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오스 2세
'''바실리오스 2세 "불가록토노스" 마케돈 / Βασίλειος Β' Βουλγαροκτόνος Μακεδών'''
'''그의 어머니를 제외하고 그를 사랑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누구를 사랑하지도 않았고, 누구의 사랑을 받지도 못했다. 사랑은 커녕 그를 좋아한 사람이 있었다는 증거도 없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절친한 친구도 없었던 듯 하다. 비잔티움의 역대 황제들 중 그처럼 고독한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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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στίχοι ἐπιτάφιοι εἰς τὸν τάφον κυροῦ Βασιλείου τοῦ Βουλγαροκτόνου καὶ βασιλέως.
'''불가르인의 학살자이자 황제이신 바실리오스 폐하의 무덤의 묘비문'''
ἄλλοι μὲν ἄλλῃ τῶν πάλαι βασιλέων
'''다른 오래된 무덤들에 묻힌 다른 군주들은'''
αὑτοῖς προαφώρισαν εἰς ταφὴν τόπους,
'''자기 스스로를 위해 무덤을 두었으나'''
ἐγὼ δὲ Βασίλειος, πορφύρας γόνος,
'''자주빛 혈통을 지닌 짐, 바실리오스는'''
ἵστημι τύμβον ἐν τόπῳ γῆς Ἑβδόμου
'''엡도몬의 땅에 짐의 무덤을 두노니,'''
καὶ σαββατίζω τῶν ἀμετρήτων πόνων
'''짐이 전장에서 맞닥뜨리고 견뎌내야 했던'''
οὓς ἐν μάχαις ἔστεργον, οὓς ἐκαρτέρουν·
'''영원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안식을 취하는도다.'''
οὐ γάρ τις εἶδεν ἠρεμοῦν ἐμὸν δόρυ,
'''하늘의 왕이신 신께서 짐을 굽어살피시어'''
ἀφ’ οὗ βασιλεὺς οὐρανῶν κέκληκέ με
'''세상의 위대한 지배자인 황제로 삼으셨으니'''
αὐτοκράτορα γῆς, μέγαν βασιλέα·
'''그 날로부터 짐의 창은 하루도 쉴 날 없이 움직였노라.'''
ἀλλ’ ἀγρυπνῶν ἅπαντα τὸν ζωῆς χρόνον
'''짐은 평생을 긴장 속에 살며'''
Ῥώμης τὰ τέκνα τῆς Νέας ἐρυόμην
'''새로운 로마의 백성들을 지켜내었고,'''
ὁτὲ στρατεύων ἀνδρικῶς πρὸς ἑσπέραν,
'''에스페리아'''[6]
'''의 변경에서부터,'''ὁτὲ πρὸς αὐτοὺς τοὺς ὅρους τοὺς τῆς ἕω,
'''멀리 동쪽의 변방에 이르기까지 용맹하게 원정하여'''
ἱστῶν τρόπαια πανταχοῦ γῆς μυρία·
'''수없이 많은 전승 기념비를 도처에 세웠다.'''
καὶ μαρτυροῦσι τοῦτο Πέρσαι καὶ Σκύθαι,
'''과 스키타이인들'''[8] '''이 이를 보았고'''σὺν οἷς Ἀβασγός, Ἰσμαήλ, Ἄραψ, Ἴβηρ·
''', 아랍인들과, 이베리아인'''[10] '''들 역시 그러했다.'''[11]καὶ νῦν ὁρῶν, ἄνθρωπε, τόνδε τὸν τάφον
'''그러니 사람들이여, 짐의 이 무덤을 보거든'''
εὐχαῖς ἀμείβου τὰς ἐμὰς στρατηγίας.
'''짐의 행동에 대한 감사의 기도라도 올려주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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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오스 2세의 묘비문
1. 개요
동로마 제국 마케도니아 왕조의 9대 황제. 동로마 제국 제3의 중흥기인 마케도니아 왕조를 대표하며 그 중 절정의 시기를 다스렸다.
976년에서 1025년에 이르는 기나긴 치세 동안 동쪽의 타우루스 산맥 너머 아르메니아까지 제국의 판도를 넓혔고, 제국 북부를 위협하던 숙적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을 멸망시켜 도나우 강 이남의 발칸 반도를 수복했으며, 키예프 공국을 정교회로 개종시켰다. 여러 업적에도 불구하고 대제 칭호를 받지는 못했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위시한 교회의 호감 문제가 아니라) 몇 가지 이상한 성격 탓에 당대인들이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즉위 전의 삶
로마노스 2세와 테오파노의 아들 중 장남. 958년 태어났을 당시 로마노스 2세가 공동 황제였으므로 포르피로옌니토스(황가의 적자)였다. 재위 기간은 962년 ~ 1025년, 실질적으로 통치한 기간은 976년 ~ 1025년이다.
로마노스 2세가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자, 황태후 테오파노는 당시 제국 최고의 장군이었던 니키포로스 포카스를 공동황제로 옹립한 뒤 그와 결혼해 권력의 안정을 꾀하기로 했다. 적자인 바실리오스(5세)와 동생 콘스탄티노스(3세)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다. 이 때 니키포로스가 바실리오스 형제 중 한 명의 대부를 서준 일 때문에 결혼성사가 무효가 될 뻔한 해프닝이 있었다. 그렇게 니키포로스 2세는 바실리오스의 계부가 되었다.
니키포로스 2세는 '''사라센의 저승사자'''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장군이었으나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다. 이는 또다른 쿠데타를 유발했다. 요안니스 치미스키스는 니키포로스 2세의 외조카이자 전우이며 부하였지만[12] , 군권 박탈 등 여러 이유로 니키포로스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다. 마침 황후 테오파노가 요안니스에게 접근, 밀회했고[13] 두 남녀는 니키포로스를 제거할 기회를 도모하기 시작했다.
969년 12월 11일, 니키포로스 2세는 테오파노와 요안니스에 의해 암살당했다. 계획대로라면 테오파노가 또다시 황후가 됐어야 했으나, 황제가 된 요안니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간섭으로 테오파노를 배신했다. 테오파노가 (제국의 황족이나 황제가 쫒겨날 때 단골로 애용하는) '''프로티 섬의 수도원으로 추방!'''당하면서, 11세의 바실리오스는 어린 동생과 홀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남게 되었다. 테오파노는 요안니스 1세가 사망한 976년에야 추방이 해제되어 아들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등장한 기록은 978년인데 스클리로스의 반란에 맞서 조지아의 군주에게 원군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녀는 추방 생활의 후유증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3. 험난한 제위로의 길
3.1. 스클리로스 내전
976년 1월 10일 공동 황제 요안니스 1세 치미스키스가 사망하자, 18세의 바실리오스 2세는 사실상 단독 황제로서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이 당시 바실리오스는 정치적 경험이 부족한 풋내기에 불과했다. 황제는 자신의 친척이자 시종장(παρακοιμώμενος, Parakoimomenos)인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Βασίλειος Λεκαπηνός)[14] 의 후견으로 착실히 국정 경험을 쌓았다. 실권을 장악한 레카피노스는 이 어린 황제를 얕잡아보며 조종하려 들었다. 이에 황제는 내심 불만을 품었으나 군말없이 따르며 행정과 군사를 익혔다.
바실리오스 2세의 집권 초반부는 내전으로 점철되었다. 두 전임 황제(니키포로스 2세, 요안니스 1세)는 모두 무력으로 즉위한(심지어 한 명은 전임 황제를 암살하고 즉위한) 장군 출신 황제였다. 이로 인해 바실리오스 2세의 정통성은 이미 상당히 약해져 있었고, 제국의 귀족들은 앞의 두 사람처럼 황제가 되고자 바실리오스 2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반란의 중심에는 요안니스 1세의 처남인 '''바르다스 스클리로스(Βάρδας Σκληρός)'''와 니키포로스 2세의 조카인 '''바르다스 포카스(Βάρδας Φωκᾶς)'''가 있었다.[15]
요안니스 1세가 사망한지 몇 달 후인 976년의 봄, 바르다스 스클리로스가 스스로 황제임을 선언하며 내전이 시작되었다. 반란은 격렬했다. 977년에는 니케아가 반군 손에 넘어갔고,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 또한 반군에게 공격받았다. 이에 레카피노스는 '''바르다스 포카스'''를 유배지 히오스 섬에서 소환, 군권을 부여해 반란 진압을 명령했다. 비록 충성심은 의심스러웠으나 바르다스 포카스가 요안니스 일가에게 확실한 반감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16] 라이벌 제거가 목적인지 단순한 반감 때문인지는 불명확하지만, 어쨌거나 포카스는 적극적으로 스클리로스의 반란군을 진압했다. 979년 스클리로스가 바그다드로 도주하면서 반란은 종식된 듯 보였다.
3.2. 트라야누스 관문 전투
979년, 스클리로스의 반란을 진압한 바실리오스 2세는 갓 스무 살을 넘긴 청년 황제였다. 젊은 황제는 내정 안정에 온 힘을 쏟으며 실권자이자 정적인 레카피노스에 대한 견제를 착착 진행해나갔다. 그러던 985년, 바실리오스 2세는 레카피노스가 바르다스 포카스와 내통하여 반란을 계획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레카피노스는 반란 및 부정부패 혐의로 유배형과 전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 바실리오스 2세는 레카피노스가 독단적으로 반포한 모든 법률을 무효화시키는 것으로 숙청 작업을 마무리했다.
요안니스 1세 사망 당시, 불가리아 지역을 다스리던 사무일은 스스로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를 선언해 로마 제국을 공격했다. 986년에는 사무일이 테살리아 지역을 공격해 라리사를 점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위협을 느낀 바실리오스 2세는 직접 2만의 군대를 이끌고 사르디카를 공격하지만 불가리아군의 저항으로 실패했고, 오히려 8월 17일 트라야누스 관문이라는 고개에서 불가리아군에게 매복을 당해 참패했다. 이 패배로 동로마 귀족들 사이에서는 바실리오스 2세에 대한 반란 움직임이 다시 일기 시작했다. '''내전의 불씨가 또 당겨진 것이다.'''
3.3. 포카스 내전
987년 8월 15일, 이러한 움직임을 포착한 바르다스 포카스는 스스로 황제임을 선언했다. 바르다스 포카스의 내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포카스는 바그다드로 도망친 스클리로스에게 서로 바실레우스임을 인정하고 공동 황제로서 동로마를 양분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을 반긴 스클리로스는 협정을 맺고자 포카스를 찾아갔지만, 이는 포카스의 함정이었다. 스클리로스는 피로포이온 요새에 감금되었고, 후방의 위험을 제거한 포카스는 본격적으로 병력을 일으켜 서쪽으로 나아갔다. 아비도스로와 크리소폴리스를 점거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
이 때가 바실리오스 2세의 최대 위기였다. 수도는 포위당했고, 자신을 구원해줄 세력은 없었다. 게다가 말이 반란군이지 당시 동로마 정예 병력은 몽땅 포카스의 반란군의 지휘 하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설사 항복하더라도 기존의 위치인 꼭두각시 황제가 되는 선에서 끝나지 않고, 폐위되거나 죽임당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바실리오스 2세는 휘하에 있던 해군으로 시간을 벌면서 키예프 공국의 대공 볼로디미르 1세에 도움을 요청해 약 6,000명의 바랑인을 지원받지만[17] 그 대신 그의 여동생인 포르피로예니티 안나를 볼로디미르에게 시집보내야 했다.[* 이후 볼로디미르가 개종해 키예프 공국은 동방 정교회 국가로 거듭났다. 이 명맥은 키예프 공국의 후예인 동슬라브족의 3개 국가([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로 이어지게 된다.][18]
989년 2월, 바실리오스 2세는 바랑인 병력 6천을 중심으로 크리소폴리스를 기습하여, 반란군을 몰살하는데 성공했다. 포카스도 역습을 위해 해군 주둔지인 아비도스를 공격하지만 황제군의 완강한 방어에 막혀 실패했다. 3월에는 바실리오스 2세가 동생 콘스탄티노스와 같이 아비도스로 진격하여, 아비도스 외곽에서 반란군을 격퇴하고 포카스를 죽이는데 성공했다.[19] 포카스의 아내는 피로포이온 요새에 감금시킨 스클리로스를 내세워 반란군 잔당을 모으려 했지만, 이미 대세는 황제군에게 기운데다 스클리로스 또한 실명 직전의 노인이었다. 스클리로스는 항복 제안을 받아들였다.
바실리오스는 비티니아에서 스클리로스를 만나, 앞으로 이와 같은 내전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스클리로스는 본인 스스로가 반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래와 같이 바실리오스에게 제대로 조언했다.
과연 바실리오스는 이 조언을 평생에 걸쳐 실천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스클리로스를 쿠로팔라티스(κουροπαλάτης)에 임명해 여생을 보내게 했다. 이로서 두 번째 반란도 종결되었으니 989년 10월 일이었다. 이때 황제의 나이 31세였다.'''자만해진 총독의 봉급을 삭감하십시오. 전장에 나간 장군에게 너무 많은 자원을 주지 마십시오. 부당한 요구로서 그들을 지치게 만들어, 자기 일에 전념하기도 바쁘게 하십시오. 여인의 의논을 허락하지 마십시오.[20]
누구에게도 이해받기 쉽지 않게 하십시오. 가장 은밀한 계획은 소수의 사람들하고만 공유하십시오.'''
4. 제국의 중흥을 이끌다
두 차례의 반란을 거치며 바실리오스의 성격은 판이하게 바뀌었다. 본래 탐욕적이고 열정적이었던 성격은 내전 이후 모든 욕망이 죽어버린 듯 했다. 그가 한평생 독신 생활을 한 유일한 황제가 된 이유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보는 학자도 있다. 네이버 캐스트에서는 '''전설로나마 남아 있는 스캔들조차 없다'''고 써놓았다. 심지어 상단의 초상화에도 혼자만 있다.[21] [22]
일찍이 트라야누스 관문 전투에서 불가리아에게 참패했던 바실리오스는 당시의 패전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반드시 불가리아인들에게 복수할 것을 맹세했고, 결국 그 맹세를 지켰다.'''
내전이 끝난 후, 바실리오스는 복수를 위해 불가리아를 재침공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995년 알레포와 안티오키아가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23] 손에 함락당하기 직전이라는 안티오키아 총독의 급보를 받았기에, 황제는 불가리아 정벌을 단념하고 시리아 지역으로 원정을 떠났다. 바실리오스는 전군에 노새를 지급해 최소 석 달은 걸릴 원정길을 빠르게 주파했고, 불과 '''16일''' 만에 알레포에 16,000여명의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었다. 파티마 왕조는 패배하였고, 황제는 이참에 기세를 몰아 에메사와 트리폴리까지 밀고 내려갔다. 아쉽게도 트리폴리는 함락시키지 못했지만, 황제는 만족하며 귀환길에 올랐다. 이것으로 한동안 파티마 왕조는 로마 제국에 도전하지 못할 터였다.[24][25]
귀환하던 도중 바실리오스는 소아시아의 유지 에브마티오스 말리노스에게 대접을 받게 되었다. 황제에 버금가는 부귀를 누리는 말리노스의 연회 내내 그는 조용히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그는 소아시아 귀족들에게 치명타를 날릴 새로운 칙령을 공포했다. 이 칙령은 그동안 토호들이 강탈한 농민들의 토지를[27] 무상으로 반환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귀족들 또한 호구가 아닌지라 가만히 있지 않았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라는 귀족들의 항의에, 바실리오스는 '''아우구스투스 때에 그대의 조상이 이 땅을 받았음을 증명한다면 소유를 인정하겠다'''고 맞받아쳤다(...) 고대 로마로부터 면면히 이어왔다는 계승 의식이 잘 드러나는 말. 아우구스투스가 묻혀 있는 로마 시 외곽의 아우구스투스 영묘가 제국령에서 벗어난 지 200년도 넘은 시점에 이런 말을 하는 건 당연히 '''배째라'''는 뜻이었다. 이 칙령으로 말리노스는 정의를 어지럽혔다는 죄명으로 감옥 신세를 지게 되었고, 많은 귀족들이 몰락했다. 또한 바실리오스 2세는 토지 반환은 물론이고, 대토지 소유자들에게 농민들의 미납된 조세를 내도록 했다.[28] 그리고 당시 교회로의 기증을 통해 봉건 영주화 되어가고 있던 수도원의 토지 소유를 억제하려고 했다.[29] 당연히 성직자들도 반발하며 소아시아 지역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고, 그는 한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러야 했다. 이는 물론 10세기 들어 눈에 띄게 강력해진 아나톨리아 지방 귀족들과 성직자들을 견제하는데 효과적이었다.짐은 가난한 사람을 상대로 허구한 날 (제국의 테마들을 가로질러 원정길에 오를 때마다) 탐욕과 불법 행위가 자행되는 것을 똑똑히 목도했다. '''토지를 불리고 가난한 백성의 재산을 제 것인 양 부당하게 떵떵거리는 세력가들의 땅은 몰수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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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6년 바실리오스 2세의 칙령[26]
4.1. 불가르인의 학살자
제국 내부가 안정된 후, 그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 불가리아에 다시 나타났다. 약 15년에 걸쳐 전개된 이 전쟁은 아쉽게도 기록이 별로 없다. 1014년경에 이 전쟁의 결과를 알 수 있는 전투가 나타나는데, 킴발롱구스 협곡에서 바실리오스 2세는 사무일이 이끄는 불가리아군을 대패시키고, 15,000명의 포로를 잡았다.(1014년 7월 29일, 클리디온 전투 또는 킴발롱구스 전투) 그는 이 포로들에게 끔찍한 형벌을 내리고 돌려보냈다. 15,000명의 포로들을 100명으로 나누어 1명은 애꾸, 나머지는 전부 눈을 뽑고, 애꾸가 나머지 99명을 인솔해 불가리아로 되돌아가게 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불가록토노스(Βουλγαροκτόνος), 즉 '''불가르인의 학살자'''라 불리게 되었다. 이 포로들의 행진을 본 사무일은 화병으로 죽고 말았고, 3년 뒤 불가리아는 동로마 제국에 정복되었다.[31]
이 불가리아 포로 학살을 야사로 여기는 견해가 있으나, 이 기록 자체는 (관찬 사서에 가까운) 스킬리치스의 약사 등이 출처이다. 실제로 클레이디온 전투와 바로 그 전에 대규모 야전이 있었고, 편집증적일 정도로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인 바실리오스 2세가 그 이후로 수도로 돌아가 공세의 고삐를 늦추고 소모전으로 일관해서 불가리아를 고사시켜 버리는 전법을 보인 여유를 봤을 때, 불가리아가 그때의 패배에서 절멸에 가까운 손실을 겪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특히 저 15,000명의 병력은 불가리아 추정 총 병력 35,000명의 40퍼센트를 넘어가는 엄청난 수치로, 저 정도의 병력을 그렇게 짧은 시기 안에 다 잃었으면 사실상 그 이상의 저항은 불가능해졌다고 봐야 한다. 사무일이 충격을 받고 쓰러져 죽었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로 큰 심리적 타격을 입었다는 얘기. 즉 당시의 정황과 (실화든 프로파간다든) 널리 인정받은 점을 미루어보아, 과장은 있을 수 있지만 아예 야사일 수는 없다. 무엇보다 바실리오스는 불가리아 정복 이전에 시리아 원정 당시 포로로 잡은 베두인 병사들의 오른팔을 잘라버리고 조지아 원정에서는 압하즈인 포로들의 두 눈을 뽑아 장님으로 만든 전적이 있다.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를 병합한 이후 불가리아의 남은 군대를 그대로 제국 불가리아 테마병들로 편입하였는데 이 병력은 제국이 불가리아를 제압하는데 소모한 것으로 추정되는 병력을 거뜬히 초과하는 수치로 추산된다. 불가리아 정복보다는 이런 편집증적인 인력 관리에 바실리오스 2세의 진면목이 있다.
5. 말년과 제국의 몰락
1020년 경에 황제는 넘치는 에너지로 제국의 동쪽 끝자락에서 활동했다. 남부 이탈리아에서도 동로마인들은 992년에 체결된 황금 문서에 따라 베네치아의 해상 원조를 받으면서 노르만인들을 격퇴했다. 그는 시칠리아를 1027년에 원정할 계획을 세웠으나, 1025년 12월 15일에 사망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67세였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으므로 자손을 남기지 않았다. 자식이 없던 바실리오스 2세는 제국 쇠퇴의 단초를 스스로 만든 셈이었다. 유능한 후계자를 미리 지정해 놓아야만 하였으나, 후계자 문제에 대해서 무책임하다 싶을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이때문에 동생 콘스탄티노스 8세가 제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8세는 연이은 군사 반란 이후 성격이 바뀌고 유능한 통치로 제국을 발전시킨 형 바실리오스와는 달리 60세가 넘었음에도 젊은 시절처럼 방탕하고 사치스러웠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팔푼이었다. 그러다보니 귀족들에게 휘둘리고 살아 황권을 스스로 약화시켰다. 특히 마지막 상속자인 세 공주들을 결혼시키지도 않았기 때문에[32] 후손이 없는 마케도니아 왕조는 초라하게 단절되고 말았다.
6. 평가
바실리오스의 군사적 업적은 일인칭 형식으로 서술한 그의 비문에서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문서 상단 참조). 불가르족의 학살자라는 별칭에 가려져 바실리오스가 불가리아 이외의 곳에서 거둔 군사적 승리, 루스족을 개종시킨 일, 할아버지와 같은 방법으로 동로마의 백과사전 문화를 후원한 업적은 잘 조명받지 못했다. 그는 또 금욕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엡도몬[33] 에 성 요한 세례자 성당을 건립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외곽의 군대 연병장 옆에 부속 황궁[34] 을 둘 정도로 경건한 인물이었다. 병력 만큼이나 재정 관리에도 치밀해, 그가 죽을 무렵 유사시를 대비해 비축한 비상금이 '''로마 제국 2년 어치 국가 예산을 훌쩍 넘길 정도'''였다. 비슷하게 거대한 영토를 수복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국고가 부족했던 것과 대조되는 점. 물론 이 돈은 후임 황제들이 나중에 전부 까먹지만, 사후 몇십 년 후에도 물가에 영향을 줄 정도로 막대한 규모의 자금이었다.'''그는 반란을 진압하고, 봉건 지주를 복종시켰으며, 제국의 적(특히 도나우 강 인근 지역과 동부)을 정복했다. 로마군의 권세는 어디서든 경외의 대상이었다. 황제가 전쟁에서 가져온 약탈품 덕에 재정은 가득 넘쳐났다. 학문의 등불은 황제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조금 희미하게나마 여전히 불타올랐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중들 다수는 충분히 행복했을 것이다. 그들 대부분의 삶은 화려하고 다채로웠다. 설사 도시의 방어 시설 어딘가가 파손되었더라도 침공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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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오스는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옌니토스가 의전서에 정리한 '''제국이 절대 외국인에게 넘겨줄 수 없는 세 가지''' 중 하나를 포기했다. 그 세가지인 즉슨, '''황실에서 태어나고 자란 공주'''(포로피로옌니타, 안나 콤네나 항목을 참조)'''''', '''그리스의 불''', '''자줏빛 제관'''(제위)''''''였는데, 황실에서 태어나고 자란 공주인 자신의 여동생을 키예프 대공 볼로디미르에게 시집 보낸 것이다.[35]
원래 동로마 황실은 절대 포르피로옌니타를 다른 나라로 출가시키지 않았다. 오토 1세의 며느리 테오파노도 황실의 여자였을 뿐 포르피로옌니타는 아니었다[36] . 그래서 바실리오스 2세도 처음에는 내키지 않아 하였고, 아예 번복하기에 이르나 분노한 볼로디미르 대공이 제국을 침략하여 바르나 등을 점령하자 어쩔 수 없이 원래 약조대로 한다. 다만 이 이후로부터는 동로마 제국에서 본격적으로 공주들을 다른 나라에 결혼을 보내기 시작했고, 제국으로 시집오는 외국인 황후들 또한 더 잦은 빈도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 마케도니아 왕조 시대까지의 동로마 제국이 포르피로옌니타(제위 계승권과 직결된 황실의 공주)를 다른 나라로 출가시키지 않고, 외국인 황후도 잘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돌려말하면 이 시기 동안 동로마 제국이 그들이 인지하는 세계 내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외국'이 없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서로마 분열-서로마 멸망 이후 동로마의 가장 위험한 경쟁상대이자 주적은 7세기 이전까지는 사산조 페르시아, 7세기 이후에는 이슬람 제국이었고, 이들은 군사력이든 경제, 문화적인 면에서든 동로마와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강대국이자 선진국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또 종교적으로도 '기독교 세계에 속하지 않는' 적대적인 관계였기에 왕실 결혼을 통한 동맹이나 협력을 고려할 상대가 아니라 말 그대로 경쟁 상대이자 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 반면 다른 이웃 국가들, 특히 국혼의 대상으로 고려할만한 기독교권 국가들은 아직까지 동로마 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맹 세력으로 인정받을 수준으로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동로마 제국은 '기독교 세계의 유일한 강대국'으로써 다른 어떤 나라와도 대등한 동맹을 맺을 수 없고, 맺을 필요도 없기에 황실 결혼과 같은 형태의 외교정책을 취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는, 서로마 멸망 이후 장기간의 분열-혼란기에 휩싸였던 서유럽에서 샤를마뉴의 제국이 그 분열과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하자 당장 동로마의 이리니와의 혼담이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논의되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오래 외국에 넘겨지지 않은 것은 바로 '''그리스의 불'''. 그리스의 불은 출현하자마자 각종 짝퉁이 넘쳐났으나(아랍은 물론이거니와 십자군도 사용했다!), 그 정확한 배합 비율은 극비로 취급되어 4차 십자군 당시는 물론 1453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도 유출되지 않았다. 물론 화약 병기의 발전으로 고대와 중세를 풍미했던 액체 화약의 필요성이 감소한 것도 클 것이다.
다만 적어도 이런 사항을 동시대인들이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진 않으며, 그들이 황제에게 불만을 품은 부분은 따로 있었다. 물론 황제로서의 바실리오스 2세는 아주 직무를 열심히 수행했다. 전쟁터에 나가서 지휘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것만 좋아했던 게 아니라, 수도에 있을 때면 산더미 같은 결재 서류들이 쌓인 황궁 내의 사무실에 틀어박혀 밤이 늦도록 일일이 직접 처리하고 지시하는 게 일상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야전에선 본래 하급 장교들이 해야 할 전투 장비 지휘 검열을 열병식 때 몸소 하면서 열외 조치까지 직접 내릴 정도였다!
하지만 문화 활동은 물론 옷을 멋지게 입는 것조차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씻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데다가(...), 연인은 고사하고 친한 친구도 만드는 일이 없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개인의 개성에 관대한 현대의 사회인이라도 이런 식이면 주변의 시선이 곱지 못할 텐데, 그는 그 당대에도 천 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중세 강대국, 그것도 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이 자리는 결코 사생활이나 개인의 개성같은, 중세에는 있지 않았던 개념이 존중받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황제라는 자리에는 제국의 최고 지도자라는 역할로서 제국의 위대함, 권위, 세련됨 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표출하고, 또 그걸 적극적으로 가꾸고 외국과 자국 내 신민들 모두에게 과시하여 결과적으로 문화력으로 표현되는 제국의 통치 이데올로기 자체를 강화할 의무가 부여되었다. 근대 이전의 제왕들이 신민들의 돈을 쥐어짜가면서도 후세가 보기에는 스케일이 큰 사치에 불과한 거대한 궁전, 종교 건물, 문화 시설들을 지은 건 물론 군왕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기호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지만, 주된 목적은 결코 왕 혼자 억수로 큰 궁전에서 놀라는게 아니라 그렇게라도 해서 왕실의 권위 자체를 지속적이고, 또 적극적으로 표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수천년전까지 가서 찾을것도 없다. 청빈하겠다고 자국의 대통령궁이 개딱지마냥 허름하고 대통령이 권위를 버린답시고 허구헌날 티셔츠에 쓰레빠 끌고 다니면 좋아할 국민이 몇이나 있을까? 대개의 국민들이 느낄 감정은 "쪽팔림"이다.[37]
그런데 바실리오스 2세는 이런 면에선 완전히 무관심했을 뿐더러, 좋아하지도 않았다. 모든 이유는 단 하나, 그의 일이자 취미이기도 했던 군대 지휘와 내정 관리에 그런 것들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현실과 인간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는 극도의 실용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이유로 앞서 이야기한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군인들과 장군들을 제외한 주변 사람들이 황제를 그다지 좋아할 수가 없었던 건 무리가 아니며, 트레드골드가 정확히 지적한 "박약한 책임감"이란 지적[38] 은 바로 여기에서 근원한다.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그가 해야 했던 이런 역할을 전담하는 사람은 정작 따로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그의 동생이자 후세에 무능한 황제로 이름난, 이름 뿐인 공동 황제 콘스탄티노스 8세였다. 이 사람은 평생 놀고 먹으면서 스포츠 경기나 하고, 성대한 의식을 아내와 함께 집전하는 게 일이었다. 권력 가진 형님 황제는 일이 취미라 권력을 누리는 데는 관심이 없고, 실권 없는 동생 황제는 형이 귀찮아서 싫어라 하는 공적 의식 참여와 집전 그리고 사교 활동하면서 노는 게 일[39] . 제국 황후가 해야 하는 모든 중요한 일은 진작부터 제수가 떠맡아 하고 있었다. 바실리오스 2세에게도 나름대로 할 말은 있었던 셈이다.
어쨌든 상술한대로, 업적으로만 보면 콘스탄티누스 1세, 테오도시우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같은 과거의 대제들은 물론, 한세기 반 뒤의 대제인 마누엘 1세와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인들의 그에 대한 평가는 꽤 박했고, 그를 군주로 존경하고 좋아했던 건 그의 군인들 뿐이었으며, '''대제 칭호 또한 받지 못했다.''' 게다가 대체로 후세에 명군이라 이름난 군주들은 성격이 괴팍한 경우는 있어도 나름대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데, 바실리오스 2세에게는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자신은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이런 의미에선 세계사적으로도 꽤나 특이한 경우다.
허나 그 당대인들의 아들, 손자 세대에서 그의 대한 평가는 180도 바뀌게 되는데 조카 딸인 조이의 남편들, 여동생, 양자의 치세 그리고 그 경쟁자들 간의 권력 암투를 뒤에 두고 마케도니아 왕조의 마지막 후계자라는 표면적인 이름의 들러리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에게 보인 일련의 무뇌적인 행각들과 바실리오스 2세의 뒤를 이은 무기력하거나 무능하거나 정통성 없는 황제들의 지배, 페체네그족과 투르크족, 노르만족에게 시달리던 11세기 중반 당대의 백성들이 아버지, 할아버지들에게서 이야기로 들어온 마케도니아 왕조 시절 무적을 자랑하던 제국의 영광에 대한 향수가 그의 대한 후세대의 평가를 극적으로 바꿔놓게 된다.
이후 콤니노스 왕조의 중흥기가 다시 한 번 도래하기는 하지만 강대국 동로마 제국이란 의미에선 실질적인 마지막 황제였기에, 이러한 그의 모습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비잔티움 연대기의 작가 노리치는 그가 사망한 다음날인 1025년 12월 16일을 동로마의 몰락이 시작되는 날로 보았다.
총평하자면 바실리오스 2세는 군주로서의 능력은 그 어떤 명군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지만, 후계자 양성만큼은 능력의 유무 이전에 관심조차 없었다고 할 수 있겠다.
7. 외모
좋은 말로도 잘생기거나 세련된 외모는 아니었던 듯 하다(...) 프셀로스의 기록에 따르면 '''보통 키보다는 작았지만''' 전반적으로 균형있는 체격에 아치형 눈썹과 총명하게 빛나는 연하늘색 눈동자를 지녔다고 한다. 유별난 점 없는 외모였으나 말을 잘 부려서 안장 위에서는 폭풍간지였다고. 말년에는 턱수염이 벗겨졌지만 뺨 쪽에 난 수염이 넉넉한 덕에 풍성해보였다고 한다.
8. 대중매체에서
-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플레이 가능한 시나리오가 없어 비잔티움 역대 황제 목록에서만 찾을 수 있다. 바닥을 기는 외교력과 하늘을 뚫는 전투력, 고독하고 금욕적인 삶을 반영해 독신주의자 특성이 붙었다.
- 크루세이더 킹즈 3에서도 역시 비잔티움 역제 황제 목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능력치는 외교력 2, 전투력 24, 관리력 9, 계책력 8, 학습력 9로, 전작과 마찬가지로 전투력이 독보적이다. 독신주의자 특성 역시 붙어 있다.
9. 여담
공동 황제로서의 제위 기간까지 포함하면, 가장 오랫동안 통치한 로마 황제다. 2세에 공동 황제로서 대관식을 받고 67세에 죽었으니.
당대 기록에 따르면, 적들은 전장에 바실리오스의 기치가 보이면 '''"도망쳐라! 황제가 나타났다!"'''라고 소리치며 후퇴하기 바빴다.[41]
흔히 '불가록토노스'라는 별칭으로 알려져 있지만 생전에 바실리오스는 이 별칭을 쓴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불가록토노스'라는 별칭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시점은적어도 불가리아 제2제국이 부흥하고 4차 십자군으로 제국이 여러 망명 정권으로 쪼개지는 시절까지 가야 한다. 바실리오스 자신은 소(또는 젊은) 바실리오스, 혹은 포르피로옌니토스(자줏빛 혈통)이라 불리는 것을 선호했고, 공식적으로도 이 별칭을 즐겨 사용했다. 이는 마케도니아 황조의 초대 황제이자 그의 조상인 바실리오스 1세를 의식한 표현이다.
988년 우주력을 동로마 제국의 공식 기년법으로 채택한 황제가 바실리오스 2세다. 989년 10월 25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지진으로 하기아 소피아의 서쪽 돔 아치가 붕괴되자 수리를 지시하기도 했다. 수리가 끝난 때는 6년 후인 994년 5월 13일이었다.
우수한 장군에 특유의 성격 때문인지 혹자는 그를 BADASS라 평하기도 했다. 국내에는 현실 토탈워 유저라는 썰이 돌 정도.
2007년 포브스 지에 따르면, '''역사상 가장 부유한 인물 9위(!)'''에 해당한다. 이는 당시 총 GDP, 순자산, 인플레이션을 반영한 결과이다. 여기에 따르면 그의 보유 자산은 오늘날 가치로 '''1,694억 달러'''. 재정 감각이 좋아 죽기 전까지 20만 파운드(약 90톤)의 금을 비축해뒀다. 어느 정도 부유한지 잘 감이 안 온다면 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4억 달러 차이로 8위(1,698억 달러)고, '''2007년 당시 세계 최고의 부자였던 빌 게이츠의 재산이 560억 달러'''다! 내정에만 힘썼던 것도 아니고 대외 전쟁도 상당히 많이 치렀으며, 내전도 굵직한 것만 두 차례 치렀고, 영토도 고대 로마 시절의 몇 분의 일 밖에(?)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국부 축적을 해놓았다는 것은 재정 관리를 그야말로 초인적으로 한 것이다.
2009년 스카이TV에서 집계한 위대한 그리스인 100인 중 '''70위'''에 선정되었다. 역대 로마 황제 중에서는 2위. 가장 순위가 높은 로마 황제는 28위의 콘스탄티노스 11세이며, 그 다음은 콘스탄티누스 대제(71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82위)였다. 헌데 그리스어권도 다 통합하기는커녕 도시 국가로 쪼그라든, 아테네 대성당 앞에 그 동상이 있는 최후의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야 이해할만해도, 다른 황제들은 다소 의문의 여지가 있다. 바실리오스 2세가 속한 마케도니아 왕조부터 아르메니아계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그리스나 그리스어권이 아닌 일리리아(나이수스) 출신이였고[42] , 후기 로마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라서 서로마 제국만 로마 제국이라고 하는 사람도 로마 황제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도 그렇고. 여러모로 현대 그리스의 역사관을 알 수 있는 통계.[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