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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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상하이방. 1998년부터 2003년까지 국무원 총리로 재직했다.
2. 생애
2.1. 초기이력
마오쩌둥의 출신성인 후난성에서 태어났다. 정확히는 창사시가 고향.[2] 집안이 명나라 황족의 후손으로 홍무제 주원장의 18남인 민장왕(岷庄王) 주편(朱楩)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래서 주원장의 직계 19세손이 된다.[3] 청나라가 명나라의 주씨 일족을 학살하자 주룽지의 조상은 호남성까지 피난와서 대대로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지주이자 지식인으로 출신 성분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중국 공산당의 초기 지도자들은 마오쩌둥으로부터 시작해서 대부분 지식인 - 중산층 이상의 부유층이었기 때문에 공산당 입당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아버지는 태어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도 그가 10살에 사망했다. 이렇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린 나이에 돌아가셔서 삼촌의 슬하에서 컸다. 마오쩌둥의 고교후배로 마오쩌둥의 모교인 창사시 제1중학교를 졸업했다. 공부를 엄청나게 잘했던지 3살때 논어를 통달하고 중고시절 한번 빼놓고 모두 수석을 차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947년 베이징의 칭화대학에 입학했고,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1949년 대륙을 장악한 공산당에 입당했는데, 1951년 칭화대학 학생회장이 된다.
2.2. 거듭된 숙청 및 복귀
대학을 졸업한 후 공무원 생활을 했고, 이후 여러군데서 관리 생활을 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1957년 백화 제방 운동 당시 마오쩌둥의 경제 정책을 비판했다가 출당되었다. 뒤이어 2년간 재교육 캠프에서 노역을 했다.
대약진운동 이후 마오쩌둥이 대실패의 책임을 져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자, 덩샤오핑과 류사오치가 정권을 잡았는데, 그때 주룽지는 복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몇년 후인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과거 마오쩌둥을 비판했던 전력 및 지주계급 출신성분이 문제되어 다시 한번 숙청되었고, 다시 삽질을 하게 된다. 1970년부터 1975년까지 5년간 깡촌으로 귀양을 가서 문자 그대로 돼지에게 인분을 퍼날라 먹이는 일을 하는 개고생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훗날을 대비해서 쉬는 시간에 틈틈히 몰래 경제서적을 탐독하였다. 나중에 복권되고 경제 전문가가 되기 위해 경제학 박사학위도 땄다.
2.3. 출세가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얼마 안가 덩샤오핑이 정계에 복귀하자 주룽지도 복권되어 다시 한번 중앙 정부로 복귀한다. 이어 석유부에서 일하고 당원 자격도 복귀되었다. 이어 계속 능력을 보여서 1980년대에는 국가 경제 위원회의 부주석에 임명된다. 1985년 자오쯔양 총리의 발탁으로 덩샤오핑(당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이외에는 아무런 직함이 없었다.) 앞에서 경제보고를 했는데, 이때 덩샤오핑의 눈에 들어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주룽지는 사실 대권과는 거리가 먼 중앙부처 공무원을 계속 역임하고 있었다. 원래 중국에서 대권을 장악하려면 지방의 행정수장으로 일하면서 행정능력을 보여야 하지만, 주룽지는 중앙부처에서 관료생활만 계속 한 것이다.
그런데 인재 보는 눈이 좋았던 덩샤오핑의 눈에 들어오면서 출세코스로 진입하여 1987년 상하이 시장에 임명된다. 이 때 상하이 지역을 세력기반으로 하는 상하이 당서기인 장쩌민을 만나게 된다. 이 둘은 의기투합하여 상하이방이라는 계파를 구성한다. 장쩌민의 후임으로 1988년 상하이시 서기에 임명되었고, 개혁 개방을 지휘하여 상하이 지역의 경제 개발을 지휘한다. 이때 엄청한 부정부패 단속과 관리들의 기율 단속으로 제2의 임칙서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당시 주룽지는 상하이에 재직하면서 1950년대 수준에 머물고 있었던 도시 인프라(교통, 통신, 상하수도, 재건축 등등)를 대대적으로 업그레이드 했다. 현재 마천루 숲을 이루는 상하이의 기반은 모두 주룽지가 닦은 셈이다.
1989년 베이징에서 벌어진 천안문 6.4 항쟁의 강경 진압과는 달리, 상하이의 소요 사태는 주룽지가 앞장서서 평화롭게 해결하여 그의 명성이 높아졌다. 그런데 천안문 항쟁을 전후하여 덩샤오핑이 후계자로 낙점해두었던 후야오방은 급사, 자오쯔양은 완전히 실각하면서, 장쩌민이 총서기에 등극하고, 결국 대권을 쥐게 된다.
상하이 시장으로 업적을 인정받아 1991년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서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2.4. 총리
1998년 장쩌민은 정년에 걸려 퇴임하는 리펑의 후임으로 상하이에 있던 주룽지를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로 발탁했다. 그리하여 장쩌민이 퇴임하는 2003년까지 재직한다. 그는 엄정한 공직 기강을 강조하여 반 부패 운동으로 성과를 거두었고, 전임 리펑과는 달리 중국에서도 이미지는 좋은 편이다. 중국 민중들에선 장쩌민보다 주룽지가 더 존재감이 있었고 인기가 많았다. 장쩌민은 주룽지를 볼 때마다 약간의 심기가 불편하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이원집정부제의 책임총리나 다름 없었고, 경제분야의 차르나 황제라 불릴 정도다. 그래도 1980년대 중반부터 함께 일한 인연으로 주룽지를 발탁한 것은 바로 장쩌민이었다.
총리로서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의 중국의 고속성장을 지휘하여 이해 매년 15% 가까운 경제성장율을 기록했다. 2003년 75세에 이르자 정년에 걸려 장쩌민과 함께 동반퇴진하고 후임은 원자바오가 맡게 된다.
WTO에 가입할 때 너무 양보를 하였다고 하여 매국노로도 몰렸다고 한다. 하지만 국내적으로는 항상 "서방국가들은 중국을 약화시키려고 한다"고 서방의 위협을 강조하기도 했다.
3. 기타
- 부인 라오안(劳安) 여사는 같은 칭화대학 전기공학과 출신으로 캠퍼스 커플이었다고 한다. 라오안도 기술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 자식은 둘이 있는데 장녀 주옌라이와 차남 주윈라이는 모두 금융쪽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중국 정치상 이렇게 아버지를 고관으로 둔 기업인은 꼭 잡음을 일으키기 마련인데(전임 리펑 총리의 딸인 리샤오린은 재벌로 성장하여 떼돈을 벌었지만, 부패문제에 연루되어 물의를 일으켰고, 시진핑 정부의 압력때문에 모든 지위를 사임했다.), 주룽지의 자녀들은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 2009년에 낸 회고록은 중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 2019년 10월 1일 열병식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서 건강이 나쁘다는 소문이 있다. 당시 91세였다.
- 홍콩에서는 평가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1] 원래 鎔(녹일 용, 거푸집 용)은 1955년 제1비 이체자 정리표(第一批异体字整理表)에서 熔(녹일 용)과 통합되었다. 그래서 鎔接(용접)을 중국에서는 熔接으로 쓴다. 그런데 이 사람 이름을 적자고 1993년에 제1비 이체자 정리표를 수정해서 鎔을 熔에 통합한다는 규정을 없앴고, 이로 인해 镕이라는 간체자가 만들어졌다. 鎔 자는 명나라 황실 후손의 항렬자이다. 민장왕파는 訪-寬-鎔-喜 순으로 항렬자가 이어지는데 주룽지의 조부 주팡쉬(朱訪緖)와 부친 주콴수(朱寬澍), 그리고 주룽지 본인은 항렬자를 사용하였으나, 주룽지의 아들 주윈라이(朱雲來)는 항렬자를 사용하지 않았다(참조). 중국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논쟁이 벌어지게 되자 한국의 기레기가 이 소식을 보도하는데, 자세한 배경 설명은 제대로 안 해서 독자 입장에서 이게 왜 시끄러워졌는지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게 써놨고, 또 결정적으로 간체자용 부수 钅(정체자의 釒[쇠 금(金)\]에 해당)을 쇠 금이 아닌 온전할 전(全)이라고 잘못 표현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동음 대체로 인해 鎔이나 熔을 溶(녹일 용)으로 쓴다. 다만 사람 이름에 쓰인 글자까지 바꾸지는 않는다.[2] 삼국지에서 위연과 황충이 지키던 장사이다.[3] 이 때문에 가상역사를 다룬 매체나 드립에서 가끔씩 명나라 부활의 주역이나 구심점으로 등장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