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전

 

1. 개요
2. 작가 소개
3. 작품 소개
4. 최초의 국문 소설인가?
5. 의의
5.1. 시대를 꿰뚫는 날카로운 비판을 담은 오락 소설
5.2. 홍길동전에 대한 비판과 반박
5.2.1. 율도국에서 자신도 왕국을 세웠다?
5.2.2. 자신이 서자였음에도 첩을 두었다?
5.2.3. 홍길동이 왕이 된다는 마무리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5.3. 제 3의 의견: 애초에 허균이 홍길동전의 저자가 아니라면?
6. 기타
6.1. 게임
7. 같이보기

  • 홍길동전이라는 고전 소설이 아닌, 홍길동이라는 의적 캐릭터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문서는 해당 항목을 참조하자.

1. 개요


[image]

"(화설) 됴션국 셰둉대왕 즉위 십오년의 홍희문 밧긔 한 재상이 있스되 성은 홍이요 명은 문이니..."[1]

작자 미상의 고전 소설. 정확한 창작년도는 알 수 없다. 원래는 작가가 허균으로 알려져있었으나, 허균의 문집에는 홍길동전에 대한 언급이 없기에, 그가 저자라는 것에 대한 논란이 있기도 하다. 허균이 지었다는 증거는 허균과 동시대의 인물인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문고에서 허균이 저술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는 것 딱 하나고, 그 외의 다른 정황증거들은 허균이 지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 자세한 것은 후술.
주인공 홍길동은 실제 도적이었던 홍길동(洪吉同)을 모델로 삼았다. 하지만 홍길동전의 홍길동은 (洪吉童) 이라서 한자가 다르다. 일부 인터넷 백과 사전에서는 한자가 같은 것으로 나오지만, 조선 왕조 실록을 확인해보면 소설 주인공과 실존 인물은 서로 한자가 다름을 알 수 있다.

2. 작가 소개


작품이 나왔을때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는데 수호지를 흉내내었다'는 평가가 있었다. 하지만 허균의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 이유는 왕정 국가였던 조선에서 허균이 역적으로 몰려서 사형 당했기 때문이다. 덤으로, 자기 책에 "내가 바로 장안의 화제가 된 금서의 저자임!" 하고 자랑하는 자폭성 멘션을 쓸 리가 없었을테니 스스로 밝힐 일은 없다고 보아야 타당하다. [2]

3. 작품 소개


홍길동의 어머니 춘섬은 홍판서의 첩이였다. 서자로 태어난 홍길동은 호부호형을 요청하지만, 이를 거절당하여 집안에서는 더욱 고립되고, 상황이 꼬여서 사회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야인이 되어버린다. 그는 도적단을 접수하여 정의의 비밀 결사 활빈당을 세우고 조선 전국을 무대로 의적활동을 하던 중, 길동의 형과 아버지를 협박한 임금 앞에서 일부러 잡혀주지만, 유유히 도술을 써서 탈출하고, 홍길동을 잡을 방법이 없었던 임금이 병조 판서 자리를 내준 후에, 저도라는 섬으로 부하들을 데리고 갔다가 옆의 율도국으로 쳐들어가 결국엔 율도국의 왕이 된다.[3]
홍길동전의 구성은 영웅 소설의 구성과 매우 유사하다. 고귀한 혈통, 비정상적 출생, 비범한 능력, 위기, 위기를 벗어나고, 위기를 극복하는 전형적인 고전 소설의 구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의 '입신양명'만이 제일 가치였던 1차원적인 단순한 오락 소설들보다는 발달한 주제를 보여준다.
이 작품이 던진 교훈은 주로 서얼 제도의 문제점, 그리고 민초들의 마음을 대변하여 계급 제도의 모순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계몽 소설로 보기에는 미비한 점이 많다. 그로 인해서 '''단순한 활극 소설'''로 치부해버리는 경향도 존재한다. 다만, 이는 대중 장르를 겸하는 고전 소설의 근본적인 속성이기에, 지나친 폄하라고 할 수도 있겠다.

4. 최초의 국문 소설인가?


홍길동전의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고 후대의 여러 이본(異本)만 존재하며, 원본이 한문이나 한글로 쓰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관계로 최초의 한글 소설인가에 대한 의문은 남아 있다. 즉, 원본이 한문본일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비슷한 케이스로 소설 설공찬전의 경우, 원본은 왕명으로 모두 불태워져 전하지 않고 묵재일기 이면에 필사된 국문 번역본이 1997년에 발견된 바 있다[4].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설공찬전이 언문(한글)으로 번역되어 전파되면서 민중을 미혹시킨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서 설공찬전의 원본은 한문본임이 명확하다. 허균은 엄처사전(嚴處士傳)·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장산인전(張山人傳)·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장생전(蔣生傳)과 같은 한문 소설을 여러 편 지은 바 있고 또 당대의 사회상으로 본다면 홍길동전도 이렇게 한문으로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홍길동전의 한문본은 유일하게 '위도왕전(韋島王傳)'이 전하는데 이는 국문본을 번역한 것이다.
2019년 4월 24일, 이윤석 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에 따르면 한문 홍길동전을 찾아냈으며, "한글 홍길동전은 허균이 아닌 18세기 후반에 알 수 없는 어떤 작가가 창작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5] 그동안 이윤석 전 교수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라는 책에서 이미 홍길동전을 허균작품이라고 보기 어려운 근거를 내놓았었는데 한글 홍길동전이 허균 작이 아닌 5+1가지 이유
  • 허균(1569~1618)은 16세기의 인물인데 '홍길동전'에는 17세기 후반의 인물인 장길산이 등장한다.
  • 소설에 등장하는 선혜청은 18세기에 들어서야 활성화된 관청이다.
  • '홍길동전'을 제외한 모든 한글 소설은 18세기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허균이 시간여행자가 아닌 이상은 홍길동전의 저자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를 내놓았었다.
다만 홍길동전이 시간이 지나면서 민간에서 구전되어오는 과정에서 글이 추가되거나 소실되면서 다른 내용을 후대 사람이 넣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으므로 이윤석 교수의 의견만으로 허균이 홍길동전의 저자가 아니라고 단정하긴 어렵다. 애초에 허균의 주요 문집인 성소부부고도 허균 본인이 역모로 죽고 나서 외손 이필진(李必進)이 편찬하는 과정에서 내용이 바뀌었을 가능성도 제시되는 상황에서 허균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는 홍길동전도 있는 그대로 전해졌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이밖에도 학계에서는 홍길동전의 저자가 허균이라는 데 많은 의문점을 제시한다. 허균 문서에도 보듯이 허균은 한문에 능한 문장가인 데다 홍길동전을 제외하면 한글로 남긴 글이 없다는 것이 근거. 다른 글들을 모두 한문으로 남겼는데 홍길동전만 한글로 남길 이유가 있냐는 것. 허균 작가설의 근거가 뒷대의 사람인 이식(1584~1647)이 쓴 '택당집'에 등장하는 "허균은 '수호전'을 본떠서 홍길동전을 지었다"라는 문장 하나뿐이라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이다.[6] 물론 한문으로 쓴 홍길동전을 후대 사람들이 한글로 옮긴 것일수도 있으므로 허균이 한글로 썼다고 여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 경우 '최초의 국문(한글)소설'이라고는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5. 의의


홍길동전에서 "평등 의식"은 존재하지 않고 홍길동 개인의 입지전일 뿐, 결코 계몽적인 메시지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다만, 홍길동전이라는 소설에 대한 비평은 '''계몽성을 내부에 숨긴 대중소설이냐''',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단순한 오락 소설이냐'''를 분간하려는 논쟁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소설은 적서 차별 제도와 탐관오리의 횡포를 비판한다. 그 당시 사찰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불리는 데 열중했기 때문에, 도적이 되어서 맨 처음으로 한 일이 바로 해인사 탈취였다. 즉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볼 수 있다.
홍길동전의 의의는 철학에까지 '''왕조 사상'''의 프로파간다 때문에 사회적인 발전이 늦었던 동아시아에서, 서얼 제도라는 '피부에 와닿는' 요소를 통해서 '''차별 제도'''의 근본적인 모순점을 파헤치고, 이를 대중 소설로서 널리 읽히게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비교 대상은 현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당시의 계급 제도를 두둔하는 프로파간다, 이에 길들여진 대중 소설들 사이에 계몽적인 성향을 스며들게 만들었던 작가의 통찰력이라고 보아야한다. 또한 당시의 부조리했던 관리에 대한 비판도 담고 있다
이전에 여기에 조선이 중세 국가니 뭐니, 동양 국가의 차별은 세계적으로 유독 심하다고 근거도 없이 써놨는데, 조선은 서양 봉건제 중세 국가도 아닌 중앙집권체제일뿐더러, 서양도 농노가 많았고 아메리카 대륙의 목화나 사탕수수 식민지 노예는 가축 이하 취급을 받는 경우가 거의 100%다. 타인에 의해 소유됐다고 다 같은 억압이 아니라서, 식민지 노예는 많은 수가 40대 쯤이면 과로사하는가 하면, 당장 술탄의 노예였던 예니체리조차 시대에 따라 막강한 권력을 쥘 수 있었다. 조선의 노비도 병역과 세금을 피해 차라리 괜찮은 집안의 노비가 되는 걸 자처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노비와 천민은 동일한 개념이 아닌데 이 전 글에는 같이 써놨다. 거기다 동서양 할 거 없이 신분제 철폐는 모두 19세기에서나 이루어지지만 유럽에서는 카고 (Cagot)라는 불가촉천민은 20세기 초기까지 차별했고 그 후손은 중기까지 차별했다. 일본은 부라쿠민이 여전히 있다.

5.1. 시대를 꿰뚫는 날카로운 비판을 담은 오락 소설


홍길동전에 대한 비판들은 전부 근대 이후의 가치관을 기준에 두고 있다. 유럽에서조차 일부일처제는 기독교를 통해서 받아들여지는데 수백년이나 걸렸고, 일부 이슬람교 국가에서는 아직도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일반적인 가치관으로 받아들여지는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16세기에 동양의 조선에서 나온 소설이 이 모든걸 동시에 생각해 내지 못했다고 비판하는건 말이 안 된다.
홍길동전에서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습은 '''동양 철학''' 전반의 한계이지, 허균이 주장했던 온건한 신분제 개혁과 양립 불가능한 소재들도 아니다. 즉, 홍길동전은 수백년 전의 대중 소설에서 계급 사상의 모순을 '''통찰하고 이를 퍼트린''' 비판 능력으로 고평가를 받는 것이다.
물론, 인본주의를 기반으로 엄청나게 진보했던 서구의 사회 철학에 비할 작품은 아닐 수 있다. 토머스 홉스의 사회 계약론이 담긴 리바이어던은 1650년대에 출판되었는데, 홍길동전은 학술서가 아닌 대중 소설이니만큼 단순비교는 불가능하지만, 천한 존재가 왕이 될 수 있다는 마무리가 있었다는 점에서 당대 동양 사회에서는 쉽사리 떠올려선 안 될 개념을 대중 소설로서 읽히게 만들었다는 의의는 분명히 낮게 평가할 수 없다.[7]
즉, 홍길동전의 한계는 동양 사회의 사상적인 한계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심지어,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권위주의에 찌든 사람들은 홍길동전의 주제를 정치적으로 곡해하는 경우가 부지기수.
결국 홍길동전이 당대 조선 사회를 기준으로 상당한 파격적인 메시지를 던졌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홍길동 같은 인재가 사회 제도적으로 차별받았던 계기, 즉 '호부호형'이 자유롭게 허락되는 세상이 나타나는데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렸는지를 생각해보자.

5.2. 홍길동전에 대한 비판과 반박



5.2.1. 율도국에서 자신도 왕국을 세웠다?


율도국을 정복한 홍길동은 정작 자신도 왕위에 올랐으므로, 민중을 살피기보다는 전형적인 왕조 소설의 인물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심지어 율도국도 원래 주인이 있는 나라의 왕족을 '''몰살하고''' 세우는 것이다. 외딴 섬에 이상국을 세운다는 줄거리로 비슷한 허생전은 "세우려다 말고 그냥 간다"라는 쿨한 모습을 보여주는 차이점이 있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애초에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자연주의를 주장한 노자도 왕국 체제를 유지한 상태에서 이상 사회를 주장했다. 즉, 동아시아에서 왕정은 계급 제도가 아닌 체제를 의미하는 개념이었다고 보아야한다. 현대의 평등 사상은 사회 계약으로 모종의 규칙 때문에 권리가 침해받지 않은 계약 이전 상태의 순수한 권리인 자연권에 의거하여 평등한 권리를 가정한 자연법 사상의 산물이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신들조차도 계급이 정해져있는 '''철학적으로 꽉 막힌 상태'''였음을 감안한다면, 홍길동의 왕이 된다는 마무리를 현대적인 사상으로 비판하는데는 무리가 있다. 즉 허균 입장에서는 왕국 외의 정치 체계를 상상해보지도 못해서 홍길동이 새로운 이상 국가를 만들 때 정치체계가 왕국이 된 것이지, 홍길동이 무슨 독재자가 된 영웅 같은 것으로 전락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는 "인류사는 일방향의 발전성이 있으며 민주주의가 절대적으로 왕정보다 문명화되었다"라는 근거가 없는 전제를 깔고 재단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18세기 유럽 왕족들도 민주주의 하자고 하면 "2000년 전의 미개한 고대 그리스 시대 따라하자고?"라는 반응이었다. 과거에도 왕조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면 그냥 좋지 않은 상태로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역성혁명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다. 그 시대 사람들도 바보는 아니며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반란들 상당수가 기존의 부패한 세력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시도가 아니었는가?
그래서 "천리"라는 개념이 존재했다. 물론 홍길동이 소위 문명국의 출신이고 조선과 중국에 조공하게 되었으므로 춘추필법에는 기존 "오랑캐" 왕가들 보다는 더 긍정적으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왕족들의 씨를 말리는 것은 당시 기준으로도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당장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씨를 말려버린 후로 개성 지방에서 이성계를 욕하는 민담이 많았던 것을 생각해보자.
애초에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는 '공화국'이라는 제도 자체가 생소했다. '공화국'이 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프랑스가 전 유럽의 침공을 받았을 정도다. 심지어 바렌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프랑스 내에서조차 입헌군주제가 대세일 정도였다. ''''왕'이 존재하지 않는 국가는 상상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그 프랑스도 결국 짧게나마 제정과 왕정을 다시 도입했다. 그런데 늦어도 18세기 후반에 작성된 데다가 15세기를 배경으로 한 홍길동전에서 '왕국'을 이상향으로 제시했다고 비판하는 건 타당치 않다.
아무튼 이런 비판 때문인지 일부 판본에서 율도국 왕과 왕족들은 충혜왕, 연산군 수준의 답이 없는 폭군으로 묘사되어 왕가 몰살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고, 또 일부 판본에서는 홍길동은 율도국 왕을 살려주려고 했는데 율도국 왕과 왕족들이 지레 겁을 먹고 자결해버리는 것으로 나온다. 몇몇 판본에서는 섬을 접수하는 과정이 아예 '''요괴 퇴치'''로 바뀌어있다.[8] 그리고 홍길동전의 주제 의식을 현대적인 평등이 아니라 '새로운 규칙(왕정)을 만든다' 는 생각으로 생각해본다면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5.2.2. 자신이 서자였음에도 첩을 두었다?


홍길동전의 서술을 보면 '처첩'이 아니라 두 부인, 즉 '이처'를 두었다고 나와 있다. 처와 첩은 지위 및 그것이 갖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일단 작중 내용에 따를 때, 홍길동이 세운 율도국에서 '''서얼을 차별하는 의식이나 관념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본을 보면, 홍길동은 백 소저와 조 소저 두 아내를 두었는데 그 사이에서 3남 2녀를 낳았고 그 중 장남을 세자로 삼고 나머지는 모두 대군으로 삼았으니 결코 자식들을 차별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즉 홍길동전은 어디까지나 첩의 자식이 차별받는 서얼 제도를 비판하면서 계급제도의 모순을 통찰한 작품이다. '처첩'을 두고 자식에게 차별 대우를 했다면 작품의 주제 의식이 흐트러지겠지만, 여러 여인들을 거두더라도 서로 동등하게 대우했다면 이 문제는 해결된다. 오히려 두 부인과 그 자식들을 동등하게 대우함으로서 차별철폐라는 주제의식을 완성하는 장치로 파악 할 수 있다.

5.2.3. 홍길동이 왕이 된다는 마무리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오히려 홍길동이 왕이 된다는 마무리는 '''출신이 천한 인간도 왕이 될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테마를 보여준다고 해석하는 편이다.
'''노비의 자식 = 왕'''이라는 등호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홍길동전의 마무리는 당대 기준으로 파격적인 것이었고 단순히 '''평등 의식'''이 없는 영웅론적 왕조 소설이라고만 평할 수가 없는 가치가 있다.
당장에 현실에 존재하는 건국 설화에서는 왕족이 하늘이나 자연에서 출생한다는 신화소를 통하여 왕족이 '인간들과 다른 존재'임을 강조한다. 심지어 '''현대'''의 독재자들조차도 종교와 권위 태몽의 힘을 빌려서 자신의 '''혈통'''을 신성한 것으로 포장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위에서 적혀있지만 당시에는 계급 사상이 더욱 철두철미해서 같은 가족끼리도 서얼과 노비들은 적자들에게 을 기본으로 하거나 대중소설들마저도 죄다 정숙한 선비와 하늘의 혈통 따위를 강조하는 주인공들만 성공하는 근본적으로 계급 사상에 모든 사람들이 푹 삭어버린 상태였다.

5.3. 제 3의 의견: 애초에 허균이 홍길동전의 저자가 아니라면?


2019년 4월에 이윤석 국문학 박사가 '허균은 홍길동전의 저자가 아니다'라는 상당히 신빙성 있는 근거를 댔는데,[9] 위의 '''최초의 국문 소설인가?''' 문단에서, 이윤석 교수는 최초의 홍길동전은 황일호가 쓴 '노혁전'으로, 현재 대중들에게 알려져있는 '홍길동전 판본'은, 후대의 인물인 장길산등이 언급되는 것을 보아 18세기 이후에 불명의 저자가 각색하거나 변형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애초에 허균이 '평등주의 의식'을 담아 쓴 소설도 아니고[10] 또 제 3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고쳐 쓴 책을 가지고, 허균을 두고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윤석 박사의 가설을 증명하려면 노혁전 이외에 다른 자료가 필요하다. 황일호는 허균보다 한 세대 후의 사람이며, 홍길동전의 내용을 짜집기해서 노혁전을 썼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으므로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11]
뭐 당연한 사실이지만, 설혹 허균이 홍길동전의 작가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주제와 평가 자체가 변하진 않는다.
작품 자체가 보여주는 '서얼 = 왕'는 결코 그 의미가 작지 않다. 조선 후기에는 홍길동전과 같은 '초자연적 영웅의 활극'이 엄청나게 많이 유행했지만, 그 작품들의 주인공은 가난하거나 불우할지언정 홍길동처럼 서얼 출신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적어도 조선시대에 많이 읽힌 이른바 '영웅소설' 중에서는 홍길동과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것이다.
홍길동전 내용 중 작품 내용에서 허균 사후의 인물과 관청 이름 등이 등장한다. 예시로 '옛날 장충의 아들 길산이 천한 종에서 태어났으니 13세에 그 어미를 이별하고ㆍㆍㆍ' 라는 대목에서 장길산은 허균 사후 70년 뒤의 인물이며, '임금이 길동의 일을 신기해 여겨 이튿날 선혜낭청에게 명령을 내려 서간 사람과 선혜청에서 일하는 사람ㆍㆍㆍ' 에서 선혜청과 선혜낭청은 대동법 시행 후 대동미/포의 출납을 맡은 관청인데, 대동법은 1700년대에 전국적으로 시행되었으므로 홍길동전의 저자로 허균이 거론되는 것은 무리가 있는 점이 있다. 다만 허균의 원본이 실전되어 확인할 수 없고, 전해지는 동안 문구가 첨삭되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으므로 이도 다른 자료가 나오기를 기대할 수밖에.

6. 기타


홍길동은 이 소설로 인해 유명해져서, 미국의 John Doe와 같은 '대표적인 이름' 위치에 올라 현대에 이르러서는 가장 다양한 종류의 문서를 작성한 사람이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지방 자치 단체에서 홍길동의 고향이 어디냐를 문제로 다툰일도 있다.
이 소설의 배경이 세종대왕(장헌대왕) 때이기 때문에 세종이 그다지 명군이 아니었다는 떡밥이 뿌려진 적이 있다. 그러나 허균 자신이 역사적 상황과는 관계없이, 당시로서는 오래된 임금의 이름을 끌어온 것 뿐이다. 따라서, 딱히 세종에게 반감을 가진 건 아닌 듯하다. 허균 자신도 임금의 신임을 받아 출세했으며 (결말은 참혹했지만) '''홍길동도 왕이 된 점을 보면''' 조선 왕조라는 시스템 자체에 대한 불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혹은 태종 때 부터 계획된 서얼금고법노비종부법 태종을 거처 바로 세종때 시작하던터라 간접적으로 작품 주제와 관련이 있기도 하다는 해석도 있어보인다.
완판본에서 나와있듯이 세종 15년에 아버지가 동침해 애를 가졌으니 실제 홍길동의 출생은 10개월 뒤인 세종 16년(1434년)일테고, 11살에 집을 뛰쳐 나왔으니 세종 27년(1445년)이다. 이후 천하를 주유하다 도적단의 두목이 되어 활빈당을 세웠는데 도적단의 두목이 되려면 아무리 못해도 15살은 넘었을 테니 1450년 이후일 것이다. 세종 대왕의 재위 기간은 1450년까지니까 실제 홍길동이 활약한 것은 당연히 문종 이후, 아마도 세조 치세가 된다. 게다가 소설 첫머리(본 항목 맨 위 사진) 세종 15년부터 "사방의 일이 업고 도젹이 업스며 시화연풍하여 나라이 태평하더라." (사방에 일이 없고 도적이 없으며 시화연풍하여 나라가 태평하더라)고 나와 있는데 허균이 세종 대왕을 비판했을 리가 없다. 한편으로는 오히려 허균이 세종 대왕의 이미지를 역이용했다는 해석도 있다. 즉, 허균이 생활한 당대는 물론이고 성군인 세종 대왕의 치세 때도 적서차별과 같은 사회의 폐단은 존재했으며 따라서 극복해야 할 존재임을 강조하고 싶었다는 주장이다.
'''현대 홍길동'''의 이미지는 신동우 화백의 명작 만화 '''풍운아 홍길동'''으로 인해서 만들어졌다. 이전까지는, 위에서도 비판받았던 중세적인 캐릭터성이 조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위에서 나온 모순적인 캐릭터성이 대규모로 물갈이 되고, 푸른 쾌자초립을 쓰는 이미지도 해당 만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동우 화백의 만화를 기준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었다. 이를 리메이크 한 작품은 돌아온 영웅 홍길동 참조. 다른 장편 애니메이션으로는 2011년에 개봉한 홍길동 2084도 있다.
고우영판의 경우 홍길동이 양반의 서자가 아닌, 모함으로 몰락한 양반의 자제로 나온다.
박수동 화백의 홍길동과 헤딩박도 유명하다.
뱀발로 실질객관동화 60화에서 이걸 막장 드라마에도 쓸 수 있는 재료라 한다.
유명세 덕분에 펭귄 북스에서도 영역판을 내놓았다.
이 홍길동이 세운 나라인 율도국을 소재로 한 국산 RPG게임 '망국전기'가 있었다. 홍길동 사후의 율도국이 배경이며, 주인공은 홍길동의 손자인 홍세영.
홍길동전의 '호부호형'에 대한 오래된 꽁트가 있다. 홍 판서가 홍길동에게 호부호형을 허락한다고 말하자 홍길동은 울먹거리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데 호부호형을 허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말한다. 이에 홍판서가 답답해하며 '그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게 하고,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한다.'라고 말하자 홍길동은 여전히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게 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게 하면 무합니까. 호부호형을 못하는데......'라고 말한다는 바보 개그.
'빨간 길에 떨어진 동전의 이름은?'이란 수수께끼의 정답이다,

6.1. 게임


위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롤플레잉 게임. 에이플러스 제작. 1993년 발매. 당시에 발매된 게임 잡지에 실린 정보에 따르면 출시 당시 가격은 3만원이고 약 7천 부가 판매되었다고 한다. 이 당시에 도트를 찍지 않고 그림을 스캔해서 넣었다고 홍보를 했는데, 256색의 한계로 인해서 스캔 후에 다시 도트 하나하나 색을 보정해야 해서 작업량이 2배가 되었다는 후문이 있다.
놀라운 사실은 이 게임 스토리라인이 원작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1995년에 2편도 나왔지만 드래곤즈 레어 짝퉁이 되어 망했다.
유튜브에도 플레이 영상이 없는 게임이었는데, 침착맨이 방송에서 이 게임을 다루면서 유튜브 최초로 홍길동전 영상이 올라오게 되었다. #

7. 같이보기


[1] 위 사진은 홍길동전 완판 36장본으로 홍길동전의 여러 판본 가운데 학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판본이다. 정확히 말하면 원본보다 훨씬 후대에 작성된 이본異本이다.[2] 현재 최초의 한글 소설이자 또 하나의 금서인 설공찬전 역시 채수가 지은 것이지만 독립된 서적으로서가 아닌 묵재일기 뒷부분에 기록된 필사본만 존재한다.[3] 완판본에서는 율도국의 왕에 오른 후까지 다룬다. 세월이 지나 태자에게 왕위를 주고 중전과 함께 도를 닦아 백일승천白日昇天하여 신선이 되는 결말이다.[4] 서경대학교 국어 국문학과 이복규 교수가 발굴해냈다.[5] 몇몇 뉴스에서는 홍길동전의 작자를 지소 황일호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덤으로 홍길동전의 원래 이름은 노혁전.[6] 하지만 이 의견이 맞다고 볼 수는 없다, 허균은 1569년생이고 이식은 본문에도 나왔다시피 1584년생인데 두 사람의 나이는 15세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며 허균이 죽었을때 이식은 이미 30대 중반의 선비었으므로 허균의 행적을 실제로 보고 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실질적으로는 동시대 사람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다. 오히려 허균 생전에 이미 성인이었던 사람의 증언을 허균과 관련 없는 뒷대의 증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홍길동전과 허균의 관계를 억지로 부정하기 위한 주장인 느낌까지 있다.[7] 단 유교에서 불교나 기독교 같은 평등 사상은 아니지만 폭군은 결국 역성혁명을 맞아 무너지고, 천한 사람도 순임금이 될 수 있다고는 등 충분히 유교적 가치관에 맞는 소설이다. 즉 유교적 이상주의를 바탕으로 한 장르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이다.[8] 참고로 이때 퇴치하는 괴물이 한국 요괴 중에서 은근히 오우거랑 비슷한 위치에 해당하는 지하국대적의 카테고리에 속한 괴물이다.[9] 언론에 널리 알려진 것이 2019년이지, 허균이 과연 홍길동전, 정확히는 "현존"하는 홍길동전의 작가인가는 수십년 전부터 연구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논란거리였다. 가) 허균의 홍길동전의 작가일 가능성, 나) 허균이 홍길동전의 작가가 아닐 가능성, 다) 허균이 홍길동전이라는 작품을 짓기는 했으나 오늘날 우리가 읽는 홍길동전과는 다른 작품이거나 혹은 변형이 많이 되었을 가능성 모두가 존재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택당 이식의 기록을 무시할 수 없는 등 여러 이유로 아직까지는 학계에서도 허균을 작가로 보는 견해가 많다.[10] 이윤석 박사는 황일호의 '노혁전'이 일종의 '''야담 모음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홍길동전은 사회 비판을 담은 저술로 보기는 어려워진다.[11] 더우기 노혁전이 나왔다는 책은 20세기 초에 황일호의 자손에 의해 다시 한번 편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