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네포무크 훔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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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네포무크 훔멜(Jan Nepomuk Hummel)
1778년 11월 14일 ~ 1837년 10월 17일

요한 네포무크 훔멜의 트럼펫 협주곡 마장조[1]
호칸 하르덴베리에르의 연주
1. 개요
2. 생애
3. 음악 성향
4. 훔멜의 주요 작품


1. 개요


후기 고전기부터 낭만주의 초기에 걸쳐 독일/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한 피아니스트, 지휘자, 작곡가.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 등과 함께 대표적인 빈 고전파 작곡가 중 한명이다.
동시대의 음악 동료이자 경쟁자로 루드비히 반 베토벤, 루이스 슈포어, 카를 마리아 폰 베버, 니콜로 파가니니가 있었으며 피아노, 특히 즉흥연주에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당대에는 제2의 모차르트로 불리울 정도로 평가가 높았고 인기도 많았으나 현재의 위상은 빈 고전파의 다른 대작곡가들에 비해 상당히 초라한 편. 다만 대표작인 트럼펫 협주곡을 비롯한 몇몇 작품은 현재에도 자주 연주된다.

2. 생애


1778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일원이었던 헝가리 왕국의 프레스버그(현재는 슬로바키아브라티슬라바) 태생이다. 그 부친 요한 훔멜은 비인 군음악학교의 감독이었으며 지휘자로도 활동했다. 요한 네포무크 훔멜이라는 이름은 체코 & 슬로바키아의 수호성인인 요한 네포무크에서 따온 것.
훔멜은 모차르트처럼 어려서부터 음악 신동으로 각광받았으며 아버지의 후광을 입고 8살때 실제로 모차르트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할 기회를 얻었다. 훔멜의 재능에 감탄한 모차르트는 훔멜을 제자로 받아들여서 2년간 가르쳤다. 훔멜이 9살때는 모차르트가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의 초연을 담당하기도 했다.
자식을 모차르트처럼 대음악가로 만들고 싶었던 훔멜의 부친은 유럽 전역을 순행하는 연주여행을 계획했으며 1차로 런던에 간다. 부친은 훔멜을 런던에서 작곡가이자 음악교육자이자 출판업자이자 피아노 제작자로 활동하고 있던 무치오 클레멘티에게 데려갔는데, 클레멘티는 이미 뛰어난 제자들을 많이 두고 있었으나 훔멜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훔멜은 런던에서 클레멘티에게 3년 조금 넘게 교육을 받았는데, 이 시기에 런던을 방문한 하이든은 어린 훔멜의 재능에 감탄해서 그에게 피아노 소나타를 써주기도 했다. 훔멜의 부친은 런던을 떠난 후 훔멜을 프랑스와 스페인 이탈리아 등에도 데려갈 계획을 세웠으나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온 유럽이 전화에 휩싸이는 바람에 계획을 철회하고 1792년 비인에 돌아온다. 14살이 된 훔멜은 비인에서 안토니오 살리에리, 하이든, 요한 알브레히트베르거 등에게 음악을 배운다.
이 시기부터 훔멜은 뛰어난 피아노 연주자이자 장래가 촉망되는 작곡가로 비인에서 본격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특히 그의 피아노 즉흥연주는 명성이 대단해서 또 한명의 즉흥연주 달인인 베토벤과 자주 비교되었다. 두 사람의 실력대결을 원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실제로 대결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은 없다.
특히 하이든이 훔멜을 높게 평가했는데, 1804년 훔멜은 하이든의 주선으로 그와 인연이 깊은 에스테르하지가(家) 악단의 부악장(concertmaster)이 된다. 이어 1809년에는 악장(Kapellemeister)이 되었으나[2] 에스테르하지 가문과의 불화 때문에 2년만에 악장직을 사임한다.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 훔멜을 내보낸 공식 사유는 훔멜이 악장직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훔멜같은 재능의 소유자가 특정 가문의 여흥 음악만 작곡하는게 격에 맞지 않는 측면도 있다. 그럼 30년이나 그 가문에서 성실하게 일했던 하이든은 뭐냐고 할지 모르겠는데 훔멜은 하이든보다 두 세대 이후, 즉 바뀌어도 한참 바뀐 시기에 활동한 음악가라는 것을 상기하자.[3]
비엔나로 돌아온 훔멜은 1813년 소프라노 가수 엘리자베스 뢰켈(Elisabeth Röckel)과 결혼했으며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들 둘이 태어났다. 이후 훔멜은 1816년에 슈투트가르트악단의 악장이 되었고 1819년부터 1837년 사망할 때까지 바이마르 악단의 악장을 역임했다.
결혼 후에는 작곡과 더불어 음악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대표적인 제자로 펠릭스 멘델스존카를 체르니가 있다. 또 독일의 대문호 괴테와도 친교를 쌓았으며 두 사람의 우정은 1832년 괴테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됐다. 말년에 훔멜은 건강이 좋지 않아서 바이마르 악장직을 사실상 그만두었는데, 명성 덕분인지 공식 은퇴하지는 않고 사망할 때까지 명예 악장으로 남아 있었다.
훔멜은 베토벤과의 친교로도 유명한데, 나이는 베토벤이 8살 많았지만 두 사람이 비슷한 시기(1792년 경)에 비인에서 본격 데뷔를 했고 같은 스승(하이든, 살리에리, 알브레히트베르거 등)에게 음악을 배웠다는 인연이 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경쟁관계에 있기도 했으나 곧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는 친구사이가 되었으며 훔멜이 비인을 떠난 후에도 두 사람은 종종 부부동반[4]으로 만나기도 했다. 음악에 대한 자존감이 하늘을 찔렀던 베토벤이었지만 훔멜의 음악적 재능만큼은 높게 평가했다고 한다.

3. 음악 성향


빈 고전파의 마지막 거장
훔멜은 비인에서 음악인생이 만개한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다른 비인 고전파 작곡가들과 달리 젊은 시절 이후부터는 주로 비인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음악활동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인 고전파의 작풍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비인 고전파의 마지막 거장'이라는 명칭을 얻은 것. 물론 그의 후기 작품에는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낭만주의의 사조가 꽤 엿보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간결한 악구와 협화음 위주의 비인 고전파의 수법은 버리지 않고 있다. 그가 말년에 작곡한 24개의 피아노 연습곡(op. 125)를 들어보면 밝고 깨끗한 음색의 고전파 수법의 기반 위에 화려한 패시지와 감성이 실린 낭만주의 수법이 같이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다.[5]

이처럼 훔멜은 시대의 흐름에 맞추거나 앞서나가는 대신 기성 작법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한 보수적인 성향의 작곡가였다. 심지어 8년 선배였던 베토벤보다도 작풍이 훨씬 보수적이었는데, 이 때문인지 생전의 높은 명성이 무색하게 훔멜의 음악은 그의 사후 급격히 잊혀져 버렸다.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 등 우뚝하게 솟아 있는 고전파 거장들과 베를리오즈/쇼팽/리스트/바그너 등 새로운 음악을 추구하는 쟁쟁한 후배들 사이에 낀 어정쩡한 음악가가 되어 버린 것. 최근까지도 훔멜의 작품은 트럼펫 협주곡을 비롯한 몇몇 대표작을 제외하고는 잘 연주되지 않았으나 다행히 21세기 이후 잊혀진 음악 발굴 붐에 힘입어 그의 작품들도 조금씩 복원되고 있다.
뛰어난 피아니스트답게 그의 작품도 피아노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고 실내악도 대부분 피아노가 포함되어 있다. 다른 악기나 관현악 성악을 위한 작품은 상대적으로 수가 적은데, 특이하게 교향곡은 전혀 쓰지 않았고 오페라도 1곡만 작곡했다. 그런데 정작 그의 대표작이 피아노곡이 아니라 트럼펫 협주곡이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 하다.[6]
한편으로 훔멜은 뛰어난 음악교육자이기도 했다. 훔멜의 악풍은 독일의 펠릭스 멘델스존,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슈베르트 폴란드의 프레데리크 쇼팽, 이탈리아-프랑스의 초기 낭만파 오페라 작곡가 등에게 계승된다.

4. 훔멜의 주요 작품




피아노 협주곡 2번
피아노 소나타 Op.13


7중주, Op.74
론도 파보리
  • 피아노 협주곡 2번 가단조
  • 피아노 협주곡 5번 내림 가장조
  • 트럼펫 협주곡 마장조[7]
  • 피아노 5중주 내림 마단조
  • 피아노 소나타 3번 바단조
  • 비올라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곡
  • 바순 협주곡 바장조
  • 론도 파보리, 내림 마장조
  • 피아노 소나타 5번 올림 바단조
  • 피아노 소나타 6번 라장조
  • 플루트 소나타 2번 라장조
  • 오보에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변주곡 바장조
  • 피아노, 플루트, 첼로를 위한 서주와 변주곡 가장조
  •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화려한 대 론도 '런던으로 돌아가다' 바단조
  • 피아노 협주곡 3번 나단조
  • 첼로 소나타 가장조
  • 미사 마단조
  • 투 피아노 소나타 내림 가장조

[1] 조성에 대해서는 아래 주요작품의 각주 참고.[2] 1809년까지 훔멜은 공식적으로는 부악장이었지만 실제로는 이미 악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만 하이든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카펠마이스터라는 명칭을 쓰지 않았을 뿐인데, 하이든이 1809년에 사망하자 비로소 공식 카펠마이스터가 되었다.[3] 19세기 이후 시민사회가 성장하면서 대중들의 경제력과 문화적 소양이 향상되었기 때문에 음악가들이 과거처럼 귀족들의 후원에 의존하는 경향은 점점 줄어들었다.[4] 물론 베토벤은 총각이었기 때문에 훔멜만 부부동반을 했다.[5] 사실 연습곡 자체가 낭만주의 이후에 크게 유행한 장르이다.[6] 게다가 이 트럼펫 협주곡은 그의 초기작이고 정식 작품목록에 올라있지도 않다. 하지만 트럼펫 협주곡 자체가 희귀한 탓에 희소성 측면에서 가치가 높다. 물론 작품성 자체도 훌륭하다.[7] 원곡은 마장조 이지만 그대로 연주를 하게 되면 트럼펫 악보의 조표가 너무 많아지고 연주 난이도가 올라가므로 보통 반음 낮춘 내림 마장조로 연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