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노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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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스 7세와 로마노스 2세의 모습이 새겨진 솔리두스 금화
그리스어 Ρωμανός Β΄, Rōmanos II
1. 개요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2.2. 치세
2.2.1. 크레타 정복 (961년)
2.3. 갑작스러운 사망
3. 참고자료

생몰 938년 ~ 963년 3월 15일
재위 959년 11월 9일 ~ 963년 3월 15일

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황제. 4년간 유능한 장군들의 활약으로 제국의 판도를 넓혔으나 963년 3월 15일에 25세의 젊은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로마노스는 938년경 콘스탄티노플 황궁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콘스탄티노스 7세이고 어머니는 로마노스 1세의 딸이었던 헬레네였다. 로마노스는 그의 아버지처럼 태어나면서부터 포르피로옌니토스였고 백성들의 추앙을 받은 황제의 적법한 아들이었다. 또한 그는 아버지의 장대한 기골과 세련된 몸가짐, 어머니의 아름다운 용모를 물려받았다. 경박하고 사냥이나 주연, 폴로 경기 등을 지나치게 즐겼다는 비난도 있었지만, 한창 나이의 젊은이에겐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서 딱히 문제 삼는 사람은 드물었다.
로마노스는 어린 나이에 이탈리아 왕 우고가 낳은 딸 베르타와 결혼했지만, 불행히도 그녀는 일찍 죽고 말았다. 이후 콘스탄티노스 7세는 오토 1세의 조카 딸인 바이에른의 헤트비히를 며느리로 삼으려 했지만, 로마노스는 이를 마다하고 펠레폰네소스의 여관집 딸인 테오파노와 결혼했다. 만약 로마노스가 아버지의 뜻에 따랐다면,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는 오토 1세와 동로마 제국은 인척 관계가 성립되므로 두 제국의 사이는 각별해졌을지도 모른다.

2.2. 치세


959년 11월 6일 콘스탄티노스가 사망했다. 이후 새 황제로 즉위한 로마노스는 아내 테오파노의 설득에 따라 어머니 헬레네를 별궁에 보냈고 다섯명의 누이들을 수녀원에 보냈다. 또한 정부와 궁정의 원로 대신들도 무더기로 교체되었고, 시종장 바실리오스는 원로원 의장(Proedros)직을 얻어 황제의 오른팔이 되었으며 그의 후임으로는 환관인 요시포스 브링가스가 임명되었다. 브링가스는 시종장을 맡는 동시에 총리 대신과 해군 총사령관을 겸임했는데, 대단히 지적이고 명민했지만 한편으로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잔인했다고 한다. 그는 로마노스의 신임을 받아 절대 권력을 획득한 후 크레타 원정에 착수했다.

2.2.1. 크레타 정복 (961년)


960년, 황제는 유능한 장군 니키포로스 포카스를 1000척과 2만 7천의 군대와 함께 크레타로 파견했다. 니키포로스는 자신의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하여 크레타군을 격퇴하고 칸디아 요새를 8개월 동안 포위한 끝에 961년 3월 7일 함락시키고 크레타 섬을 완전히 공략했다. 이로서 크레타 섬은 827년에 아랍인에게 점령된 이후 130여년 만에 제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크레타 해적들에게 오랫동안 시달렸던 제국은 여세를 몰아 무슬림 학살을 포함한 강력한 재개종 정책을 추진하였고,[1] 승장 니키포로스는 콘스탄티노플로 당당하게 돌아왔다. 그러나 로마노스 2세와 환관 요시포스 브링가스는 그를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 개선식을 치뤄주지 않고 원형 경기장에서 시민들에게 갈채와 환영을 받는 것만 허용했다.

2.2.2. vs 함단 왕조


962년, 니키포로스 포카스는 동방 전선으로 파견되어 함단 왕조의 사이프 앗다올라(Sayf al-Dawla)와 대결했다. 이보다 앞서, 니키포로스의 동생 레온 포카스는 형이 크레타 원정을 나가 있는 동안 사이프와 대적했다. 960년 초여름, 사이프 앗다올라는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제국의 국경을 넘어 타우로스 산맥 동쪽의 협곡들을 무사히 통과하고 멜리티니 부근의 하르시아누의 요새로 가서 수비대를 죽이고 많은 포로를 잡았다. 레온 포카스는 대응하려 했지만 수적으로 열세인데다 길고 험한 원정으로 지쳐서 함부로 맞서지 않고 산악 지대에 주둔하고 주요 길목에 병력을 세심하게 배치한 뒤 사이프가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렸다. 11월 초, 사이프는 본국으로 귀환하다가 쿨린드로스 고개에서 레온 포카스가 이끄는 제국군의 기습을 받고 300명의 기병대와 함께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병사들은 절반 가까이 죽었고 붙잡힌 병사들은 노예로 전락했다.
동생의 활약으로 기세가 꺾이긴 했지만, 사이프가 언제라도 세력을 회복해 제국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니키포로스의 가세는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니키포로스는 962년 초 동생과 함께 킬리키아로 진군해 불과 3주 만에 킬리키아의 도시 55개를 되찾고 부활절에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진군을 개시해 알렉산드레타 근처의 시리아 성문을 통과했다. 이후 그의 군대는 남쪽으로 서서히 이동하면서 도상의 촌락들을 불태우고 알레포를 포위, 39만 디나르의 은, 낙타 2천 마리, 노새 1400마리,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랍산 종마들을 약탈하고 궁궐을 불태웠다. 사이프는 알레포 성벽 바깥에서 사로잡혔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왔고, 현지 방어군은 저항하다가 결국 12월 23일 무너졌다. 병사들은 알레포 시내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와 지칠 때까지 학살을 계속했다.

2.3. 갑작스러운 사망


963년 3월 15일, 로마노스는 불과 25살에 나이에 급사했다. 황후 테오파노가 남편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당대부터 파다했지만, 그녀가 실제로 그랬다는 증거는 없으며 그럴만한 동기도 부족하다. 역사학계에서는 로마노스는 황음을 일삼다가 몸에 무리가 와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테오파노는 로마노스 사이에서 네 명의 자식을 낳았고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 막강한 권력을 휘둘렸다. 그러나 남편이 급사하는 바람에 그녀의 권력이 위태로워졌고 어린 자식들은 제위를 노리는 야심가들에게 위협받았다. 이에 그녀는 비밀리에 니키포로스 포카스에게 전갈을 보내 황궁으로 돌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니키포로스는 콘스탄티노플로 달려와 그녀와 그녀의 자식들을 지켜주겠다고 맹세했다. 당대 실권자 브링가스는 그를 어떻게든 제거하려 했지만, 민심은 니키포로스에게 쏠렸고, 결국 니키포로스는 테오파노 황후와 결혼하고 황제 니키포로스 2세가 된다.

3. 참고자료


  • 워렌 트레드골드 : <비잔틴 제국의 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 <비잔티움 제국사>
  • 존 줄리어스 노리치 : <비잔티움 연대기>
[1] 이 재개종 정책의 영향으로 이후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18세기까지 정교회 인구가 절반을 차지하였고,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의 결과 크레타는 완전히 기독교권으로 확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