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바 공화국

 


'''가장 고귀한 제노바 공화국'''
'''Serenissima Repubblica di Genova'''
'''Repúbrica de Zê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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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1]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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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년 ~ 1797년, 1814년 ~ 1815년
표어
Respublica superiorem
non recognoscens
(자신보다 더 높은 것을
인정하지 않는 공화국)
위치
이탈리아 북부 해안
수도
제노바
정치체제
상인 공화정
국가원수
도제
주요 도제
시모네 보카네그라
안토니오토 아도르노
토마소 디 캄포프레고소

주요 실권자
안드레아 도리아
언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리구리아어
민족
리구리아인
종교
가톨릭
주요사건
1005년 건국
1797년 1차 멸망
1814년 부활
1815년 사르데냐 왕국에 합병
통화
제노비노
성립 이전
자치 도시
멸망 이후
사르데냐 왕국
1. 개요
2. 역사
4. 기타
5. 관련 문서

언어별 명칭
리구리아어
Repúbrica de Zêna
이탈리아어
Repubblica di Genova
라틴어
Res Publica Ianuensis / Genua
기타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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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시카어
Genuva
베네토어
Gènoa
프랑스어
Gênes
독일어
Genua
그리스어
Γένοβα (''Génova'')
스페인어
Génova
카탈루냐어
Gènova
포르투갈어
Génova
터키어
Cenova
영어
Genoa
아랍어
جِنُوَى (''Jinowā'')
페르시아어
جنوآ‎ (''Jenoâ'')


1. 개요


이탈리아 서북부 해안에 존재했었던 공화국으로, 수도제노바였다.

2. 역사


중세베네치아 공화국과 함께 유럽중동을 잇는 양대 무역 국가로 군림했다. 처음으로 본격적인 두각을 나타낸 것은 10세기 무렵으로,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기 이전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왕조인 파티마 왕조와의 해전에서 점차 우위를 차지하기 시작하여 10세기 말엽에는 북아프리카의 주요 거점 중 하나인 튀니지술탄을 굴복시켜 지중해의 강자로 그 세력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제노바의 앞길을 가로막는 경쟁자였던 베네치아 공화국과 갈등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해안의 동안에 위치한 도시국가였던 베네치아는 도시의 시작부터 동로마 제국과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었는데,[2]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동로마 제국의 상권을 점차 잠식해 가며 콘스탄티노플을 경유한 동방 무역로를 장악해 동방 무역에서 절대적인 강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자 이미 안정된 무역로를 확보하고 있던 베네치아가 대응에 골몰하고 있던 반면에, 제노바는 발빠르게 전쟁에 참여해 베네치아에게 돌아갈 수 있던 많은 이권들을 확보하는 것에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동방 무역에 있어 베네치아와 거의 동등한 위치를 차지했다. 사실 식민지의 규모 같은 것을 보면 베네치아의 화려함보다는 덜하기는 했다. 아무래도 위치상 베네치아와 같이 에게해에 식민지를 만들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노바가 직접적으로 지배한 식민지는 우크라이나의 카파 주변과 모나코, 코르시카사르데냐 섬의 북부 정도로, 이탈리아 본토에서 상당한 크기의 속주를 차지하고 에게 해의 섬들을 거의 다 점령, 오스만 제국과 동지중해의 패권을 다퉜던 베네치아 공화국보다는 적었다.
십자군 전쟁에 사용된 모든 물자와 병력은 1차 십자군 전쟁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제노바와 베네치아인의 손에 의해 수송되었고, 이런 '운송업' 과 '무역' 을 겸한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위상은 갈수록 높아지게 되었다. 가령 당시 제노바의 무역 수입은 프랑스 왕국 전체 세입의 3배에 달했다. 이 시기를 제노바의 전성기로 보는 경우가 많은데 백년전쟁에서 프랑스의 우군으로 참전해 분전했으나 프랑스 기사들의 삽질로 대패해 체면을 구긴, 프랑스의 석궁병도 바로 제노바 용병이었다. 일부에서는 제노바 상인이 자본주의를 시작했고 이어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미국 순으로 헤게모니가 넘어갔다고 보기도 한다. 지배적인 무역 발전이 베네치아에서 시작해서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으로 이어진다고 보는 경우도 있는 것과 비교된다.

3.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경쟁



베네치아라이벌 관계였던 시기도 있었고, 한때 4차례에 걸친 전면전을 벌여 마지막 전쟁에서는 '''베네치아 수도'''까지 침입하는 등 승세를 타는 듯 했으나 베네치아의 바로 옆동네에서 벌어진 키오자 전투에서 영혼까지 탈탈 털리고 말았다. 이를 전환점으로 베네치아가 1381년 제노바를 누르고 패권을 차지했다고 여겨진다.
키오자 해전 이후 베네치아와의 경쟁에서도 탈락하고, 카파와 키오스 섬을 비롯한 해양 무역 거점들도 오스만 제국의 팽창으로 상실하며 국운이 위태했던 제노바 공화국은 옆동네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제국의 부상으로 다시 영향력을 늘리기 시작했다. 스페인 세력은 무력으로는 서지중해의 패자로 떠오르면서도 무어유대인 추방 등으로 인해 자국의 금융, 교역 인프라를 스스로 상당히 날려 먹었다. 이 공백을 제노바의 은행가들이 메꾸었고, 이후로도 17세기 후반 스페인 패권 자체가 몰락하기 전까지 제노바는 예전 같은 독립 세력의 포스는 발휘하지 못해도 부유한 금융의 허브로서 명맥을 유지했다. 자체적인 금융 인력을 스스로 말아 먹어버린 스페인의 무역, 금융, 유통업은 많은 부분에서 제노바 상인과 은행가들이 전담했다. 신대륙의 금은이 세비야로 들어 오면 이를 제노바 상인들이 본토 제노바로 이송하여 다시 나머지 유럽으로 되팔고, 나아가 카스티야의 양모, 바스크 지방의 고래 기름, 안달루시아의 농작물 또한 제노바 상인들이 유통하게 되었다. 이렇듯 매우 절묘한 시기에 줄을 잘 서서 생명 연장을 한 것은 물론이고, 제2의 번영기를 맞이하게 된 제노바를 두고 1557년에서 1627년 사이를 '스페인 제국의 시대 뒤에 있었던 제노바 금융 제국의 시대'라고 보기도 한다. 인적인 면에서도 콜럼버스 본인 또한 제노바 사람이었고, 후기 스페인군 테르시오의 명 지휘관으로 활약을 떨친 암브로지오 스피놀라 또한 제노바 출신 스페인 장군이었다. 제노바 공화국의 수도였던 제노바의 인구도 1600년에 70,000명으로 많은 편이었다.
역으로 말하면 제노바의 국운 또한 스페인에게 상당히 종속되어 당시 스페인의 숙적이었던 발루아 왕조부르봉 왕조 아래 프랑스 왕국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었고, 설상가상 제노바도 도저히 감당 못 할 규모의 재정난이 스페인 제국을 여러차례 강타하자 스페인이 제노바를 군사적으로 보호해 줄 능력 또한 17세기 중반 이후 약화되고 만다. 제노바는 18세기에 걸쳐 프랑스의 위협 아래 있다가 결국 나폴레옹의 손에서 오랜 숙적 베네치아와 함께 멸망을 맞이하였다. 멸망할 당시였던 1800년에 제노바의 인구는 90,000명이었다.
한때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밀렸지만, 현재 베네치아가 관광 도시로서 겨우 명맥을 이어나가는 것과 달리 제노바는 현재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는 항구 도시로 기능하고 있어 도시 자체의 경제적 위상은 베네치아보다 우위에 있다.(물론 현재 인구도 베네치아보다 많다.) 도시 내 인구는 60만명 정도, 도시권 인구는 80만명 이상, 대도시권은 150만명 정도로 이탈리아에서 6번째로 큰 도시다. 그에 반해 현재 베네치아의 인구는 26만명 정도.
북이탈리아 지방의 주요 항구로, 나폴리에 이어 이탈리아 제2의 항구다. 물론 항구 이용량도 이탈리아 내에서도 8위로 떨어진 베네치아보다는 훨씬 많다.[3] 다만, 제노바가 있는 리구리아 주 전체의 경제력은 베네치아가 있는 베네토 주 전체 경제력보다 떨어지는데, 베네토 주에 파도바, 트레비소, 비첸차, 베로나 같은 인구 많은 지역이 다수 있는 반면에 리구리아 주에는 인구 10만명을 넘는 도시는 제노바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4. 기타


중세에 잘 나가던 산업인 용병에도 뛰어들어서, 제노바 쇠뇌병이라는 용병자원을 주력으로 파견했다. 애초에 제노바가 공화국으로 성립할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이 제노바 쇠뇌병의 활약 덕분으로, 십자군 전쟁이라는 성전에 투자함으로써 제노바는 중세 유럽 질서의 비호 하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백년전쟁 때도 프랑스 쪽에 용병을 공급하였는데, 크레시 전투아쟁쿠르 전투 등에서의 프랑스 쪽의 지휘가 워낙 병맛이었다고 여겨지기는 한다.
크림 반도 남부에 식민 도시를 만들었는데, 13세기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 제국군이 러시아 남부에 쳐들어왔을 때 크림 반도가 위기에 처하자 제노바 공화국이 군대를 파견해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참고로 이때 몽골군을 물리치긴 했으나(몽골군도 전력으로 상대한 건 아니었다), 한 설에 따르면 몽골 군대가 떠나면서 성으로 시체 몇구를 던져놓고 갔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전염병이 돌아 훗날 엄청난 재앙인 흑사병이 찾아왔다는 소리가 있다(...).

5. 관련 문서



[1] 제노바 공화국의 국기는 수호성인잉글랜드와 같은 성 제오르지오로 국기 모양은 비슷하나 가로세로 비율이 다르다. 현재 제노바밀라노의 시기가 이와 유사하다.[2] 베네치아의 도제는 공식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봉신인 달마티아 공작을 겸임했다. 그렇기에 외부 영토에 매우 가혹했던 베네치아는 달마티아 지역에만 본토에 준하는 대우를 해준다.[3] 지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지만, 아드리아 해 깊숙한 곳에 있는 베네치아에 비해 제노바에 면해있는 리구리아 해는 열린 바다라서 접근성과 입지 자체가 훨씬 좋다. 제노바와 베네치아가 양대 해상 상업 공화국으로 각각 독립된 시절이면 모를까, 이탈리아 공화국이라는 단일한 정치체로 묶인 현대에 와서는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 접근하기 위해 굳이 아드리아 해(아드리아 만) 깊숙히 들어가서 베네치아항을 이용할 메리트가 딱히 없는 것. 해상 공화국의 전성기 당시에야 배의 항속거리가 어차피 그리 길지 않아 자주 기항해야 하니 항구들이 비교적 잘 구축된 이탈리아 반도 동안-아드리아 해를 따라 항해해도 그리 비효율이 크지 않을 수 있고 따라서 아드리아 해가 베네치아의 해상 방어선이자 함대를 위한 활주로 역할도 한 셈이지만 원거리 항해로 바로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현대 해운업 입장에서 보면 아드리아해에 들어갔다 다시 나오는 비효율을 감당할 필요가 없다. 덤으로 동지중해의 무역적 가치가 크던 중세~근세 초기에 비해 서지중해, 대서양, 북해의 무역적 가치가 커진 근대~현대 기준에서 베네치아에 비한 제노바의 입지적 유리성이 더 커진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