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오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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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 NBA 선수. 현 중국 농구 협회(CBA) 주석(회장). 중국인이며, '''NBA 드래프트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 출신 1라운드 1순위 지명자이며 사실상 유일하게 NBA에서 대성한 아시아 선수이다.'''[3]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역시 키가 크다. 아버지의 키는 208cm, 어머니의 키가 190cm. 두 사람 다 전직 농구선수이다. 야오밍은 이런 부모 덕분에 태어날때 몸무게가 5kg이었고 10살때 키는 165cm였다. 그리고 그는 13세때 CBA 상하이 샤크스의 주니어팀에 입단하면서 농구선수의 길을 걷게 된다.
2. 상하이 샤크스 시절
야오밍은 매일 10시간씩 연습하는 강행군을 치르며 4년동안 주니어팀에서 뛴다. 17살때 성인팀으로 승격되면서 본격적으로 성인무대에 데뷔한다. 야오밍은 루키시즌에 평균 10득점 8리바운드를 기록하면서 준수한 활약을 보였지만, 다음시즌에 발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으면서 한경기도 뛰지 못했다. 이때 야오밍의 제자리점프는 10에서 15cm 정도 줄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번째 시즌 네번째 시즌에 팀을 CBA 파이널에 올리는 등의 공을 세운다. 하지만 당시 중국최고의 농구스타 왕즈즈가 버티고 있던 바이 로키츠(상무처럼 군인팀)에게 패배해 두 번이나 준우승에 머물렀다. 야오의 자서전에 보면 그가 왕즈즈에게 초창기에 계속 열등감을 가졌다는게 드러난다. 실제로 왕즈즈는 야오보다도 더욱 뛰어난 슈팅터치, 슛거리, 볼핸들링 능력까지 갖춘 다재다능한 선수인데다 운동능력까지 갖췄다. 야오가 어린 시절에 팀 관계자들은 그가 엉덩이가 너무 커서 굼뜨기 때문에 대성하긴 힘들다고 평했다고 한다.(왕즈즈나 후배 이젠롄은 하체가 늘씬하고 호리호리한 체격이다.) 그러나 둘이 NBA에 진출하자 상황은 완전히 역전된다. 왕즈즈가 자랑하던 스피드나 볼핸들링은 그보다 훨씬 빠르고 다재다능한 NBA 선수들 앞에선 무용지물이었고, 중국에서 상당한 수준이던 공밑 장악력도 체격이 빈약해 별 볼일 없었다. 결국 그는 장신 슈터 겸 백업 골밑요원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야오는 NBA에서 가장 느린 선수이긴 했지만 어차피 그는 골밑장악력으로 먹고사는 선수라 기동력이 딸리다는게 그렇게까지 큰 타격은 아니었다. 게다가 7피트 6인치, 310파운드를 상회하는 그의 거대한 체격, 특히 튼실한 하체로 밀고 들어가면 NBA의 운동능력 만땅인 센터들도 막기 힘들어했고 NBA에서 손꼽히는 빅맨으로 성장했다. 결국 왕즈즈가 야오보다 우월했던 건 CBA 시절이 마지막이었다.
실제로 타리그에서 입지가 [전미 농구 협회|NBA]]에서 역전되는 경우는 많은데, 원래 실력이 딸리던 선수가 성장해서 역전하는 경우도 있고 스타일 차이로 인한 것도 있다. NBA는 워낙 수준이 높기 때문에 웬만한 실력으론 두각을 나타내기 힘들다.[4] 모든 것에서 수준이 몇단계씩 올라가기 때문에 모든 걸 수준급으로 잘하기보단 몇 가지를 확실히 잘하는게 더 중요하다. 왕즈즈의 경우 216cm의 장신임에도 센터 본연의 역할 외에 점프력, 스피드, 볼핸들링, 슛, 패스 등 모든 걸 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아시아권에선 거의 끝판왕이었다. 반면 야오는 골밑 존재감이 거의 규격외였지만, 어차피 아시아권을 장악하려면 야오만큼 클 필요는 없었다. 이 때문에 한국같은 라이벌 팀들 입장에선 야오만큼 무서운게 바로 왕즈즈였다. 반면 NBA에선 왕즈즈 정도 체격은 별로 무섭지 않아도 야오 정도 체격은 부담스러웠던 것. 야구에서도 직구 스피드 하나를 제외하고 다른 두명의 라이벌(임선동, 조성민)에 비해 확실히 뒤쳐졌던 박찬호 였지만 MLB 100승 투수가 된 경우도 비슷한 예로 들 수 있다.
물론 스타일을 떠나 근본적으론 실력 차이도 있었다. 왕즈즈가 야오를 압도했던 건 그가 3살이 많았고, 어려서부터 프로데뷔를 하는 중국리그에선 20대 초반 젊은 선수들 사이 3년 차이가 엄청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왕즈즈가 야오랑 중국에서 붙은 마지막 시즌인 99-00 시즌에 야오를 꺾어서 그렇지, 야오가 무섭게 성장 중이었던 00-01 시즌에 다시 붙었다면 발릴 가능성도 있었다. 밑에 언급된대로 야오는 결승에서 상식 밖의 기록을 냈는데, 왕즈즈는 한번도 저 정도로 압도적인 기록을 낸 적이 없다. 상성상 빠르고 다재다능하고 공격범위가 넓은 왕이 더 유리하긴 하지만, 저 정도로 골밑을 박살내면 상성을 논할 수준이 아니다.
하지만 2001년 왕즈즈가 NBA로 진출하면서 빠이 로키츠가 약화되자 바로 그해 결승전에서 빠이 로키츠를 꺾고 CBA 챔피언이 된다. 샹하이 샤크스의 현재까지 유일한 우승. 이때 야오밍은 플레이오프 기간동안 평균 38.9점 20.2리바운드 76%의 필드골 성공률을 기록하면서 맹활약했다. 여기에 2001년에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MVP까지 차지하면서 그는 NBA의 많은 팀에 관심을 받게 된다.
3. NBA 커리어
사실 왕즈즈와의 상대전적과는 별개로 야오밍에 대한 NBA의 관심은 이전부터 대단히 뜨거웠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중국대표팀의 백업센터로 참가했던 야오밍은 5반칙 퇴장을 당했음에도 짧은 시간동안 알론조 모닝, 빈 베이커가 버틴 미국 대표팀을 상대로 5블록슛을 기록하며 인상적인 모습을 알려줬다. 이 때 당시 미국 대표팀 관계자들이 야오밍을 보고 18세의 나이와 신장 그리고 풋워크를 감안하면 NBA 1순위도 노려볼 수 있을 선수라고 이야기 했다. 단 한번도 동양인이 드래프트 현장에서 지명된적이 없었음을 감안하면 야오밍에 대한 당시의 평가는 대단히 파격적이었다. NBA는 이때부터 야오밍을 드래프트에 참가시키기 위해 작업을 시작했고, 중국농구협회는 야오밍을 뺏기지 않기 위해 팽팽한 기싸움을 벌여야 했다. 애초 야오밍은 2001년 드래프트에도 나올 수 있었지만 중국협회의 반대로 딜레이되다가 마침내 2002년 드래프트에 참가를 허락 받았다. 드래프트를 앞두고 미국에서 실시한 워크아웃에는 거의 르브론 제임스 급 언론사 취재열풍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동양인에게 있을 수 없는, 1라운드 1순위로 휴스턴 로키츠에 지명된다. 이때 특이 했던 점은 야오밍은 드래프트 현장에 참가조차 못하고 위성중계로 상하이 자택에서 드래프트 현장과 연결을 했다는 사실이다. 중국 농구협회가 야오밍을 뺏기지 않기 위해 얼마나 기싸움을 벌였는가 보여주는 대목이다.
야오밍은 NBA에 진출하고픈 욕망이 강했다. 1라운드 1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휴스턴 로키츠 역시 야오밍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중간에 CBA와 야오밍의 원 소속팀이었던 샹하이 샤크스가 야오밍의 NBA 진출을 막으려고도 했지만[5] 이것도 여차저차해서 해결은 되었다. 야오밍 본인은 사비를 들여서 미국으로 건너갔고, 미국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 프리 드래프트 캠프와 시카고 불스와의 워크아웃을 치뤘다. 하지만 시차적응도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의 워크아웃은 독이었고,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6]
드래프트 당일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반반이었다. 하지만 휴스턴 로키츠는 하킴 올라주원 시대의 재건을 꿈꾸면서 그를 1순위로 지명한다. 처음에 야오밍을 지명하는 것을 별로 탐탁치않게 여겼던 스티브 프랜시스는 막상 그가 팀에 합류한 첫날에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친한 친구가 되었다. 이 때 드래프트를 중계하던 찰스 바클리는 "내가 만약 1순위 지명권이 있다면 캐런 버틀러나 제이 윌리엄스를 지명했을 겁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바클리는 야오의 루키 시즌에 그를 저평가하던 전문가 중 하나였는데, 야오가 실력으로 모든 걸 입증하자 그를 높이 평가했다.
농구가 워낙 피지컬이 중요한 스포츠고, 장신 센터는 워낙 희소자원이라 피지컬이 엄청난 센터는 실력과 상관없이 유망주로서 고평가되는 성향이 강하다. 이 때문에 별로 보여준게 없는 선수라도 지명을 받는 경우가 많다. 당장 2004년의 파벨 포드콜진만 하더라도 유럽에서 이탈리아 리그에서 뛰면서 별 눈에 띄지 않는 실적만 보였음에도 한때 전체 10위 이내 픽까지 거론되었으며 결국 21픽으로 뽑혔다. 하승진은 심지어 유럽도 아니고 한국대학리그에서 잠깐 뛴게 전부임에도 한때 1라운드감으로 거론됐고 2라운드로 뽑혔다. 그런데 정작 뛰게 되니 이 둘 다 NBA급 기량이 아니었다는게 분명히 드러났고, 미미한 활약만 보이다 방출되었다. 이 둘과는 다르게 미국 대학리그에서 성과를 보이긴 했지만 기량 면에서 한계를 보였던 하심 타빗 같은 경우에도 대학무대에서 활약이 훨씬 좋았던 제임스 하든, 타이릭 에반스, 스테판 커리 등을 제치고 2009년 NBA드래프트에서 2순위로 뽑혔다. 이들의 공통점은 피지컬이 어마어마했던 것. 포드콜진은 226cm, 하승진은 맨발 221cm(NBA식으론 사실상 223), 타빗은 221cm에 팔이 무지막지하게 길었다. 문제는 이들의 실력은 NBA급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적응만 하면''' 대박이기 때문에 반쯤 도박하는 심정으로 지명하는 것이다. 심지어 타빗은 포스트업 1대1보다는 팀플레이에 능한 작고 빠른 센터였고, 2009년에도 2순위로 지명되었다. 야오밍의 경우만 하더라도 NBA에서 가장 느린 선수란 치명적인 단점에도 불구하고 2008-09시즌까지 최정상급 선수로 명성을 떨쳤으며, 발이 아작나지 않았더라면 리그 파괴는 더 오래 이어졌을 것이다. 로이 히버트는 야오와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기량이 딸리는데다가 키도 10cm나 더 작았음에도 빅3가 버티는 마이애미 히트의 스몰볼을 박살냈다. 즉, 그만큼 농구에서 실력있는 초대형 센터의 가치는 크다. 그리고 그렇게 클 가능성이 있는 초대형 유망주의 유혹도 그만큼 강력하다.
1순위에 지명된 야오밍은 그해 9월 부산 아시안게임에 참가하게 된다. 예선부터 준결승까지 아시아 버전 드림팀의 위엄을 보여준 중국 대표팀은 결승에서 홈코트 어드벤티지를 가진 대한민국에게 예상치 못한 일격을 당해 준우승에 그치며 야오밍 개인에게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은 잊고 싶은 기억이 됐을지도 모른다. 여담으로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는 미래의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 두 명이 참가했는데 한 명은 야오밍이고 한 명은 리빙 복싱 레전드 게나디 골로프킨이다.
3.1. 초창기
NBA 적응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2002년 6월 말에 드래프트 되어 4개월 동안 NBA 준비를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중국 국가대표로 뛰느라 NBA 적응할 시간을 날릴 수 밖에 없었으며, 국제대회의 경험은 어느정도 있었지만 NBA의 거칠고 빠른 농구를 경험해보지 못한 야오밍은 NBA에 빠른 적응을 못했다. 드래프트때부터 야오밍을 씹어대던 찰스 바클리는 그것보라는 듯 TNT방송의 Inside The NBA에서 '''"만약 야오밍이 한경기에서 19득점 이상을 하면 내가 케니 스미스 엉덩이에다 키스를 하겠다."''' 폭탄선언을 하기에 이른다.[7]
하지만 2002년 11월 17일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LA 레이커스]]와의 경기에서 야오밍은 9개의 야투를 모두 성공시키고 자유투 2개까지 포함해서 20득점을 올린다. 이에 찰스는 빼도박도 못하고 케니의 엉덩이에 키스를 해야 될 판. 그런데 케니 스미스는 이를 아주 잘 이용해먹었고, 스튜디오에 당나귀 한마리를 끌고와 당나귀 목에 '''KENNY'''라는 팻말을 걸고 찰스에게 '''"내 엉덩이에다 키스할건지 아니면 이 당나귀 엉덩이에다 키스할건지 알아서 해 ㅋㅋㅋ"'''라고 약올렸고, 결국 찰스는 당나귀 엉덩이에 키스했다.[8] 이 장면은 경기를 끝내고 락커룸에 있던 야오밍도 지켜봤다.
이 사건 이후 야오밍은 서서히 NBA 무대에 적응해 나갔다. 2002년 12월에는 이달의 서부 신인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2003년 1월 17일에는 마침내 샤킬 오닐과 역사적인 첫 대결을 가졌다. 이 경기에서 두 선수가 올린 기록은 야오 10득점, 10리바운드, 샤크는 31득점, 13리바운드였다. 수치만 보면 MDE가 풋내기에게 참교육을 시킨 것처럼 생각되겠지만, 실제 경기를 보면 이는 어림도 없는 평가로, 샤크가 야오와 매치업에서 매우 고전한 경기였다.
샤크는 1쿼터 초반 야오와 첫 매치업에서 자신보다 '''훨씬''' 크면서도 몸놀림이 부드럽기까지 한 비현실적인 존재를 맞아 평소와는 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 자신의 빠른(?) 발을 활용해서 야오를 돌파할 요량으로, 페이스업 자세를 취한 것이다. 하지만 샤크의 첫 공격 시도는 야오의 블록에 막혀 불발되었다. 다음 공격 기회 때는 본인의 주특기인 포스트업 우격다짐을 시도했으나 이번에도 야오의 블록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샤크는 이날 첫 네 번의 샷을 모두 실패했다. 야오는 그 경기에서 6개의 블록을 찍었는데 그 중 3개가 샤크를 상대로 한 것이었다. 샤크는 2, 3쿼터에서도 야오밍이 수비수일 때는 마치 루키 시절에 나머지 4대 센터들을 상대하는 양 쩔쩔 매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그 시간대에는 야오도 수비에 최선을 다하는 샤크를 좀처럼 뚫지 못했고, 4쿼터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샤크가 야오를 제대로 공략하기도 했지만, 완전히 압도한 정도는 아니었다.
연장전까지 간 경기에서 샤크는 10.2초를 남긴 클러치 타임에 야오가 쐐기 덩크를 터뜨리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결과는 108-104 휴스턴 로키츠의 승리, LA 레이커스의 패배였다. 그리고 이 첫 대결을 많은 농구팬들이 '야오밍의 승리'로 기억하는 것은 단지 소속 팀이 이겨서가 아니다. 그 경기에서 야오밍과 매치업 상황 시 샤킬 오닐의 샷 성공률은 7/19로 40%도 되지 않았다.[9]
3월에 또다시 이달의 서부 신인선수에 선정이 되었다.
시즌 종료때 13.5득점 8.2리바운드 1.8블록슛 야투율 .498 자유투 .811을 기록해 피닉스 선즈의 아마레 스타더마이어와 치열하게 경쟁해서 아쉽게 13표차로 2위에 만족해야 했다. 둘이 워낙 개인성적이 비슷해서 소속팀 성적으로 갈릴 것이란 예측이 많았는데, 이 때 이 둘의 소속팀 휴스턴 로키츠와 피닉스 선즈는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두고 막판까지 치열하게 경쟁했으나, 시즌 내내 우세하던 휴스턴 로키츠가 루디 톰자노비치 감독의 갑작스런 사임 (건강 문제) 이 후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결국 탈락하고 만 것이다.
03-04 시즌에 새롭게 감독으로 부임한 제프 밴 건디에 의해 팀의 중심으로 낙점되었다. 시즌 성적은 17.5득점 9.0리바운드 1.9블록슛으로, 대부분의 기록치가 상승했고 오랜만에 플레이오프에도 올라갔다. 1라운드 상대가 전당포 라인업 LA 레이커스였고, 1승 4패로 탈락하긴 했지만.
04-05 시즌에는 새로운 파트너로 올랜도 매직에서 온 득점머신 트레이시 맥그레디가 합류했다. 맥밍콤비의 탄생. 물론 처음에는 티맥의 부상과 처음으로 손발을 맞는거라 생각만큼의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시즌이 흐르면서 점차 호흡도 맞아떨어져 가면서 휴스턴 로키츠는 서부의 무시할 수 없는 팀이 되었다. 야오밍의 시즌 성적은 18.3득점 8.4리바운드 2.0블록슛.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는 댈러스 매버릭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패했다. 물론 7차전의 경우 너무 압도적인 차로 패배하긴 했지만,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치는 높았다. 그러나...
3.2. 짧은 전성기와 계속되는 부상
05-06 시즌 야오밍은 부상으로 시즌아웃되며 57경기 출장에 그쳤다. 이 시즌에 처음으로 시즌 평균 더블더블을 기록하면서 상승세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쉬운 대목. 그러나 그는 이 시즌에 예전과 달리 공격에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며 엘리트 빅맨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06시즌 초반까지 휴스턴 로키츠는 엘리트 득점원인 트레이시 맥그레디에 지나치게 의존했고 야오 역시 2옵션 역할이 편한 듯 보였다. 수치상으로 12월에 큰 부상을 입기 전까지 19.9점 9리바운드로 높았으나 득점욕심을 크게 내진 않았던 것. 그러나 한달 이상 부상으로 결장하고 1월 말에 복귀한 이후부터는 보다 적극적으로 공격을 시도하며 복귀 이후부터 35경기동안 평균 23.8점 10.9리바운드란 엘리트급 기록을 낸다. 이때 시즌 통틀어 22.3점 10.2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샤킬 오닐(20점 9.2리바운드)보다 뛰어난 기록을 냈는데, 이때 야오가 57경기에만 출장하고 팀이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해 올 NBA 세컨팀으로 밀렸으나 만약 플레이오프에만 올랐다면 충분히 퍼스트팀이 유력한 상황이었다. 앞서 언급됐듯 퍼스트팀 센터 오닐은 이때 커리어 로우 성적을 냈고 출장경기수도 야오랑 비슷했기 때문에 동부 2위란 팀성적 버프와 네임밸류만 아니었으면 야오를 제치기 힘들었을 것이다.
06-07 시즌에는 한층 더 성장해 11월에 NBA 이 달의 선수로 선정되는 쾌거를 거둔다.[10] 특히 11월에 있던 마이애미 히트와의 경기가 정점이었는데 여기서 그는 33점을 올리며 '''생애 최초로 샤크와의 매치업에서 그를 압도하며 승리를 거둔다.'''[11] 이전까지 1옵션이었던 티맥은 첫 두달동안 20점 언저리에 그치고 야오가 팀의 1옵션이로 25점을 넣으며 명실상부 최고의 센터로 자리를 잡는 듯 했으나....역시 부상으로 48경기 출장에 그쳤다. 이 때문에 퍼스트팀 센터 아마레 스타더마이어를 경기력과 기록 양면에서 압도했음에도[12] 써드팀에 그쳤다.
07-08 시즌에는 평균 22득점 10.8리바운드로 커리어 두 번째 더블더블을 기록했으나 55경기 출장에 그쳤다. 이렇게 부상이 잦아지면서 중국 팬들과 휴스턴 팬들을 안타깝게 했는데, 특히 07-08시즌 그가 부재중인 기간에 휴스턴이 22연승을 달성하자 '''"이제 휴스턴에는 야오밍이 필요없는 거 아님?"'''이라는 말까지 나오기도 했다. 물론 보스턴 셀틱스에게 패해서 연승행진이 끝났을때 그 말은 쏙 들어갔다. 보스턴의 골밑이 막강했기 때문에 야오의 부재가 너무 눈에 띄었던 것. 사실 야오밍이 있을때와 없을 때의 경기력 격차를 생각하면 저 소리는 애초에 농구를 잘 모르거나 휴스턴 농구에 대해 잘 모르는 인간들의 헛소리에 가깝다. 야오가 없을 때 2미터도 안되는 수비전문 척 헤이즈의 근성과 40대 노장 디켐베 무톰보의 노장투혼에 기대며 골밑의 공백을 겨우겨우 메꿨는데, 하프코트 오펜스 비중이 큰 휴스턴 특성상 이 정도 골밑과 믿을만한 득점 옵션이 티맥 하나 뿐인 상황에서 야오없이 서부에서 뭘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농구에서 에이스가 빠졌을때 조력자들이 투혼을 발휘해 반짝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경우는 종종 있다. 역대최고의 선수로 불리는 마이클 조던조차 1993년 은퇴했을 당시 시카고 불스가 전시즌과 별로 차이나지 않는 55승이나 거둔 적이 있다. 그러나 팀을 잘 이끈 스카티 피펜은 플레이오프 당시 뉴욕 닉스의 패트릭 유잉에게 밀리며 한계를 보였는데, 유잉이 22점 12리바 (야투 53%)를 기록하는 동안 피펜은 21점 7,7리바 4.7어시 (야투 40.5%)를 기록했다. 눈에 보이는 수치보다 그 유명한 3차전 막판 당시같이 에이스 대결에서 밀렸는데, 이때 뉴욕 닉스가 지고 있다가 유잉이 8연속 득점을 하면서 따라가는 동안 피펜은 3연속으로 공격을 실패하며 리드를 다 날렸다. (그래놓고 마지막 슛 기회를 안 줬다고 항명했다. 전 포제션에서 아이솔레이션 기회를 줬을때 13초나 혼자 쓰고도 수비수 한명을 못 제쳤으면서...) 이처럼 정규시즌에선 슈퍼스타 선수가 빠져도 별 타격이 없거나, 오히려 더 나은 성적을 거두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중위권 이상팀만 올라가는 플레이오프에서는 확실히 한계가 있으며, 우승 후보팀들하고 붙게되는 상위라운드에선 이런 문제가 더더욱 심각해진다. 득점력이 확실한 슈퍼스타 없이 우승한 팀은 04년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밖에 없으며, 그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도 올스타급 로우포스트 득점원(라쉬드 월러스), 클러치 득점원이자 리더(천시 빌럽스), 강력한 골밑수비(벤 월러스) 등을 골고루 갖췄다. 얘기가 좀 셌지만, 어쨌거나 포인트는 에이스가 빠지고 '''일시적으로''' 잘 나간다고 그 선수가 필요없다고 결론 내리는 건 지나치게 경솔하다는 것. 이와 같은 케이스가 패트릭 유잉 항목에도 나와있는 이른바 유잉 무용론이다.
연승 도중 왼쪽 발의 스트레스 골절[13] 로 아웃된 야오는 3월에 수술을 하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중국대표팀을 이끈다.
3.3. 마지막 불꽃
08-09시즌에는 모처럼 건강하게 77경기를 뛰었다. 출장시간이 33.6분으로 줄면서 평균 19.7득점 9.9리바운드로 기록은 다소 감소했지만, 그래도 야오밍이 모처럼 많은 경기를 소화해주면서 휴스턴은 트레이시 맥그레디의 시즌아웃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오프 2라운드까지 진출했다.
당시 휴스턴은 53승으로 4번 시드, 2라운드에서 맞붙은 상대는 바로 65승을 거두었으며 코비 브라이언트, 파우 가솔, 라마 오돔, 앤드류 바이넘이 버티는 리그 최강전력의 LA 레이커스였다. 반면 휴스턴은 트레이시 맥그레디가 아웃된 상태에서 야오밍과 롤플레이어들 메타 월드 피스, 셰인 배티에, 루이스 스콜라, 에런 브룩스로 버티는 상황.
그러나 1차전 당시 야오밍과 휴스턴의 롤플레이어들의 맹활약으로 로키츠가 줄곧 앞서나갔다. 특히 3점슛 3개를 포함해 적재적소에 득점을 해주며 21점을 기록한 월드피스, 19점을 넣은 브룩스 등이 야오를 잘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종료를 5분 정도 앞둔 시점에서 돌파하는 코비를 커버하기 위해 막아선 야오의 오른쪽 무릎과 코비의 왼쪽무릎이 부딫히고 말았다. 그리 큰 충돌은 아니었지만 이미 05-06시즌 당시 무릎이 부러지면서 장기결장한 적이 있던 야오에겐 큰 타격이었고, 그는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며 괴로워한다.
트레이너들의 부축을 받으며 퇴장하던[14] 야오는 고민하는 듯 얼굴을 찌푸리더니 트레이너에게 뭔가 말하고 '''뒤돌아서서 코트로 향한다.''' 이에 트레이너는 황급히 만류했고 설득을 시도했지만 야오는 완고했다. 결국 트레이너는 야오에게 "무릎을 굽힐 수 있겠냐"고 물어보는 듯 했고[15] 야오가 무릎을 구부리고 다리를 펴보더니 "뛸 수 있다"고 하며 그는 '''절뚝거리면서 코트로 돌아온다.'''
돌아온 야오밍은 비록 리바운드나 블럭은 추가로 기록하지 못했지만 8점을 추가로 득점하며 팀의 8점차 승리를 이끌었다. 심지어 리바운드를 할 정도로 제대로 점프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밀려넘어지면서도 간신히 볼을 쳐내 셰인 베티에 쪽으로 던지는 등[16] 투혼을 발휘했다.
사실 많은 팬들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인데 그는 1차전 이후 바로 아웃되지 않았고 두 경기를 더 뛰었다. 그러나 2차전에서는 부상의 후유증으로 26분만을 뛰었고(12점 10리바운드), 3차전에서는 39분을 뛰었지만 (19점 14리바운드) 팀의 승리를 이끌진 못했다. 3차전 이후 발목을 삔 것으로 드러났고, 추가 검사 결과 '''왼쪽 발에 또''' 골절이 발견되면서 결국 시즌아웃이 된다.
휴스턴은 야오를 잃었음에도 두 경기를 더 따내며 선전했으나, 압도적인 전력의 LA 레이커스에게 7차전만에 무릎을 꿇고 만다. 이 해에 휴스턴은 LA 레이커스를 7차전까지 물고늘어진 유일한 팀이었고, 두 에이스가 빠진 상황에서도 두 경기나 따냈다는 점에서 만약 부상이 없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3.4. 은퇴
09-10시즌에는 아예 한 경기도 뛰지 못해 팬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수술했던 부위가 아물지 않아서 골절이 재발한 것. 결국 야오밍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가 받았던 발에 인공관절을 삽입하는 수술을 받았다. 실제로 이 수술을 받기 전에 일가우스카스의 조언을 받기도 했다.
10-11시즌에 팀은 야오의 출전시간을 평균 24분 안팎으로 제한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결국 다섯경기만에 다시 부상이 또 재발해서 시즌아웃되었다. 야오는 인터뷰를 통해 복귀에 대해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등 예전에 비해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였고[17] ,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이 때 그의 나이 겨우 30세. 한창 전성기를 달려야 할 선수가 부상으로 잇달은 불운을 맞이하면서 NBA 우승을 경험하지 못한 채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다. 그 이후 같은 중국인 선수인 멍크 바터(2003년 샌안토니오 스퍼스 소속)와 쑨예(2009 LA 레이커스 소속), 그리고 순수 중국인은 아니지만 대만계에 속하는 아시아계 선수 제레미 린(2019년 토론토 랩터스 소속)이 NBA 우승을 경험하면서 앞으로 동양인 선수가 우승을 차지할 때마다 의문의 1패씩을 챙겨야 하는 사실상 영고라인이 확정되었다고 보면 된다.
물론 웃자고 하는 소리지, 저 선수들처럼 우승하는 걸 야오밍이 부러워할리가 없다. NBA는 정규시즌의 경우 실제로 경기를 뛸 수 있는 active선수와, active로 명단을 옮기지 않으면 경기에 뛸 수 없는 inactive선수까지(과거에는 부상자 명단으로 불렀다.) 로스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플레이오프에서는 inactive없이 딱 12명의 선수로만 로스터를 꾸려야 한다. 그런데 쑨예와 멍크 바터 둘 다 우승 당시 팀에서 플레이오프 로스터에도 합류하지 못했다. 즉, LA 레이커스와 샌안토니오 스퍼스 입장에선 둘 다 전력 외 선수 취급한 것. 이에 따라 이 둘은 해당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단 1초도 코트를 밟지 못했고 말 그대로 우승반지를 기념품처럼 받아온 셈이다. 물론 둘 다 정규시즌에도 팀에 코딱지만큼의 도움도 되지 못했으며, 가상의 대체선수보다 얼만큼 공헌도를 했느냐를 따지는 VORP 수치에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즉, 대체되는 게 나은 레벨의 선수인 셈. 제레미 린의 경우 둘보다 훨씬 뛰어난 선수인만큼 플레이오프 로스터에는 합류했으나, 24경기 중 고작 8경기 출전, 평균 3분 남짓 뛰며 1.1점 0.4리바운드 0.5어시스트 0.1스틸이라는 미미한 기록만을 남겼다. 심지어 파이널 무대에서는 말 그대로 딱 1경기, 총 1분만을 뛰며 말 그대로 '''아무 기록도 못 남겼다.''' 심지어 실책이나 파울도 없다. 슈퍼스타였던 야오밍 입장에서 이런 우승을 바랄 이유가 없다. 실제로 슈퍼스타였다가 말년에 저런 식으로 반지만 챙기는 수준으로 우승한 선수가 바로 미치 리치몬드인데, 이는 아직도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내리고 있으며 이때 우승을 미치 리치몬드의 업적으로 언급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4. 왜 이렇게 자주 부상을 당했나?
일단 농구선수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키가 너무 컸다. 과거 휴스턴 로키츠에서 하킴 올라주원과 트윈타워로 대활약했던 223cm의 랄프 샘슨이나 231cm의 초거인 게오르그 무레산, 마누트 볼이 그랬듯 220cm를 넘는 초거대 선수들이 NBA 같이 82게임 풀시즌이라는 초 빡센 스케줄에 공수전환이 빠르고 운동량이 장난이 아닌 리그에서 오래 살아남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18] 이들도 채 10년을 제대로 뛰지 못했다. 유일하게 12년이라는 긴 커리어를 보낸 228cm의 초장신 숀 브래들리는 매우 마른 체격으로 신체에 오는 부담을 최소화한데다가 평균 출장 시간이 30분이 넘은 시즌이 세 번 밖에 없을 정도로 관리를 받았다. 게다가 커리어 후반의 세 시즌은 경기당 15분 미만으로 뛰었다. 애초에 그는 수비 전문 선수라서 팀 내에서 맡는 역할이 제한적이었다. 그럼에도 커리어 내내 부상에 시달렸다. 그러나 야오밍은 브래들리처럼 마른 체격도 아니면서 키가 230cm에 육박했고, 팀의 기둥으로서 막중한 역할을 맡은데다가 루키 시즌과 5 경기 만에 아웃된 마지막 시즌을 제외하고는 줄곧 평균 30분 이상을 뛰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자주 부상을 당한 진짜 이유는 NBA의 하드한 일정에 여름에는 중국대표팀 일정까지 소화하다보니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NBA팬들과 중국팬 그리고 중국농구협회는 야오의 부상 책임을 누구한테 있느냐에 대해선 의견이 달랐다. NBA팬들은 중국농구협회가 야오밍의 몸상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무리하게 국가대표로 차출시켜서 오늘날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주장한다.[19] 실제로 야오밍은 잇단 국가대표 차출로 인해서 과부하가 걸린 상태였고, 결정적으로 자국에서 열린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한 것이 독이었다. 이때 야오는 부상에서 회복된지 얼마되지도 않았고 컨디션은 당연히 좋을 리 없었다. 아무리 자국에서 열리는 첫 번째 올림픽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참가했다고는 하지만, 결국 그것이 부상을 더 키우고 말았다.
반면 중국농구협회와 중국팬들은 야오밍의 부상이 휴스턴 구단의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야오밍의 백업요원만 영입했더라면 이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 이는 맞는 이야기이면서 틀린 얘기이기도 하다. 실제로 야오밍을 받쳐줄 백업요원은 팀내에서 디켐베 무톰보 정도였지만 그는 이미 불혹을 넘긴 노장이었다. 또 당시에는 NBA 리그 자체가 쓸 만한 센터가 많지 않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척 헤이스가 있었다곤 하지만 그는 센터로써는 부적합에 가까운 198cm였고, 그나마 데려온 센터들은 10분을 맡기기에도 힘든 선수들이었다. 1차적인 책임은 야오밍 하나에만 의존한 CBA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근시안적인 대표팀 운영으로 인해 정말 전성기를 달려야했던 야오밍은 그렇게 30세가 되기도 전에 은퇴하고 말았다.
사실 위의 조건이 전부 다 적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7피트6인치, 310파운드가 넘는 거구는 태생적으로 신체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약 그가 숀 브래들리급은 아니더라도 중국팀이건, 휴스턴이건 어느 정도 관리를 해줬더라면 그래도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가장 큰 책임은 국보급 스타를 별 쓸데없는 국제대회마다 차출해서 부려먹은 중국농구협회에 있겠지만, 그렇다고 휴스턴 로키츠가 책임이 완전히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별다른 백업이 없는 휴스턴에서 야오는 출장시간과 별개로 공수에서 엄청난 부담을 져야했다. 또한 05시즌까지 29~32분으로 출장시간 관리가 잘 되었으나 06시즌부터 야금야금 출장시간이 늘어나더니 08시즌엔 평균 37분까지 늘어났다. 사실 07시즌도 시즌 전체 수치만 보면 33.8분으로 관리가 어느 정도 된 것처럼 보이지만, 경기당 기록을 자세히 보면 초반 26경기동안 35.7분동안 뛰게 하다가 부상 당한 이후 출장시간이 줄어든 것이다. 당시 기록출처을 보면 40분 넘는 경기도 종종 보이고, 48분 뛴 경기까지 보이는 등, 야오가 거인 센터라는 걸 전혀 감안하지 않고 그냥 뛰게 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부상위험이 큰 선수를 일반적인 7푸터처럼 기용하면서 위 세 요소가 어우러져 야오의 선수생명을 깎아먹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5. 명예의 전당 헌액
그리고 미국 현지시간으로 2016년 9월 9일, 샤킬 오닐, 앨런 아이버슨과 함께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때 쓴 스피치로 위트있고, 유머러스한 성격을 보여줬는데, 초장부터 딸은 농구 대신 축구를 선택한 벌로 안 데려왔다고 하고[20] , 자신이 처음으로 나간이유를 모르겠다며 그 자리는 아이버슨에게 줘야하는데 그 이유가 자신은 연습이 더 필요하다는 농담을 시작[21] 으로, 자신의 전성기 때 가장 큰 라이벌중에 한 명인 샤킬 오닐에게는 "좋은 손 덕에 저놈보다 10000개 이상의 자유투를 안놓침 ㅋㅋㅋ"하며 재치있는 디스전도 장착했고, 자신이 오늘에 있게 해준 자신의 부인, 부모님, 중국농구계 관계자들, 자신의 비즈니스팀[22] 에게 감사를 표하며 마무리를 지었다.
6. 플레이스타일
6.1.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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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쉐이크'''를 멋들어지게 성공시키는 야오밍.[23]
커리어 내내 준수한 득점기록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막강한 공격력이 스탯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스타일이다.
일단 기술 면에서는 센터에게 필요한 모든 공격 기술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선수이다. 기술적으로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손끝 감각. 슈팅 터치가 상당히 부드러워 슛이 안정적일 뿐 아니라 한 손으로 올려놓는 훅슛도 대단히 정확하다. 이 때문에 전성기 시절에 그가 림 근처에서 볼을 잡을 경우 막을 방법이 거의 없었다. 일반적인 센터들은 예나 지금이나 1. 피지컬로 밀어붙이는 우격다짐식 덩크, 공격 리바운드 후 세컨드샷, 앨리웁 받아먹기 등에 특화된 선수들과, 2. 빅맨답지 않은 볼핸들링 능력이 있어 레이업/핑거롤이 주무기인 선수들로 양분되어 있지만, 야오밍은 덩크건 핑거롤이건, 좀 떨어진 거리에서 훅슛이건 전부 능했다.
야오밍은 기술적으로도 대단히 완성도가 높은 빅맨이었지만 이 기술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그의 무지막지한 피지컬. 착화신장 233cm의 말도 안되는 초장신에 윙스팬도 키에 비하면 좁긴 하지만 그래도 키와 비슷한 수준이라[24] 타점이 무지막지하게 높아서 기습적으로 타이밍을 잘 잡지 않으면 블럭이 거의 불가능하다. 실제로 샤킬 오닐은 216cm 장신에 팔도 긴데도 야오밍은 그의 블럭을 크게 신경쓰지 않고 공격했으며, 알론조 모닝이나 드와이트 하워드 같은 키 작은 센터들은 그에게 거의 털렸다.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그의 파워다. 사실 야오의 상체는 NBA 센터치고 튼실한 편이 아니었다. 커리어 내내 계속된 것이 오프시즌 벌크업→개막 후 좀 지나면 다시 팔이 가늘어지는 패턴이었는데, 야오가 아무리 노력파라도 NBA의 가혹한 스케줄은 체력이 좋은 편이 아닌 그에게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타고난 어마어마한 하체가 있었다. 한때 중국인 의사들이 "농구선수로서 대성하기 힘들 것"이라고 한 이유인 튼실한 엉덩이와 나무 줄기같은 굵은 종아리로 밀고 들어가는 야오를 정면으로 막아낼 수 있는 빅맨은 거의 없었다. 야오가 이 백다운으로 상대하지 못한 상대는 샤킬 오닐 뿐이었고[25] 그 오닐에게조차 어느 정도는 로우포스트에서 들이댈 수 있는 선수가 바로 야오밍이었다.
야오밍은 골밑에서 파괴력만 대단했던 것이 아니라 공격 범위도 넓었다. 앞서 언급된 골밑 마무리/훅슛 외에 10~15피트 거리에서 턴어라운드 페이더웨이, 그보다 먼 거리에서 중거리슛도 장착하고 있었다. 슈팅 능력에 있어 야오밍은 당대 센터들과 비교해서는 안될 수준이었다.
사실 농구 선수, 특히 빅맨들은 키가 크고, 그 큰 몸집에 비해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자질이기 때문에, '손끝 감각'에 있어서는 농구 잘 하는 일반인 이하인 선수들도 적지 않다. 4대 센터 중에서는 패트릭 유잉이 슛 터치가 부드러운 것으로 유명했지만, 자유투 성공률은 74.0%로 하킴 올라주원, 데이비드 로빈슨과 비교해서 근소하게 앞서는 정도였다. 야오밍과 같은 시대 중거리샷이 뛰어난 빅맨으로 이름난 카를로스 부저 또한 자유투율은 72.2%에 그쳤다. 그에 반해 야오밍의 통산 자유투 성공률은 무려 '''83.3%'''로 전문 슈터 못지 않은 수준이었다. 그러다 보니 팀 내 최장신이면서 한때 휴스턴 로키츠에서 테크니컬 파울 자유투를 전담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3점슛까지 쏘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당시는 센터들이 너도 나도 3점을 던지는 시대는 아니었기 때문에 커리어 통틀어 10개 던져서 2개 성공했을 뿐이다. 가장 많이 던진게 한 시즌에 2개. 전문가들은 대부분 그가 지금 뛰었으면 3점슛을 장착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26]
야오의 공격력은 2000년대 센터들 중 샤킬 오닐을 제외하면 탑을 달릴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실제로 그는 1옵션으로 중용된 08-09시즌에 33.8분만을 뛰며 평균 25점을 넣었다.
6.2. 수비
수비 면에서 야오는 딱히 특출나지 않았다. 지나치게 큰 덩치로 인해 수비에 매우 중요한 사이드스텝이 매우 느렸다. 루키 시즌에 스테판 마베리와 스위치되었을 때 제대로 엉덩방아를 찍으며 굴욕을 당한 적도 있다. 사이드스텝이 아니더라도, 어느 방향으로든 재빨리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그가 3점라인 부근까지 나왔다면 수비는 실패한 것으로 봐도 될 정도였다.
그래도 맨투맨 수비에선 괜찮은 모습을 보였는데, 바로 그의 사이즈 덕분. 키도 키지만 몸무게도 140kg을 상회하는 야오밍은 샤킬 오닐을 제외하면 NBA에서 가장 무거운 선수였고, 그 누구도 그를 상대로 쉽게 포스트업으로 밀지 못했다. 서장훈이 무릎팍 도사에서 야오밍의 위압감에 대해 "마치 자동차 와이퍼가 백보드를 닦는 것 같았다"고 표현한 바 있다. 그의 블럭 수치는 가장 높았을 때가 2개 정도로, 출장시간을 감안해도 특급 블러커는 아니었지만 일단 그 존재로서 돌파를 주저하게 만들거나 무리한 슛을 하게 만드는 효과는 확실했다.
다만 거구 때문에 느린 편이라, 발이 빠르고 기술이 좋은 빅맨은 막기 힘들어 했는데, 대표적으로 유타 재즈의 카를로스 부저에게 플레이오프에서 털린 적이 있다.
종합하자면 수비력 면에서 샤킬 오닐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할만하다. 혹은 디켐베 무톰보의 상당한 다운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오닐과 야오 둘 다 골밑에서 멀어지면 수비가 안되고 팀수비가 딱히 좋은 편은 아니지만 림프로텍터로선 최상급이고 맨투맨 수비가 뛰어났다. 다만 NBA 센터 평균 이하인 운동능력을 지닌 야오에 비해 (전성기 기준) 오닐은 운동능력이 대단히 뛰어났으므로 맨투맨 수비수로서 오닐이 훨씬 뛰어났고, 종합적인 수비력도 오닐이 위였다.
야오가 오닐보다 더 나은 것은 높이와 적극적인 의지. 수비하려는 의지가 오닐보다 훨씬 뛰어나서 굴욕을 당하더라도 끝까지 블럭을 시도하는 선수였다. 오닐은 디펜스 세컨팀에도 든 뛰어난 수비수였고 블럭 능력 자체는 더 뛰어났으나 굴욕당하는 걸 굉장히 싫어해서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당할 것 같으면 수비를 포기해 버리거나, 가드와 스위치될 것 같으면 그냥 골밑으로 뒷걸음을 쳐버리는 안 좋은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엄청난 신체능력에도 끝내 수비수로서 대성하지 못했다.
6.3. 약점
평균 20점을 넘긴 시즌에 세 번에 불과할 정도로, 야오밍은 위력에 비해 항상 득점 스탯이 비교적 낮은 편이었다. 스티브 프랜시스, 트레이시 맥그레디처럼 볼 소유가 많은 가드들과 뛴 영향도 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약점인 '''체력''' 때문이었다.
덩치가 거대한 야오밍은 움직일 때마다 체력소모가 엄청났다. 이 때문에 그는 커리어 내내 출장 시간을 관리받아야 했으며, 전경기를 출장한 1, 2년차 시즌, 80경기를 뛴 3년차까지도 출장시간은 29분, 32.8분, 30.6분에 그쳤다. 또한 그가 뛰는 도중에도 체력이 고갈되면 로우포스트로 밀고 들어가지 못하고 페이더웨이를 쏴야했는데, 당연하지만 이는 야투율 하락의 원인이 된다.
당연히 이러한 체력 문제는 시즌 후반으로 갈 수록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루키 시즌 첫 한 달 동안 64%, 첫 30경기 동안 57.1%에 달하는 성공률을 자랑하던 그가 결국 49.8%에 그친 것은 후반으로 갈수록 체력 고갈로 인한 경기력 난조로 슛의 기복이 심해진 것이 컸다.
야오밍의 가장 큰 문제는 지구력이었지만, 전반적으로 운동능력이 안 좋은 편이었다. 물론 226~230cm의 초대형 센터로 한정하자면 야오의 운동능력은 역대 최강이긴 했지만, NBA 센터들 전체를 놓고 보면 루키 시즌 기준으로도 평균에 못 미치고, 전성기 때도 NBA에서 가장 느리고 점프가 낮은 센터들 중 하나였다.
실제로 NBA에서 초장신 센터들이 크게 성공하지는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이유는 이러한 운동능력과 체력 문제가 크다. 수비자 3초룰, 여타 선수들의 미친듯한 스피드, 빠른 경기 페이스 등의 환경으로 인해 거인들이 갖는 메리트보다 디메리트가 더 크기 때문. 대표적인 예시가 세르비아 국가대표 센터인 보반 마르야노비치이다. 보반은 220cm를 넘기는 신장에 스티븐 아담스 등의 파워 센터들조차 감당하기 어렵다고 말할 정도의 힘,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슛터치에 BQ까지 겸비하여 농구에 통달한 기술자형 선수라는 평을 받았지만, 기동성의 한계로 가드 및 포워드를 막는데 심각한 약점을 보였고, 거기다가 NBA의 페이스를 따라가기엔 체력이 부족하기까지 하여 벤치에서 10분 정도를 출장하는 데 그친다.
사실 키가 워낙 크다보니 점프력이 낮아도 NBA 최고의 높이를 자랑했지만, 그러나 민첩성과 스피드는 확실히 문제였고, 이는 위에 언급된 수비력 저하에 한 몫을 했다. 그러다 보니, 중거리 슈팅력이 있고 민첩한 빅맨들에게 약했다. 대표적으로 플옵에서 만나 털린 카를로스 부저.
이와 같은 기동력 문제 때문에 야오밍의 커리어 후반기에 휴스턴 로키츠는 자기 팀이 자유투를 쏘는 상황에서 팀내 최장신인 야오를 리바운드 쟁탈에 참여시키지 않고 보통 가드들이 서는 코트 중앙 지역에 세워, 빨리 백코트를 하게 했다. 이렇게 되면 공격리바운드 확률이 낮아지지만, 그것보다 팀내 최장신을 수비에서 잃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긴 것.
6.4. 종합
큰 키에도 불구하고 그 신장대에서는 가장 뛰어난 기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게오르그 뮤레산이나 숀 브래들리와는 비교가 거부되는 선수. 슛 범위도 넓고, 포스트업 능력도 좋았으며, 상체는 빈약해도 하체 힘이 좋아 막상 밀고 들어가면 막을 선수가 거의 없었다. 특히 2000년대에는 힘과 기술을 겸비한 센터가 드물어서 더욱 그랬다. 패싱 능력도 뛰어났기 때문에 골밑에서는 다양한 공격 옵션을 구사할 수 있었다. 수비 능력은 많이 부각되는 편은 아니지만 탄탄한 하체를 바탕으로 버티는 힘이 있고, 블록 능력도 수준급었다.
NBA 경력 내내 심판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이 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격력은 NBA 최상위권 수준이라 드와이트 하워드와 함께 센터의 최고를 다투었다. 2000년대 들어 NBA 센터진의 높이가 전체적으로 낮아진 이후 7피트(213cm) 미만 센터들에겐 재앙이나 다름없던 존재였다.
당대 최고의 수비수 드와이트 하워드는 올해의 수비수상을 휩쓸던 시절에도 야오밍을 만나기만 하면 털렸다. 공격력이 강한 야오와 수비력이 강한 하워드의 기량은 백중세였지만 매치업에서는 야오가 하워드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 야오는 하워드와 9번의 맞대결에서 자신의 NBA 통산 평균 득점(19.0)보다 높은 평균 23.3점을 기록했지만, 하워드는 그 절반 수준인 평균 12.2점에 그쳤다. 그 기간 하워드는 루키 시즌을 제외하고 매 시즌 그래도 평균 15점 이상은 올렸음을 참고하면, 수비에 비해 공격이 약한 선수라는 점을 감안해도, 야오 앞에서 형편없이 허우적댔다고 볼 수밖에 없다. 사실 하워드는 포스트업도 못하고 미드레인지도 없는 관계로 닥돌이 안 먹히는, 자기보다 월등히 큰 선수와의 1대1 매치업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니 하워드에 비해 거의 20cm 가까이 크고 기술까지 뛰어난 야오를 막는 건 특히 힘든 일이었을 것이고, 뚫는 것는 더더욱 무리였을 수밖에 없었다.
알론조 모닝은 전성기 시절 7피트 센터들과 대등하게 매치업하고 말년에도 출전하는 짧은 시간만큼은 확실하게 활약하는 선수였음에도 야오밍에게 많이 고전했다. 벤 월러스는 2년차이던 야오에게 생애 최초 20득점 20리바운드 이상을 허용하기도 했다. 애초에 벤 월러스는 프로필만 6-9이지 실제 신장은 6-7(201cm) 정도로 야오밍이랑 거의 30cm 차이가 나는데 이정도면 수비력이 무의미할 정도의 신장차이다.
국제무대에서는 적수가 없었다. 중국의 한 쿼터 득점을 혼자 한 적도 있었다. 물론 다른 중국 선수들과의 수준차가 있었지만, 아딜잔 은퇴 후 한국 가드들에게도 탈탈 털리던 중국 국대의 식물 가드진을 밖에 두고도 그렇게 활약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종합적으로 보면 그는 전형적인 NBA식 정통센터였다. 사실 슈팅터치가 더 부드럽다는 것과 키가 매우 크다는 걸 빼면 플레이스타일상 그는 패트릭 유잉에 가장 가까운 선수다. NBA 역사상 최강의 센터들에 비해 어마어마한 힘이나 빠른 발이나 현란한 스텝을 이용해서 림 바로 아래까지 도달하는 능력은 다소 떨어져서 중거리 점퍼를 많이 던져야 했지만, 그것이 정확하고 타점이 높아 매우 강력한 무기였다는 점, 그렇다고 골밑에서 파괴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평범한 센터들을 상대로는 어렵지 않게 뱅크샷, 핑거롤, 덩크 등으로 득점을 올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다 못해 기동력이 뛰어나지 못해서 리바운드가 덩치에 비해 좀 약한 것까지 닮았다. 물론 유잉은 야오밍보다 훨씬 뛰어난 수비수였고 기동력에서도 훨씬 뛰어나긴 했다. 다만 야오의 알면서도 막을 수 없는 1대1 공격력만큼은 유잉보다 더 위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야오가 샤킬 오닐을 로우포스트에서 상대하는 방식은 유잉이 한 것과 비슷하다. 유잉은 힘에서 오닐에게 밀리는지라 굳이 힘을 빼가며 백다운하지 않고 로우포스트에서 자리를 잡은 뒤 페이더웨이를 쏘거나 패스를 받아 점퍼를 던지거나 페이스업에서 돌파, 혹은 훅슛으로 마무리하는 식의 공격을 많이 보였는데, 야오는 여기에 키가 훨씬 크다는 장점 덕분에 공격하기가 더 수월했다. 반면 유잉은 기동력이 더 좋아 페이스업 상태에서 돌파능력이 더 좋았다. 물론 전체적으로 보면 야오는 체력이 약해 대등하게 매치업하다가도 체력이 빠져서 오래 못 뛰었지만, 40분 내내 투닥거릴 수 있는 유잉의 공헌도가 더 높긴 했다.
어찌보면 샤킬 오닐이 야오를 (처음엔 안 좋아했지만)[27] 그렇게도 좋아하고 존중한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오닐 이후 정통 센터들이 사실상 맥이 끊긴 상태에서[28] 야오밍은 그의 뒤를 잇는 마지막 슈퍼스타 정통 센터였기 때문이다.
7. 이것저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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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오밍의 키 때문에 벌어진 착시효과인데, 가운데 부인은 키가 190cm다.[29] 배경에 있는 사람들과 비교해 보자. 왼쪽 딸은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지만 3세 여아다. 키가 110cm...이 딸은 2020년 기준으로 10세이며 이미 키 170cm를 돌파했다.
- 일각에서는 야오밍이 너무 느렸기 때문에 최근 달리는 농구가 트렌드가 된 이후에는 위력이 없을 것이라는 예측도 있지만 이는 한쪽만 바라본 시각이다. 야오는 현역시절에도 NBA에서 가장 느린 선수 중 하나였고 이는 빠른 팀들을 상대로 할 때 큰 약점으로 작용했다.(야오가 전성기 때에도 피닉스 선즈나 뉴저지 네츠 등 속공을 중시하는 팀이 없었던 게 아니다.) 그럼에도 그가 위력적이었던 것은 그 약점을 커버할 정도로 장점이 극명했기 때문이다. 229cm, 140kg의 파워와 기술을 겸비한 야오는 1대1로 막는게 거의 불가능한 선수였고, 실제로 206cm, 113kg의 벤 월러스, 211cm, 120kg의 드와이트 하워드[30] 는 둘 다 올해의 수비수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는 뛰어난 수비수들이었음에도 야오를 1대1로 못 막아 털리곤 했다. 또한 수비력이 1급은 아니었고 발도 느렸지만 워낙 큰 덩치 덕분에 rim protector로서 역할을 준수하게 해냈다. 달리는 팀이 더욱 많아진 2010년대에 그 약점이 더욱 부각되긴 하겠지만 센터진의 높이가 전체적으로 더 낮아지고 수준급 1대1 빅맨 수비수가 줄어든 지금 그를 막긴 더욱 힘들 것이다. 또한 당시 휴스턴은 야오의 느린 코트왕복 속도를 보완하기 위해 속공시 야오를 제외한 네 명이 공격을 빠르게 전개하던가, 같은 팀이 자유투 당시 야오를 공격 리바운드에 참여시키지 않고[31] 상대편 코트 근처에서 대기시키는 등 다양한 전술을 활용했다. 즉, 앨런 아이버슨과 마찬가지로 활용하기가 까다로운 선수긴 하지만 잘만 활용한다면 굉장한 위력을 낼 수 있는 선수.
- NBA 시절 숨만 쉬어도 파울콜을 줘버린 심판들 덕에 인종차별을 받는다는 소리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경기도중 해설진이[32] "파울이잖아!"라고 소리지른 적도 있다. 편파판정이 극에 달한 경기 장면인데, 이 때 야오밍의 매치업은 벤 월러스, 그리고 헐리우드 액션으로 유명한 앤더슨 바레장이었다. 두 선수가 파울유도 액션을 하면 어김없이 파울을 선언하는가 하면 리바운드를 잡고 세컨샷을 시도하는 도중 바레장이 대놓고 야오의 손을 두 차례나 갈겼는데도 파울을 안 줬다. 위에 언급된 "파울이잖아"가 이 플레이에서 나온 멘트. 이후 이 해설자는 "장난해요? 심판이 도대체 뭘 보고 있는거죠?? 15미터 밖에서도 잘 보이네요."라고 했으며 그의 파트너는 "그냥 두들겨맞고 있네요.(Just hammered)"라고 했다. 이후 리플레이에서 한번 더 파울성 플레이가 있었던게 드러났으나, 바로 앞에서 보던 심판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참고로 야오밍은 NBA 선수치고 심판에게 항의를 안하는 축에 속하는데, 이 경기에서는 항의가 잦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자리 잡으면서 양손을 머리 위로 쭉 들고 전혀 밀지 않았는데도 공격자 파울을 불 정도로 말도 안되는 콜이 계속 나와서 누적된 파울로 인해 제대로 뛰지도 못했다.
- 위에 기술된대로 찰스 바클리에게 온갖 까임을 받았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고 오히려 찰스의 생일날 축하메세지를 보내주기도 하는 대인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고,[33] 샤킬 오닐이 자신을 도발하는 발언을 할 때도 "샤크의 팔꿈치는 물렁해서 아플 것 같지 않다."라고 대답하는 등, 무뚝뚝한 얼굴과는 달리 상당히 위트가 있다.
- NBA에 진출한 중국선수 중 유일하게 다른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왕즈즈, 이젠롄, 순 유에 등 대부분의 중국선수들은 필요한 의사소통은 통역을 통해서만 하고, 영어도 적극적으로 배우지 않으며, 이동 시에 헤드폰끼고 자기 할 것만 하는 걸로 악명이 높다. 반면 야오는 영어를 거의 못 하는 상황에서 미국에 온 것은 마찬가지지만, 루키 시즌부터 떠듬거리는 영어로 주변 사람들과 농담도 하고 얘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4년차부터는 아예 전담 통역사를 쓰지 않았으며 인터뷰나 방송출연도 혼자서 영어로 했다. 영어 실력을 평해보자면 목소리가 낮고 발음이 좋진 않아(th를 완전히 S로 발음한다. 생큐, 아이 싱크(i think) 등) 알아듣기는 조금 힘들지만, 꽤나 유창한 편이다. 이 때 야오의 전담통역사였던 콜린 파인은 당시 초짜 통역사였고 그를 고용한 로키츠 구단은 경험이 전무한 파인을 못 미더워했었는데,[34] 실제로 파인은 어린 시절부터 중국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야오보다 훨씬 더 불안해했다. 야오의 루키시즌을 다룬 다큐먼터리 "The Year of Yao"에 보면 한 번은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파인이 깜빡 잊고 휴대전화를 안 꺼놔 전화벨이 울렸는데, 죄송하다며 버벅이는 파인을 보고 야오가 씨익 웃으며 어설픈 영어로 "All rookies, huh(우리 둘 다 초짜네요)?"라고 농을 던지자 파인이 두 손을 들며 "초짜입니다!(Rookie!)"라고 받기도 했다. 당시 기자회견장은 웃음바다가 됐지만 단 한 사람 웃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로키츠 구단 관계자. 그는 여러 번 야오에게 통역을 바꿔줄 수 있다고 건의했으나, 이미 파인과 친해진 야오는 이를 거절했다. 한 번은 휴스턴의 기자가 야오에게 "NBA 생활하면서 가장 감사한 게 뭐냐?"고 묻자 야오는 웃으며 말없이 파인을 가리킨 적이 있다. 이를 계기로 야오와 친해졌으며 지금도 종종 연락한다고 한다. 지금도 야오가 가끔 통역을 부탁할 때도 있다고...
- 휴스턴과의 재계약 협상 때 휴스턴이 처음 제시했던 계약을 한번에 수락하기도 하는 쿨한 모습도 보여주었고, 또 자신의 원 소속팀이었던 샹하이 샤크스가 경영난으로 허덕일 때 구단을 사들여 구단주가 되기도 했다. 은근히 자신이 속한 팀에 대한 의리도 남다르다.
- 은퇴 후에는 상하이의 구단주로 지내다가 최근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와인사업에 뛰어들었다. 또한 상어요리에 반대한다는 발언을 해서 몇몇 중국의 호텔에서 상어요리가 없어지게 하는 등의 공도 있다. 영화에도 나오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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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국에서 개최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회식에서 중국 선수단의 기수를 맡았다. 그의 국내외적 명성을 반영한 모습.[35]
- 2012 런던 올림픽 중 신화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고의패배로 탈락한 중국 여자 배드민턴 선수들을 '희생양'으로 표현하며 심정적으로 옹호하였지만, 이들을 실격처리한 국제배드민턴연맹의 조치에 대해서는 지지하는 입장을 표했다.
- 야오밍은 8살 때 왼쪽 귀의 청력을 상실하는 사고를 겪었다. 야오가 8, 9살 때 병을 앓았고 약을 먹었는데, 알고 보니 야오는 이 약에 알레르기가 있었고 이 부작용으로 왼쪽 청력의 60%을 잃은 것. 이 사실은 야오의 2년차 시즌이 끝나고 나온 자서전 "Yao: A Life in Two Worlds"에 나와 있다. NBA 관계자들 뿐 아니라 팬들 사이에서도 한참 전부터 유명한 얘기였고 야오가 딱히 숨긴 적도 없다. 아래 기사는 야오의 2년차 시즌 초반에 나온 기사인데, 야오의 루키 시즌에 치르던 경기 도중 한 심판이 야오가 자기 얘기에 반응이 전혀 없자 휴스턴 벤치로 가서 "저 친구 왜 저래요?"라고 묻자, 코치진이 "왼쪽 귀가 안 들려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야오 본인은 "좀 영향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 문제가 되진 않아요"라고 답했다. 재밌는 것은 그의 동료이자 당시 로키츠의 스타 포인트 가드였던 스티브 프랜시스 역시 02시즌 당시 겪었던 극심한 편두통으로 인해 왼쪽 청력이 좀 안 좋았다는 것. 이로 인해 로키츠는 수신호를 자주 사용했다고 한다.
- 성격이 상당히 점잖고 유쾌한지라 미국 내에서도 팬들이 많다. 휴스턴에 처음으로 도착해서 한 첫 마디가 "저를 보러 많은 분들이 와주셨는데 다 싸인을 못 해드려서 죄송합니다."니 팬들이 호감이 갈 수 밖에. 높은 인기와 유니크한 스타일 덕에 야오밍의 현역시절 미국에서 키 큰 동양인은 백이면 백 야오밍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최희섭의 경우도 그를 야오밍으로 착각한 미국 어린이에게 싸인을 해 주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
- 트래쉬토킹이나 비매너 플레이도 안하고, 자주 부상을 당하는 몸에도 엄청난 노력파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냥 순둥이만은 아니라서 커리어 중반기로 가면서 자신감을 쌓기 시작하자 매치업 상대에게 득점을 먹이고 "넌 씨x 날 막을 수 없어!(You can't fuxxing stop me!)"라고 소리지른 적도 있다.[36] 또한 09년 LA 레이커스와의 서부 준결승 1차전 당시 심한 부상을 입고 코치진이 뛰지 말라고 만류하는데도 코치진과 싸우고 억지로 나와서 경기를 승리로 이끈 적도 있다. 다만 안타깝게 야오는 이때 부상 이후 결국 예전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고 은퇴하고 만다.
- 모범적인 사생활, 불평을 안하는 성격, 노력파, 국가대표 소집을 거절하지 않고 매번 참석한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박지성을 여러모로 떠올리게 한다. 다만 재미없는 인터뷰로 알려진 박지성과 달리 야오는 의외로 빵 터지는 유머감각을 소유하고 있다. 그의 유머감각을 알 수 있는 좋은 예로 기자가 그에게 "좋아하는 미국 노래가 있나요?"라고 하자 "미국 국가(anthem)죠"라고 대답하면서 "1년에 적어도 82번(정규 시즌 게임이 82경기이고 매 경기 시작마다 국가가 흐른다.)은 듣거든요"라고 하면서 기자들이 다 빵 터졌다.[37]
- 2017년 2월 23일, 만장일치로 중국농구협회 주석(회장)에 선임되었다. 이때 나이는 불과 37세. 야오밍 중국농구협회장 만장일치 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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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어 그릴스와 함께 Man vs. Wild에 출연하기도 했다.
- 시진핑 정부의 무리한 축구진흥책으로 중국 학교들이 무리한 학원축구를 시도하며 농구하던 학생들에까지 축구를 강요한 것에 대하여 비난하는 인터뷰도 했다. '왜 억지로 농구하고픈 아이들에게 축구를 시키느냐?'라는 비난이니 시진핑 정권에게도 뭐 정치적으로 얽매일 아무 것도 없고 저렇게 억지로 축구시켜봐야 유망주 죽이기 밖에 되지 않기에 중국에서도 야오밍의 비난이 맞다고 동조하며 이런 학교들을 비난하는 여론이 많다.
- 코로나 19 사태로 2019-20시즌에 리그가 두 달 간 중단되었다가 다시 재개되었고, 재정적 압박을 받은 중국 농구 협회 임원들은 임금 삭감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회장 야오밍은 3년간 무보수로 일해온 사실이 밝혀졌다.
- 2005년 경에 야오밍의 부모가 휴스턴에 식당을 오픈했는데, 이 곳의 VIP룸은 야오 식구처럼 키 큰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제작되었다고 한다. 통로의 높이는 무려 9피트(270cm)에 달하고 테이블과 의자 모두 덩치 큰 사람들이 편히 앉도록 특수제작되었다고 한다. 야오는 여기서 당시 휴스턴의 백업센터 디켐베 무톰보(218cm)와 레전드 센터이자 코치이던 패트릭 유잉(213cm)와[38] 함께 식사를 하면서 대담을 나눈 것이 기사화된 적이 있다.https://vault.si.com/vault/2005/03/14/dinner-at-yaos
8. 말말말
'''부상 없이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면 그가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센터 다섯 명에 드는 위대한 선수로 기억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39]
ㅡ 샤킬 오닐. 야오밍의 은퇴식 헌사.
9. 야거장?
한국내에서는 소수 NBA 매니아들이 붙인 별명이나, 해외에선 의외로 많이 알려진 야오밍의 코믹한 사진 모음. 그 어떤 미남미녀라도 순간 캡처하면 얼굴 개그가 나오긴 하나 야오밍은 유독 이런 코믹한 사진이 많이 알려져 있다.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유명한 사진 몇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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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S 코비 브라이언트: 한눈에 봐도 미스매치.[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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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굴표정은 4chan 필수요소(meme)인 Bitch Please의 원본으로 더 유명하다.[42]
10. NBA Career Statis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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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관련 문서
[1] 은퇴한 이후로는 체중관리를 잘 안해서 200kg 이상까지 쪘다고 한다.[2] Chairman Mao에서 따온 별명. 중국 농구 협회 (CBA) 주석이기 때문에 "야오주석"이 된 것이다.[3] 다른 아시아계 NBA 선수였던 하승진, 타부세 유타는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하승진은 불과 두 시즌, 그것도 가비지타임 위주로 뛰며 1~2점씩 넣다가 방출되었고 타부세 유타는 이보다 못해 한달 반만에 쫓겨났다. 제레미 린은 동양계(미국국적)이고 이 둘보다는 훨씬 큰 족적을 남기고 우승반지도 하나 챙기긴 했지만, 야오밍에 비해 활약이 높다고 할 수는 없다. 야오밍에 앞서 NBA에 진출했던 왕즈즈도 2001-2005년까지 4시즌간 활약하기는 했지만, 경기당 10분 이내의 부진한 활약을 보였다.[4] 예를 들어 브루스 보웬은 프랑스 리그 최고수준의 득점원이었지만 NBA에선 공격잉여가 됐고 (3점슛은 궁여지책으로 익힌 것으로 와이드오픈 상태에서만 쐈다), 유럽보다 더 수준이 낮은 한국리그에서 평균 35점을 넣은 피트 마이클의 득점력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그가 수비위주 롤플레이어로 변신한 유럽시절에 NBA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렉 스팀스마의 경우 본인보다 뛰어났던 다른 외국인 선수들을 제치고 블락 실력 하나만으로 NBA에 진출해 잠깐 뛰었다.[5] 막았다기보다는 리그의 탑스타이자 자신의 팀의 대스타를 그냥 보내주기는 뭐했던지 이적료 비슷한 걸 원했다.[6] 이 때 한 스카우터는 "그는 7피트 6인치고 페이더웨이를 쏠 수 있다. 그렇지만 페이더웨이를 쏠 수 있는 6피트 9인치 선수가 넘쳐나는데 왜 그가 필요하단 말인가?"란 말을 남겼다. 실제로 야오는 데뷔 당시 소프트하다란 평을 받았다. 그가 레이업을 하려다가 마찬가지로 신인이었던 네네 힐라리오에게 블럭당하자 한 해설자가 "여긴 국제무대가 아닙니다. 저건 덩크해야죠"라고 말을 하기도. 야오가 자서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인유어페이스를 하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상대방을 도발하는 행위를 하면 상대방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다소 얌전히 플레이하는데 익숙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NBA에서 적응하기 위해 이런 거친 플레이에 익숙해지고자 노력했다. 결국 야오는 루키 시즌 도중 블럭슛의 달인 테오 래틀레프의 면상에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먹이고 괴성을 지르다가 "도발"로 생애 첫 테크니컬 파울을 받았는데, 이를 두고 그에게 "터프해져라"고 신신당부하던 휴스턴 로키츠 선수단은 잔치 분위기가 돼서 즐거워했다고 한다.[7] 사실 NBA 수준에서 1대1로 먹힐만한 기술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던 '''그 하승진'''도 받아먹기로 13점을 기록한 적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드래프트 1순위 지명선수가 19점도 못 넣는다고 한 건 야오밍이 '''완전히 망할 것'''으로 봤던 얘기다. 실제로 이 방송이 될 당시 야오밍은 데뷔 후 네 경기에서 0점-2점-8점-0점을 기록 중이었으며, 후술될 20점 경기 전까지 평균 4.3점을 기록하고 있었다. 훗날 데뷔한 다르코 밀리시치의 경우 2번으로 뽑혔음에도 데뷔 후 3년간 평균 5점을 못 넘긴 걸 생각하면 당시 NBA에서 하승진급으로 헤메고 있던 야오를 두고 이렇게 생각하는게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야오밍은 바클리의 호언장담 이후 열흘 뒤에 20점을 기록하며 이때까지의 부진이 오직 적응 문제였음을 증명했고, 두 경기 뒤에는 야투 12개 중 10개를 적중시키며 무려 30점을 기록하며 바클리를 민망하게 했다. 30점 경기 이후 바클리는 방송에서 "그 친구가 잘할 거란 걸 알고 있었어. 근데 이렇게까지 빨리 잘하게 될 줄은 몰랐던 거지"라고 태세전환을 시도했다(...).[8] 미국에서 kiss my ass(내 엉덩이에 키스해라)는 엿먹어에 해당하는 fuck off의 순화(?) 버젼이며 굴욕의 상징이다. WWE의 빈스 맥마흔 부자나 방송에서 시전할만한 것. 굳이 다른 남자의 엉덩이에 키스를 하는 괴상한 벌칙을 택한 이유가 여기 있는 것. 또한 케니의 당나귀 대타 역시 엉덩이를 뜻하는 속어가 당나귀(ass)의 속어도 된다는 걸 이용한 언어유희. 재밌는것은 훗날 오픈코트에 출연한 케니가 "당나귀가 ass니까 그냥 당나귀한테 키스하면 되는거지, 당나귀 엉덩이에 키스할 필요는 없었어. But you kissed an ass(당나귀) on the ass(엉덩이)ㅋㅋㅋㅋㅋ"하면서 비웃었다.[9] 사실 기록에서 드러나 듯이 경기 전반적으로는 샤크가 야오를 압도한 경기가 맞다. 야오는 첫 야투 세 개를 모두 넣으며 쾌조로 출발했지만 이후론 2/14(14%)에 그쳤다. 그나마 1대1로 넣은 득점은 초반에 샤크 위로 날린 훅슛 두 개 정도고 나머지는 거의 위치선정을 잘해서 한 득점들. 전체 경기를 봐도 5/14로 야투가 35.7%에 불과하다. 두 선수 간의 매치업 상황에 한정해도 대등 또는 샤크의 약 우위로 봐야 할 경기다. 하지만 문제는 두 선수에 대한 기대치의 크기가 전혀 달랐다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샤크는 명실상부 NBA를 지배하는 센터였다. 반면에 야오밍은 그저 기대주 정도였다. 그런 야오가 1대1에서 크게 밀리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며 천하의 샤킬 오닐 상대로 블록을 세 개나 찍고 경기 승리까지 가져가니 '전반적으로 잘한' 샤크보다 하일라이트 필름을 제대로 찍은 야오의 인상이 더 강하게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10] 각 컨퍼런스당 한명만 뽑으므로 엘리트 선수가 아니면 노리기 힘든 기록이다. 이때문에 이 상을 받는 선수는 이 시점에서 MVP후보에 거론되는 게 대부분이며 실제로 야오도 (약한 후보였지만) 이때 MVP 얘기가 돌았었다.(유일한 예외는 14년이었는데 이때 동부1위로 돌풍을 일으키던 애틀란타 호크스엔 스타가 없었으나 팀워크로 똘똘 뭉친 케이스였는데, 이례적으로 주전 5명을 공동으로 동부 이 달의 선수로 뽑았다.) 야오밍의 선정은 휴스턴 로키츠 선수로서는 1995년 하킴 올라주원 이후 11년만에 처음이었으며, 동료인 티맥도 휴스턴에서 한번도 선정되지 못했다. 야오는 08시즌 초반에 한번 더 선정.[11] 선수로서 넘어선 시점은 06시즌 후반이라고 할만하지만 이때까지 그는 샤크와 매치업에서 그를 압도하진 못했다. 워낙 피지컬에서 밀리는지라...[12] 아마레 스타더마이어는 20.4점 9.6리바운드에 그쳤으나 '''전경기 출장''' 및 소속팀이 서부 2위란게 컸다.[13] 뼈에 가해지는 지속적인 부담으로 인해 생기는 골절. 쉽게 말해 몸을 지나치게 굴려서 생긴 부상이다. 당시 고작 28세 젊은이였던 야오가 이런 부상을 당한 것은 후술되는대로 워낙 거대한 덩치를 타고난 것 반, 그리고 그 거구를 중국대표팀과 NBA에서 지나치게 굴린 것 둘 다 작용했을 것.[14] 여담이지만 이때 LA 레이커스 관중들은 부상을 받은 야오를 위해 일제히 기립박수를 쳐주고, 그가 나중에 돌아올때도 박수와 환호로 화답하는 좋은 매너를 보여주었다.[15] 중계 카메라가 따라가서 영상은 찍혔지만 소리는 잡히지 않았다.[16] 야오를 민 라마 오돔의 파울이 선언되어 무효처리(팀리바운드)됐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야오의 수비리바운드이자 11번째 리바운드로 기록됐을 것이다.[17] 이번에 재발한 부상은 왼쪽 발목이었고 2009플옵 당시 시즌아웃됐을 당시는 왼쪽 발 골절이었다. 중요한 건 '''둘다 재발에 둘다 스트레스 골절'''이었다는 것. 그냥 골절과 달리 스트레스 골절은 특정 부위에 누적된 대미지 때문에 뼈가 골절되는 것으로, 특정 부위에 스트레스 골절이 계속 재발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 그 부위의 내구도가 바닥이라는 걸 의미한다. 즉, 수술을 하거나 쉬어봤자 임시방편일 뿐 더 이상 활발하게 쓸 수 없다는 소리. 그런데 그 부위가 발과 발목이라면, 계속 뛰고 점프해야 하는 농구선수는 사실상 절대 불가능하다.[18] 물론 219cm의 신장으로 마이클 조던 다음 자리를 다투는 카림 압둘 자바 같은 예외도 있긴 하다. 자바가 그냥 초인인 걸로 생각하자. 다만 빅맨들 사이에서 10cm 차이는 굉장히 큰 차이이며, 카림도 전체적으로 빅맨들의 평균 체중이 가벼운 시대에 뛰었기에 매우 가벼운 체중을 유지했다. 실제 그의 전성기 몸무게는 225파운드로 이는 마르기로 유명한 데다 그보다 작은 케빈 가넷의 초창기 몸무게와 비슷했다. 반면 야오는 빅맨들의 대형화가 진행된 시절이라 최소 300파운드, 전성기 때는 310파운드를 상회하는 거구였다. 물론 카림이 키에 비해 사기적인 내구도였던 건 맞다.[19] 중국에서 열린 2003년 ABC챔피언십 대회 결승전을 보면 이 문제가 드러난다. 당시 중국은 후웨이동이 대표팀을 은퇴하면서 류웨이 등 젊은 피가 외곽을 담당해야 했는데, 이들은 기량이 그리 뛰어나지 못했다. 실제로 당시 골밑 높이에서 압도당하던 대한민국이 중국을 괴롭힐 수 있던 이유가 외곽에서 우위로, 이 경기에서도 풀코트 프레스와 3점으로 한국이 4쿼터 막판에 1점차까지 쫓아가는 동안 중국 가드들은 실책을 연발했다. 결국 야오밍이 하프코트까지 나와서 볼운반을 도와야 할 정도였다. 이 경기에서 야오밍은 평상시처럼 압도적이었다. 유일하게 키가 비슷한 하승진은 아직 애송이 고등학생으로 얼마 뛰지도 못했고, 메인 매치업인 김주성은 무려 23cm나 작았다. (02년에 서장훈이 약간의 홈콜을 등에 업고 육탄전에 가까운 수비로 막았으나 이번 대회는 중국에서 열렸으니 이것도 불가능. 게다가 김주성은 서장훈만큼의 파워가 없었다) 그 결과 골밑을 그야말로 박살내며 전반에 크게 앞서나갔으나 외곽에서 발리며 추격을 허용한 것. 기가 막힌 게 이 때문에 당시 야오밍은 '''풀타임 출장을 했다''' 방금 세상에서 가장 빡센 리그에서 82경기 전부 출장하며 루키시즌을 보내고 온 선수를 이렇게 굴린 것이다. 야오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과도한 출장시간은 그의 커리어 내내 계속되었다.[20] 이건 페이크고, 사실은 학교 첫주라서 결석을 못했기때문...[21] 아이버슨의 여러 의미로 유명한 "practice" 기자회견에 대한 가벼운 농담.[22] 이분들은 야오밍이 NBA 신인일때부터 같이 했는데 이분들한테 한말이..."우리 처음 만난 날보다 다 늙었고 다 살쪘네 ㅋㅋㅋ"[23] 참고로 이 기술의 창시자이자 구단 선배인 하킴 올라주원이 직접 맨투맨으로 야오밍을 단련시킨 바 있다. [24] 즉, 7피트에 팔 긴 디안드레 조던보다 2cm 짧다. 키에 비하면 안습으로 짧은 거지만 절대적으로 보면 팔도 길고 어깨도 넓은 것.[25] 루키 시즌에만 맞붙은 아비다스 사보니스도 파워 면에서 야오를 능가했지만, 이때 야오는 아직 매우 말랐었고 미숙했다. 야오는 전성기 기준 310파운드, 루키 시즌엔 290파운드였는데 이 20파운드(9kg)은 거의 근육으로 키운 거라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실제로 2년차인 03-04 시즌부터 야오가 플레이할때 팔근육이 제법 그럴듯하게 잡히는 걸 볼 수 있다.[26] 야오처럼 중거리 위주의 슛터치가 매우 좋은 빅맨이 팀의 필요에 따라 3점 던지는 빅맨으로 변신하는 경우는 많다. 대표적으로 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의 파우 가솔.[27] 사실 안 좋아했다기보단 원래는 관심이 없었는데, 기자들이 하도 야오 얘기를 해대니까 짜증나서 디스한 것에 가깝다. 실제로 둘이 처음 만났을때 코트에서 평범하게 인사하고, 두 사람의 부모님들도 서로 포옹을 해줬다. (샤크의 경우 양아버지 필 해리스만 와서 야오와 포옹을 나눴다) NBA를 지배하고 있는 빅맨 입장에서는 아직 아무것도 보여준 적이 없는 루키에 대해 다들 얘기하는게 짜증날 수밖에... 재밌는 건 이처럼 정상급 빅맨 vs 떠오르는 신예가 주목받는 구도는 오닐이 신예 시절에 데이비드 로빈슨과 보여준 적이 있는데, 오닐의 2년차 시즌 당시 MVP레이스를 펼치던 로빈슨에게 자꾸 오닐 얘기만 하자 짜증난 로빈슨이 "대체 그 친구가 누군데요? 내가 왜 그 친구를 그리 신경써야 합니까?"라고 짜증섞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야오와 달리 한 성깔하던 오닐은 로빈슨을 박살내버리겠다고 이빨을 털었고, 이후 10년간 지속된 앙숙관계가 시작되었다.[28] 이후 정통 센터라고 주장할 수도 있는 선수는 앤드류 바이넘 정도인데 바이넘은 위력도 커리어도 떨어지고, 무엇보다 멘탈쓰레기다. 그런데도 오닐은 바이넘의 LA 레이커스 시절에, 당시 전성기던 드와이트 하워드보다 바이넘을 더 높게 평가하기까지 했다.[29] 이름은 예리. 역시 중국 국대출신으로 농구선수였다. 야오밍은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첫 눈에 반해서 끈질기게 구애를 했는데 이 둘이 정식으로 사귀게 된 때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끝난 후로 야오밍이 폐막식 때 다른 나라 선수들에게서 얻은 뱃지를 모아서 예리에게 선물로 준 걸 계기로 예리도 야오에게 반했고 2007년에 부부의 연을 맺었다.[30] 하워드와 월러스 둘 다 실제 신장은 거의 5cm 정도 작다.[31] 통상적으로 자유투 시 양팀에선 리바운드를 잡을 확률이 가장 높은 빅맨들을 골밑에 대기시킨다. 하지만 수비팀을 골대 가장 가까이 배치시키는 룰이 있어 공격팀은 어차피 자유투 리바운드를 잡기가 불가능에 가깝다.[32] 심지어 휴스턴 지역방송도 아니었다.[33] 사실 바클리의 경우 현역시절이나 은퇴 이후에나 생각나는데로 막 말을 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렇지 야오밍을 그렇게 깐 건 아니었다. 위의 야오밍 폄훼 발언도 야오가 루키시즌 초반에, 별로 뛰어난 센터가 아닌 션 브래들리를 상대로 형편없는 모습을 보이자 까면서 한 것. 오히려 야오가 적응을 하고 좋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자 높게 평가했는데, 이는 픽앤롤, 픽앤팝에 특화된 2000년대 대부분 센터들과 달리 야오밍은 포스트업을 포함해 정통 센터플레이를 할줄 아는 몇 안되는 선수기 때문. 바클리와 마찬가지로 현역시절 막강 포스트업 플레이어였던 샤킬 오닐도 정통센터를 높게 평가하는데, 오닐의 경우 바클리보다 더 막무가내로 말하는 성격이라 포스트업이 뛰어난 앤드류 바이넘을 드와이트 하워드보다 더 뛰어난 센터라도 했다가 다른 패널들에게 까이기도 했다.[34] 파인은 당시 법대를 갓 졸업한 20대 후반의 청년이었는데, 유창한 중국어 실력 덕분에 통역사 자리를 얻었다.[35] 안 그래도 큰 키인데 맨 앞에 있으니 원근감 때문에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들이 죄다 미니어쳐로 보일정도(...).[36] 그러나 이것은 휴스턴 로키츠 팀원 전원이 원한거였다(...).[37] 위에 언급된 자서전에 보면 본인이 개그욕심이 상당하다고 한다. 사실 미국에 처음 갈 당시 단어 몇 개를 빼면 영어를 거의 못 했음에도 엄청난 속도로 영어를 배운 데에는 이렇게 말이 많은 성격 덕이 컸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어 못하는 상태에서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투 머치 토커 본능으로 필사적으로 영어를 배운 박찬호의 경우처럼.[38] 여담으로 여기서 무톰보가 유잉에게 "사실 6피트9인치"라고 놀린 것 때문에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는데, 유잉은 드래프트 전 신체검사 결과가 공표되기 한참 전의 세대라 정확한 신장이 불명이지만, NBA에서 6피트10인치로 표기되는 알론조 모닝이나 6피트9인치인 칼 말론같은 선수들보다는 확연히 크다. 만약 이게 진짜라면 유잉이 맨발 신장이 6피트 9인치후반대라든지(이러면 NBA식으로 농구화를 신은 신장이 7피트에 가깝다), 아니면 여기선 유잉이 최단신이므로 키가 작은(...) 유잉을 무톰보가 놀린 것일 수도 있다.[39] 샤킬 오닐은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매우 프라이드가 강한 인물이다.[40] 코비 브라이언트도 198cm의 장신이긴 하나 NBA는 평균 신장이 2m.[41] 다만 야오밍이 약 20~30cm 공중에 떠있다.[42] 해당 표정 때문에 대한민국 배우 최성국과 일본의 여자 성우 하나자와 카나와 같이 호쾌한 웃음의 표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