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국민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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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민정부(國民政府)'''는 중국 국민당이 집권하는 중화민국의 정부이다.
1925년 광저우에서 국민정부를 선포하며 시작되었으며 공식적으로는 1948년 중화민국 헌법을 시행하며 종결되었으나 그와 별개로 국민정부라는 어휘는 1952년이 되어서야 사용을 중단하였다. 국부천대 이후 민주진보당의 천수이볜이 집권하기 전까지 국민정부의 연장선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전 총통 마잉주(재임 2008년~2016년)의 정권도 이 국민정부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총 5개의 국민정부가 있었는데 광저우 국민정부(훈정 0기), 우한 국민정부(훈정 1기), 베이핑 국민정부(참칭), 광저우 국민정부(참칭), 난징 국민정부(훈정 2기)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장제스의 난징 국민정부를 제외한 국민정부들은 장제스와의 경쟁에서 패배하여 사라졌고 국민정부라 하면 난징 국민정부(훈정 2기)를 말한다. 1925년부터 1950년까지 중화민국의 주권은 광저우 국민정부(훈정 0기)→우한 국민정부(훈정 1기)→난징 국민정부(훈정 2기)로 계승했다.
2. 국기
3. 국가(國歌)
4. 역사
4.1. 광저우 국민정부(훈정 0기)
영풍함 사건으로 2차 광동정부가 붕괴되자 1923년, 쉬충즈의 월군, 류전환, 양시민의 운남, 광서군과 합세하여 천중밍을 격퇴하고 3차 광동정부가 수립되었다. 쑨원은 1922년 8월 1일 직예군벌들의 구국회 복구와 1923년 6월 차오쿤의 회선사건으로 호법운동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혁명전쟁을 준비하여 대총통이 아니라 대원수에 취임하였는데 이 때문에 3차 광정부를 이를 대원수부, 대본영이라 한다. 1924년 중국 국민당은 중국 공산당과 1차 국공합작으로 통일전선을 열었고 소련의 지원으로 국민당을 개조, 독자적인 군사력을 양성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24년 광저우 상단 사건을 제압했으며 1925년 국민당의 1차 동정을 감행하여 천중밍의 광저우 탈환 시도를 저지하고 천중밍을 축출했다.
1925년 3월 20일 쑨원이 사망한 후에는 후한민이 잠시 대원수 대행을 맡다가 양시민, 유전환이 전횡을 일삼자 군민재정 통일선언으로 이들에게 복종을 요구했으나 도리어 반란을 일으키자 6월 12일 토벌했다. 6월 14일 국민정부 수립을 위한 회의가 열렸고 중국 국민당 중앙 위원회의 결의로 국민정부가 1925년 7월 1일에 정식으로 출범했다. 왕징웨이가 주석으로 추대되었으며 랴오중카이가 재정부장, 후한민이 외교부장, 쉬충즈가 군사부장 등으로 추대되었다. 국민 정부 위원회와 중앙 민정 관청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성현제를 입법하여 광동성에 가장 먼저 실행하자, 1950년대의 대만성 정부처럼 광동성 정부가 온 나라의 내정을 맡았으니, 중앙 민정 관청들은 외교부와 재정부만 상설화했는데, 중앙 정부와 광동성 정부와 광저우 시정부는 실권에 대하여 다투고 있었다. 왕징웨이가 국가 원수로 취임했으며, 1926년 7월에 시작된 국민당의 1차 북벌로 1926년 가을, 우페이푸가 지배하던 우한 삼진이 함락됨에 따라 1926년 겨울, 우한으로 주요 기관과 요인들이 이동, 사법부장 쉬첸을 중심으로 연석회의가 조직되어 1927년 1월 1일 우한 국민정부를 출범시켰다.
4.2. 우한 국민정부(훈정 1기)
1927년 장제스의 북벌로 우페이푸와 자오헝티를 몰아내고 양호 지역을 장악하면서 중국 내륙의 대도시 우한 삼진이 국민당 손에 들어왔다. 이에 광저우에 있던 국민당 정부가 우한으로의 천도를 결정하면서 수립되었다. 하지만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주도하면서 난징 정부가 분열되었고 한때 탕성즈, 장파쿠이의 무력과 펑위샹과의 동맹, 봉천군벌들의 견제를 활용하여 장제스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점하기도 했지만 장제스가 양 정부의 통합을 위한다는 구실로 하야하고 이를 틈타 난징 정부의 실세가 된 리쭝런, 바이충시 등의 광서 파벌이 난징 정부를 장악함으로 양 정부의 통합이 결정되었으나 중국 국민당을 이끌어갈 세력과 자금이 부족했던 광서 파벌은 곧 세력이 약해져 밀려나고 장제스가 곧 복귀하게 된다. 자세한 것은 영한합작 문서 참조.
4.3. 광저우 국민정부(참칭)
계계군벌, 월계군벌, 광동파, 개조파, 서산회의파가 합작하여 장제스에 대항하여 세운 정부. 탕산 사건이 핵심적 계기가 되었다. 1931년 5월 27일 수립되어 1차 양광사변을 일으켰으나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장제스의 하야를 조건으로 1932년 1월 해체하여 다시 난징 정부와 합쳤다.
4.4. 베이핑 국민정부(참칭)
중원대전 중인 1930년 9월 옌시산이 개조파, 서산회의파, 펑위샹, 광서파를 규합하여 장제스를 견제하기 위해 세운 정부. 하지만 장쉐량이 장제스 지지 통전을 날리고 장제스 편에 참전하면서 열흘도 안돼서 타이위안으로 이전했고 1930년 11월 4일 소멸했다.
4.5. 난징 국민정부(훈정 2기)
1928년에 공식적으로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이 북벌을 완수하였고, 수도를 난징으로 천도하였다. 중국 국민당에 집중된 권력은 그 권력의 중추였던 장제스의 권력을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청나라의 영역을 대부분 자국 영토라고 주장했지만 1921년 이후 독립한 몽골 인민 공화국과 아직도 잔류한 각지의 군벌들 그리고 티베트와 위구르 지역에 설치된 사실상의 자치국이 문제로 떠올랐고, 그들의 잠재적 라이벌인 중국 공산당은 장시 성에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세우며 그들에게 맞서기에 이른다. 사실상 광저우 및 난징 일대만 장악한 국민당 정권은 어려움을 겪었고 일본 제국은 관동군을 동원하여 만주를 장악하고 만주국을 건국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중국 국민당의 군대인 국민혁명군은 1931년부터 초공작전을 감행하여 공산당 소탕을 시도했고 1933년부터 1934년까지 진행된 제5차 초공작전이 주효하여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을 멸망시키는데 성공한다. 살아남은 마오쩌둥과 남은 인물들은 산시 성 옌안을 향한 대장정에 오른다. 국민혁명군은 6차 초공 작전을 준비하게 된다.
이 시기에 강력한 공업화 정책과 농촌 개혁이 시작되어 장강 삼각주를 중심으로 산업이 육성되었고 도로와 철도 건설을 비롯한 인프라 확충, 농민들을 위한 은행 설립, 품종 개량, 상업 작물 보급 등이 이루어졌다. 1935년에는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아서 법폐개혁을 단행함으로 화폐를 통일하여 재정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그러나 점점 중국을 압박하며 전쟁의 불씨를 키우는 일본에 맞서는 게 먼저라는 여론이 비등했고, 회담차 방문한 시안에서 장쉐량이 장제스를 감금하는 시안 사건이 발생하자 협상 끝에 국공 합작을 선언했고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을 구실로 중일전쟁이 개시된다. 중국의 국부군은 화북, 상하이에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전술적 미숙과 장교진의 부족으로 인하여 결국 영웅적인 분투에도 불구하고 북방의 베이핑, 경제의 중심지 상하이, 수도 난징, 난징 함락 이후 실질적으로 수도로 기능하던 우한과 광저우까지 함락되고, 외교적으로 전쟁을 중지할 수 있던 트라우트만 공작도 실패로 돌아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38년 왕징웨이의 배신으로 난징에 괴뢰 정부가 수립된다. 여기에 내몽골에서 데므치그돈로브가 몽강연합자치정부를 선언하면서 중국의 상황은 날로 암울해져 간다.
충칭까지 수도를 옮겨갈 정도[4] 로 망국의 위기에 처한 중화민국이었지만, 중국은 일본의 항복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고 항전을 계속했고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연합국의 일원이 되었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는 차후 세계질서를 운영할 강대국 중 하나로 인정받았고 만주, 타이완을 비롯한 일본 제국에게 양도된 영토의 회복을 약속받았다. 1945년 일본 제국이 패망하자 타이완 섬을 1945년 10월 25일 돌려받으며 중화민국 정부 최대의 [5] 영역을 확보했다. 내전 위기가 다시 커지자 쌍십 협정으로 공산당과의 화해를 도모했지만 실패했고 미국 국무장관 마셜의 개입으로 국공 내전을 일시 정지시켰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장제스는 공산당이 중공업의 대부분과 막대한 양의 곡물을 생산하는 만주를 기반으로 재기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 전에 공산당을 멸망시키겠다는 목적으로 1946년 국공내전을 재개했다.
한편 중국 국민당은 삼민주의 이념의 [ 군정 => 훈정 => 헌정 ] 논리를 바탕으로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여당 / 무소속 / 직업 단체의 직선으로 선출한 제헌 국민대회를 1946년에 소집했으며, 중화민국 헌법을 반포하면서 다당제 헌정으로 전환했는데, 1947년에 여당 / 야당 / 무소속 / 직업 단체의 직선으로 선출해 소집한 행헌 국민대회 / 행헌 입법원 / 행헌 감찰원에서는 중국 공산당이 참정을 거부하면서 중국 국민당(大) / 중국 청년당(中) / 중국 민주 사회당(小)의 여대야소를 자연스럽게 연출했으니, 장제스의 책략으로 '3당 훈정'을 형성했다. 여기서 '3당 훈정'은 강력한 총통제와 3개 정당의 연립내각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형식적인 헌정(憲政)과 실질적인 훈정(訓政)을 동시에 추구하는 1946년 체제를 가리키는 낱말이다.
1946년에 장제스는 3당 훈정의 막후 공작을 추진하면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을 차례로 초청하여 최고위급 관직에 등용을 약속했고, 곧이어 제헌 국민대회에서 중화민국 헌법을 입법하면서 3당 훈정(형식적인 헌정과 실질적인 훈정)에 바탕한 중화민국 헌정의 성립을 선언했으니, 3당 훈정의 여당으로 변신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은 연립 내각의 여당으로서 중앙 정부의 장차관으로 출세했지만, 그들의 표밭은 어디까지나 중국 대륙의 대도시에 한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중국 공산당은 중국 국민당이 주도하는 다당제 헌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거부하고 있었다.
1948년 4월 20일 제1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에서 총통으로 장제스, 부총통으로 리쭝런이 취임하고, 같은해 5월 20일 중화민국 헌법의 시행으로 정부 조직을 개편하면서 기존의 국민정부는 폐지되고 이후의 정부는 그저 '중화민국 정부'로 불린다.
8년이나 진행된 전쟁으로 중화민국의 경제 기반이 모조리 파괴된 터라 초인플레이션이 중화민국을 강타했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장징궈가 1948년의 대륙 화폐개혁(법폐 300만 위안 = 금원권 1위안), 1949년의 대륙 화폐개혁(금원권 5억 위안 = 은원권 1위안)을 실시했지만 실패했고 경제가 수습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규모 내전을 개시한 국민정부는 나락으로 치달았다. 결국 만주에 이어 화북이 함락되고 장강까지 돌파되면서 쓰촨, 윈난의 오지로 내몰린 국민당은 더 이상 대륙을 사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1949년 국부천대를 단행한다.
5. 군대
중국 국민당의 당군인 국민혁명군이 국가 방위의 역할을 수행했고, 400만이 훨씬 넘는 육군을 가졌으나 대부분 군사 훈련을 거치지 못해 그 역량이 매우 낮았으며, 해군 또한 연안 수비가 가능할 정도에 머물렀으며, 공군 역시 매우 열약했으며 그나마도 수가 적었다. 군대는 소련의 붉은 군대의 체계를 모방하였다. 황푸 군관 학교 출신자들이나 지방 군벌들의 수장이 간부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나 소수 일본이나 미국 유학파도 있었다. 1946년에 제헌 국민대회에서 중화민국 헌법을 입법하면서 중화민국 국군으로 전환되기에 이른다.
6. 경제
1910년대 이후로 어느 정도의 공업 발전이 이루어졌으나 연안 지역에 이루어졌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후 1930년대 대규모의 경제 발전이 계획되었으나 중일전쟁으로 중단되었다. 총력전을 수행하면서 자원과 현금의 부족으로 공장들의 가동률이 현저하게 떨어졌으며 중화민국의 국민 경제를 특정 기업과 몇몇 가문이 독점한 현실은 국공내전에서 패배하는 원인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7. 외교
주로 일본을 견제하면서 국제 사회에서 중국의 발언권을 확대하는데 중점을 주었다. 여기에 대해서 미국과 영국, 독일, 소련의 원조로 일본을 견제하는 쑹쯔원과 일본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면서 공산당을 견제하는 왕징웨이가 대립하기도 하였다. 한편 1차 세계 대전 이후로 북양정부 시기부터 독일과의 교류가 증가했는데 중국은 희귀 자원을 판매했고 독일은 무기와 고문단을 파견했다. 이후 1930년대에도 두 나라의 사이는 좋았지만[6] 중일전쟁 발발 이후로 일본의 요청으로 고문단이 철수해 사실상 관계가 단절되고 1941년 7월에 독일이 왕징웨이 정권을 승인함에 따라 공식적으로 단교한다. 그리고 진주만 기습 이틀 후 중국은 독일에 선전 포고한다.
이후 중화민국은 연합국에 합류해 4대 강국으로 인정받으면서[7] 대만 섬으로 쫓겨간 이후에도 1971년 11월 23일까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이었다. 1971년에 유엔 총회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유엔 가입을 승인하면서 중화민국은 안보리 상임 이사국은 물론 유엔에서도 탈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8. 연표
8.1. 1925년
- 2~3월 국민당의 1차 동정.
- 3월 27일 군민재정 통일선언.
- 3월 20일 쑨원 사망.
- 6월 12일 1925년 객군 반란 진압.
- 6월 14일 정치회의 소집.
- 7월 1일 대원수부 폐지, 국민정부 수립, 왕징웨이의 주석 추대.
- 8월 20일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 9월 21일 쉬충즈 추방.
- 9월 22일 후한민 추방.
- 10월~11월 국민당의 2차 동정.
- 11월 23일 서산회의 개최.
- 12월~1926년 2월 국민당의 남정.
8.2. 1926년
- 1월 1일 중국 국민당 2차 전국대표대회 개최.
- 3월 20일 중산함 사건.
- 4월 1일 왕징웨이 하야.
- 5월 15일 중국 국민당 제2기 2차 전체회의.
- 7월 1일 북벌 총동원령 선포, 국민당의 1차 북벌 시작.
- 7월 12일 중국 공산당 제2차 중앙위원회 집행위원회 확대회의 개최.
8.3. 1927년
- 1월 1일 우한 국민정부 출범.
- 3월 10일 중국 국민당 제2기 3차 전체회의.
- 3월 24일 난징사건
- 4월 12일 4.12 상하이 쿠데타.
- 4월 15일 4.15 광저우 쿠데타.
- 4월 17일 중국 국민당 제2기 4차 전체회의(난징)
- 4월 18일 난징 국민정부 출범.
- 5월 21일 마일사변 발생.
- 7월 13일 공산당의 국민정부 탈퇴.
- 7월 15일 국공결렬.
- 8월 1일 난창 폭동
- 8월 7일 8.7 긴급회의
- 8월 13일 장제스의 1차 하야.
- 9월 9일 추수폭동
- 9월 16일 영한합작
- 10월 20일 탕성즈 토벌.
- 11월 5일 장제스-다나카 회담
- 11월 22일 난징참안.
- 12월 11일 광저우 폭동
- 12월 14일 소련과 단교.
8.4. 1928년
- 1월 7일 장제스 복직.
- 2월 2일 국민당 제2기 4중전회 소집.
- 2월 13일 국민혁명군 재편성.
- 4월 7일 국민당의 2차 북벌 시작.
- 5월 3일 제남 사건
- 6월 4일 황고둔 사건
- 6월 8일 베이징 함락.
- 6월 11일 양쩡신이 국민정부에 투항.
- 6월 12일 <대내선언> 발표.
- 6월 15일 <대외선언> 발표.
- 7월 6일 ~ 7월 12일 탕산회의.
- 7월 7일 수약외교 선포.
- 8월 8일 국민당 제2기 5중전회 소집.
- 10월 10일 장제스의 국민정부 주석 취임.
- 10월 27일 마오쩌둥이 정강산에 도착, 정강산 투쟁 시작.
- 12월 29일 동북역치 선포.
8.5. 1929년
- 1월 1일 편견회의 개최.
- 1월 14일 마오쩌둥이 정강산을 떠나서 강서로 이동, 정강산 투쟁 종료.
- 2월 21일 호남사건.
- 3월 13일 1차 장계전쟁 발발, 반장전쟁의 시작.
- 3월 15일 국민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 소집.
- 5월 24일 1차 장풍전쟁 발발.
- 7월 10일 중동로 사건 발생.
- 9월 7일 장파쿠이의 반란, 2차 장계전쟁.
- 9월 19일 봉소전쟁 발발.
- 10월 11일 2차 장풍전쟁 발발.
- 11월 13일 국민당 제4차 전국대표대회 소집.
- 12월 5일 탕성즈의 반란, 장당전쟁.
- 12월 12일 서산회의파 제명 결정.
- 12월 15일 편견회의 해체.
8.6. 1930년
- 2월 10일 옌시산의 장제스 하야 요구.
- 4월 5일 중원대전 발발.
- 7월 창사 폭동
- 9월 1일 베이핑 국민정부 수립.
- 9월 18일 장쉐량의 중앙옹호 통전, 동북군 참전.
- 10월 27일 태원약법 제정.
- 11월 4일 베이핑 국민정부 폐지.
- 11월 5일 초공작전 결정.
- 12월 1일 옌시산 망명.
- 12월 19일 제1차 초공작전 개시.
8.7. 1931년
- 1월 3일 제1차 초공작전 종결.
- 2월 28일 탕산 사건, 장호합작 붕괴.
- 4월 1일 제2차 초공작전 발동.
- 5월 27일 광저우 국민정부 수립.
- 5월 31일 제2차 초공작전 종결.
- 6월 27일 나카무라 신타로 대위 살해, 나카무라 사건
- 7월 1일 만보산 사건, 제3차 초공작전 발동.
- 7월 12일 광저우 국민정부의 1차 북벌, 1차 양광사변 시작.
- 9월 1일 광저우 국민정부의 2차 북벌.
- 9월 18일 만주사변.
- 9월 20일 제3차 초공작전 종결.
- 11월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선포.
- 12월 15일 장제스의 주석 하야.
8.8. 1932년
- 1월 1일 영월합작.
- 1월 18일 마옥산 사건
- 1월 28일 왕징웨이 행정원장 취임, 제1차 상하이 사변
- 2월 8일 장제스 군사위원장 취임.
- 5월 5일 송호정전협정 체결
- 6월 제4차 초공작전
- 7월 17일 이시모토 사건.
8.9. 1933년
- 1월 1일 일본군의 산해관 공격, 열하사변.
- 4월 5일 폐량개원
- 4월 12일 4.12 디화 정변
- 5월 30일 당고정전협정 체결.
- 10월 16일 제5차 초공작전 실시.
- 11월 20일 복건사변 발생.
8.10. 1934년 이후
- 1934년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
- 1935년 하매 협정
- 1935년 진토 협정
- 1935년 왕징웨이 저격 사건, 3차 장왕합작 붕괴.
- 1935년 법폐개혁
- 1935년 중미은협정 체결.
- 1935년 기동사변
- 1935년 12.9 운동
- 1936년 2차 양광사변
- 1936년 7군자 체포 사건
- 1936년 서안 사건
-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 - 중일전쟁 발발.
- 1937년 제2차 상하이 사변
- 1937년 난징 전투
- 1937년 난징 대학살 사건
- 1937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 멸망.
- 1937년 트라우트만 공작
- 1938년 왕징웨이 공작 - 왕징웨이 정권 수립.
- 1939년 1939년 동계공세작전
- 1941년 대 추축국 선전포고[8]
- 1944년 대륙타통작전
- 1945년 만주 작전
- 1945년 일본의 항복, 중일전쟁 종결
- 1945년 쌍십협정
- 1946년 중화민국 헌법 제정
- 1946년 국공내전 재개
- 1947년 헌정실시
- 1948년 재정경제긴급처분령
- 1948년 제1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 중화민국 헌법 실시, 국민정부 폐지, '중화민국 정부' 출범
9. 역대 국가원수
10. 역대 정부수반
[1] 만주는 동북역치로 봉천군벌이 국민정부에 합류하여 명목상 국민정부 치하에 있었고, 만주사변이래로는 일제 치하, 1945년 이후에는 소련 치하에 있었다가, 1946년 국민정부에 반환되었으나 직후에는 중국 공산당에 의해 점령되면서 실질적으로는 국민정부가 행정력을 끼친 적이 거의 없다.[2] 상하이 사변때 잠시 옮김. 제1차 상하이 사변 참조.[3] 중일전쟁 참조. 중일전쟁 동안 난징에 설립된 정부는 왕징웨이 정권 참조.[4] 여기에 맞춰 대한민국 임시 정부도 계속 옮겨갔다.[5] 사실 외몽골은 몽골 인민 공화국이 다스리고 있었고, 만주는 소련이 점령하고 있었다.[6] 욘 라베 등 몇몇 독일인들이 중일 전쟁 당시의 중국인들을 도울 수 있었던 이유도 넓게 보면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7] 사실 중화인민공화국도 낙후되기는 했지만 1950년대에 전후복구가 이루어지면서 바로 세계 5위 경제대국으로 손꼽혔을 정도로 강국으로 손색이 없는 수준이었고, 적어도 아시아에서 제1경제대국 타이틀을 얻을 체급은 됐으나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과 같은 실정으로 경제력 세계 13위로 추락했었다.[8] 독이일 3개국에만 했으며, 태국과 헝가리를 비롯한 나머지 추축국과는 선전포고도 교전도 없이 상호 중립을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