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황제

 




'''진(秦)나라 32대 국군
제6대 왕
초대 황제
시황제 | 始皇帝
'''
<colbgcolor=#000> '''제호'''
'''始皇帝
시황제 | Shi Huang Di'''
'''출생'''
기원전 259년 1월
한단 영자초 사저
'''사망'''
기원전 210년 9월 10일 (50세)
사구
'''능묘'''
여산릉
'''재위'''
<colbgcolor=#000> ''''''
기원전 247년 5월 7일 ~ 기원전 220년
'''황제'''
기원전 220년 ~ 기원전 210년 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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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嬴)[48]
''''''
조(趙)[49] / 여(呂)[50]
''''''
정(政)[51], 조정(趙政)[52][53]
'''부모'''
부왕 장양왕[54], 모후 조희(趙姬)

1. 개요
2. 일생
2.1. 출생과 어린 시절
2.1.1. 출생 문제
2.2. 왕위에 오르다
2.3. 왕권을 되찾다
2.4. 천하 통일을 이루다
2.5. 제국의 통치
2.5.1. 업적
2.6. 말년
2.6.1. 수은 중독
2.6.2. 시황제의 미신 집착
2.7. 죽음과 사구정변
3. 긍정적인 평가
3.1. 최초의 중국 통일
3.2. 통치체계 확립
3.4. 도로 건설
4. 부정적인 평가
4.1. 유의 사항
4.2. 천하통일 업적의 지분문제
4.3. 폭정
4.4. 잘못된 후계자 선정
4.5. 하나의 중국은 한(漢) 제국
4.6. 한나라의 반면교사
4.7. 법가 사상의 맹신
6. 용모
7. 암살 위협
8. 그 외
10. 같이보기
11.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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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秦)나라의 제32대 군주이자, 제6대 왕이자, 첫 번째 황제. 휘는 정(政).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였고 '''황제라는 직위명을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사용한 인물'''이다.[1] 스스로를 첫 번째 황제라는 뜻의 시황제로 자칭했는데, 진나라 첫 황제라는 의미로 '''진시황'''이라 하기도 한다.
고대 중국의 연, 조, 위, 제, 한, 초 6국을 멸망시켜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왕조 진나라부터 청나라까지 약 2000년에 걸쳐 이어진 황제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한 인물이며, 따라서 중국 역사에 결코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1949년 신중국 건국 이전에는 기껏 중국을 통일해 놓고도 가혹한 정치로 백성들을 괴롭히다가 진나라 멸망을 불러일으킨 폭군이라는 혹독한 평을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며 통일 중국을 찬양하는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대만에서도 국민당을 지지하는 외성인들은 마찬가지로 하나의 중국을 추구하기 때문에 진시황에 대한 평가가 좋은 편이다. 북방의 오랑캐들이라며 비난 받던 북방 민족의 정복 왕조인 나라들(몽골족원나라, 만주족의 청나라 등)이 동북공정 이후 중화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재평가되는 것과 유사하다.
사기의 경우는 오로지 진시황 본기만 번역되는 경우도 잦다. 그래서 중국 최초의 평민 황제이자 사실상 중국의 정치 패러다임을 설립한 유방한나라는 오히려 무시당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시호와 묘호가 없는 황제로 유명하다. 흔히 불리는 '시황제'는 시호가 아니라 첫 번째 황제라는 의미일 뿐이다. 시황제가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면서 시호를 폐지했다. (죽은) 황제에게 시호를 올리는 건 (그 다음 군주가 된)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논하고 신하가 (죽은) 군주에 대해 논하여 적당한 글자를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시법), 철권 독재자인 시황제의 눈에는 매우 건방진 관행으로 보였다. 그래서 아예 시호를 없애버리고 황제의 대수만 표기하게 했다. 시황제는 말 그대로 첫 번째 황제라는 뜻. 호해가 '이세황제'라고 불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2] 시황제의 시호가 없는 탓에, 선진#s-2·양한[3](先秦兩漢) 시대 탁월한 군사적 업적을 이룬 시황제와 한무제를 함께 일컬을 때 특이하게도 진황한무(秦皇漢武)라고 표현한다.[4] 어차피 진나라 이세 황제 호해는 황제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치세를 보냈고 재위기간도 짧아 따로 언급할 일이 적고 그 다음 군주인 자영 역시 한 달 조금 넘게 재위한 데다 아예 황제 칭호를 포기하고 왕을 칭했다.[5] 따라서 시황제가 사실상 진나라의 유일한 황제라고 볼 수도 있으므로 진황(秦皇)이 딱히 틀린 표현은 아닌 듯. 물론 진황한무 대신 진시한무(秦始漢武)라고 쓴 예도 옛 문헌을 검색해 보면 발견되긴 하지만 진황한무가 더 일반적으로 쓰인다.

2. 일생



2.1. 출생과 어린 시절


기원전 259년 정월(음력 1월 15일)에 조나라 수도 한단에서 영이인(훗날 장양왕)조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시황제의 아버지 영이인은 진나라의 태자(왕위 계승자)인 된 안국군 영주(嬴柱)의 아들이었지만, 서자라서 보잘 것 없는 대접을 받고 장평대전 이전에 조나라의 인질로 끌려갔다.[6] 그러던 중 당시 사업차 한단에 와 있던 거상 여불위의 주목을 끌어 후원을 받으며 안국군의 정부인인 화양 부인을 포섭해 안국군의 후계자가 되기로 약속을 받는다. 얼마 뒤 영이인은 여불위 집에서 조희를 만나게 되고 여불위에게 부탁해 조희를 받는다. 그리고 영이인과 조희 사이에서 자녀를 갖게 되고 아들이 태어나는데 이 아이가 바로 시황제인 '정'이다.
기원전 257년, 정이 3살 때 증조할아버지자 진나라 국왕인 소양왕 영직이 장군 왕의(王齮)를 보내 장평 대전 때 함락하지 못했던 조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조나라 효성왕은 진나라 인질인 영이인을 죽이려고 마음먹었으나, 여불위가 600금을 뇌물로 써가며 아버지 영이인만 간신히 구출했다. 정과 어머니 조희는 한단에서 탈출하지 못했지만, 조희가 조나라의 호족 집안 출신이라 간신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한편 어린 시절 정은 연나라에서 볼모로 온 세자 단과 친하게 지냈는데[7] 이때 친분을 계기로 연단은 정이 진왕이 된 후 진나라의 볼모가 되었지만, 나중에는 사이가 틀어져서 탈출하기에 이른다.
기원전 251년 정이 9살 때 증조부 소양왕이 죽고 할아버지 안국군이 효문왕으로 즉위하자, 아버지 영자초(영이인의 개명이름)[8]도 과거 약조대로 태자가 되었고, 조나라도 태자에 오른 영자초를 두려워해서 영자초의 가족인 조희와 정을 진나라로 보냈다. 그리고 효문왕이 즉위한 지 3일 만에 병사하고 태자 영자초가 진나라 장양왕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정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진나라 후계자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자초의 후원자였던 여불위는 승상이 되어서 강력한 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

2.1.1. 출생 문제


呂不韋取邯鄲諸姬絕好善舞者與居,知有身。子楚從不韋飲,見而說之,因起為壽,請之。呂不韋怒,念業已破家為子楚,欲以釣奇,乃遂獻其姬。姬自匿有身,至大期時,生子政。

여불위는 한단 땅의 여자 중에 매우 아름다우며 춤을 잘 추는 여자를 얻어 함께 살다가 임신한 것을 알았다.

영자초는 여불위와 술을 마시다가 그녀를 보고 반하여 일어나 장수를 기원하며 그녀를 청했다.여불위는 처음에는 노했으나

이미 영자초를 위해 집안이 무너져도 진기함을 낚으려는 일을 생각해 마침내 첩을 자초에게 바쳤다.

그녀는 스스로 임신을 숨기고 만삭이 될 때에 이르러 아들 정(政)을 낳았다.

《사기》 여불위 열전

시황제의 어머니인 조씨(후일 왕후가 되면서 조희라고 불린다.)는 원래 조나라의 거상 여불위가 데리고 있었던 여자인데, 이후 여불위가 진나라 승상까지 된 것을 보고 원래 시황제는 조씨가 임신했던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사실 사마천사기 여불위 열전에서 시황제는 여불위의 아들이라고 적고 있는데 그 외에 정확한 근거가 발견되진 않았으므로, 현대에는 진나라의 멸망 이후, 진 왕조의 정통성을 깎아내리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아 부정하는 견해가 있다.
사마천 본기의 시황제 편에서는 시황제는 장양왕의 아들이라고 적었다.

진 소왕 50년에 왕의(王齮)를 시켜 한단을 포위하게 하여 위급해지자 조나라는 자초를 죽이려 했다. 자초는 여불위와 모의하여 금 600근을 내어 자초를 감시하는 자에게 주고 탈출한 다음 진나라의 군대로 도망쳐서 마침내 귀국했다. '''조나라는 자초의 아들과 부인을 죽이려 했으나''' 자초의 부인이 조나라의 호족의 딸인지라 숨을 수 있었고, 이로써 모자는 결국 살아날 수 있었다.

《사기》 여불위 열전

여기에서 말하는 자초의 부인은 문맥상 바로 앞에서 여불위의 집에 있었다가 자초의 부인이 된 그 여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녀가 조나라 호족가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 국가를 피해 도피를 지원할 수 있을 정도의 호족가라면 보통 힘있는 집안은 아니었을 것인데, 그런 집 딸이 무희(이자 일종의 접대부)였다는 것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희가 조나라 호족 집안의 본처소생인지, 근거 없는 첩의 소생인지 알 수 없으며 자초가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있을 당시 조희 외에 또다른 부인의 존재 가능성 역시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2.2. 왕위에 오르다


영자초가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 당시 진나라 왕이자 시황제의 증조부였던 소양왕이 붕어하였다. 효문왕(=안국군)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사흘만에 붕어하고 말았고[9] 이를 이어 영자초가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장양왕이었다. 그러나 장양왕도 3년 만에 붕어하는 바람에 정이 13살에 진나라의 왕이 된다.

2.3. 왕권을 되찾다


아직 진왕 정의 나이가 어렸던 탓에 당시 장양왕의 후원자로서 막대한 권력을 누렸던 승상 여불위가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분으로 상방(相邦)[10]의 직위에 올랐으며, 왕으로부터는 아버지와 같다는 '상보'(尙父)[11]의 칭호까지 얻었다. 이토록 강력한 권세를 얻은 여불위는 아직 나이가 어린 시황제 대신 나라를 다스리는 섭정이 되었다. 때문에 진나라의 실권은 사실상 여불위의 손 안에 들어갔다.
여불위가 상방에 지위를 얻은 이후부터 과거에 자신의 첩이었던 정(시황제)의 어머니 조 태후와 간통을 하였다고 한다. 여불위는 이 사실이 들통날까 두려워했으나 조 태후가 여불위를 사랑하여 늘 불러 정을 나누려 했으므로 결국 가짜 환관 노애(嫪毐)를 조 태후 옆에 붙여 시중들게 하였다. 노애는 정력이 출중해서 조 태후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후로 조 태후는 과연 여불위를 찾지 않았다. 그러나 간통이 길어지면서 조 태후는 노애의 아이를 두 명이나 낳고 말았는데 여기에 더하여 노애와 조 태후는 아이들을 감추어놓고 키우면서 정을 몰아내고 그들의 아들을 왕으로 삼고자 하는 모략을 꾸몄다.
그러나 정이 성인이 되었을 쯤에 이들의 행각은 곧 발각되었다. 당시 노애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움켜쥐고 있었던 덕택에 그의 성격은 점점 더 거만해졌다. 하루는 연회에서 술주정을 하다가 어느 신하가 그의 거만한 태도를 꾸짖자 도리어 "내가 왕의 계부인데 두려울 게 뭐냐?"는 말까지 듣고 말았다. 모욕을 당한 그 신하가 속을 터트리며 나가는 것을 본 정이 그의 분개한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물었다. 이야기를 들은 정은 노애를 몰래 조사하여 모든 진상을 파악하고 말았다.
노애는 조 태후와의 불륜이 드러나자 최후의 발악을 하여 진나라 수도인 함양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정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이를 진압하도록 명하였다. 정이 곧 창문군창평군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켜 반격에 나서게 되니, 수도 내에서 교전까지 벌인 끝에 노애는 패하여 달아났다. 승리한 정은 조 태후가 노애와 간통하여 낳은 아이들, 즉 이부동생들을 자루에 넣고 때려서 죽였으며, 달아난 노애를 붙잡아서 사지를 찢는 거열형에 처한 뒤 그 삼족을 멸하였다. 이후 자신의 어머니인 조 태후를 싫어하게 되어 그녀를 유폐하였다. 하지만 신하들의 간청으로 조 태후를 다시 함양의 왕궁으로 불러와 모셨다.
한편 정은 실권자인 여불위도 노애와 조 태후의 스캔들을 들어 처벌하려 하였으나, 여불위를 따르는 신하들과 식객들이 많았기 때문에 벼슬을 빼앗고 낙양으로 유배보내는 정도로 그쳤다. 그러나 한때 왕과 견줄 만한 세력을 지녔던 여불위의 권세는 무참히 꺾여버렸고 실의에 빠진 여불위는 곧 자살하였다. 결국 정은 노애와 조 태후 그리고 여불위까지 왕권을 위협하던 모든 세력을 짓눌러 나이 22세에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비로소 친정 체제를 굳히게 된다.

2.4. 천하 통일을 이루다


정은 상방 여불위마저 제거하면서 마침내 진나라 최고의 실세로 떠올랐으며 잠시나마 실추되었던 왕권을 회복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평생토록 보좌할 이사를 만났고, 그와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소양왕이 쌓은 기반으로 나머지 6국을 통일할 계획을 세우고, 우선 정은 모사인 울료의 주장대로 6국의 대신들을 미리 매수하고, 6국 사이를 이간질을 시키도록 조언하였는데, 이는 실제로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매수당한 간신들은 나라의 유능한 장수들의 활동을 저지하여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싸울 수 있었고, 6국이 서로를 믿지 않아서 도우려 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 정은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여서 진나라와 인접했던 국가들부터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기원전 230년에 한나라를 장군 등이 멸망시켰고, 그 다음에는 조나라를 장군 왕전이 수도를 함락시켜 멸망시켰다. 기원전 225년에는 위나라를 쳐서 멸망시켰다.
그 뒤 이신의 주장대로 20만의 군사로 초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초나라의 명장 항연에게 격파당하자, 노장 왕전의 주장을 받아들여 60만 대군으로 다시 공격해 기원전 223년에 초나라를 멸망시킨다. 궁지에 몰린 항연은 결국 자결로서 생을 마감했다. 사기에 의하면 당시 초나라의 군사도 40만 명이였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로 보인다. 다만 진나라만큼의 중앙 집권력이 없었고 각 귀족들의 사병이라는 성격이 강했기에 진나라에게 패배한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정의 조나라 볼모 시절 친구였고, 진나라의 볼모였다가 탈출한 연나라 태자 연은 진나라의 이런 정복 활동을 우려해서 형가를 보내어 정의 암살을 시도했다 실패하고, 정은 이를 빌미로 연나라를 공격했다. 요동까지 도망간 연나라 왕 연희는 연단의 목을 잘라서 바치면서까지 용서를 빌었으나, 정은 거부하고 집요하게 추격해서 연나라 왕을 사로잡아 연나라는 기원전 222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제나라를 쳐서 제나라 왕의 항복을 받아내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제위 17년인 39살에 약 10년 만에 정은 중국을 통일하는 천하 통일의 엄청난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다만 엄밀히 말하면 시황제는 모든 중국을 통일하진 못했다. 왜냐하면 전국 시대가 끝난 후에도 엄연히 위(衛)나라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시황제는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스스로 위(衛)를 야왕(野王)으로 옮겨놓고도 끝까지 멸망시키지 않았고 2대 황제인 호해가 위의 마지막 군주 을 서민으로 만들면서 완전히 멸망시켜 버린다.

2.5. 제국의 통치


통일 후 정은 기존의 전국 시절 군주의 호칭인 진왕(秦王)을 대체할 호칭을 찾는다. 이에 신하들은 태황이라는 호칭을 주장했으나 시황제는 그 주장을 물리고, '''태황에서 '황'만을 남기고 신을 뜻하던 상고의 호칭 '제'를 붙여 황제란 칭호를 만든다. 그리고 자신이 진나라의 첫 황제, 즉 진 시황제가 되었다.'''
황제의 칭호를 도입하면서 천자의 명령을 교(敎)가 아니라 조(詔)라고 바꾸고[12], 천자의 자칭을 종전의 고(孤)나 과인(寡人) 대신 짐(朕)으로 바꾼다. 이전까지 '짐'은 고대 중국어의 1인칭 대명사 중 하나였는데[13] 시황제는 '짐'을 천자의 전유물로 바꾼 것이다. 이때 시황제가 확립한 조와 짐의 용법은 후대 왕조에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또 시황제는 황제의 칭호를 도입하면서 천자에게 시호를 올리는 것을 금지했다. 시황제가 천자의 시호를 올리는 것을 금지한 이유는 시호라는 게 군주가 사망 후에 후대 왕이나 신하들이 생전의 공과 과를 평가하여 정하는 것이라서, 천자에게 시호를 올릴 경우 '''감히 아들(새로 즉위한 군주)이 아버지(죽은 군주)에 대해 논하고''', '''감히 (살아 있는) 신하가 (죽은) 군주에 대해 논하게 된다.''' 시황제는 이것이 굉장히 무엄하다고 생각해서 폐지했던 것이다.[14] 그래서 진나라의 황제는 다른 왕조와 달리 시황제(첫 번째 황제), 이세 황제(제2대 황제) 이런 식으로 불리는 것이다. 하지만 천자에게 시호를 올리는 관습은 시황제의 아들 이후 한나라 때에 바로 부활했다.

2.5.1.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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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시황제는 본격적인 제국 통치 사업에 몰두하면서 갖가지 개혁 정책을 내놓는다.
우선적으로 군현제를 실시하였는데, 이전에 주 왕조가 중국 대륙을 통치했을 때 사용한 봉건 제도와는 그 근본이 달랐다. 기존에 실시되던 봉건제도는 국가의 수장인 왕이 중앙을 통치하되, 그 외의 부분은 쪼개어서 왕족이나 공신들을 제후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는 형식으로써 중앙 권력에 비해 지방 정권이 더욱 비대해 질 수 있는 구조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시황제는 이러한 봉건 제도를 폐지하고, 나라를 군과 현의 행정 지역으로 나누어 쪼갠 후에 중앙 정부 소속의 관리들을 파견하여 다스리는 군현제를 실시함으로써 '''중앙 집권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아무래도 주나라가 봉건 제도로 나라를 다스리던 중에 지나치게 성장한 제후국에게 온갖 못볼 꼴 다 보였던 것을 보고 배운 듯하다. 이 군현제는 진나라 멸망과 초한전쟁을 거치며 사라졌지만 전한한고제 시기에 군국제로 반쯤 부활하고 한무제 시기에 마침내 다시 정식으로 부활한다. 하지만 이후에는 좀 더 세분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느꼈는지 주-군-현 3단체계로 개편되고 원나라 전까지 그러니까 남송시기까지 약 1300년 가까이 중국의 행정제도가 된다.
이러한 중앙 집권 체제 강화를 위해서 진나라의 통치 이념이 되었던 법가 사상을 중국 전역의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는 등 사상 개혁도 시도하였다. 이때에 서적에 대한 탄압을 실시하여 진나라 역사책과 법령집 외에 농사, 천문, 점술, 의학 등 실용 지식에 관련된 서적을 제외한 대부분의 경서들을 없앨 것을 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학자들과의 충돌이 일어났고, 이로 말미암아 분서갱유와 같은 참혹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15] 게다가, 이러한 사상 개혁은 부작용이 컸다. 더욱이 법가의 지나치게 업격한 법률이 중국 전국의 통치에 쓰이게 되자 엄격한 데다 지역적으로도 맞지 않은 법률과 형벌에 익숙하지 못했던 6국의 백성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진시황은 온 나라가 들썩일 정도의 대규모 토목 공사를 수차례 벌이기도 하였다.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아방궁[16]진시황릉을 건설하여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는 한편, 운하를 파서 수로를 통한 교역과 물품의 운송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언제나 중국에 위협이 되어온 북방 민족들의 침략을 방어하고자 기존 7국의 성벽들을 보수해서 길다란 성벽을 건설했고, 진나라 멸망 이후에도 여러 나라들이 이 성벽을 보수, 증축, 신축하여 만리장성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중국 통일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각지의 나라마다 화폐와 서체가 달라 서로 간에 교류하는 데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여겼는지 중국 전역의 화폐서체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통일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후로 물건의 치수나 길이를 재는 도량형 등도 하나로 통일되도록 하였다. 이는 모두가 통일된 넓은 중국 전국의 통치를 원활히 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특히 서체의 통일은 단순 교류의 목적이 아니라 문서기반의 중앙집권적 행정체계의 핵심이었다. 모든 보고를 오직 문서로만 하도록 하고 황제의 명령이 관료제의 피라미드를 따라 전국에 전달되도록 하는데 공문서의 서체 통일은 필수적이었다.

2.6. 말년


이런 급진적이고 과격한 개혁들은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또 폭압적으로 이루어지는 바람에 백성들의 불만이 대단하였다. 우선 진나라의 통치 이념이었던 법가 사상의 가혹하고 무거운 통치는 백성들, 특히 정복당한 6국의 사람들에게는 지옥이 따로 없었고, 이러한 까다로운 법률과 무거운 형벌 때문에 민심은 피폐해져만 갔다. 당시 진나라의 신분제는 이십등작이었는데, 전장에서는 수급 하나마다 한 계급씩을 올려줬고 죄인은 계급에 따라 감형이나 형벌을 계급 강등으로 교환할 수 있었다. 진나라의 백성들이야 지난 정복 전쟁에서 획득하였던 군공과 계급이 있었지만, 정복당한 육국의 백성들은 진나라를 위해서는 공을 세운 바가 없었기에 당연히 작위가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6국의 백성들은 안 그래도 가혹한 제도와 형벌에 피지배민으로서 그대로 노출되면서 차별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진시황릉 건설, 흉노 정벌, 만리장성 건설 등등에 수십만의 인력을 동원해 국력을 낭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잦은 인력 동원과 과도한 세금 징수로 진승, 오광이나 유방의 경우처럼 민중의 엄청난 반발을 샀고 이러한 점들이 진나라 멸망의 원인이 되는 농민 반란의 씨앗이 되었다. 이 때문에 황태자인 장남 부소마저 보다 못해 과도한 사업들을 중단하고 민생을 돌보라는 간언을 하였지만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부소몽염이 있는 만리장성 건설 현장으로 추방해버리는 등 전형적인 암군의 모습을 보여준다.

2.6.1. 수은 중독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있는 진시황의 말년의 기행과 폭정, 암군의 행태는 진시황이 중장년부터 꾸준히 복용했던것으로 알려진 수은 중독으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다.
수은에 장기간 노출될 시 우울증, 의욕상실, 비정상적 졸음 등 정신적인 장애를 동반하며, 심할 경우 환각, 정신착란, 기억상실로 지능이 극도로 떨어진다. 즉 '''뇌가 망가진다'''.
따라서 '의욕적인 개혁군주, 유능한 정복군주'의 모습을 보이던 그의 전반의 치세와는 달리, 완전한 암군의 모습을 보여 황릉에 천문학적인 국가예산을 쏟아붓고, 불로초를 찾아 다니느라 국고를 탕진하며, 각종 미신에 빠져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치세의 후반부는 그가 이미 중증 수은 중독에 걸려 '''정신지체장애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2.6.2. 시황제의 미신 집착


(중략) 진인은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습니다. 구름을 타고 다니며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존재합니다. 지금 주상께서 천하를 다스리시지만 욕심 없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셨습니다. 바라옵건대 주상께서 머무시는 궁을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불사약을 구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에 시황은 “짐이 진인을 흠모해왔다. 이제부터 짐이라 하지 않고 ‘진인’이라 부르겠다”라고 했다. 바로 명을 내려 함양 부근 200리 안에 있는 궁관 207곳을 구름 다리와 회랑으로 연결하고, 휘장, 종, 북, 미인들로 채우되 모두 등록된 각자의 부서에서 함부로 옮기지 못하게 했다. 황제가 행차하여 거처하는 곳을 발설하는 자는 사형에 처했다.

-사기 진시황 본기

말년에 들어 시황제는 미신에 집착하게 되어 대규모 국책 사업으로 국력을 낭비하기 시작한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진시황릉으로 진시황 본기에 따르면 즉위 직후부터 짓기 시작해서 통일 이후에는 70만 명(총인원으로 추정)을 동원해서, 수십 년간 나라에는 조금도 도움이 안 되는 초대형 무덤을 만들었고 결국 죽을 때까지 완성하지 못했다. 그 외에도 진나라는 '''호''' 때문에 망한다는 망진자호야라는 점쟁이의 점괘[17]를 믿고 수십만을 동원해서 흉노를 정벌하고 만리장성을 쌓아 국력을 낭비하고, 불로불사에 집착해서 사기꾼들에게 속아서 잡초를 사들이거나 당시 귀금속인 수은을 사는 등 국고를 낭비하고, 최후에는 홍의동자 꿈을 꾸고 꿈속의 홍의동자가 자신의 나라를 빼앗을 거라는 해몽을 믿고 순행길에 올랐다가 병사하는 등 미신에 푹 빠져 버린다.
시황제의 미신에 대한 집착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 불로초다. 점차 나이가 들어가던 시황제는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불로불사에 집착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갖은 사기를 당하며 재정을 낭비하였다. 특히 서복이라는 사기꾼이 동해 바다에 살고 있는 신선에게 불로초를 구해오겠다며 뻔히 보이는 사기를 쳤는데도 시황제는 그대로 속아 넘아가 서복에게 엄청난 양의 재물과 동남동녀들을 딸려보내 주었던 일화는 무척 유명하다. 제주도서귀포시의 이름도 시황제의 불로초를 찾아 온 서불의 전설에서 나온 지명. 이외에도 수많은 사기꾼들이 돈을 노리고 불로불사의 약을 구해오겠다면서 시황제에게 돈을 뜯어 달아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지만 그때마다 시황제는 늘 속아넘어갔다.[18]
진시황은 암살의 위험을 두려워해 환관 조고가 없이는 누구도 진시황을 만날 수 없게 했고 그 탓에 조고의 권력은 비대해 졌으며 진시황의 통일에 큰 공을 세우고 법률체계를 만든 이사마저도 조고에게 고개를 숙이고 아첨해야할 정도로 조고는 진나라 권력의 핵심이 된다.

2.7. 죽음과 사구정변


말년에 불로초 찾기 대모험과 같은 삽질만 하던 시황제는 자신이 제패한 중국의 천하를 둘러보고자 여러 차례에 걸쳐 전국 순행을 단행했으나, 다섯 번째 순행 도중에 병에 걸려 회복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기원전 210년 7월 사구(沙丘 : 오늘날 하북성(河北省) 평향현(平鄕縣) 부근)에서 병사하면서 약 50년간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했다.
이에 대하여 사기에서는 한 가지 일화를 전한다. 평소에 미신에 대한 집착이 심했던 시황제가 낮잠을 자던 도중, 하늘에서 해가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곧바로 홍의동자청의동자가 나타나 서로 그 태양을 가지기 위해 싸웠는데, 홍의동자는 청의동자에게 수 차례 두들겨 맞아 쓰러져도 기어이 일어나 단 한 번의 일격으로 기어이 청의동자를 물리쳤다. 시황제가 홍의동자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묻자, '나는 백제(百帝, 서쪽의 방위신)의 아들이며 이후 사백 년 황조의 기틀을 다질 자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사후 시황제의 유서에 의해 멀쩡한 장남 부소몽염과 같이 사형시키고, 무능하기 짝이 없었던 호해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바람에 나라가 작살나 버렸다. 이 때문인지 호해가 이사조고 등과 짜고 유서를 위조했다는 소문이 호해 제위 직후부터 돌아서, 진승·오광의 난 등 부소를 사칭한 반란이 일어났고, 한나라 이후 공식화 되어서 사마천이 사기에 기록해서 정설이 되었다. 위에서도 말한 이야기지만 '''문제는 그 측근들이 설사 정말로 유서를 위조했다 하더라도 대체 그들이 유서를 위조했는지 여부를 사마천이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냥 흔히 떠돌던 낭설을 2세 황제의 바보짓 때문에 시황제 같은 사람이 정말 2세 황제를 후계로 삼았을 리가 없다고 여긴 사마천이 믿어 버렸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사마천이 이 기사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또다른 설로는, 사마천이 책을 쓰던 시기에는 정말 모두가 저 밀담에 대해서 당연하게 알고 있던 사실이라 따로 출전을 적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고, 혹은 이사가 형을 받으면서 모든걸 불었다는 의견도 있다. 단지 사마천이 따로 적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아들 호해와 관련되어 한 가지 민간 설화가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진나라는 호에게 멸망할 것이다(망진자호야, 亡秦者胡也)'라는 점괘가 사실은 이민족(胡)이 아니라 호해에게 망하고 말았다는 얘기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오랑캐에 의해 멸망할 줄 알아서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되려 나라는 돌보지 않고 놀기만 하는 무능한 아들인 호해에게 멸망당했다는 것이다.

3. 긍정적인 평가



3.1. 최초의 중국 통일


비록 시황제가 말년의 폭정으로 기껏 통일해놓은 진나라를 크게 약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했으나, 최초로 중국 전역을 통일하여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놓은 시황제의 업적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외형적인 통일을 넘어서서 서체(서체 통일은 한나라 때 완성)와 도량형, 화폐, 법 등을 통일함으로써 수백 년간 여러 나라로 쪼개져 있으면서 문화가 이질적으로 발전한 각지의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 놓는 역할도 하였다. 특히 시황제 시기에 확립한 통일제국의 통치 제도와 행정체계 등 근간 시스템은 한나라에서 문자그대로 복붙수준으로 계승되어 근대화 이전까지 2000년이 넘도록 모든 중화문명권 국가들에 적용되었다. 즉 동아시아 문명권 전체의 국가시스템을 확립한 시초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현재 중국에서는 굉장히 띄워 주고 있는데 특히 최근에 들어 중국 내의 소수 민족들과 중국 한족 간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분위기에도 잘 어울려 거의 국가 차원으로 띄워주고 있는 듯하다. 물론 긍정적인 평가는 역사적으로도 있었고, 중국 정부의 평가도 폭군으로서의 실정은 인정하는 등 찬양일색은 아니므로 '이게 다 중국 정부 덕이다'라는 식의 인식은 어느 정도 과장이라 할 수 있겠다.
황하 유역, 장강 유역, 나아가 서부 내륙과 난링, 우이산맥 이남 남중국 일원까지 모조리 통일하여 단일 국가 하에 놓이게 한 첫 인물이 시황제임을 상기하면, 그가 중국이라는 하나의 국가 개념, 문명권 개념이 태동함에 끼친 영향은 실로 가공할만한 것이라 평해도 그리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또한 계속 언급되듯 시황제의 업적이 아무것도 없던 변방의 후진국을 혼자의 힘만으로 발전시킨 후, 여섯 나라를 모두 무너뜨리고 천하 통일을 17년 만에 했다고 포장하는 건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다 된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기엔 어려운 것이 그 숟가락도 밥상에 못 얹는 어리석은 이들은 분명 있다. 밥상에 숟가락 얹는 것도 능력이며 그마저도 못 해먹은 것뿐만 아니라 그 밥상을 뒤엎어버린 이들도 수두룩한데 천하 통일이란 업적을 밥상에 숟가락 얹어 이뤄낸 것으로 폄하할 수는 없다. 이신왕전의 기용 면에서 보더라도 군사적 안목과 재능은 별로 뛰어나지 않더라도 군주로서의 아량과 그릇은 참되어 이신의 대패에 상심하지 않고 바로 백전 노장 왕전을 기용하며[19] 이례적으로 패배한 이신을 재신임하여 연나라를 정복하는데 공을 세우도록 다시 쓴 정도로 보아 그가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업적을 한 것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추가로 시황제와 진나라의 업적은 '중화'라는 관념을 물리적으로 실현해내었다는 데 있다. 하나의 중화, 하나의 문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영토와 통치의 단일화는 필수이다. 하나의 문명권이라는 개념을 심어주지는 못 했지만, 하나의 영토가 될 수 있다는 점 만으로도 중화의 단초를 제시한 군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시황제의 통일은 하나된 중화를 이루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전제 조건인 하나된 영토를 최초로 달성했다는 측면에서, 한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시황제의 진이 중화 문명의 형성에 상당 부분 기여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진나라 이후 일어선 초와 한은 제후들을 분봉하면서 진나라의 체제를 부정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들의 창업군주인 유방항우도 내심 시황제의 위세를 부러워 했었고, 시황제를 워너 비로 여겼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부러워한 위세는 강력한 권위를 가진 통일제국의 군주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하여 일시적으로 분봉제를 시행했던 한나라도 결국은 점차적으로 분봉왕들의 세력을 약화시켜 중앙집권으로 갔고, 항우의 분봉 역시 끝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한나라, 초나라가 분봉제를 채택한 건 옛날이 좋아서 돌아가려는 게 아니라 구세대들의 반발을 줄이기 위해 과도기적인 성격이 크다.[20]

3.2. 통치체계 확립


진시황이 최종적으로 완성해 낸 법가적 국가 운영 방략과 그에 기반한 율령, 관료 체제는, 유교적 이념과 함께 후일 동양 왕조의 한 전형성을 구성하는데 있어 필수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그가 적어도 역사의 한 대목에서 기념비적 이정표를 제시한 인물이란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흔히 동아시아 문명권을 유교문화권으로 칭하지만 실제 통치 체계의 큰 구조와 세세한 부분까지 통일 진나라의 통치제도를 그대로 따라갔다. 물론 선대의 업적을 물려받은 것이긴 하나 통일 이후 어전회의에서 봉건제를 주장한 신하가 사기에 남아 있고 진을 멸한 후 잠시나마 천하의 주인이 된 항우는 구시대적 질서인 봉건제를 재건했다. 유방도 천하 통일 이후 한나라의 제도를 정할 때도 무심코 봉건제로 갈뻔했다. 즉 당대 사람들은 새로운 천자의 통지제도로 군현제보단 주나라식 봉건제를 먼저 떠올렸고 익숙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사의 간언을 수용하고 전면적 군현제의 실시를 밀어붙인 장본인이 시황제이다. 적어도 아무나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니다.

3.3. 만리장성 건축


중국 북쪽에는 흉노족들이 살았는데 이들의 땅은 농사짓기 힘든 곳이여서 추수할 때가 되면 진나라로 쳐들어와서 곡식들을 약탈했다. 그래서 이들을 막기위해 진나라 북쪽의 성벽들을 이어붙여서 만리장성을 건축하게 됐고 덕분에 흉노족들을 막을 수 있었다.

3.4. 도로 건설


진시황제는 수도와 주요도시로 연결되는 큰 도로를 만들었다. 이 도로 덕분에 황제의 명령이 빠르게 주요도시들로 전달됐고 반란이 일어나면 군대를 빨리 보낼 수 있었으며 큰 도로인 만큼 안전해서 장사하는 상인들도 안전하게 다른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4. 부정적인 평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였던 대업적은 당연히 높게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최초의 통일 이후 갖은 폭정과 숱한 실책을 벌였고 결국 자신이 합쳐놓은 나라를 자신이 도로 흩어놓기에 이르렀다.

4.1. 유의 사항


먼저 알아둬야 할 건 통일 제국으로서 중국의 문화를 본격적으로 꽃피운 건 한 제국부터라 할 수 있다. 진을 엎어버리고 세운 게 한나라인 셈이니 한나라에서 편찬된 사기에는 전 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분위기가 강했고 진나라에 대한 부정적인 기록 또한 많은 편이다. 게다가 은근히 위정자들을 비판하는 부분이 있는 사기인만큼, 진시황 본기 자체가 한무제를 어느 정도 빗댄 게 아니냐는 추측도 할 수 있다. 실제로 한무제와 진시황은 닮은 부분이 상당히 많다.
또한 과거 유교를 국교로 숭상한 중국과 한국의 왕조들, 그리고 유학자들은 진시황을 매우 낮게 평가했다. 언급이 나올 때마다 거의 폭군의 대명사 수준으로 까인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시황제부터가 유교를 매우 싫어했으며 그 유학자들 본인을 마구 죽였기 때문이다. 분서갱유같은 초유의 일까지 저질렀던 것이 기록에 남아있는 판이라 표면적으로라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이런 사정은 서양도 비슷한데 크리스트교가 지배적이었던 유럽에서는 전근대까지만 해도 기독교를 박해한 디오클레티아누스에 대한 평가가 시궁창이었다.
전국시대는 하루가 멀다하고 10만 단위로 전쟁이 벌어지고 한전투에서 수만씩 죽어나가는 생지옥이었다. 전국 칠웅 전체가 병영사회로 국가 총동원령이 상시 유지되는 체제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통일 진나라의 통치가 가혹하긴 하나 전국시대보다 특별히 더 가혹한 통치라고 단언하긴 어렵다. 대외 원정과 궁궐신축등은 신생 통일왕조 중에 안 한 왕조를 찾기 힘들 정도기도 하고. 특히 아방궁은 폭정의 대표적인 예지만 고고학적으로 실존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21]
또 진 본토의 오리지널 진나라 백성들은 큰 반발이 없었다. 오히려 영씨 왕실에 대한 지지가 강했기에 자영이 조고를 축출할 기회를 얻었고, 그를 우호적으로 대우해준 유방은 옛 진나라를 원활히 접수할 수 있었다. 반진 봉기도 육국의 정체성과 기반이 남은 상태에서 바로 어제까지 원수였던 진에 대한 반발심이 있었을 지역에서만 봉기가 일어났으니 단순히 폭정 탓으로만 돌리기엔 무리가 있다.[22] 결과적으로 진을 멸한 것도 육국 지배층의 후예들의 대표인 항우였고. 진승 오광의 난의 시발점 이야기 등 사서의 기록과 실제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진나라의 법과 제도가 상충하는 면도 많다.
정론은 "시황제는 폭정을 자행하여 멸망의 단초를 자행했다" 이고 이것이 역사적 실체와 한참 멀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육국 유민들 입장에서 폭정으로 받아들일 만한 요소가 매우 많았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폭정으로 거론되는 예의 상당수는 통일왕조에서 통합을 위해 으레 추진하는 사업들도 많다. 이 경우는 성군으로 평가받는 군주들도 시행한 사례가 많아 결과론적인 평가이기도 하다. 당대에 육국 유민들에게 폭정으로 받아들여질만한 각종 정책을 단순히 시황제 개인의 악함으로 돌리기보다는 통일 진제국이 제국의 통합이라는 당면 과제를 다루는 방법과 그 한계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다.

4.2. 천하통일 업적의 지분문제


먼저 알아둬야 할 건 진시황은 홀로 진을 부강하게 일으켜 천하 통일을 이룬 것이 아니라 이미 예전부터 주변국가들 중 최고로 강력했던 국가를 이어받고 정복전쟁을 벌여 통일을 한 것이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국가인 만큼 이러한 업적을 이룬 진시황에 마냥 함몰되어 진시황이 천하를 최초로 통일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마냥 진시황 개인을 위주로만 평가하는 의견들과 태도는 진나라가 어떻게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는지 객관적인 고찰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사실 진은 진시황이 집권하기 전부터 전국 칠웅중 최강의 국가로 평가받았었다.[23]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미 진 헌공 때 국력을 다져, 이후 그 유명한 상앙을 등용, 그의 법가적 개혁 정책을 전폭적으로 실행한 시황제의 현조부 효공, 그리고 이러한 개혁 정책들을 꾸준히 유지한 고조부 혜문왕[24]을 거치면서 증조부 소양왕일 때 사실상 진은 전국시대의 헤게모니를 장악해왔다.[25] 참고로 진시황은 소양왕 사후 불과 5년뒤 13살의 나이로 집권한다.[26]

4.3. 폭정


통일 이후를 보면 진나라인들을 제외한 6국의 후예들은 토목 공사, 군역, 가혹한 세금 때문에 삶이 비참해지는데 시황제 본인은 중국 최초의 통일을 자화자찬하며 쓸데없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그 대표적인 사실이 불로초를 찾아 헤메고 수은을 복용한 것. 진나라 멸망 후 유방은 관리와 제후왕들이 조세법이 애매모호한 걸 툭하면 악용해서 사람들을 혹사한다면서 이 부분은 예외적으로 아예 뜯어고쳐버렸다. 온갖 이유로 세금을 깎고 요역을 막았는데도 나라 운영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국고는 갈수록 부유해지는 걸 보면 시황제 시기의 세금이 얼마나 불합리했는지 상상이 안갈 지경.
사실 진나라가 가혹할 정도로 민중들을 쥐어짠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는데 시황제가 밀어 붙였던 법가 사상의 '법은 함부로 바뀌어선 안된다'였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현실과 맞지않는 법률들을 고치지 않고 계속 이어간 게 치명적이였다. 현대의 법도 안정성 때문에 그리 쉽게 바꾸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법을 맹신하는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까지 가도록 하진 않는다. 특히 법은 사회를 안정되고 질서있게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지 법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러나 시황제의 진나라는 법을 지키는 게 목적이 되었다.
결국 통일 이후 진나라는 전국 칠웅 시대와 중국의 첫 통일 제국이라는 새롭게 바뀐 상황과 현실에 대해 과거 전국칠웅 시절의 법가 정책을 고스란히 강요하는 실책을 저지른다. 쉽게 말해서 전시 체제 때나 통하던 극단적인 법률을 평화시에까지 적용을 시킨 것이다. 가혹한 법이라도 전쟁으로 사람 목숨이 마구 날아가던 시대에는 불평을 하지 못하지만, 사회가 안정기에 들어서고 사람들의 행동양식이 변하였는데도 법의 잣대에 걸리면 가차없이 목이 날아가는 잔인한 통치는 끊임없이 불만들을 가중시켰고, 그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민중들의 반발이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중국 최초의 통일이란 대업을 성취해냈음에도 진나라는 3대 만에 허망할 정도로 순식간에 쪼그라들고 멸망해버렸다. 자신을 시황제로 칭하며 이후의 진나라 황제들이 2대 황제, 3대 황제를 칭할 것을 기대었건만... 이세 황제의 폭정으로 진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시황제를 찬양하는 측에서는 진의 멸망 원인을 죄다 2대 황제인 이세 황제에게 몰아붙이는 경우가 태반인데 이세 황제의 암정이 큰 비중을 차지했긴 했지만 이러한 진 제국의 혼란의 단초를 제공한 것에는 시황제가 일정 부분 기여했다. 진승의 난은 호해 즉위와 거의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에 사후대처 외에 반란의 원인 자체는 진시황의 책임이라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 더욱이 뭐가 어떻게 된건지 중앙에서 동원할 군사도 15년 사이에 증발해버렸다고 한다. 계포 말로는 흉노 원정 탓이라고 한다.[27]

4.4. 잘못된 후계자 선정


시황제는 진 제국을 3대 13년만에 망하게 하는 폭탄을 여러개 남기긴 했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게 바로 후계자 결정이었다.
사마천사기에서는 시황제 본인은 2대 황제를 태자인 부소로 지명했지만 그의 사후 조고이사가 자신들이 권력에서 소외될 것을 두려워해 유언을 조작하여 호해를 2대 황제로 옹립하였다고 썼으나 사구정변 항목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그대로 믿기에는 '''너무 구체적인 이야기다.''' 저 정도로 상세한 기록을 남기려면 바로 옆에서 보고 들어야 할텐데 그건 아무리 봐도 무리다. 설령 유언을 조작하지 않은 정당한 계승이어도, 황제 승계라는 엄청난 보안이 필요한 이야기를 그 정도로 정보를 흘리며 했을 가능성은 낮다.
결국은 시황제가 조고, 이사의 감언에 취했을지도 모르지만 2대 황제 지명 자체는 시황제 스스로 결정을 내렸을 가능성이 높은데, 어느 쪽이든 시황제는 제대로 큰 자기 적장자를 두고 어리석고 열여덟 번째 아들인 서자를 황제로 만드는 희대의 삽질을 한 것이다. 아이러니한건 시황제가 그리도 추구했던 법가는 유가와 비슷하게 '''적서차별'''을 대놓고 드러냈던 학문중 하나였는데 이를 거슬렀다.[28]
일단 부소 대신 호해가 2세 황제가 된 이유는 사구정변 때 시황제의 유서를 조작했기 때문이라고 시기에 기록은 되어 있지만 유서 조작이 맞든 아니든 시황제가 부소에게 마음이 떠난 건 거의 확실하다. 시황제가 정신이나 육체나 건재할 당시, 부소를 만리장성 건설하라며 변방으로 내친 건 순수 100% 시황제 본인의 결단이다. 물론 죽기 전에 갑자기 마음이 변해 부소를 차기 황제로 지명했을 수도 있고, 그래서 조고와 이사가 유서를 조작했을 가능성도 없잖아 있지만 시황제의 태도만 보면 분명 부소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황제의 후계자 계승은 당시 진나라 상황을 살펴보면 진짜 답이 없는 결정이다. 진나라는 법가 사상이 지배적이었는데, 법가는 상술한대로 적서차별이 심한 편이다. 이 와중에 멀쩡하게 이름 알리던 부소를 멀리하고 서자를 임명했으니 불만이 안 나올 수가 없고, 멸망당한 6국 출신들은 그런 거 없어도 진나라에 적대심이 강했다.
안 그래도 천하통일 후 무리한 문화 통일 때문에 (성공여부는 둘째치고) 고위층/저위층 안가리고 전체적으로 불만이 만연했는데 심지어 이걸 구 6국 전부에 '''통일 직후'''에 동시에 실시한 만큼 분노가 한 나라가 다른 나라 하나를 흡수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부소는 그래도 장남인데다가 백성 친화적 행보를 보여줘서 진나라 내에서는 물론 타국[29]에서까지 인정을 받는 걸물이었다. 적어도 장자가 엄청나게 답이 없으면 몰라도 상술한대로 부소는 적자계승, 명망, 능력 모든 면에서 합격점인 후계자였는데 이런 후계자를 무기한으로 변방에 내쫓은 것도 모자라 정계 활동 없이 놀기만 한 호해를 황제로 세운 것. 부소가 (진위 여부는 둘째 치고) 황명을 받고 그대로 죽지만 않았어도 나라가 다시 갈라지기 전에 당장 부소파와 호해파로 대규모 내란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컸다.
또 상술한대로 부소를 '태자' '후계자'로 칭하긴 했지만 사실 시황제는 살아 생전 '''부소를 직접 후계자라고 언급한 적은 없다.''' 후계자를 공식적으로 지명하는 태자 제도는 이미 춘추 전국 시대에도 보편적으로 활용해 후계 구도를 안정시키는데 도움을 주었고, 진시황의 아버지 장양왕은 후계자 서열이 떨어졌지만[30] 태자로 공식 지명되자 별 논란도 없이 진나라 왕위를 계승하였다. 즉 호해에게 힘을 실어주려면 태자로 삼든지, 아무리 못해도 생전에 미리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언급이라도 했어야 했다. 그러면 내부 반발은 크게 줄었을 것이다. 시황제는 그렇다고 '''호해를 후계자 후보로 고려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2대 황제는 시황제 사후 유서를 통해서나 밝혀졌고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황제가 뚝딱 생겨난 격이다. 괜히 유언장 조작설이 나온 게 아니고, 당대에도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킬때 주요 명분 중 하나가 이거다. '''정통성도 없는 가짜 황제 호해가 폭정까지 일삼으니 들고 일어나자!'''는 것이다.
고작 수십 년 분열기를 끝내고 태어난 왕조들도 분열기의 관성 때문에 모두 2-3대에서 한 번씩 위기를 맞이했지만 중앙정부가 굳건하면 어렵지 않게 위기를 넘겼다. 농민봉기는 제대로 돌아가는 중앙정부가 있으면 치명적인 문제가 전혀 아니다. 숙손통의 일화를 참고하면 진승·오광의 난 초기, 대신들의 초동대응 요청을 호해가 언짢아해서 없는 일이 되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진압을 명했다면 그 강대한 진나라가 반란 시작 1년여가 지나도록 병력 징발도 못해보고 수도 코앞에 반란군이 나타나서야 죄수를 끌어다 쓰는 병크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후대의 국가들의 예를 보면 (누대에 걸쳐 이미 망조가 든 나라가 아니라면) 진시황은 비교도 안되는 폭군들이 온갖 미친 짓을 해서 온사방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는 와중에도 중앙정부만 제기능을 유지하면 수십 년은 거뜬히 버텨냈고 결국 망해도 지배층 내부의 반발로 망하는게 대다수다. 따라서 통일 왕조의 가장 취약한 시점에 정통성이 부족한 호해를 아무 사전 준비 없이 후계로 올려 엄청난 숙청과 내부 혼란을 초래했고, 이는 진시황 최대의 실정이자 진나라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라 할 수 있다.

4.5. 하나의 중국은 한(漢) 제국


분명 시황제는 중국이라는 '''영토'''를 통일하는데에는 성공했지만 시황제 본인이 바라던 '''하나된 중국'''을 이루지는 못했다. 시황제 생전에는 여전히 각국에 원래 국가로의 독립을 원하던 반란분자들이 쎄고 빠졌고 내부로는 폭정과 후계자 문제, 인재 부족등 온갖 일들로 곪아있었다. 결국 시황제가 그리도 바라던 진정으로 하나된 중국은 '''한고제의 전한'''이 되어서야 이룰수 있게 되었고 고작 100년도 못간, 3대에서 끝난 통일 진나라는 어디까지나 분리된 중국을 하나의 국가로 만들었다는 점만 의의가 있지 문화통일이나 그런 면에서 보자면 실패한 거나 다름없다.
명백하게 중국은 한(漢) 제국의 400여 년 통치를 겪으면서 하나의 중국의 개념과 정신이 형성되었다. 3대 만에 망한 진나라에서 하나의 문화 개념과 하나의 중국이란 개념을 심어줄 수는 없었다.
시황제의 중국 통일이 이후 한제국이 하나의 중국을 형성하는데 밑거름들 중 하나가 된 것은 분명하나 시황제의 중국 통일은 이후 진나라가 빠른 속도로 무너진 데다 무엇보다도 항우가 18제후왕들을 분봉하면서 진의 통일이 무색하게 중국을 또다시 갈라 버림으로서 한제국의 하나의 중국의 형성에서 진나라의 영토 통일의 의미는 상당부분 퇴색되어 버린 지 오래다.[31] 결국 한 제국은 항우의 임명을 받은 여러 제후왕들과 수많은 전투를 거치면서 중국을 두 번째로 통일하게 된다.[32]
요약하자면 진나라는 씨족공동체에서 출발한 분권적 구시대를 박살내며 통합된 중국의 가능성을 최초로 보여주었고 그 하나의 중국을 다스리는 시스템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 시스템의 적절한 운영법을 더하여 완성하고 하나의 중국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며 사회 문화적 통합을 이루어낸 건 온전히 한나라의 공이다.

4.6. 한나라의 반면교사


한나라에게 있어 진나라는 좋은 반면교사였다. 진은 한 제국이 가지게 국가 운영 방략과 율령, 관료 체제, 국가 이념 성립, 경영 전략에서 좋은 반면교사[33]이자 참고 대상이었다. 게다가 한나라는 국가 운영 방략으로 법가를 시행하면서 정신적 이념으로는 황로사상을 택하여 실제 운용은 느슨하고 융통성있게 하는 등, 3대 만에 망해버린 진의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점은 비판하고 버리는 실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과진론이다.

4.7. 법가 사상의 맹신


시황제는 법가를 신봉하다 못해 맹신해 통일 후에 불편함 등을 이유로 도량형과 화폐 등을 통일, 개선하면서도 정작 진나라 사회의 근간이 되었던 법령을 고치지 않고 통일된 중국 전역에 계속 적용, 지속시키는 돌이킬 수 없는 실정을 저질렀다. 효공 시절부터 내려온 진나라의 법가적 통치는 진나라의 강성한 국력의 기반이었다. 법가 사상이 진나라에게 천하 통일을 안겨주었으니 곧바로 개선한다는 것은 그만큼 유능한 개혁가가 출현해야 가능했을 것이니 이건 비단 시황제만의 문제라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시황제는 이러한 법령을 고치지 못했으며 결국 적절한 개혁을 하지 못한 진은 외부의 적이 더 이상 없음에도 내부의 문제점들로 인하여 급속도로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34]
진나라의 법가는 엄격하지만 이십 등작으로 부여된 작위에 따라 팔다리를 자르거나 사형, 혹독한 유형지로 끌려가는 신체적 처벌 대신 자신이 얻은 작위가 강등되는 등으로 처벌이 감형받거나 용서받고 면제받을 방법이 있었기에 실제 진나라 백성들이 법전에 적힌 혹형들을 그대로 받은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작위가 실제로 공을 세워서 올라간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만으로도 무거운 처벌이다.
그런데 진나라의 중국 통일 후에 이것이 큰 문제가 됐는데 진나라 백성들이야 진나라가 육국과 벌인 전쟁 등에서 자주 징병되면서 올라간 작위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복 당한 육국 백성들은 작위가 있을 리 없으니 가혹한 형벌에 그대로 노출되어 버린 것이다.[35]
사실 진나라 멸망의 시작을 알린 진승·오광의 난이 발생한 원인도 기일 내에 당도하지 못하면 바로 목이 베이는 진나라의 엄격한 법률 때문이었다[36]. 본디 진나라는 상대적으로 건조한 중국 내륙 지역이었으므로 태업을 하지 않는다면 대체로 정해진 기일 내에 도착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지만, 중국 전역이 진나라가 아니고 특히 중국 동부는 폭우가 여름철에 자주 오기 때문에 이런 지역에서 진나라 방식의 법률을 그대로 적용하는 건 그냥 죽으라는 것과 차이가 없다. 앞에서 말한 진승과 오광의 난도 여름철이면 장마가 빈번하게 벌어지는 오늘날 안후이성 지역[37]에서 음력 7월 여름 장마 도중에 벌어진다.
이후 그 유방의 한나라도 유교 사상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통치의 수단은 계속 법치에 중점을 뒀는데, 한 제국은 유교를 근간 이념으로 삼고 법가는 제국을 운영하는 제도로서 삼았다. 한 제국은 법가를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면서도 과진론이라 하여 진의 과실을 분명하게 따졌다. 게다가 한 제국 초기엔 도가가 상당히 흥하는 등 유가, 도가[38], 법가가 서로 어우러진 복잡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漢)이 이처럼 법가 하나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며 매달렸던 진나라와 달리 좋은건 받아들이고 잘못된 것은 철저히 버리는 실용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있어서는 한 고제 특유의 유연한 태도도 있었다. 이는 최초의 통일의 대업을 이루고도 3대 만에 망해버린 진과 하나의 중국, 하나의 문화권을 태동시킨 400년 역사의 한(漢) 제국의 명백한 차이점.

"내가 난세를 만나 진나라가 학문을 금하자, 스스로 기뻐하여 책을 읽는 것이 유익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임금이 되고 난 뒤로부터 비로소 때때로 책을 살펴보았는데 글 쓴 사람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이에 비추어 내가 옛날에 행동하였던 것을 생각해보니 옳지 않은 일이 많았다."[39]

육생이 옛날 시경과 서경을 때때로 인용하여 유세하자 고조가 꾸짖었다.

“이 어르신(乃公)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시서(詩書) 같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육생이 대답했다. “말 위에서 얻은 천하를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고제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부끄러운 표정을 짓고 말했다.

“나를 위해 진나라가 어떻게 천하를 잃었고, 내가 어떻게 천하를 얻었으며, 과거에 나라를 얻은 일, 잃어버렸던 일들을 글을 지어 올려주시오.”

- 사기 역생 육가 열전

실제로도 한은 법률과 관료체제 자체는 법가에 준해서 만들며, 국가 통치 이념과 법의 적용에 대해서는 유가나 도가의 사상을 받아들여서 조치에 경중과 가감을 두었다. 이렇게 하면 법가의 장점을 활용한 체계적인 국가 체제를 만들 수 있음과 동시에 백성들의 민심을 끌어모으고, 법이 규정하지 않은 예외 상황들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백성들의 민심을 다독일 수 있었다. 이는 결국 시황제의 폭정에 대한 반발로 인해 3대 만에 멸망한 진과 달리 한 제국이 400여 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5. 분서갱유



분서갱유라는 초유의 사건을 벌인 것으로도 유명하여, 전근대의 유학자들에게는 가히 만세의 적 취급을 당해왔다.[40]

6. 용모


사마천의 『사기』에서 울료는 시황제의 용모를 가리켜 '코가 높고 눈은 길게 찢어졌으며 가슴은 매처럼 생기고 목소리는 들개 같으며 은혜를 베풀 줄 모르는 사람으로 폭압적 정치를 했으며 극악무도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덤으로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나 속으로는 인덕이 부족하고 음험해 승냥이나 이리같은 자"라고 혹평한다.
중국 근대의 학자 곽말약은 그의 저서 '십비판서(十批判書)'에서 "시황제는 초상화와 달리 선천적인 병으로 인해 어렸을 때의 외모가 추했고, 이 때문에 사람들이 꺼렸고, 특히 화려함을 좋아했던 어머니에게 거부당한 것이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받은, 소질 있는 아이가 타고난 외모와 안 좋은 환경 때문에 비뚤어진 전형적 케이스"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어린 나이에 갑자기 왕이 된 탓에 제대로 된 인간 관계를 배우지 못했을 텐데, 이게 그의 정신적인 성장에 큰 영향을 줘서 다른 사람들을 잘 믿지 못한 게 아닌가 그래서 뭔가 이루는 것에 집착하게 되어 중국 통일을 이루거나, 만리장성 축조 등 큰 규모의 건축을 계획하게 된 거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시황제의 비정상적인 외모와 말년에 보인 정신착란 증세가 사실 심각한 뇌 손상이 가져온 결과라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수은은 소량 섭취 시 일시적으로 피부가 팽팽해지는 효과가 있어 시황제는 이를 불로장생 약으로 믿게 되고 시황제는 매일같이 수은을 먹고, 발라서 결국 수은 중독에 이르렀고, 거기에 수은은 금단 증상까지 있어서 결국 시황제는 수은을 더 많이 더 자주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데 이런 수은중독에 과로까지 겹쳤는데도 50대까지 살았다.[41] 결국 죽어서도 진시황릉에도 수은으로 만든 강을 만들어 넣었다고 한다.[42] 현대 진시황릉의 토지 수은 농도가 다른 곳보다 월등하게 높아서 실제로 다량의 수은이 묻혔을 것으로 보고 있다.

7. 암살 위협


10년 만에 전국의 여섯 국가를 멸망시키고 가혹한 통치를 한 탓에 과거 6국 백성들의 증오를 한 몸에 받았고 수많은 암살 시도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연나라 형가의 암살미수와 형가의 친구 고점리, 훗날 한나라 개국 공신이 되는 젊은 시절 장량 등이 있다. 이연걸 주연의 영화 "영웅 (부제 : 천하의 시작)"을 보면 이 암살 시도를 모티브로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중국 역사를 통틀어서도 시황제는 유난히 암살 위협을 많이 받은 황제였고 이 때문에 불로불사에 더 집착했다는 주장도 있다.

8. 그 외


  • 이상하게도 시황제의 황후나 후궁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렇지만 황후를 두지 않았다면 그것도 당시로서는 특이한 일이었을텐데 그런 기록도 없다. 사기집해에는 이사가 십칠형을 폐하고 호해를 세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유명한 부소와 호해 이외에도 아들이 많았던 것이니 당연히 황후와 상당수의 후궁을 거느렸을 것이다. 다만 사기 진시황 본기의 진시황릉에 대한 내용 중 이런 서술이 있다.
>이세 황제가 말하기를 "선제의 후궁들 중, 자식이 없는 자를 내쫓는 것은 옳지 않다." 명령을 내려 (그들을) 모두 죽게 하니,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二世曰 "先帝後宮非有子者, 出焉不宜." 皆令從死, 死者甚眾)
여기서 선제는 당연히 시황제를 가리킨다. 그러나 진시황릉이나 그 인근에서도 황후나 후궁의 묘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부분에 후궁의 시신이 매장되었을 가능성, 또 하나는 저 기록에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다.
  • 폭군인 것 치고는 여불위를 제외하면 공신 숙청이 없는 편인데, 숙청의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공신 숙청은 군주의 권위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개국 초창기에 많이 일어나는 편인데, 진나라는 상앙의 변법 이래로 제도가 상당히 정비되어 있고 군주의 입지도 탄탄했다. 백기나 여불위 같은 거물들도 군주의 명령 한 마디에 얄짤없이 버로우 타는 걸 보면... 따라서 시황제 본인이 말년에 타락하지만 않았어도 진나라는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중국을 다스렸을 가능성이 높다.
  • 현대 한국에서는 시진핑을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주석 집권 후 지배력을 강화하고 연임 제한을 폐지하면서 자신을 마오쩌둥과 동급 또는 그 이상으로 헌법에 명시하는 바람에 '시'씨 성의 '황제', 또는 '진' 짜 '시' 진핑 '황' 제가 되었다는 뜻. 이 표현은 연합뉴스에서도 쓰인 바 있다.[43]
  • 혐중들에게는 중국통일함으로써 지금처럼 강대한 중국이 존재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한 점 때문에 만악의 근원 취급을 받기도 한다. 특히 중국 화남 지역 전체가 중국 통일 이전엔 모두 베트남 문화권이었다고 주장하는 베트남판 환빠들에게는 그야말로 증오의 대상이다.[44] 2020년에는 시진핑 정권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산 방치로 전세계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중국 본토를 제외한 여러 나라에서 시황제의 중국 통일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이 더욱 늘어나고 있다.
  • 정약용은 재물이나 땅문서를 믿는 게 부질없는 짓이라고 할 때 진시황 이야기를 했다.
  • 쵸소카베 모토치카, 쵸소카베 모리치카 등으로 유명한 센고쿠 시대다이묘 쵸소카베 가문이 진시황의 후손을 자칭하였었다.[45][47]

9. 대중 문화에서




10. 같이보기



11. 둘러보기(계보)



'''역대 진나라 왕'''
30대 장양왕 영자초

'''31대 진왕 영정'''

통일 진 시대
'''진의 역대 황제'''
칭제건원

'''초대 시황제 영정'''

2대 이세황제 영호해
[1] 로마 제국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고 공식적으로 일인자의 지위에 오른 것은 기원전 27년으로, 시황제가 통일을 이룩한 때와는 약 200년가량 차이가 난다. 한편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아케메네스 왕조에서는 황제와 비슷한 개념인 샤한샤를 사용하고 있었고, 의미는 다소 다르지만 이집트파라오라는 칭호 역시 '신 또는 신의 아들'의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동아시아권의 황제 개념과 유사한 역사적 사례로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시황제를 ‘세계’ 최초의 황제라고 하기엔 논란의 여지가 있다. [2] 그러나 진나라가 망한 후 전한 시대에 시호를 부활시키게 된다. 뿐만 아니라 상나라 멸망 후 쓰지 않았던 묘호까지 부활시켰다. 황제라는 칭호는 이미 유용성이 입증됐다고 봐서 그대로 사용한다. 사실 진나라를 극단적으로 증오하고 통일 제국에서 다시 전국시대로 회귀하려고 했던 복고주의자 항우도 초의제를 세우는 등 황제 칭호를 버리지는 않았다.[3] 중국의 전한후한한나라를 통틀어 이르는 말.[4]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이 당대의 황제인 한무제를 까기위해 의도적으로 진시황에 한무제를 덧씌운 정황이 있는 것도 이러한 표현의 원인이 된다. 실제로 사기의 진시황의 폭정 묘사는 한무제가 일으킨 대규모 토목공사와 비슷하다.[5] 다만 후대인들이 영자영을 삼세황제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긴 하다.[6] 다만 안국군의 정처인 화양부인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안국군의 자식은 다 서자였다. 즉 이인은 그의 어머니가 안국군의 총애를 얻지 못해서 대접이 별로였던 것.[7] 출처 - 사마천, 사기 자객 열전[8] 영이인은 진나라로 돌아간 뒤 화양 부인의 권유로 영자초로 개명한다.[9] 진 소왕이 죽은 지 사흘 뒤에 사망한 건 아니고, 정식으로 즉위하기 전 그 사이에 추모 기간이 몇 달 있었다.[10] 병마용갱에서 출토된 무기에는 상방(相邦)으로 표기되어 있다. 후대에 사마천이 쓴 사기에는 한고제 유방의 이름인 방(邦)의 피휘를 하기 위해서 상국(相國)이라고 표기했다.[11] 여기서 父를 '보'라고 읽는다.[12] 황제의 명령을 가리키는 또 다른 글자 중 하나인 칙(勅 또는 敕)은 이때 도입되지 않았고 후대에 추가된 것이다.[13] 그래서 시황제 이전 시대의 글을 인용한 것을 보면 보통 사람이 스스로를 '짐'이라고 부르는 예들을 자주 찾아 볼 수 있다.[14]사기(역사책) 진시황본기에 나오는 얘기다.[15] 시황제가 분서갱유로 악명이 떨쳤는데, 이후의 중국 왕조에서도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사상과 서적에 대한 탄압은 자주 벌어졌다. 특히 청나라 때에 만주족에 대한 비판을 엄중히 다스린 문자의 옥이 유명하다.[16] 단 고고학적 발굴결과 추정 터만 있고 건물의 흔적이 없어 실존하지 않았다는게 주류의견. 사기에 언급된 규모도 500*100 미터로 황궁치고는 매우 작다.[17] 이 '''호''' 자를 오랑캐 말고 2대 황제 '''호'''해라고 해석한다면 적중한 예언이 되는데 채만식의 태평천하에선 진시황은 저게 호해를 뜻하는줄 몰랐으니 다행이라고 했다[18] 당시를 다루는 소설에서는, 무덤을 만든 이유가 불로불사와 연관된 또 다른 미신의 일환이라는 설정을 쓰기도 한다.[19] 물론 시황제의 의심을 푸는 왕전의 처세술도 기억해야 한다.[20] 근데 이런 측면에서 보면 역으로 진나라가 허무하게 망한 이유는 통일직후 나라의 역량이 부족한 상황에 무리하게 기득권을 빼앗는 중앙집권을 추진한 시황제 탓이 된다(!). 지방권력과 중앙권력의 상호작용으로 역사를 보는 시각에선 단순히 폭군으로 모는 것보다 이쪽이 더 설득력이 있긴 하다. 후대에 폭군으로 몰리는 군주 중에도 지방호족세력을 제압하려다가 역으로 당하고 먹칠당한 경우가 많다.[21] 통일후 통치에 문제가 많았을 것임은 사실이다. 어디까지나 사기에 기록처럼 고의로 작정하고 나라 말아먹으려는 듯한 폭정이 어디까지 진실일까에 대한 의구심이 드는 정도다.[22] 하지만 약법삼장을 약속하며 혹법을 완화할 것을 약속한 유방에게 감격하여 유방을 왕으로 모실 생각을 한 것을 보면 이들에게도 진나라에 대한 불만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유방쪽의 기록) 특히 육국의 후예들이 이끈 다른 국가의 세력들과 달리 진 쪽은 그럴 만한 사람들이 족족 조고에 의해 제거당하거나 도망치는 바람에 마땅한 구심점이 없었던 점도 있다.[23] 춘추전국시대의 후반부 이야기를 보면 진은 나머지 육국들에게 있어 최종보스격인 존재로 등장한다. 그중 이목, 인상여 등 몇명 유명인들은 진나라 군대와 진의 군주의 대결이 주된 일화일 정도이다. 대등하다고 언급하며 대중매체물에서는 자주 초나라를 언급하며 비교하지만 사실 초나라조차도 진나라와 국력을 비교하면 몇수는 뒤쳐질 정도로 이미 상당히 차이가 났다.[24] 혜문왕은 사적으로 상앙을 매우 증오했지만 정작 상앙이 죽은 후로도 상앙의 개혁정책들의 상당부분을 계속 유지한다. 때문에 오기가 죽은 이후 오기의 정책들을 줄줄이 폐기한 초와 자주 비교될 정도. 파촉을 정벌한 것도 혜문왕 때 일어난 일이다.[25] 소양왕 때 서주를 점령하고 구정을 진나라로 가져간다. 이미 주나라가 서주와 동주로 분열되고 권위가 떨어질때로 떨어졌다고는 하나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장평대전 직후 백기 말을 듣고 조나라를 멸했다면 아예 이 사람대에 통일까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삼진정도는 병합 가능했을 듯.[26] 다만 진시황이 어린 나이에 집권하고 이후로도 진나라의 국정을 뛰어나게 수행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진시황이 물려받은 진나라는 육국을 거침없이 압박하던 소양왕 시절에서 불과 5년도 안된, 국력이 절정에 달하였던 잘 정비된, 강력한 국가였던 것이다.[27] 몽염이 흉노를 대파했고 자결직전까지 30만 대군을 이끌고 있었으니 이건 아니고, 진승의 군대가 관중에 육박하자 그제서야 징발할 시간이 없다는 기록과 숙손통의 일화를 보면 중앙군 문제는 호해만의 잘못일 수 있다. 멸망 직후 겨우 4년간의 초한대전에서 한나라의 물량을 보면 이때도 미리미리 대응했으면 죄수를 데려다 쓸 일은 없었을 듯하다.[28] 법가 사상가 한비자의 망징편 기록을 보면 정부인보다 애첩의 권위가 강하면 태자보다 서자에게 관심이 몰리며 이를 기반으로 정부인과 애첩 간 세력싸움이 벌어지고 밖으로는 태자와 서자, 나라의 2인자인 재상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 나라가 망하게 된다면서 힘은 어디까지나 황제와 적자에게 모여야만 한다고 주장했다.[29] 당장 진승·오광의 난의 주동자인 진승과 오광도 초나라 출신임에도 자신들을 부소라고 사칭한 걸 보면 부소의 총명함이 타국까지 알려졌다고 볼 수 있다.[30] 장양왕 영이인은 어머니의 신분이 미천해 후계자로 높게 평가받지 못했고, 때문에 장평 대전으로 학살 피해를 입은 조나라의 인질로 보내져 양국 간의 전쟁 중에 처형당할 뻔 한 적이 있다.[31] 사실 진이 한에게 기여한 것은 영토보다도 오히려 행정 제도들이다. 한 제국의 행정을 조직하고 기틀을 정리한 한제국의 초대 승상이었던 소하부터가 진의 지방행정을 조직/실행해오던 관리 출신이였다.[32] 한제국과 전투를 치른 제후들이 전부 항우의 임명을 받은 제후들은 아니다. 이후 항우의 분봉에 불만을 품고 항우가 임명한 제후왕을 살해하고 자신이 정권을 잡은 제후들도 생겨났기 때문.[33] 중원을 완벽하게 통일한 한 제국에서 이후 2대 황제를 결정하는 데 있어 건국제인 한 고제가 여후의 아들인 혜제 대신 개인적으로 총애하는 척희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으려 하자, 한 제국의 예법, 국가 이념을 정비하는 데 큰 업적을 세운 숙손통이 장자 승계의 원칙을 어겨 나라를 망하게 한 실패 사례로 시황제를 언급한다. 유방이 소하를 처벌하기 위해 시황제와 이사의 관계를 거론할 때도 나라를 망하게 한 인간들을 뭐하러 본받냐고 비판당했다. 시황제로서는 실로 굴욕.[34] 그런데 진나라의 제도가 상군서나 한비자에서 서술하는 법가를 완전히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는게 함정.[35] 최근 고고학적 발견은 본 문단과 반대되는 정황을 암시하는데, 2000년대 발굴된 시황 25년 ~ 이세 2년까지의 행정문서인 리야진간의 일부 기록에 따르면 육국의 작위를 진의 상응하는 작위로 인정한 정황이 보인다. 리야는 본래 초나라 지역인데 형불경아무개 형태의 문구가 발견된 것이다. 형은 곧 초의 피휘(장양왕 영자초)이므로 초불경이 되는데 진의 불경에 해당되는 초나라 작위를 보유했던 아무개 란 뜻이다. 공문서에서 멸국으로 무효화된 작위를 진의 대응 작위로 맞추어 표기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진에서도 육국유민에 대한 유화책으로 작위를 인정해주었다는 해석이 있다. 다만 리야진간은 20만자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고 2009년에야 독문이 공개되었다. 계속 연구가 진행중이므로 널리 받아들여진 정설로 보기에는 이르다. 적어도 한번은 통일 기념으로 한등급씩 작위를 올려준 기록이 있긴 하다.[36] 당대의 기록인 수호지진간에 따르면 이런 경우에 인솔하는 관리에게 국가에 배상하는 의미로 지각한 날짜에 따라 벌금을 부과하는 조항만 있다. 진률 전체가 발굴된건 아니라 지각하면 사형시키는 조항이 없다고 단정은 못하지만 인솔책임자는 노동력제공을 늦게한 죄로 벌금을 부과하면서 늦게나마 도착한 "노동력"을 죽여 없애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37] 진승 일당이 발이 묶여 반란을 일으킨 대택향은 오늘날 안후이성의 쑤저우다.[38] 유방의 건국 공신 장량이 도가에 귀의한 것이 대표적 사례.[39] 진나라가 법가의 실용성을 주장하며 유학을 탄압하자 유방 본인이 '쓰잘데기 없는 거 치워버리니까 좋네!'라고 했다가, 나중에 황제가 되고 나서 다시 배우게 되자 과거 자기의 행동을 반성하였다는 이야기.[40] 다만 이 시대의 책들이 전해 내려오지 않는 이유는 시황제의 분서갱유보다 항우의 역할이 더 컸다는 말도 있다.[41] 증조 할아버지 소양왕이 70살 넘게 산 걸 보아, 수은 안 마셨으면 꽤 장수했을 가능성이 높다.[42] 출처 : 사기 진시황 본기.[43] 하지만 시황제의 시는 비로소 시(始)자인 반면, 시진핑의 시(Xí)는 익힐 습(번체 習/간체 习)자의 중국 발음이다.[44] 당연하지만 이런 베트남 극우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중국 남부 지역은 현대 베트남인의 선조 격인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계통 민족만 살았던 게 아니라, 묘족이 속한 몽몐어족 계통 민족들과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통의 민족들, 그리고 태국인라오인, 좡족의 조상 민족인 타이카다이어족 계통의 민족들이 마구 뒤섞여서 살았다. 그래서 백번 양보해서 베트남 환빠들 말대로 중국 남부 전체가 베트남계 왕조의 치하에 있었다고 쳐도, 실상은 중앙집권화가 전혀 안 되어서 수많은 민족과 부족들이 각자 다른 나라인양 따로국밥으로 노는 상황이었을 것이다.[45] 실제로 모토치카는 서장을 작성할 때 미나모토, 타이라 같이 자신의 성씨를 쓰는 곳에 하타(秦)라고 기입했다.[46] 제설로 1221년의 죠큐의 난(承久の乱)이후로 도망쳐왔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47] 실제로는 헤이안 시대 하타 요시토시(秦能俊)라는 인물이 그 선대가 하사받은 시나노의 땅에서 세력을 뻗치고 있었는데 1156년 호겐의 난(保元の乱) 때 패배세력에 소속해있었기 때문에 토사로 도망쳐 왔다고 한다.[46] 그렇게 토사로 도망쳐온 요시토시는 토사에는 얼마 존재하지 않는 평야 지역이자 중심지역이나 다름없는 나가오카 군에 정착하게 되었고 자신의 성을 소카베(宗我部)로 바꿔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안가 옆동네 카미 군(香美郡)에도 자신들의 성을 소카베라고 쓰는 일족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고 이들은 서로를 구분하기 위해 나가오카에 거주하는 소카베 일족을 쵸소카베(長宗我部), 카미에 거주하는 소카베 일족을 코소카베(香宗我部)라 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