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둥성

 


[image] '''중화인민공화국
广东省(Guǎngdōng Shěng''' (廣東省)
광둥성 | Guangdong Province

[image]

'''성정부 소재지'''
광저우시 웨슈구 둥펑중로 305
(广州市 越秀区 东风中路 305)
'''지역'''
중난
'''면적'''
179,800km²
'''하위 행정구역'''
21지급시(2부성급시) 59구 21현급시 36현 3자치현
'''인구'''
1억 1,169만명
'''인구밀도'''
622명/km²
'''시간대'''
UTC+8
'''한국과 시차'''
1시간
'''서기'''
리시(李希)
'''성장'''
마싱루이(马兴瑞)
'''HDI'''
0.784 (2017)
'''GRDP'''
$1조 5,154억 0,538만 (2019)
'''1인당 GRDP'''
$13,651 (2019)
'''행정구역 약칭'''
'''粤'''
'''ISO 3166-2'''
'''CN-GD'''
홈페이지
1. 개요
2. 역사
3. 강한 중화사상
3.1. 반골 기질, 광동 독자의식
4. 지리와 기후
5. 행정구역
6. 산업
7. 출신 인물
7.1. 중세
7.2. 근대
7.3. 현대
7.3.1. 정치인
7.3.2. 연예인
7.3.3. 재계
7.3.4. 스포츠 선수
7.3.5. 예술인


1. 개요


중국 남동부의 이다. 약칭은 (粤).[1] '광동'이라는 지명은 삼국시대 오나라 후한 13주 중 하나인 교주(交州; 지금의 광둥성과 광시좡족자치구, 베트남 북부 일대)를 갈라 광주(廣州)를 설치한 것에서 유래했으며 송나라 대에 이를 다시 광남서로(廣南西路)와 광남동로(廣南東路)로 분할하였는데 광남동로를 축약하여 광동로(廣東路)라 하였고 이것이 '광동'이 되었다.
중국 대륙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흔히 '''남방'''이라고 한다.[2] 중국 대륙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성으로, 그 수가 2019년 기준으로 무려 '''1억 1,300만 명'''이나 된다. 비슷한 사례로 인도 뭄바이가 있는 마하라슈트라 주의 인구는 '''1억 3,000만 명'''이나 된다.
이렇게 인구가 많은 이유는 광둥성이 중국 최대의 공업 지역으로, 중국 각지에서 노동자가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외지인들이 꽤 있다는 것이다. 또한 광둥성이 인구 수로 중국 내 행정구역 1위가 된 것에는 1997년 그동안 부동의 인구 1위를 차지한 쓰촨성 인구 중 3,000만 명이 충칭시 인구로 떨어져 나간 것도 크다.[3] 2009년 인구 1억을 돌파한후 서서히 증가세가 둔화됐지만, 매년 100만명이 넘는 인구 증가폭을 감안할 때, 향후 10년안에 일본 인구도 추월할 것으로 보인다.
면적은 177,900km²로 남한의 약 1.7배에 해당하며, GDP는 1998년에 싱가포르, 2003년에 홍콩, 2007년엔 대만의 GDP를 추월했고, 2013년 기준 약 1조 달러에서 2017년 기준으로는 이미 1조 4,400억 달러로 증가해 2018년 기준 1조 6,900억 달러인 한국을 턱 밑까지 쫓고있다. # 중국에서 사상 처음으로 GDP 1조 달러를 돌파한 성이라고 한다.
결국, '''2020년 광둥성의 경제 규모가 1조 6000억 달러에 이르러 대한민국 경제규모를 추월했다.''' # 이로서 싱가포르, 홍콩, 대만, 대한민국을 마침내 모두 제친 중국 최초의 성이 되었다.
성도는 광저우. 그 외에도 홍콩과 가까운 동네인 선전도 대표적인 도시다.
야오족좡족이 자치현을 각각 두 개와 한 개씩 가지고 있다. 야오족이 성 인구의 0.2%, 좡족이 0.7%.
유난히 해외에는 이 성 출신의 화교가 많이 보인다. 대체로 산둥성 출신인 한국 화교, 과거 식민지인 대만본성인인 일본 화교를 제외한 전세계 화교는 이 성 출신들과 푸젠성 출신, 객가 정도로 구분된다. 이는 원래 사람이 많은 것도 있지만, 19세기 중반에 태평천국의 난 이후 청나라의 행정력이 붕괴하고 살기 어려워지자, 이 성 출신들이 대거 바다를 통해 홍콩, 대만 등 주변 섬이나 동남아시아 각 국가 및 호주, 미국, 캐나다, 멕시코, 푸에르토리코, 쿠바북아메리카/ 페루남아메리카, 그리고 남아공 등으로 이주한 탓이 크다.
또한 명나라 시절부터 이곳은 매우 해외교류가 활발한 곳이었다. 인도인페르시아인은 이미 3세기, 포르투갈인스페인인 등 유럽인은 16세기에 이곳에 도달했을 정도이며 그 중 포르투갈인은 마카오를 조차해 가기도 했고 스페인은 광동 연안에서 행패를 부리다 불랑기포조총을 몰수당하고 쫓겨나기도 했다.
2014년 기준으로 1인당 GDP는 1만 달러를 넘어선 수준으로, 한화로 따지면 1,000만원을 넘어선 수준이다. 중국에선 9번째로 높은 축에 속한다.
최근 들어서도 인구가 조금씩 늘어서 대만 중앙통신은 광동성의 인구가 1억 1,300만명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2. 역사


중국 대륙 내부와 물리적 거리가 멀어서 정통 중국 문화와 바다를 통해 들어온 외국 문화가 융합된 독자적인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특히 유럽 여러 나라들과 무역을 하게 된 뒤부터는 반체제적인 사고 방식이 형성되어 중국 내부의 정치 상황이 급변하는 변수가 생긴다면 이 곳이 변화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원래 베트남 북부와 함께 임호와 그의 부관이었던 조타진시황 사후 세운 남월(南越)의 영역[4]으로, 광저우는 과거 남월의 수도였다. 그래서 고대에는 중국보다 베트남동남아시아 민족과 더 동질성이 있었다. 남월은 중원의 풍속 대신 이 동네 풍속에 맞추고 독자적 세력을 이루다가 한나라 국력이 절정에 달해 흉노고조선 등 주변지역을 마구 침공한 한무제 때 정복당해 한나라에 복속되었다.
하지만 한나라 시절에도 이 지역은 미지의 남방영역이었으며 베트남 북부 교지, 중부 일남군 등과 함께 간접적인 통치가 이뤄지다가[5] 서진이 몰락하고 남북조시대가 되어서야 이곳은 남조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개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나라까지는 이곳의 개발이 그다지 진척되지 않았고, 인구밀도도 그다지 높지 않았다. 하지만 명나라 이후 기후가 좋고 해양세력과 접촉하는 데 상당히 유리했기 때문에, 이곳은 점점 부유한 지역이 되었다. 그리고 만주족 청나라가 들어선 후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청나라 멸망 이후 국민혁명 이전까지는 중국 국민당의 본거지나 다름없었다.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호응하는 4.15 광저우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광동성 정부주석 리지선이 광동성의 군정대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장파쿠이장황사변을, 중국 공산당광저우 폭동을 일으켜 광동성을 장악하고자 했으나 모두 진압당했다.이후 난징 국민정부에 그런대로 충성은 하지만 중앙과 적대적인 계계군벌의 수장 리쭝런, 바이충시가 리지선과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우호적인 동맹 관계에 있었다. 1929년 2월, 호남 사건이 발생하자 장제스는 리지선을 광서파와 연대한 혐의로 투옥하고 천밍수를 신임 광동성 정부주석에 임명하였고 광동의 군권을 천지탕에게 맡겨 광동성의 지배자를 천지탕과 천밍수가 양분하게 했다. 천지탕과 천밍수는 반장전쟁 기간 동안 남방에서 광서파와 장파쿠이를 상대로 큰 전공을 세우며 중앙에 충성했다. 하지만 1931년 2월, 탕산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1차 양광사변이 일어난다. 장제스에 우호적이었던 천밍수는 천지탕에게 축출되었고 광동성은 천지탕의 지배지역이 되었다.
9월 만주사변이 발생하면서 형성된 거국적인 협력 분위기 덕분에 광동 지역은 현 광시좡족자치구인 광시성과 함께 1931년 12월, 제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자치를 인정받아 서남정치분회, 서남정무위원회, 군사위원회 서남분회를 설치하고 반독립적인 지역으로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1934년부터 1935년에 걸친 대장정, 1935년 법폐개혁을 거치면서 중앙의 영향력이 계속 강해졌고 1936년 5월, 광동의 정신적 지주인 후한민이 사망하자 위기를 느낀 천지탕은 1936년 6월 2차 양광사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해 홍콩으로 망명했고 광동성은 이후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중일전쟁 중 일본의 침략을 받아 광저우 등지가 함락당한 바 있다. 일본군은 이후 1941년 태평양 전쟁을 도발해 광동보다도 더 아래의 홍콩과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까지 쳐들어가서 홍콩으로는 선전과 홍콩 경계인 로우 다리로 대규모의 기병기갑포병이 밀고 들어오고 홍콩 섬에 해군 육전대, 즉 해병대를 상륙시키며 베트남으로도 똑같이 육/해 양로로 쳐들어간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하자 다시 중화민국의 통치에 들어간다.
국공내전 중에는 인민해방군에 밀려 중화민국의 수도가 광저우로 이전되었지만 결국 여기도 1949년 중국 인민해방군에 함락되었고, 그 해 10월 1일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광둥성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후 조용히 있다가 중국의 개혁개방을 선언한 덩샤오핑 집권 이후 홍콩과 가깝고 바다가 인접해 있다는 영향을 받아서 산터우, 선전, 주하이 등이 경제특구로 지정되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공업이 발전해 폭발적으로 성장했으며,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 되었다. 주강 삼각주라는 거대 경제권이 형성된 현재는 여러모로 중국 경제의 핵심지역이다.
하이난 섬도 원래 광동 소속이었다가 1980년 경제특구 지정으로 별개 성으로 분리, 독립했다. 다만 하이난은 광동 문화권이 아닌 푸젠성 그러니까 민남 문화권이다. 이쪽은 말도 민남어와 더 가깝다. 어디까지나 배가 광동성 서부에서 출항해서 편의상 광동성으로 넣었을 뿐이다. 당연히 지금은 완전 쌩판 남의 동네다.
한편 홍콩/마카오도 역사적으로 광동에 속했으나 이 둘은 영국, 포르투갈의 지배에 놓이며 갈렸고 현재는 특별행정구로서 별도의 행정구역으로 분리되었다. 이 둘은 당연히 이제는 쌩판 다른 동네다. 나무위키에서 간혹 광동성 홍콩(...)으로 서술한 글들이 보이는데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3. 강한 중화사상


'''중원에 늦게 편입되었지만, 중화사상한족 민족주의가 강한 지역이다.''' 해외에서 긴밀한 민족주의 네트워크를 가진 화교들도 광둥 출신 혹은 그 후손이 많다.
광둥성은 국수주의가 중국의 어느 지역보다도 강하다. 그 이유는 이 지역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짜 한족이다'''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광동 지역의 분청들은 광동어야말로 고대부터 내려온 '''참 중국어'''라고 소개하며 만다린, 즉 표준중국어몽골어, 만주어가 섞인 짝퉁 잡어로 격하시키는 게 이들이다.
중국사에 대한 시각에서도 한족 왕조인 한나라, 송나라, 명나라에 대한 감정이나 평가는 높은데, 북방 기마민족들의 정복왕조인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에 대한 감정이나 평가는 낮다. 한 예로 송나라가 아닌 금나라 입장에서 저술한 책의 집필자가 물리적으로 공격받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하도 북쪽에서 오랑캐들이 많이 쳐들어오다 보니 한족들이 화를 피해서 대거 남쪽으로 내려와서 그럴지도 모른다. 실제로 원나라-송나라 교체기에 남하한 하카인들이 많이 사는 곳 중 하나도 광둥이다.
이 때문에 가끔씩 온라인에서 지역 비하 키배틀이 일어나면 북방인들은 광동인들을 가리켜 난만쯔(南蛮子, 키 작고 못생긴 남방 오랑캐라는 뜻)라는 멸칭으로 부른다. 광동성 출신들 앞에서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표현이다.

3.1. 반골 기질, 광동 독자의식


한편으로 광동 지역은 옛날부터 부조리에 저항하는 성질이 강했다. 특히 북방세 내진 몽골 고원에서 기원한 기마민족들은 얄짤없이 광동에서 시작한 저항으로 무너졌다. 세계를 재패한 그 원나라도 장사성의 난으로 무너졌고 청나라가 무너진 것도 이 지역 출신 쑨원신해혁명 때문이었다.[6]
몽골족 원나라가 무너지고 한족 왕조 명나라가 들어선 것도 여기서 시작되었으며 만주족 청나라에 맞서는 남명도 여기 기반을 두었다. 그리고 청나라가 중국을 장악한 후 순치제에 의해 내려진 변발령 당시 성 하나를 통째로 팔기군이 도륙하는 소위 '''도성'''도 광동 지역에서 주로 행해졌다. 태평천국운동을 벌인 홍수전,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운 쑨원도 광동 출신이다. 원나라가 처음 들어설 때도 여기서 저항이 가장 심했고 만주족청나라변발을 강제하자 여기서 가장 많은 저항이 벌어지기도 했다. 중화민국 때도 이는 마찬가지로 장제스가 대륙에 있을 시절에도 남경정부에 호락호락하지 않고 여러번 반란을 일으켰다. 남경정부는 강남 기반으로 북방세도 아니었는데도 광동은 장제스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해 평정에 애를 먹었다.
이는 현대까지 이어져 중국 공산당에 대한 비판도 경향도 일국양제 하의 홍콩, 마카오나 소수민족 자치구신장 위구르 자치구, 티베트를 제외하면 가장 강하다. '''중국 본토에서 가장 과감하게 공산당을 까는 언론인 남방도시보와 남방주말도 광둥성 기반이다.'''[7] 원래 광동성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다루기가 쉽지 않았으며, 자영농이 많았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도 토지개혁이 매우 온건했다. 그러나 중국 남부보다 화북이 더 자영농이 많아 토지개혁이 아니라 중일전쟁 시기 민족감정으로 화북을 회유해야 했던 것에 비하면 토지개혁이 적게 일어났다고 보기는 힘들다.
광동의 중화 민족주의쑨원삼민주의 사상에 기초한 중화민국에 대한 애국심과 강한 반공사상이며, 2019년 들어 중국 공산당 체제가 이런저런 도전을 받자 광동 지역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을 단순히 홍콩 본토주의인 홍콩 독립운동의 시각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며, 중화민국 복고주의자와 극렬 중화사상 신봉자들, 친서방 성향 민주파 인사가 홍콩 독립세력과 함께 반 중국 공산당의 기치 아래 연대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시진핑 지도부 홍콩 보안법을 강행한 이유도, 홍콩 독립에 반대하는 민주파 인사들도 국가분열주의자로 몬 것도 바로 '''광동에서 시작한 저항은 반드시 승리한다'''라는 무시무시한 역사가 증명하기 때문이다. 원나라를 무너뜨린 장사성의 난도 이 광동에서 시작하였고 청을 무너뜨린 신해혁명도 광동에서 시작하는 등 북방 세력의 붕괴는 대개 광동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8]
서방에서 '''중국의 풀뿌리 민주주의'''이라고 극찬했던 인구 2만여 명의 작은 어촌마을인 우칸 촌이 바로 광둥성에 있다. 2011년 9월 현지 당 지도부가 마을 공동 소유 땅을 개발업자에게 몰래 헐값에 넘긴 데 격분해 시위를 벌여 비리 관리들을 내쫓고 이듬해 3월 직선을 통해 촌민위원회를 구성했다. 하지만 2014년에 있었던 선거에서 당국이 노골적으로 개입하더니 2016년에 직선 선출된 린쭈롄 당위원회 서기가 비리로 체포되었다고 하지만 촌 주민들은 당국의 방해로 보고있어 시위를 벌이고 있다. 2016년 7월 22일에 결국 구속되어서 5년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지금도 대치 상태이며, 홍콩 기자가 불법적으로 연행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최근엔 뇌물수수를 인정한 자백을 돌연 철회해 수사당국의 강압·회유 의혹이 일고 있다.# 촌민 전 지도자에게 징역 3년 1개월형과 20만 위안(약 3,340만 원) 벌금형을 선고한 1심 판결을 확정했다. 그리고 주민들도 무더기로 징역형을 선고했다.# 이 때 많은 수의 홍콩인들이 우칸 촌 사건을 비판했으며 지역 주민들과 연대했다.
앞서 밝혔지만 사실 홍콩인들을 단순히 반중, 혐중 성향이다라고 단정짓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9] 홍콩인들이 단순히 혐중 성향일 뿐이라면 넷 우익들마냥 우칸 촌 사건을 비롯하여 중국본토에서 일어난 난징 대학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천안문 학살 피해자들을 기념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혐중이나 반중이 아닌 어디까지 중국 공산당이라는 일개 정치집단이 싫을 뿐이며 이들은 '''중국 공산당은 중국을 대표할 수 없다'''며 중화민국에 정통성을 둔다. 한국의 혐중 드립은 홍콩에서도 욕먹는다. 중국인 출입금지를 떡하니 붙인 제주도 편의점 사진이 올라오자 홍콩에선 웹상에서 '''한국불매'''까지 외치기도 했다. 물론 사정을 아는 홍콩인들은 혐중이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륙인을 타게팅으로 하는건 알고 있지만, '''저건 선 넘었다'''와 '''얼마나 중화인민공화국/대륙인이 싫으면 저럴까'''하는 반응이 섞여서 씁슬함을 감출수 없을 것이다.[10]
물론 타 지역보다 부유한 지역이고 이질적인 성향이 있는 만큼, 이탈리아 북부와 스페인카탈루냐-바스크, 영국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 멕시코캘리포니아 반도, 캐나다퀘벡처럼 분리주의 움직임도 있다. 홍콩이 가까운 만큼 홍콩 독립을 추구하는 홍콩인들이 광둥성 주민들의 독자의식을 자극시키려고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광동의 독립을 주장하는 낙서가 광둥성 곳곳에서 발견되었는데, 중국 공안홍콩 독립운동 지지자들의 소행으로 보고 있다.#
광둥인을 비롯한 남중국인은 북방인보다는 동남아시아인과 비슷한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눈이 크며 왜소한 체격이 많다. 실제로 광둥성을 비롯한 남쪽에 거주하는 한족은 북쪽에 거주하는 한족과 유전적 차이가 어느 정도 있는 편이다. 주류 Y 하플로그룹은 O2-M122로 북쪽 한족과 똑같지만, mtDNA 하플로그룹은 B로 북부 베트남이나 동남아시아 북쪽에 더 가깝다. 즉 원래 북쪽에 있던 한족의 남성들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현지인들과 동화되었고 이들의 후손 중 하나가 광동인들이라는 것. 그래서 외모도 흔히 말하는 북방계보다는 남방계, 즉 동남아시아인들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특히 베트남인, 태국인과 아주 비슷하게 생겼다. 당연히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말레이계와는 크게 다르다.

3.2. 요리




4. 지리와 기후


무지 습하고 덥다. 겨울에도 10도쯤인 온도를 유지한다. 단적인 예로 광저우가 영하로 내려간 적은 1983년 1월 영하 5도를 비공식으로 기록한 것을 제외하면 관측 이래 한 번도 없다. 서남부는 충저우(瓊州) 해협을 사이에 두고 하이난성과 닿아 있다.

5. 행정구역


현재 21개의 지급시(地級市)를 비롯해 55개의 시 직할구, 23개의 현급시(縣級市), 41개의 현, 그리고 3개의 자치현(自治縣)을 관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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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산업


평야가 30%밖에 안 돼서 농업 생산력은 부족했었고 1978년 전까지는 공업으로도 침체된 지역이었지만 내륙 대신 해안을 개발하는 것을 포함하는 덩샤오핑의 개혁 및 개방 정책 덕에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5개의 경제특구 중 선전, 주하이, 산터우의 3개 경제특구를 가지고 있다.
홍콩마카오는 원래 광둥성 소속이었다가 영국포르투갈에 귀속되었고 중국은 오랫동안 이 지역을 미수복 지구 비슷하게 취급했다. 중국에 반환된 지금도 홍콩과 마카오는 광동과 교류가 많아 1979년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홍콩 및 마카오와 중국의 2중 차적을 발행하고 이 차적을 이용해 화물차들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7. 출신 인물


중국의 변방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역사를 주도한 인물들이 많다. 다만 중세 이후에야 확실한 중국의 영역이 되었기 때문에 명나라 이전에는 출신 유명인물이 매우 적다.

7.1. 중세



7.2. 근대



7.3. 현대



7.3.1. 정치인



7.3.2. 연예인


대부분의 홍콩 배우들은 광둥성 출신이 홍콩으로 이주한 경우가 많고, 홍콩 출생이라도 본적이 광동성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7.3.3. 재계



7.3.4. 스포츠 선수



7.3.5. 예술인



[1] 본래 중국 남부를 가리키는 말로, 춘추시대의 월(越)과는 다른 나라인 베트남계 고대 국가인 남비엣(남월)에서 유래한다. 지금은 이들 나라 역시 '越'을 사용하지만, '粤' 역시 광둥 일대를 가리키는 의미로 중화민국기부터 약칭을 사용하기 시작해 유지되고 있다.[2] 단 남방은 광동성만 말하는게 아니고 양쯔강 이남을 말한다.[3] 광둥에서도 하이난성이 떨어져나가긴 했지만 거기는 충칭보다 인구가 훨씬 적어서 타격이 적었다.[4] 한족이 단일민족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 광동인들이 원래 남월인들의 혼혈 혹은 그 후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사실이다. 확실히 남방한족은 북방과 다르다. 광동성이 속한 양광지방은 확실히 타 중원지역에 비해 생김새도 말도 너무 이질적인 게 사실이다. 그리고 남월은 엄연히 베트남 역사에 해당하는 나라다. 쯩짝/쯩니 자매의 반란 역시 구 남월 귀족세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활동이었다. 그러나 한족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민족 중에 고립된 섬나라나 산간지역 국가가 아니면 혈통상의 단일민족은 없다. 한족이 혈통으로 봤을 때 민족의 혼혈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광동성 뿐만 아니라 한족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산시성-허난성을 제외한 대부분의 다른 지역들도 주나라시대에는 오랑캐, 즉 이민족의 영역이었으며, 이런 곳의 주민들도 대부분 모두 이민족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민족 구분에는 혈통뿐만 아니라 문화나 고유의 민족의식, 정체성도 큰 역할을 하므로 혈통을 근거로 한족이 단일민족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5] 삼국지에 나오는 사섭이 교지와 일남을 다스렸다.[6] 물론 그 기원은 현재 후베이성 우한시인 우창과 한커우의 무창봉기이다.[7] 중국의 모든 행정구역은 중국 공산당의 지배를 받는다. 일개 성의 기관지가 감히 공산당을 비판할 수 없는 구조이다.[8] 광동과 함께 코로나19로 크게 피해를 입어 경제가 무너진 후베이성과 이웃 후난성도 또다른 뇌관으로 떠오르고 있다. 우한에선 강렬한 반정부 시위도 있어 경찰차를 뒤집는 등의 일도 있었다. '''참고로 우한시우창 봉기가 일어났던 지역이고, 장제스에 반대하던 왕징웨이가 독자적으로 국민정부를 수립하고 대립했던 지역이다.'''[9] 그래서 혐중 성향의 한국인들이 말 잘못해서 홍콩인들에게 미움을 받아 찍혀버렸다.[10] 사실 중화인민공화국 본토인이 아닌 홍콩인이나 마카오인, 대만인 등 타 중화권 한족들은 한국의 혐중이 '''중화민족과 문명 그 자체'''에 대한 혐중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이를 싫어하는 건 마찬가지다. 민주파를 지지하는 홍콩인이라도 홍콩 독립운동은 극소수인 만큼 반드시 이를 주의해야 한다. 중공이 아니라 중화민국이 통치하는 대만은 혐중 표적이 되어 싸잡아 욕먹으면 굉장히 억울해진다. 북한이 싫다고 남한까지 싸잡아서 어떤 외국인이 욕한다고 생각해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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