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치산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중국의 제11대 국가부주석이다.
2. 생애
중화인민공화국 산둥성 칭다오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산서성이라고 한다.
문화대혁명 당시 대부분 고등학생이 그렇듯이 고교를 졸업하고 시골에 내려가서 삽질을 했다. 1973년에 시베이대학에 들어갔고, 여기서 역사를 전공했다. 졸업 2년 후 당시 유배중이었던 경제관료 야오이린(姚依林, 1917-94)의 딸 야오밍산을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는데, 주된 연구 분야는 청말과 민국초였다고 한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야오이린이 유배에서 풀려 정부에 복귀했는데, 이때 왕치산도 중앙서기처 농촌정책연구실에 채용되면서 공무원생활을 한다. 이때 능력을 보여 주목을 받아 고속출세를 하게 된다.
1988년부터 금융계통에서 요직을 맡아서 성과를 냈고,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광둥성의 금융담당으로 아시아 각국의 금융위기가 중국에 옮겨붙지 못하게 하는 성과를 내서 광둥성 부성장으로 승진했다.
2000년대부터 주룽지 총리의 주목을 받아서 국무원에서 일하게 되고, 이후 하이난 성 당서기를 맡았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는 베이징 시장을 맡아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의 초석을 놓았다.
2007년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으로 임명되며 중국공산당 중심부에 진입하였으며, 18차 당대회에서 중앙기율검사위원장[1] 을 맡았다.
2018년 1월 국가부주석에 임명되었다.
3. 행적
현재 중국공산당 내에서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 다음으로 서열 8위이다. 부주석이라는 자리가 외견상으로는 시진핑 다음의 2인자처럼 보일수 있지만,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7인에는 포함되지 않아서 직함에 비해서는 권력의 힘이 약하다.
전인대에서도 왕치산의 직함이 유임되면서 시진핑의 사실상의 1인 독재가 확립되도록 도움을 주게 되었다. 이번 전인대는 시진핑이 2012년부터 보유하고 있는 중국공산당 총서기, 국가주석, 그리고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3대 최고권력직을 다시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주석직의 임기를 폐지하여 사실상 마오쩌둥 시절의 1인 지도체제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4. 기타
덩샤오핑의 집권기인 1980년대 이래 중국은 '7상8하', 즉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에서 67세까지는 현역이지만 68세부터 물러나는 것을 관례로 하여 자연스러운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도록 해왔다. 이에 따르면 당초 왕치산 정도의 나이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어야 했겠지만, 시진핑의 지지로 인해 오히려 국가 부주석으로 승진까지 했다. 이 점에서 그의 국가부주석직 임명은 7상8하 원칙이 사문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중국의 부동산 재벌 궈원구이 전 정취안홀딩스 회장이 "판빙빙에 대한 탈세 조사는 판빙빙으로부터 성 상납을 받은 왕치산 국가부주석이 입막음용으로 취한 조치"였으며 "두 사람의 성관계 동영상을 내가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는 소식을 대만의 자유시보가 보도했다. 하지만 권력핵심부에 건재한 왕치산에게 성상납을 했는데도 판빙빙이 이렇게 갑작스레 거액의 벌금을 무는 사태가 벌어진 것은 더 설득력이 없다는 말도 나오기도 한다. 자유시보가 그 동영상을 보았다고 주장한 궈원구이는 미국에 망명한 중국인 망명객 재벌인데 이에 대해서 뉴욕타임즈에서는 그의 주장에 신빙성이 없다는 투의 기사를 작성하였다.
중국은 궈원구이를 인터폴 적색수배 명단에 올려놓고 부동산 사기 등의 혐의로 10조(...)에 달하는 벌금을 부과했다.
나루히토 일본 천황 즉위식에 특사 자격으로 참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