밝힌 한편, 이 제재가 일시적인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혔다. 추가로 6월 23일 미 의회에서 컴퓨터, 무기, 인공위성의 수출을 대폭 삭감하고 동시에 융자의 감축을 요구하는 수정방안이 제출되었다. 또한 국제무역에서 중국의 최혜국 대우(MFN) 지위를 인권 문제와 연계하며 인권 상황이 개선되지 않았을 때는 최혜국 대우를 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였다.[12] 그러나 미국은 향후 미중관계를 고려하여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유럽권에서는 프랑스가 가장 먼저 대중 제재에 나섰다.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 축제의 열기가 뜨겁던 6월 6일, 프랑스의 로카르 총리가 프랑스 정부와 중국 지도층의 접촉을 필두로 모든 차원의 대중 접촉을 동결시켰다고 발표했다. 이후 중국 주재 모든 프랑스 외교관들의 수도 가능한한 최소한으로 감축할 것을 표명했고, 7월 13일 미테랑 대통령은 G7 정상회담에서 미국, 서독, 영국, 이탈리아, 캐나다, 일본 등의 지도자에게 중국을 격렬히 비난하고 대중제재를 위한 공동 보조를 제의했다. 프랑스는 이외에도 티베트 독립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나라라서 중국은 프랑스를 여전히 좋게 보지 않는다.
일본은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일단 일본은 대 중국 원조국가 중 가장 큰 규모의 원조를 제공한 나라라는 경제적인 문제가 컸으며, 향후 중일관계에서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적극적인 제재는 피하는 것이 좋았다. 다만 국제적인 지위도 있고 해서 형식적으로나마 제재 조치를 취하기는 했다. 먼저 1988년 8월에 발표한 8천 1백억 엔(당시 58억 달러)의 대중 차관을 유보한다는 발표를 했지만, 중국 정부와의 실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차관 유보는 일시적인 것이며 정치적 자유가 허락되지 않더라도 중국의 경제자유화 계획이 부활되면 원조를 재개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그리고 1990년 11월 2일 차관 공여를 정식으로 시작했다.
세계은행은 가장 혹독한 제재를 가했다. 6월 8일 세계은행은 서방 세력의 압력을 수용해서 중국에 대한 7억 8천만 달러의 차관을 유보한다고 발표했다. 개혁 개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1981년 이후 세계은행이 중국의 가장 중요한 융자기관임을 감안하면 이것은 대단한 수준의 제재였다. 8년 동안의 차관 총액이 약 85억 달러로, 1/3이 농업, 나머지가 교육, 문화, 그리고 사회복지에 사용된 것을 감안하면 이 차관의 유보가 중국 사회에 악영향을 미칠 것은 자명했다. 하지만 세계은행은 12월 4일 이사회에서 중국 경제개혁 프로젝트에 1억 달러의 융자를 결정하고 대중 융자규제를 사실상 전면 해제했다.
아무튼 천안문 항쟁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은 결코 작다고 할수 없었는데 1982년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고성장세에 접어든 중국의 경제가 1989년에 성장률이 4.2%, 1990년에 3.8%로 떨어지며 성장세가 확연히 꺾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1년을 기점으로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다시 상향곡선을 그리면서 특히 1992년부터 1995년까지 4년 연속 10%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큰 영향에서는 벗어나게 되었다.

6.2. 화교들의 동요


전 세계의 화교, 특히 당시 영국령 홍콩에 거주하던 화교들에게 큰 충격을 던진 사건인데, 덩샤오핑의 개혁정책에 기대를 걸었던 많은 중국계 홍콩인들이 홍콩의 중국 귀속에 회의적으로 변하여, 한때 영국, 미국 등 외국으로 이민을 간 홍콩인들이 큰 수로 증가하기도 했다.

6.3. 대만에 끼친 영향


대만에서도 한창 대륙과의 관계개선에 나섰던 상황이었다. 또한 대만이 장징궈 후반기부터 국제적인 고립이 심화되면서 대만의 생존을 위해서 민주화 작업에 대해 언급되기 시작했고, 1987년 7월을 기점으로 대만 계엄령이 철폐되고 1988년 리덩후이가 총통으로 등극하면서 계엄령 철폐와 언론통제 폐지, 야당[13]의 허용 등 정치개혁과 민주화 조치가 시행되며 자유화 조치들이 하나하나 실현되기 시작했고, 그 이전까지 철저하게 언급이 금기시 되었던 2.28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에 대한 논의도 이때부터 본격화되었으며,[14] 동시에 중국에 대한 유화책도 어느 정도 쓰면서 대만 기업들이 중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대만과 중국간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활발해지면서 통일 여론도 어느정도 존재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이 대만처럼 민주화 과정을 밟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며 중국과의 통일에 대한 회의론이 커졌다. 또한 당시 대만 야당에서 대만독립을 지지한 민진당 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통일에 찬성하는 사회민주당과 노동당, 공당도 있었는데 이들은 당시 대만 내에 성장하는 노동운동을 바탕으로 세를 갖추려고 했지만 애초부터 민진당에게 지지율에서 밀리던 차였는데 천안문 항쟁까지 겹치며 거대정당으로 성장하지 못하며 결국 이들 정당 중 사회민주당과 노동당은 기존 국민당내 외성인계가 빠져나와 창당한 신당에 사실상 합병되는 처지가 되었다. 물론 신당도 얼마가지 않아 지지기반을 쑹추위와 그의 정당인 친민당에게 빼앗기고 현재는 군소정당 신세로 전락했다.
어쨌든 이로 인해서 중국과의 통일을 반대하는 민진당의 파이가 압도적으로 커진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민진당이 가장 먼저 창당된 정당이고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의 제2정당 자리를 차지했지만 천안문 항쟁 6개월 후에 치러진 국민대회 입법회, 지방 동시선거에서 민진당이 약진하며 민진당의 입지는 굳건해지게 되었고 더 나아가 리덩후이가 대만독립론을 내세우게 된 것도 천안문 항쟁의 영향이 없지않아 있다고 볼수있다. 타이완 독립운동 지지자들은 천안문 사태를 통일반대론의 단골 레퍼토리로 쓰고 있다.
한편으로 6.4 항쟁은 대만의 민주주의 정착에 큰 도움이 되었는데, 비록 1980년대 후반에 민주화 조치가 단행되었다지만 여전히 국민대회와 입법원은 전면적인 총선거가 진행되지 않고 1947년도와 1948년도의 선거에서 뽑힌 의원들이 종신의원을 재직하고 있는 등의 부조리가 남아있었는데 이를 하나하나 혁파시킬 수 있는 동력 중 하나가 중국과 달라야했다는 점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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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4일 천안문 항쟁 30주년을 맞아, 대만에서는 풍선으로 탱크맨을 재현하는 작품이 전시되었다.

6.4. 교육과 문화적인 충격


천안문 항쟁 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는 학문과 예술의 자유 부흥 움직임이 거셌다. 문화대혁명 이후 당시 세태를 고발하는 작품들이 여론에 힘입어 개혁 개방의 물결과 더불어 쏟아져 나왔다. 1986년~88년에 걸쳐 철학, 문학서들의 출판이 이전에 비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독립적인 신문 잡지도 몇 개씩 발간되었다. 또한 문화대혁명에 대한 진상규명 논의도 활발히 이루워졌다.
하지만 공산당이 시위대를 무력진압하고 권력을 공고히 확립한 후 이 사건을 자유화에 영향을 받은 반체제 무리들이 일으킨 것으로 판단해서 대학생들의 사상교육을 강화하는 전국적 운동을 실시했다. 먼저 1989년에 졸업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2주 동안의 정치수업을 의무적으로 참여시켜서 정부의 데모진압의 정당성을 주입시키고, 각 대학에서 학생들을 소수 그룹으로 나누어 시위대가 인민해방군을 공격했을 때에만 강제진압이 이뤄졌다는 내용의 영상을 의무적으로 시청하게 했다. 또한 시위 주동자들의 많은 수가 대학생인 것을 감안해 1989~90년에 입학하는 대학 신입생을 3만 명이나 감축시켰다. 이 삭감조치는 먼저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명문대학이자 학생운동의 중심지였던 베이징대학을 중심으로 주로 시작되었다. 베이징대학의 신입생은 천안문 사건 이전에 2100명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사건 이후 고작 '''784명'''으로 대폭 감축되었다. 특히 학생운동 지도자들의 대부분이 철학, 역사, 국제관계 및 행정학 전공자인 것을 보고 4개 학과에게 아예 '''신입생의 선발을 중지'''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신입생들에게는 엄격한 군사훈련과 공산주의 이론 교육을 실시했다. 1990년 베이징 대학 신입생들은 1년동안 스좌장의 육군학원에서 혹독한 군사교육을 의무적으로 받았고, 톈진 시, 상하이 시, 시안 등에 소재한 학교에서도 8주 동안의 군사훈련이 의무적으로 부과되었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여신상'을 제작한 중국예술학원 역시 탄압을 받았다. 1989년 여름에 졸업한 '''모든 학생들은''' 도시에서의 취직이 허가되지 않았고 적어도 1년동안 농촌과 공장에서 일하며 정신개조를 당했다. 학생들은 당 관료에 의해 사상검증이 실시되고 그곳에서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평가받았다고 한다. 이미 졸업해서 직장에 다니던 학생들도 공장, 광산, 농촌 등으로 보내진 경우도 적지 않았다. 천안문 학살 1주기에 베이징대 전체에 경찰의 통제가 시작되었는데, 무언의 시위차원에서 기숙사 전체에 촛불이 켜지고 일부 학생들은 창 밖으로 작은 병을 던져 깨뜨렸다고 한다. 이유는 '작은 병'이 중국어로는 '샤오핑(小瓶)'인데, 이게 학살의 주범인 덩샤오핑을 연상시킨다는 것 때문이었다.
출판물에 대한 탄압도 철저히 진행되었다. 지명수배자 리스트에 올라간 지식인들의 저작과 자유사상을 포함하는 문학서, 철학서는 당연히 출판 금지 처분을 받았다. 반정부적 견해를 유포하는 혐의를 받은 신문과 잡지는 모두 폐간 처분을 받았다. 이로 인해서 1980년대 활발히 이루워졌던 문화대혁명에 대한 진상규명 논의도 물밑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비록 규모나 유혈이 마오가 저지른 문화대혁명에 비하면 부족하기는 했으나 덩샤오핑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이들은 천안문 항쟁을 탄압한 여파가 문화대혁명 못지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비록 중국이 문혁 이후 과거의 중화 문화와 단절되었다는 수준의 평을 받을 정도로 큰 상처였으나 6.25 전쟁 이후의 한국처럼 기존 사회가 완전 리셋된 대신 새로운 사회 질서와 문화를 창조하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천안문 참사 후 이런 아래에서부터의 자체적 개혁 요구는 완전히 소멸했고 중국의 소프트파워는 박살이 나버렸다. 그나마, 이때 사망하지 않고 체포되었던 10만이 넘는 천안문 사태에 참여한 중국 최고의 명문대학생들을 덩샤오핑이 죽이거나 버리지 않고 목숨만은 살려줘야 한다며 모두 강제추방시켰고, 미국, 영국, 프랑스등 서방 선진국들이 정치적 이유로 이들을 망명자 신분으로 받아주고 공부까지 시켜주었다. 그 덕에 21세기부터 재개된 중국의 개혁개방 때 이들이 다시 모국에 돌아와 중국의 기술, 과학 발전에 이바지할 카운터파트 역할을 맡아 기여했다. ###

6.5. 정치적 영향


중국이 개혁개방을 추진하던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서구에서는 중국의 경제 발전이 자연스럽게 정치적 자유의 신장과 민주주의 제도로의 점진적 전환을 이끌어 낼 것으로 보는 낙관적 시각이 많이 존재하였으나. 이 사건이 일어난 이후로 이 시각이 틀렸음을 보여주었다.
천안문 항쟁 이후 가해진 서방의 경제적 제재는 덩샤오핑의 개방 정책과 1년 뒤 새로운 이슈로 부상한 걸프 전쟁 등으로 얼마 안가서 곧 유명무실해졌고, 중국은 정치적 억압을 강화하면서도 1991년에 고성장 기조가 회복되었고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연속적으로 10%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보란듯이 고도 경제성장을 구가했다. 덕분에 공산당 내부의 개혁적 세력과 시민 사회 세력은 다 쓸려나가게 되고 민주화를 갈망하는 동력은 현저히 약해졌으며 견제 세력 없는 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는 오히려 더 공고해졌다.
21세기 들어서 마오쩌둥 사후 그나마 유지되던 당내의 집단지도체제마저 유명무실해지고 오로지 시진핑 일인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퇴행적 현상마저 벌어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공산당은 다당제와 보통선거로 대표되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중국에 맞지 않는 포퓰리즘이라며 배격하고 심지어는 어용 학자와 관변 지식인들을 동원 매수해 자신들의 독재를 철인정치 혹은 능력주의로 미화 포장하기에 바쁘다. 허나 현실은 공산당의 부패는 이미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민주국가에서 하는 일반적인 공직자 재산공개조차도 중국은 절대 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앞으로 중국의 경제성장이 위축되는 순간 빈부격차와 지역간 불평등과 같은 산적한 사회적 문제에 대한 불만은 봇물처럼 터져나올 가능성이 높은데 민주주의 국가와는 달리 정상적인 권력 교체가 불가능한 일당독재체제의 특성상 큰 정치적 충격과 내부 혼란이 발생하거나 아니면 이를 무마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팽창주의적 대외노선을 채택할 것으로 관측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당연히 이럴수록 범세계적으로 반중감정이 극대화되어 더 고립된다는 사실을 시진핑도 모를 리가 없지만 내부 불만을 돌리려면 어쩔 수 없다. 이러한 딜레마는 권위주의 정부를 가진 중국이 미중 패권 경쟁에서 이기기 힘든 주된 원인으로 여겨진다.내부 불만을 돌리자니 국제적으로 고립되고,그렇다고 그 불만을 방조하자니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시진핑 시대부터 중국이 생존전략으로 발견한 정책이 바로 일대일로와 중국몽이다. 서구세계에서 활로를 찾을 수 없으니 제 3세계로 가서 부를 가져오자는 것이다. 그러면 인권문제를 무시하면서도 여전히 경제발전을 지속할 수 있게 된다. 그야말로 제 3의 길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성공할 수 있을지는 시간이 흘러야만 알 수 있을 것이다.[15]

7. 언론의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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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에 대항한 반란.
중국★폴란드★소련
천안문 항쟁을 다루는 미국 주간지 타임(TIME)
천안문 항쟁은 신문방송학이나 대중 커뮤니케이션의 역사에서도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당시 미뤄진 '''고르바초프의 중국 방문 취재를 위해서''' 베이징에 머무르던 외신기자, 특히 CNN이 천안문 광장 근처 빌딩의 옥상에 설치해놓은 카메라가 천안문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라이브로 전 세계에 중계'''했기 때문이다.

1989년 6월 4일 당시의 CCTV 방송영상.[16] 위에 나온 CCTV 남녀 아나운서는 유독 평소와 다르게 상복과 유사한 검은 정장을 입고, 부고를 읽을 때와 같은 느린 어조로 보도한 탓에 교체되었다고 한다.

당시 중국의 대외 라디오방송인 중국국제방송국(Radio Beijing, 지금의 CRI. 다시 말해서 중국 정부 산하의 국영방송이다.) 영어방송 부서의 한 아나운서는 직설적이고 격앙된 어조로 당국의 무력 진압을 비판했다. 중국국제방송국의 일부 직원도 무력 진압 때 희생되었다고 한다.

8. 중국 지도부의 대응


소스에 따라서 강경파와 온건파가 다르게 나오기 때문에 아래 명단이 꼭 옳은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강경파의 대표인 덩샤오핑과 온건파의 대표인 자오쯔양 이외의 다른 모든 사람은 확실하지 않다.

8.1. 강경진압주장


일부 반중인사들이 장쩌민을 여기 강경파에 넣기도 하지만, 장쩌민은 당시 상하이의 지역인사였기 때문에 중앙정계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그가 중앙으로 진출하게 된 계기는 덩샤오핑이 후계자로 낙점해 두었던 자오쯔양 총서기를 실각시키면서 대타로 능력을 눈여겨보았던 상하이 서기 장쩌민을 선택해서 베이징으로 불러들였기 때문으로, 천안문 사건에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물론 장쩌민은 훗날 집권기간 내내 덩샤오핑을 두둔하기는 했다.
당시 정보기관을 책임졌던 차오스가 강경파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사람은 온건파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외에도 당시 국가주석이었던 양상쿤이 강경진압을 지지했다는 설이 있으나, 양상쿤의 주치의였다가 후에 중국공산당 비판자가 된 장옌융의 증언에 의하면 양상쿤은 사건을 두고 천안문 항쟁은 우리당의 실수라고 말했다고 한다.#

8.2. 온건대응주장


사건 이후 실각.
  • 친지웨이 국방부장.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덩샤오핑의 진압명령이 내려오자, 국내사건의 군개입은 내정을 책임지는 총리 자오쯔양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는 핑계를 들어 계속 시간을 끌었다고 한다.# 결국 거듭되는 압력에 명령을 수행했으나, 결과적으로 덩샤오핑의 노여움을 사서 국방부장의 일반적인 임기인 10년(5+5)을 못채우고 5년 단임으로 내려온다.[17]
  • 장아이핑(전 해군사령원), 예페이(전 해군사령원), 양더즈(전 총참모장), 샤오커(전 군정대학 교장), 쑹스룬(전 군사과학원장), 리쥐쿠이(전 총정치위원), 천짜이다오(전 우한군구 사령관) 모두 상장(上將)으로 국공내전부터 활약한 군 원로였다. 이들은 군통수권을 쥐고 있는 당중앙군사위원회에 공동 명의의 편지를 보내서 군 투입을 반대했다. 다만 강경대응을 반대했다기보다는 덩샤오핑이 자신들의 의견을 묻지 않고 계엄을 결정한 것에 대한 항의였으며 실질적으로 군 투입을 반대했는지는 불투명하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장아이핑을 비롯한 7명의 원로 상장이 계엄령 및 군 투입을 반대했다는 사실은 여러 소스에서 확인되고 있다.[18]

베이징군구 38집단군 군장. 중장. 출동명령을 거부하였다가 가택 연금당했다. 사태 종료 후에 5년형을 선고받았다.
2년 후 정치국에서 실각하여 지방으로 좌천됐다.
  • 녜룽전, 쉬샹첸: 생존해 있던 두 명의 개국원수로 당시 군 최고 원로였다. 계엄에는 반대하지 않았으나 유혈 사태에는 반대한다고 개인적으로 입장을 표명했다.
  • 천이쯔: 국무원 체제개혁연구소장. 자오쯔양의 측근으로 무력진압에 반대하다가 유혈사태를 목도하고 공산당 탈당을 선언한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중공의 기밀 문서를 공개하여 미국의 중국학계에서 활동했다. 말년에 중국 귀국을 요청했으나 중국 정부가 공개전향과 사회활동 불참을 요구하자 거부하고 미국에 잔류하다가 2014년 사망했다.

9. 각종 매체에서의 천안문 항쟁



9.1. 다큐멘터리


2010년 광주광역시 비엔날레 출품작인 류웨이 감독의 'Unforgettable Memory'를 보면 이 사건을 보는 중국인들의 시각이 잘 나와있다. 오늘이 며칠이냐고 묻자 중국인들은 한결같이 회피하거나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유는 비디오를 찍은 오늘이 바로 천안문 대학살이 일어났던 6월 4일이기 때문이다. '''알고는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세월이 흐른만큼 진짜 모르는 중국인도 있을 수 있다.
또한, 위의 탱크맨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진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는가? 이 사진을 보고 어떤 느낌이 드는가?"'''를 묻자, '''"이 탱크들은 198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군요. 그런데 이상하네요. 1980년대 이후에 중국이 전쟁을 했던가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해당 사진의 전차는 1960년대부터 만들어진 전차이며 사진이 1980년대에 찍힌 것이다. 1980년대에 만들어진 전차라 하는 것은 이 사진이 뭔지는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게 아니면 '''"저는 정치 얘기는 안합니다."''', '''"저는 이 주제로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너무 민감한 이야깁니다."'''라고 겸연쩍게 웃으면서, 아예 대화를 거부하고 서둘러 사진을 돌려주고 가버린다. 어떤 사람들은 탱크는 보이는데, 사람은 안 보인다고 아예 탱크맨의 존재 자체도 무시한다. 일례로 관광 중 가이드에게 천안문 광장에서 넌지시 물어보자. '서방의 프로파간다, 악의적인 거짓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천안문항쟁 3시간 다큐멘터리(중국어)

9.2. 음악



시위 참가자 허우더젠이 부른 아름다운 중국인(漂亮的中国人).

천안문 사건을 묘사한 1989년 필립 모건의 노래인 '광장에 흐르는 피(The blood is on the square)'.

또한 인더스트리얼 밴드인 스키니 퍼피의 'Tin Omen'도 천안문을 주제로 했다. 곡명인 'Tin Omen'부터가 'Tiananmen'과 발음이 비슷하다. 뜻은 "양철 징조"다.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 당국의 선전에 대한 풍자적 의미를 담고 있는 1991년 R.E.M.의 "Shiny Happy People".

매염방이 부른 '혈염적풍채'. 원래는 중월전쟁에 참가했다가 전사한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곡이지만 매염방이 1990년 콘서트에서 6.4 항쟁 때 희생당한 젊은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부른 후부터는 6.4 항쟁 추모 노래로도 많이 불린다. 다만 원체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곡인지라 중국 내에서 다른 천안문 관련 콘텐츠가 검열삭제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이 노래는 멀쩡히 검색되기는 한다. 물론 천안문 관련 언급이 있거나 할 경우에는 얄짤없이 삭제.

홍콩에서 열린 6.4 항쟁 추모식 때 '혈염적풍채'를 부르는 시민들 모습.


9.3. 영화


천안문 사태를 다룬 영화로, 미국인 리처드 고든과 카마 힌턴이 공동 감독한 1998년 개봉된 다큐멘터리 영화 'The Gate of Heavenly Peace'가 있다. 당시 시위에 참여한 학생운동가들과 시민들, 지식인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는 훗날 노벨 평화상을 받는 류샤오보도 있다. 1997년 4월 제2회 서울다큐멘터리영상제 개막작으로 초청받았으나, 주최측인 삼성영상사업단이 중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상영을 자진 취소했고 그 후 1998년 6월 극장 상영되었다. 서울 다큐멘터리 영상제 뿐 아니라 싱가포르 영화제, 시드니 국제영화제 등에서도 상영이 취소되는 해프닝이 잇따르기도 했다. 한국 상영시 제목은 '태평천국의 문'. 천안문을 영문으로 번역한 원제 'The Gate of Heavenly Peace'를 다시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이렇게 바뀌었다.
천안문 6.4 항쟁을 다룬 또다른 중국 영화로는 2006년 칸 영화제 경쟁부문 진출한 로예 감독의 〈여름궁전〉[19]이 있다. 당연히 중국 정부는 상영금지와 동시에 로예에게 5년동안 중국에서 영화를 만들지 못하도록 금지 조치를 내렸다.[20] 이에 로예는 중국 정부의 조치를 무시하고 몰래 영화 스프링 피버를 만들었고, 그 영화는 칸 영화제 각본상을 받았다. 여름궁전 말고도 중국 지하전영에서 천안문 관련된 영화가 소수나마 만들어졌지만 모두 철퇴를 맞았다.

9.4. 문학


샨사프랑스어로 발표한 최초의 소설인 <천안문의 여자(Porte de la paix céleste)>가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원제는 천안문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직역한 "천상의 평화의 문"이라는 의미.

9.5.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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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오루(철수): 베를린 장벽이다!

신짱(짱구): 천안문 광장.

네네(유리): 선생님, '''우리들 수준이 낮은가요?'''

선생님: '''아니, 쟤네들이 이상한 거야.'''

크레용 신짱 1화 잡지 연재분에서 신짱과 토오루가 찰흙 조소 대결을 하다가 각각 '''천안문 광장'''과 '''베를린 장벽'''을 만들게 되는데, 이 때 짱구가 '''전차'''를 빚어낸다.
사실 이는 짱구는 못말려가 실은 어른을 대상으로 한 만화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후 아동층의 지지가 높아지자 아동 만화로 노선이 바뀌었고 당연하게도 이 장면은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한 나머지 결국 단행본에서는 잘렸다.

9.6.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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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광장'''

1989년에 여기서 '''아무 일도 없었음'''.

심슨 가족에서는 중국을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에서 천안문 항쟁을 대놓고 풍자했다. 그리고 이 장면 뒤에 중국 현지 가이드가 탱크를 타고 아기를 데리고 있는 셀마 앞에 나타나는데, 탱크맨을 연상시킨다.
미국에서 1980년대 유행한 장식 중에 On This Site, in 1897[21], Nothing Happened라고 써진 장식이 있었는데, 그것을 패러디한 듯.
그리고 다른 에피소드 마지막에는(아마 바트가 미니 바이크와 윈자력 발전소 기술을 바꿔먹으려한 편)(22시즌 12화 Homer the Father)중국에서 집으로 돌아가기위해 호머가 호텔앞에서 공항까지 20달러 이하로 가줄 택시를 잡는데 천안문 광장의 탱크처럼 나란히 있던 여러대의 택시중 가장 앞에 있던 택시가 호머를 태우는것을 거부하며 떠나려고 하자 호머는 택시 앞을 가로막는데 이때 3인칭으로 보여주는 구도가 위의 탱크맨과 완전히 같은 구도였으며, 호머는 양손에 가방을 든체 자신을 피해 옆으로 지나가려는 택시를 따라 좌우로 움직이며 "하루 종일 이럴수 있어!" 라고 하며 길을 막은 호머는 결국 발이 아프다는 이유로 자리에 드러누우며 에피소드는 끝나게 된다.

9.7. 인터넷


천안문 6.4 항쟁은 중국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이기 때문에 중국 당국에게 이 사건은 대표적인 흑역사이다. 물론 인터넷에서 검색하지 못하도록 중국 공안이 철저하게 검열한다.
우스갯소리로 쓸 만한 소재는 아니지만 이것 때문에 중국발 DDoS 공격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이트에 '''"천안문"'''이라는 텍스트를 넣어 두는 것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여러 마법의 단어가 있으며, 이것이 모이고 모여서 2011년 9월 즈음에는 天安門 天安门 法輪功 李洪志 Free Tibet 劉曉波이라는 마법의 단어가 유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저렇게 적어 놔도 그다지 효과는 없는데,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고할 것.
웨이보(微博)에서는 ‘천안문’이란 검색어를 치면 “관련 법규와 정책에 따라 검색 결과를 보여줄 수 없습니다”라는 안내문이 뜬다. 검색 사이트 바이두(百度)에서는 일반적인 천안문 관련 정보는 뜨지만 ‘천안문 마마(엄마)’는 검색이 차단돼 있다. 그리고 '천안문 사건'이라고 치면 1976년 4월 5일에 일어난 1차 천안문 항쟁밖에 안 나온다.
2017년 이후로는 타이완 넘버원처럼 중국인들의 만행이나 중국 사회의 문제를 비판하거나 풍자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한다.
대체역사소설 경애하는 수령동지에서는 북한이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이것이 더 강경하게 진압된다. 인민해방군의 총에 수많은 시민들이 쓰러지고 '''탱크맨이 탱크에 깔려 죽는다.''' 이 사건 이후 덩샤오핑은 죽고 중국은 엄청난 수준의 경제제재를 당한다.

9.8. 예능


비정상회담에서 대자보 문화에 대해 다룬 적이 있었는데, 천안문 6.4 항쟁에 나온 대자보를 언급하자 당시 중국인 패널이었던 왕심린이 아무것도 모른다면서 귀를 막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안 하면 고국에 있는 가족이나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본인한테 무슨 불이익이 있을지 모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10. 평가



10.1.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당은 천안문 사건을 두고 극소수의 반사회적, 반공적인 지식 세력이 순진한 노동자와 시민들을 선동해서 국가를 뒤엎으려 한 난동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문제가 되었던 과잉진압 역시 '당연히 이루어졌어야 할 조치'라고 평가하며, 이 평가를 30여년간 뒤집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은 당시 소련이 비슷한 상황에서 대폭적인 민주화 개혁을 실시했다가 주민들의 불만이 폭주하면서 국가체제가 붕괴했기 때문에 진압 자체는 불가피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허나 인민해방군이 인민을 무력으로 탄압했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 긍정하기 힘든 사건이기는 하다.
물론 중국 공산당이 후일 전향적인 조치를 전혀 내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언론의 보도 자유를 조금은 풀어주었다. 정부 차원의 표현도 2010년대 들어서 폭동에서 정치적 풍파 정도로 순화된 상태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검열과 보도 통제가 지속되는 것 역시 사실이며, 중국 당국의 천안문 사태에 대한 의견에는 변한 점 역시 없기 때문에 이 전향적인 조치들은 체제 지속을 위한 시도로 보는 것이 맞다.
결국 이렇게 장기적으로 사건이 숨겨진 결과, 25년이 지난 시점에서 중국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탱크맨을 보고 천안문 사태를 유추해낼 수 있던 학생은 소수에 불과했다고 한다. 베이징 주민들이나 학계에서는 희생자가 적지 않은 만큼 널리 알려진 얘기지만 청년층들이나 베이징에 살고 있지 않던 지방민들은 천안문 항쟁이 뭔지 진짜로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다만 그와 별개로 지나친 검열 때문에 오히려 천안문 항쟁에 대해 간접적으로나마 인지를 하고 있는 경우가 상당하다고 하며(스트라이샌드 효과), 사실 중국이 천안문 항쟁에 대해 은폐를 필사적으로 하려고 하지만 홍콩, 대만이나 해외로 나가는 중국인들이 1년에 1억 명 이상[22]을 거뜬히 넘기는데다가 취업, 유학, 사업 등의 이유로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인들도 상당하기에 홍콩, 대만, 해외에서 천안문 항쟁에 대해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천안문 사태 당시 베이징 시장으로 재직하면서 강경 진압을 주장했던 것으로 알려진 보수파 인물 천시퉁(陳希同)은 홍콩 저서에서 “나는 꼭두각시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는 부정부패와 권력투쟁이 얽힌 소위 ‘천시퉁 사건’으로 1998년 징역 16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된 뒤 2004년 심혈관 질환 등으로 조건부 가석방되었다.
중국의 민주화 운동가들은 끊임없이 천안문 사태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지만, 중국 공산당이 버티고 있는 한 중국 내부의 평가가 바뀔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요지부동인 중국 공산당은 둘째치고 대다수 인민들도 애써 회피하고 있다.
물론 중국 정부 측도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기는 하는지 아예 없었다는 식으로 나오지는 않는데 인민망에서 1989년 정치풍파라는 제목으로 다루고 있지만 "시위자들이 중국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고 혼란을 일으켰다"는 식으로 왜곡 서술되어 있고 무력 진압 등의 언급도 없이 그저 "결정적인 조치를 취했다" 정도로만 서술되어있다. 이외에도 바이두에서는 "天安门事件"라고 검색하면 1976년의 사건만 검색되고, "六四风波" "1989年政治风波"라 검색하면 위의 인민망 링크가 검색결과로 나온다.
2010년 노벨평화상천안문 민주화 운동 당시 시위에 참여한 혐의로 수감되고 풀려난 이후에도 활발히 시민운동을 벌인 민주화 인사인 류샤오보가 수상하였다. 이때 류샤오보 본인은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고 일가친척들 역시 가택연금을 당하거나 교도소에 갇혀 있어서 본인이나 대리인이 수상을 할 수 없었다. 덕분에 중국과 서방 간의 신경전이 한때 치열해졌다. 류샤오보는 정치적인 활동이 아예 금지당한 채로 반체제 인사, 민주화 운동가 등과의 접촉이 전면 차단되어 있으며 부인은 2년 동안 가택연금, 처남은 사기혐의로 11년형을 선고받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중국 당국의 정치보복이라는 의견도 있다. 또한, 류샤오보에게 노벨평화상을 주었다는 점 때문에 노르웨이는 중국으로부터 대 중국 연어 수출량이 급감하는 경제 보복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중국은 이것 때문에 노벨평화상에 대항해 공자평화상을 만들기도 했다.[23]
2011년 2월 10일에 베이징에 인공강설로 첫눈이 내렸는데, 누군가가 천안문 광장에 6.4라는 글씨를 남겨서 화제가 되었다.
2019년 6월 2일 싱가포르에서 진행된 아시아안보회의에서 중국 국방부장 겸 국무위원 웨이펑허(魏鳳和)는 톈안먼 항쟁에 대해 "톈안먼 사건은 정치적 혼란이었으며 중앙 정부는 혼란을 안정시키려는 조처를 했다"면서 "그것은 옳은 정책이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지난 30년간 중국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면서 당시 중국 정부가 톈안먼 사건을 잘 해결했기 때문에 "중국이 지금까지 안정과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라고 주장했다.

10.2. 홍콩, 마카오, 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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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4일, 천안문 민주화 운동을 기리는 홍콩 시민들.
일국양제의 영향으로 홍콩마카오는 중국 내에서 공산당의 규제 없이 천안문 사건 희생자를 추모할 수 있는 곳이 되었고, 1989년부터 매년 6월 4일에 민주파 홍콩인과 마카오인들에 의해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마카오의 추모제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홍콩은 사실상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 내에서 유일하게 천안문 사건 희생자 추모가 가능한 곳이다.
중국 공산당은 처음에는 홍콩 내 이런 움직임에 대해 경악하고 두려워했으나,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홍콩인들의 중국 공산당에 대한 반감을 측정하는 리트머스지 정도로밖에 보지 않고 있다. 민주화 요구는 대놓고 막기에는 명분이 없고, 어차피 천안문 추모에 참여한 홍콩 주민들도 대다수는 중국 민주화를 주장하지, 분리독립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물론 개중에는 홍콩 독립운동이 대두한 이후 홍콩은 중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천안문 희생자 추모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추모 자체를 반대한다기보다는 ‘민주 중국 건설’을 주장하는 촛불집회 주도 단체에 대해 홍콩 민주화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 따라서 이들이 주도하는 추모제에는 참가하지 않으며, 천안문 민주화 운동이 홍콩의 민주화와 독립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논의하는 포럼 등을 개최하는 모양이다.
한편 반대로, 친중 성향의 홍콩인들은 중국 공산당의 강경진압을 옹호하는 경우가 제법 많다. 실제 홍콩에서는 상기된 이유들과 세월이 흐르면서 추모제에 참가하는 홍콩인들의 수가 매년 줄어들고 있어 민주파 홍콩인들과 중국 민주화 운동가들의 걱정이 커지고 있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사라진 것은 아니며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으니 추모제 기간에 홍콩에 갈 일 있으면 들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2019년에는 홍콩의 천안문 항쟁 추모 집회에서 역대 최대규모인 18만 명이 모였다.
하지만 2020년 7월부터 발효되는 홍콩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2020년 이후로는 추모 집회가 못 열릴 가능성이 높다.
포르투갈령 마카오는 한 술 더 떠서, 말이 포르투갈령이지 실제로는 1966년 12.3 사건 이후 실질적으로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당시 마카오인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15~25만 명이 중국 민주화 지지 시위에 참여할 정도로 마카오 시민들은 천안문 시위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후 이어진 중국 정부의 간접적 개입으로 천안문 사태에 대한 언급이 봉쇄되고, 중국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인사에게는 가족 불화와 직장에서의 해고, 은행 계좌 동결, 기업의 경우 갑작스런 거래 중지 등의 불이익에서부터 심하면 백색테러까지 횡행했다고 한다. 따라서 천안문 사태를 빌미로 친중파는 민주파를 대거 숙청하고 마카오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중화민국(대만)에서도 당연히 천안문 항쟁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항쟁 27주년을 맞아 2016년 차이잉원 총통이 페이스북에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국민이 중국을 전진시킬 수 있다."며 간접적으로 이를 언급하기도 했다.#

10.3. 기타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2018년 6월 3일 중국 톈안먼 민주화 운동 29주년을 맞아 중국에게 '톈안먼 사태 사망자 수'를 밝힐 것을 요구하며 중국의 인권 문제 개선을 촉구했고, 이에 중국 당국은 내정간섭하지 말라며 반발했다.# 다음 30주년을 맞아 폼페이오 장관이 성명에서 "중국 정부가 이 어두운 역사로 인한 많은 희생자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 사망하거나 실종된 사람들의 수를 밝히고 이를 완전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도 2019년 6월 24일. 워싱턴 D.C. 소재 싱크탱크 우드로 윌슨 센터에서 중국의 인권 탄압 문제를 신랄히 비판하는 연설을 하였다.#
'''천안문 사태 30년 후인''' 2019년 8월 18일, 홍콩 대규모 시위에 대응하여 중국이 100여 대의 장갑차와 많은 인민해방군을 동원하자,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제2의 천안문 사태로 이어진다면, 미중외교 협상이 어려울 것"'''이라고 직접 언급하면서 중국에 강력히 경고하였다. 출처(중앙일보)
다만 일본은 미국보다는 유화적인 입장으로, 외교 문서에서 인권보다 장기적으로 대국적인 모습 방향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을 제시했다.# 그리고 중국 국내 문제라고 사실상 덮었고 먼저 정상회담을 제의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이러한 유화적 태도를 보고 통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당시 집권 여당인 자민당은 물론이고 어느 야당도 천안문 사태에 대한 입장은 다르지 않았으며, 그리고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미국만큼의 파워를 결코 발휘할 수 없으며 특히 1989년에는 잃어버린 10년의 초입 단계로 경제가 서서히 하강되기 시작해서 중국과의 협조가 더욱 절실했음을 감안하면 씁쓸하지만 충분히 맥락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모습이다.
한편, 천안문 항쟁 관련 유족들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공개편지로 천안문 사태의 재평가를 촉구하기도 했는데, 중공은 이후 발전상과 긍정적인 부분을 보라며 재평가론을 일축했다.
사실 서구권을 비롯해 민주화가 이루어진 대다수 국가에서는 이 사태를 반민주·반인륜적인 폭거이자 국민의 정당한 요구를 짓밟은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의 그릇된 행동으로 규정하며, 1980년대 말 시점에는 중국에 대한 서방 각국의 투자 중단 및 철수로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 들어 이런 제재는 군사 부문만 제외하면 슬그머니 풀어졌다. 물론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중 수교는 천안문 사태 이전이 아니라 3년이 지난 1992년에야 이루어졌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은 서방과 연대해 소련과 대항하는 정책을 변경하여 친 소련(친 러시아) 정책으로 회귀하였다.[24]

11. 관련 링크


'''혐오스러운 사진(유혈 진압 직후 등) 관련한 사이트는 올리지 말 것.'''
그 밖에도 구글[25]에 천안문 항쟁 또는 천안문 사태라고 검색하면 시위 당시의 사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다만 연관 이미지로 희생자들의 사진이 나올 수도 있으니 주의.

12. 관련 문서



[1] 독재자 마오쩌둥의 하수인들이 왜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홍위병은 극좌였다. 당연히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빈부격차를 키운 덩샤오핑을 증오했기에 대학생들과 연합했다.[2] 중국 적십자 협회 발표 및 미국 정부 추정치[3] 당시 중국 당국의 강경하고 무자비한 진압을 보여주는 일면으로, 웹상에 떠도는 참혹한 실상을 담은 사진을 보면 거의 절반이 불에 타 죽고, 머리가 깨져 뇌가 땅에 나뒹굴거나 탱크에 깔려 사지가 으스러져 피투성이가 된 사람 시체다. 구글이나 네이버 등에서 'Tiananmen' 등의 관련 검색어로 검색 시 이런 잔인한 사진이 많이 나오므로 주의해야 한다. 물론 중국 검색 엔진인 바이두에서 찾아보면 이런 사진은 검열되어 단 한 장도 나오지 않는다. +지금은 너무 잔인하여 구글에서도 나오지 않는다.[4] 영문 위키백과의 제목도 이쪽이다.[5] 그러나 아주 숙청된 것이 아니라 총서기에서만 물러났고 정치국 내에서는 그대로 머물렀다.[6] 당시 국무원 총리. 이후 중공 중앙 총서기 대리를 거쳐 정식 총서기가 됨.[7] 특히 베이징대학과 베이징사범대학 학생들[8] 중국에서는 동성애자에 대한 시각이 매우 좋지 않다.[9] 영어로는 Uerkesh Davlet로 표기한다.[10] 사태 종식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약 3분 정도의 VHS 테이프를 대만 방송사에 보냈는데, 상당히 침통한 표정과 함께 자신의 주장을 조목조목 밝히기도 했다.[11] 제2회 응씨배 때 루이나이웨이 이후로 여자 바둑기사가 세계대회 4강에 간 사례는 단 한번도 없다.[12] 여기서 최혜국 대우란 '''"다른 어떤 나라에게든 이로운 대우를 해주기로 했다면 이 나라에게도 자동적으로 그 대우를 적용한다."'''라는 것이다. 최혜국 대우는 말만 들으면 그 나라만 특별취급해주는 것 같지만,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거의 모든 다른 국가들에게 최혜국 대우를 해주고 있으므로 '''실제로는 기본 권리에 가깝다.''' WTO는 이 최혜국 대우는 가맹국 모두에게 인정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13] 1980년대 중반까지 대만도 국민당만 정권을 차지가 가능했던 일당독재국가였고, 언론통제도 단행되었다.[14] 그 이전까지는 현대의 중국 정부가 천안문 항쟁을 폭동으로 치부하는 것처럼 장제스-장징권 당대의 대만 정부도 2.28 사건을 반국가분자들의 폭동으로 치부했었고,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제대로 된 보상 등은 기대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오히려 중국 대륙에서 2.28 사건에 대해서 인민들의 항쟁이라며 기념하던 21세기의 일과는 정반대의 양상. 물론 1980년대 이후로 중국 당국이 대만 당국과의 관계개선을 시도하면서 2.28 사건 기념행사는 없어졌다.[15] 다만 최근에는 시진핑이 당내의 집단 지도체제를 무너뜨리고 일인 독재 체제를 구축하는 거대한 삽질을 함으로써 그나마 공산당 1당제이기는 했어도 비교적 온건했던 후진타오 때가 더 나았다고 주장하는 중국 국민들도 생겨나는 추세다.[16] 저 당시 신문연파 오프닝 음악은 현재까지도 리믹스를 거치지 않고 사용되고 있다.[17] 다만 자오쯔양이나 쉬친셴처럼 군,정계에 완전히 쫒겨나지 않았으며 이후 전국인민대표대회 부회장을 역임해 나름대로 대우는 받았다. 그의 자식들도 인민해방군 장교를 역임하고 있는데 그중 장남이자 現 동부전구 부사령원군 사령원인 친웨이장 중장은 흑사회를 박살낸 것으로 유명하다.#[18] 뉴욕타임즈 중국어판 2019년 6월 3일자(인민해방군 기관지 해방군보 기자 장림(江林)의 증언). 나와 전총참모부 훈련처장 장성(张胜)은 장아이핑의 전기를 쓰기 위해 그를 방문했다. 장아이핑은 7명의 상장이 나서기 전에 중앙군사위원회에 단독으로 보고를 했다고 말했다. 그때는 아직 계엄이 내려지지 않았는데, 그(장아이핑)는 이 상장들을 이끌고 광장에 가서 학생들과 대화한 후, 중군위에 학생들과 대립하지 말것을 요구했다. "우리(중국공산당 초기지도자들)도 소시적에 학생운동을 했는데, 왜 그들(학생)들과 대화하지 않고 적으로 삼느냐. 이들이 단식해서 병든 모습을 봤는데 왜 그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느냐."[19] 원제:頤和園[20] 사실 로예는 데뷔작 주말연인에서도 천안문 사태를 다루는 등 개김성이 있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중국 영화계 검열 논란 언급하면 항상 빠지지 않는 감독이며, 중국 공산당이 망친 대표적인 감독으로 손꼽힌다. 2019년 난심대극원(새터데이 픽션)도 검열에 걸려 출품을 지연해야 했다.[21] 또는 Sept. 5, 1782[22] 중국 인구를 감안하면 10명 중 1명이 약간 못되는 꼴로 존재한다는 것이다.[23] 다만 이 상은 중국 정부가 허가하지 않은 정체불명의 조직이 만든 상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24] 소련과 중국은 양국이 서방을 적대하는 것보다 '''더 심하게''' 서로를 적대하였고, 소련의 여러 전쟁 계획이 유럽에서는 대부분이 NATO군의 선공에 대응하는(침략계획도 있기는 했다) 것이었다면 중국을 상대로는 일단 선제핵공격을 퍼붓는다는 수준의 계획일 정도였다. 실제로 무력충돌까지 했었고... 그래서 사실 지금까지도 중국과 러시아 관계는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은 형태'이다.[25] 구글의 경우 Tiananmen만 검색하면 맨 첫 줄부터 잔혹한 사진이 표시되니 특히 주의. 영어로는 무엇으로 검색하든 그 사진이 뜨는 판국이니 가급적 한국어나 중국어로 검색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