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즈즈
1. 개요
아시아 출신 첫번째 NBA 진출 농구 선수이며 현 바이 로케츠[1] 감독이다.
2. 상세
왕즈즈는 농구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님이 모두 농구 선수출신이다. 1994년 17세의 나이로 바이 로케츠에 입단해 이후 중국 남자 농구 사상 최연소 국가대표가 됐다. 1995-96년 중국농구협회가 첫 시즌을 시작할 때 리그 최연소 선수 중 한 명이었으나 곧 스타급 선수단의 핵심 멤버가 되었으며 이후 1996년과 2001년간 6시즌동안 바이 로케츠는 리그 우승을 독점하고 있었다.
미국농구협회의 댈러스 매버릭스는 1999년 NBA 드래프트 2라운드에서 36번째 선택으로 왕즈즈를 선택했다. 준비도 안 되고 혼란스러웠던 바이 로케츠는 왕즈즈가 NBA로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오랜 협상 끝에 NBA 진출이 허가되었다. 왕즈즈는 2000-01시즌이 10경기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마지막 CBA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한 뒤 댈러스 매버릭스에 입단했으며, 사상 최초의 아시아 출신 NBA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댈러스 매버릭스가 중국 농구 관계자들에게 약속했듯 국대소집으로 중국으로 돌아가기보다는 미국에서 여름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2002년 10월 중국농구협회에서 2002 부산 아시안게임 기간에 그를 중국대표팀에서 제명하였다. 이러한 제명절차는 2006년에야 해제되어 국가대표로 다시 뛸수 있게 되었다.
이후 2002년에 LA 클리퍼스와 계약했다 한 시즌을 보낸 후, 마이애미 히트와 다년 계약으로 입단했다. 그는 2004-05시즌에 마이애미와 2시즌 동안 뛰다 자유계약선수가 되었고, 이 기간 동안 34경기를 뛰었고 평균 2.5PPG를 기록했다. 이후 CBA 바이 로케츠로 복귀하게 된다.
2016년 공식적으로 은퇴하고 2018년부터 바이 로케츠 감독이 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아시아 무대에선 신장도 월등하고 포스트업 스킬도 있으며 BQ가 높으며 슛 거리도 길어 3점슛도 가능하다. 야오밍의 자서전에 보면 그가 왕즈즈에게 초창기에 계속 열등감을 가졌다는게 드러날 정도로 말 그래도 다재다능한 선수였다.
하지만 NBA 무대에선 트위너로 취급을 받았다. 파워와 스피드는 애매했으며 스킬 역시 NBA 수준에선 모자랐기 때문이다.[2] 결국 야오밍과 달리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 상무와 같은 군인팀이다.[2] 스피드는 사실 키에 비해 나쁜 편은 아니었으나 왕즈즈는 NBA 기준 골밑에서 위압감을 낼 정도의 힘이 없었다. 볼핸들링이나 패스 역시 빅맨치고 나쁘진 않았으나, 골밑에 있기도 애매한 선수가 외곽에 나올 정도의 기술은 아니었다는 게 문제. 스트레치형 빅맨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으나 3점슛이 노비츠키 수준으로 뛰어난 것도 아닌데 그거 하나 믿고 출장시간을 줄 이유가 없었다. (슈팅터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부드러웠다. 사실 당시 기준으론 NBA 빅맨 중 상위권 슈팅력이긴 했다) 결국 수준이 더 낮은 리그에서 다재다능함을 뽐내는 선수들이 수준이 더 높은 리그에 가면 다재다능하게 애매해진다는 걸 보여준 케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