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장상 영유종호
1. 개요
왕, 제후, 장수, 재상의 지위는 생득적인게 아니란 의미로 사람의 신분은 태어날 때 정해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 말."공(公) 등은 모두 기한을 넘겼으니 참수를 당할 것이고, 가령 참수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수(戍) 자리 서면서 죽는 자가 열 명 가운데 진실로 여섯 일곱명일 것이다. 또 장사(壯士)란 죽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죽는다면 큰 이름을 드러내야 할 뿐이다. '''왕(王), 후(侯), 장(將), 상(相)의 씨가 어찌 따로 있단 말이냐!"
- 진나라 말기, 진승·오광의 난에서'''[1]
그러나 정작 이 발언을 한 진승 자신이 지도자로서의 전방위적인 재능미달로 패착을 반복한 끝에 섣부른 칭왕의 결정적 우를 범하고 패망하였다. 이후 한고제 유방은 선배에 준하는 진승에게 은왕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왕으로 추봉했으나 이처럼 대비되는 둘의 결과는 신분획득의 선, 후천성 여부와 무관하게 그것이 실력에 달렸다는 역설을 드러내고 있다.
2. 상세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는 급진적인 개혁과 법가를 기반으로 한 폭압적인 통치로 국가에 무리를 끼쳤고 민심은 피폐해졌다. 이세황제 호해(胡亥)는 환관 조고(趙高)에게 실권을 잃고 제국엔 망조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양성(陽城), 지금의 하남성 등봉현(登封縣) 동남쪽 출신인 진승은 BC 209년, 900여 명의 인부들과 함께 만리장성의 건설에 동원되어 공사처로 향하던 중 큰 비가 내려 900명이 함께 고립된다. 제때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 명백해지자 인부들은 진의 혹법에 따라 받을 형벌이 두려워졌다. 목이 날아가게 된 처지에 놓이자 평소 야심있던 진승은 반란을 결심하고 봉기할 때 그는 휘하 인부들을 설득하면서 <왕후장상 영유종호>라는 발언으로 좌중을 선도하였다.
이후 이 문장은 일반 민중에게, 특히 난을 일으키는 민중에겐 일종의 구호로 기능하게 된다.
여기서 쉽게 간과되는 점은, 이 문구가 반봉건의식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상황에 따라 그런 응용이 가능하냐 여부는 차치하고 '왕후장상 영유종호'가 맨 처음 표방한 기치는 광의로 해석한들 민중 해방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진승은 본디 소작농이었고 출신 성분의 한미함만큼 배움이 없었으나 가슴에 품은 뜻이 크고 출세에 목말라 있음을 그는 숨기지 않았다. 세상을 한탄하면서 야망을 감추는 법을 몰랐기에 주위에서 그런 그를 비웃자 연작(燕雀)[2] 은 홍곡(鴻鵠)[3] 의 뜻을 모른다는 비유를 내세웠다. 시기가 되어 거병하였으나 그것은 우발적이면서도 계획된 것이었고, 그렇게 궐기할 때 수졸들의 동조를 얻으려 '진승왕'이라는 계시를 날조했다. 난의 구호로서 '왕후장상 영유종호'는 그저 누구나 왕위를 도모할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지, 신분 질서와 계급 체계, 왕조 체제를 타파하자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 뜻이 와닿는 방식은 사뭇 달라지게 된다.[4] 즉 "신분질서 타파하자!"가 아니라, "나도 왕후장상 하고 싶다!"인 것이다.
3. 기타
- 개천에서 용난다
- 만적의 난 : 실제 만적은 해당 문구를 거론했다고 기록돼 있다.
- 진승·오광의 난
- 천민
- 홍길동전
- 정도전(드라마) : 이성계가 정몽주에게 역심을 드러낼때 역시 사용되는 표현. 자신의 역심을 드러내면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거니? 왕씨는 500년이나 해먹은 임금질을 내는 하면 아니되는거니?"라며 역정을 내고 자신이 역성혁명의 주체임을 강조했다.
[1] 권중달 자치통감 1권. pp403[2] 제비와 참새[3] 기러기와 고니[4] 난을 일으키는 데 동원한 대의명분이 제 한 목숨 살리고 자신이 기왕 왕위에 오르겠다는 너무도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단 점에서 당시의 정황과 진승이라는 반란 지도자를 이해하는 각도 자체에 변화가 불가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