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살리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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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음악
4.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5. 창작물


1. 개요


Antonio Salieri
이탈리아작곡가이자 지휘자 및 음악교육자이다. 1750년 8월 18일 이탈리아 레가노 출생, 1825년 5월 7일 에서 사망. 오랫동안 빈의 궁정악장으로 재직했으며, '''수많은 대음악가들의 은사(恩師)'''이기도 하다.
세간에는 그의 음악과 교육자로서의 공로보다는 '''모차르트와 불화를 일으킨 사람'''으로 오랫동안 기억되어 왔다. 그러한 이야기의 '''대부분이 사실무근으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불화라는 점만 널리 퍼져서 '모차르트를 망쳐버린 악인', '질투의 화신'이란 이미지로 고착화되었다. 그래도 이러한 이미지는 점차 재고되어 현재 음악계와 대중들 사이에서 그의 음악세계와 성향을 파악하며 연구되고 오페라 공연도 나올 정도로 약간씩이나마 개선되는 중이다.
질투의 화신이라는 잘못된 이미지와는 달리 실상을 따져보면 모차르트에게 딱히 열등감을 품을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2. 생애


'2인자 콤플렉스'의 대명사 살리에리, 사실은 사람냄새나는 사람이었다
1750년 이탈리아의 부잣집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상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형에게서 쳄발로바이올린 등을 배웠는데 상당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부모를 일찍 여읜 뒤 가세가 몰락했는지 이탈리아 각지를 옮겨다니며 살다가[1] 1766년 당시 베네치아에서 만난 빈의 궁정작곡가 플로리안 가스만(Florian Leopold Gassmann, 1729 ~ 1774)의 후원을 받아 빈 궁정으로 진출하였다.
1774년에는 빈의 궁정작곡가가 되었고 1788년에는 드디어 궁정악장이 되었다. 훌륭한 음악적 능력과 '''원만한 성품''' 덕분에 재직기간 동안 왕이 여러 번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죽기 1년 전까지 궁정악장의 지위를 유지했으며, 이런 성공을 바탕으로 빈 음악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많은 음악가가 되었다. 그는 1800년대 초반까지 오페라를 많이 작곡했으며, 나이가 든 후에는 오페라 대신 종교음악을 많이 작곡하였다.
살리에리는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같은 동시대 작곡가들과의 교류가 활발했음은 물론이고 제자 양성에도 힘쓴 음악 교육자이기도 했다. 특히 나이가 든 후에는 작곡보다 음악 교육에 더 신경을 썼는데, 루트비히 판 베토벤,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 프란츠 리스트, 카를 체르니, 요한 네포무크 훔멜, 지아코모 마이어베어 등의 쟁쟁한 음악가들의 스승이었으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제자였던 프란츠 자버 쥐스마이어와 '''모차르트의 아들'''인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 등도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들중 상당수는 무명시절 궁핍하게 사는 경우가 많아서 '''전액 무상'''으로 가르침을 줬다.[2] 궁정악장이라는 위치때문에 명예로도 자산으로도 기행만 안벌이면 평생 아무런 문제없이 살 수 있으며 당대 음악계에서도 큰 손이었는데 이런 인물이 빈부격차 안따지고 후대의 교육에 자신의 시간을 써가며 큰 열의를 보인 것은 꼭 음악계만이 아니라도 당대에서 엄청난 봉사정신이었다.
살리에리의 봉사정신은 단지 후대 교육에 멈추지 않았는데, 실직한 음악가 또는 사망한 음악가의 유족들을 위한 상조회를 조직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자선 콘서트도 '''매년''' 조직하는등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당대 후기지수들을 위해 엄청난 투자와 열의를 보인 '''대인배'''였다. 당시 살리에리 본인이 대표적으로 지적한 문제가 '태생이 이탈리아인이라 독일어가 어렵다' 정도였다. 독일어가 워낙 배우기 어렵기도 하고 이탈리아어와 여러 차이점도 있다보니, 독일에 있던 시간이 긺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독일어에 익숙해지지 못했다는 듯.

3. 음악


그는 시기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빈 고전파의 권역에 속해 있으며 이 악파의 음악 양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주로 오페라와 종교음악 분야에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기악곡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살리에리는 평생 37편의 오페라를 썼는데, 대부분이 이탈리아어로 된 정가극(오페라 세리아)이나 희가극(오페라 부파)이다. 다만 빈에 진출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인 1781년에 '굴뚝 청소부(Rauchfangkehrer)'라는 독일어 오페라(징슈필)[3]를 쓴 적이 있고 프랑스 극단의 의뢰를 받아서 프랑스어로 작곡한 오페라도 몇 곡 있다. 살리에리는 이탈리아 출신이긴 했지만 파이지엘로와 같은 정통 이탈리아 오페라 스타일을 답습하기 보다는 글룩을 필두로 한 새로운 경향의 오페라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살리에리의 오페라는 이탈리아 본토의 오페라처럼 화려하고 기교가 넘치는 아리아가 적은 대신 좀더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창법을 갖는 아리아가 많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오르무스의 왕 아주르'(Axur, re d'Ormus,1788), '치프라'(La Cifra,1789), '페르시아의 여왕 팔미라'(Palmira, regina di Persia,1795), '팔스타프'(Falstaff, 1799)[4] 등이 있다.
그의 오페라가 흥행에 실패한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생전의 인기만 보면 당시 빈에서의 인기는 '''모차르트보다 살리에리의 인기가 더 좋았다.''' 이 한마디로 그가 단지 선생만이 아닌 음악가 본업으로서도 엄청났다는 것. 그 예시중 하나로 1789년 12월에 상연된 오페라 부파 '치프라'(La Cifra)는 비슷한 시기(1790년 1월)에 상연된 모차르트의 같은 장르 오페라인 '코지 판 투테'(Così fan tutte)보다 더 인기를 끌었으며 15년 뒤인 1805년까지도 자주 상연되었다.[5] 살리에리의 피아노 협주곡
하지만 18세기 말부터 살리에리가 주력으로 삼았던 이탈리아 양식의 오페라가 점차 쇠퇴하고 새로운 수법의 오페라가 인기를 얻었다. 19세기 이후 그가 작곡한 오페라는 시간이 지날수록 관심을 덜 받게 된 반면 그가 흥행 면에서 한 수 아래라고 생각했던 모차르트의 오페라가 작곡가 사후 재평가받으면서 계속 인기가 높아졌으며, 1810년대에는 로시니가 빈의 오페라계를 휩쓸기도 했다. 이 시점부터 살리에리는 시대를 받아들이고 기존의 작품을 개작하거나 가끔 종교음악, 기악곡을 내는 것 외엔 음악가로서 활동을 대폭 줄였고 그 대신 후배 작곡가의 육성에 더욱 집중했다.
생전에는 남부럽잖게 살았던 살리에리였지만 오늘날에는 당시 시대를 풍미했던 여러 빈 고전파 음악가 중 한 명 정도로만 평가받고 있으며, 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등 클래식계의 사기캐로 인정받는 음악가들과는 확실하게 위상 차이가 있다. 그는 글룩의 오페라 철학을 응용하는 등 나름 새로운 시도를 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의 작곡가였으며 새로운 음향이나 음악양식을 실험하기보다는 당대의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좀더 안전하고 무난한 길 을 택했다. 그래서인지 베토벤이나 슈베르트 등 살리에리에게 배웠던 많은 후배 작곡가들이 정작 음악적 롤모델은 살리에리가 아니라 하이든과 모차르트를 선택했다.[6]
살리에리가 나름대로 훌륭한 오페라를 많이 남긴 건 사실이지만 그당시와 유행이 많이 바뀐 오늘날 흥행하기에는 아무래도 임팩트가 많이 부족한 편이다. 모차르트의 후기 오페라들이 설득력 있는 서사(narrative)를 갖추고[7] 등장인물들의 개성도 뚜렷한 반면, 살리에리의 오페라는 대체로 스토리가 밋밋하고 등장인물의 성격도 전형성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만 당시 청중들에게는 동시대의 관습에 좀더 충실한 살리에리의 오페라가 부담이 적고 쉽게 느껴졌으며 한편으로 그가 빈 음악계의 큰 손이었기 때문에 그의 오페라가 한동안 모차르트의 작품보다 더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오페라 외에 좀더 쉽게 무대에 올릴 수 있는 독창곡이나 기악곡의 수가 너무 적은 것도 그의 복원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데, 다행히 20세기 후반 이후 잊혀진 클래식 작품들을 재발굴하는 분위기를 타고 살리에리의 오페라들도 다시 복원되고 있으며 치프라를 비롯, 전술한 작품들은 간헐적으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4.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먼저 말하자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문서를 보면 알듯이 '''애초에 그가 있던 음악계에서 그와 친했던 사람을 세는게 더 빠를 정도로, 모차르트는 성격이 개차반이었다.''' 그중에서 살리에리만 지적되는건 그가 모차르트의 스승이었으며 유명인이었고 큰손이라는 위치인 점이 컸다. 그리고 천재의 이른 죽음과 이에 관련된 살리에리의 루머, 이를 바탕으로 창작된 여러 창작물들 때문에 이러한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전술했다시피 오늘날 살리에리가 유명해진 것은 그의 작품 때문이 아니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의 갈등 때문이다. 모차르트가 35살에 요절한 직후부터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시기하고 그의 사망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이후 모차르트의 유명세가 점점 오르면서 모차르트와 관련된 일화가 퍼지는 과정에서 확실하지도 않은 소문이 그게 정설인마냥 퍼져나가고 여기에 살점이 더 붙어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곡을 베꼈다.'라거나 '모차르트는 살리에리에게 독살당했다.'같은 억울한 누명들이 붙었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시기하고 독살했다는 주장은 현대가 아닌 당대에도 이미 나타난다.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1830년에 쓴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라는 희곡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는데, 이후 이 독살설은 특별한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기정 사실처럼 여겨졌다. 심지어 이런 이미지는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후술되는 창작 항목을 보면 살리에리는 항상 모차르트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그의 재능을 질투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싫어하고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모차르트의 부음을 듣고 살리에리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사실을 증거로 든다.

천재가 죽었다. 우리는 마땅히 그것을 축하해야 한다. 모차르트가 살아 있을 적에 사람들은 우리 같은 작자들에겐 빵 한 조각 던져주는 것 이상의 관심을 안 보이지 않았던가.

살리에리와 모차르트는 실제로 사이가 안 좋기는 했다. 음악학자들은 두 사람의 갈등이 모차르트가 빈에 온 직후인 1781년에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두 음악가는 당시 14살이었던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엘리자베타 왕녀(Princess Elisabeth of Württemberg)의 음악교사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였는데, 결국 교사 자리를 차지한 것은 살리에리였다. 또 모차르트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던 황제 요제프 2세가 죽은 후 후임으로 레오폴트 2세가 황제가 되었는데, 이 신임황제가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은 것을 두고 모차르트는 살리에리를 비롯한 궁정음악가들이 자신을 시기해서 레오폴트 2세에게 추천해 주지 않은 탓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모차르트는 자주 편지에서나 구두로 '''"자신이 빈에서 출세하지 못하는 건 살리에리가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의도적으로 훼방놓았다는 증거는 없으며, 이는 모두 모차르트의 망상이었다.
물론 이는 사실을 따져보면 '''그냥 모차르트의 나쁜 성격 문제가 대부분이었다.''' 모차르트는 그를 잘 대해준 전임황제 시절에 적당히 존중의 태도를 보이긴 커녕, 오히려 그걸 자랑하듯 잘난척하며 안하무인하게 행동했다. 그리고 황실에서 직접 내린 작곡 요구또한 건성건성으로 받아들여서 살리에리를 포함한 음악계만이 아니라 그와 엮이는 사람 대부분이 그의 이런 막나가는 인성때문에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8] 애초에 모차르트는 빈에 오기 전에도 잘츠부르크에서 궁정음악가라는 직위이면서 대외적 시선을 신경쓰긴 커녕 대주교 히에로디무스 폰 콜로레도에게 대놓고 개긴 뒤 스스로 자리를 박차고 떠난 불량아로 인식되어 있어서 빈에 올 당시엔 이미 그 실력에 비해 프리랜서라는 이미지가 고착화되어 있었다.[9][10] 이렇게 허구한날 위아래없이 깽판치고 다니니 주군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했던 살리에리같은 궁정 음악가들에게 모차르트는 당연히 부담스럽고 거슬리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베토벤의 제자이자 작곡가였던 이그나츠 모셸레스(Ignaz Moscheles,1794~1870)는 1823년 11월 일제포르슈타트 병원에 입원한 살리에리를 찾아가서 인터뷰했는데 이 때 살리에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11]

나는 분명히 그를 싫어했네. 그리고 지금도 그가 싫어. 그러나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나만 그를 싫어했던 것은 아닐세. 그리고 내 뜻으로 그를 죽게 만든 건 더더욱 아니고. 그를 죽였다는 오명은 나에게 전혀 반갑지가 않아.

모셸레스의 이 말을 들은 베토벤은 자신이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두 사람 모두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 없지만 살리에리의 말은 믿는다고 대답했다고 한다.[12]
모차르트의 시신을 살펴본 의사는 후에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소문이 돌자 도리어 불쾌해하며 "아니 그럼 내가 틀렸단 말야? 모차르트는 틀림없는 자연사다. '''그의 시체에 독살의 흔적은 없었다고'''!"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현재 모차르트의 시신이 행방불명 상태이기 때문에 그당시 의사가 얼마나 제대로 진단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모차르트의 시신에서 이상한 흔적이 있었다면 그가 딱히 이를 숨길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독살설을 빼고봐도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질투했다.'라는 것도 증거가 빈약한데, 위에서 살리에리가 직접 말했듯이 모차르트 말기에서부터 사후에 점차적으로 그의 곡이 인기를 얻어가고 유행자체가 바뀌며 자신의 음악이 유행에 뒤쳐진 곡으로 취급되면서 음악가로서 섭섭했을수는 있다. 하지만 애초에 살리에리는 20대에 궁정 음악가가 된 후 모차르트처럼 개차반으로 다니긴 커녕 대인배적 인성으로 사회적으로 존경받은 위인이었고 애초에 1790년에서 1800년즈음엔 이미 자신의 곡이 유행에서 밀린다는걸 알고 일선에서 스스로 물러나기도 했던 인물이었고 음악가가 아닌 선생으로서도 훌륭한 인품과 명예를 누리던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해서 '''재능넘치고, 인간관계 좋고, 선생으로서 능력도 우수하며, 돈도 많고, 명예까지 드높은 엄친아'''였던 것. 이런 인물이 모차르트를 시기할만한 이유는 전혀 없다고 볼 수 있다. 말년에 모차르트의 음악과 비교당하며 좀 아쉬웠을 수는 있겠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마따나 개차반인 성격에 제명에도 못죽은 모차르트를 살만큼 살고 명성도 충분히 얻은 살리에리가 시기할 이유가 딱히 어디있겠는가? 애초에 그의 곡들을 실제로 들어만 봐도 모차르트의 영향을 받았다는게 루머라는걸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모차르트는 당대에 인정받지 못한 음악가가 아니었다. 모차르트는 생전에도 빈에서 충분히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당시 웬만한 음악가들은 꿈조차 꾸기 힘든 엄청난 돈을 벌었다. 모차르트 항목의 씀씀이에 대한 논란 단락에 자세히 나와 있지만, 그가 큰 돈을 벌었음에도 계속 쪼들렸던 주된 이유는 경제 관념의 부족과 이로 인한 낭비벽 때문이었으며, 그가 일찍 사망한 것도 큰 씀씀이를 만회하기 위해 건강을 돌보지 않고 무리하게 작곡에 매달렸던 것이 주 원인이었다. 따라서 살리에리를 비롯한 다른 작곡가들이 그를 질투하고 마타도어를 해서 음악활동에 지장을 받았다거나 돈을 제대로 벌지 못했다는 주장은 분명히 사실과 다르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애초에 두 사람의 갈등관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도 계속 나오고 있다. 모차르트의 빈 초기 시절에는 두 사람이 갈등을 빚은 것이 맞지만 모차르트가 빈에서 자리를 잡고 작곡가로 성공을 거둔 후 부터는 두 사람이 서로 협력했다는 증거도 많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살리에리는 1788년 궁정악장이 된 직후 황제 요제프 2세 앞에서 자신의 오페라 대신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지휘했으며 1790년 레오폴트 2세 황제의 취임식에서 모차르트가 작곡한 대관식 미사를 연주하기도 했다. 특히 1791년 10월 14일 모차르트가 아내에게 쓴 마지막 편지를 보면, 살리에리와 같이 마술피리를 관람한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살리에리가 이것이 진정한 오페라다, 앞으로 계속 보러 와야겠다 등등의 민망할 정도의 격찬과 함께 살리에리가 브라보를 외치지 않은 부분은 없었다고 모차르트는 흐뭇하게 쓰고 있다.
또한 두 사람이 합작해서 작품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었는데, 악보가 발견되지 않아서 한동안 소문에 머물러 있다가 2015년 11월에는 드디어 두 사람이 공동으로 작곡한 곡의 악보가 프라하에서 발견되었으며 2016년 2월 연주회가 열렸다. 전술한 것처럼 살리에리는 모차르트 사후 그의 아들이었던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를 가르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세간의 인식처럼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사회생활이란 게 다 그렇듯 같은 분야에서 서로 비난하기도 하고 경쟁하기도 하고 때로는 협력하기도 했던, 좀더 복잡한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지독히도 싫어했고 그의 재능에 열등감을 품었다는 소문 때문에 오늘날 의학계에서도 '타인에 대해 지나친 열등감을 갖고 시기, 질투하는 심리'를 살리에리 증후군으로 부르고 있다. 다만, 음악적 명성이 없진 않았으나 당대에 그친 수준이었던 살리에리가 덕분에 그 이름이 길게 남게 되었으니 이것이 살리에리에게 마냥 억울한 일일지는 각자 판단하도록 하자.

5. 창작물



전술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항목에서 보았듯이 이들 창작물은 어디까지나 대체역사물 수준의 창작이며 실제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클래식 음악 팬이라면 이들 창작물의 내용을 실제 사실과 혼동하지 않도록 하자.
알렉산드르 푸시킨(Александр Пушкин, 1830년)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를 필두로 이 희곡을 바탕으로 한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Николай Римский-Корсаков, 1898년)의 오페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와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 아마데우스, 뮤지컬 모차르트 오페라 락 등이 있다.
이들 창작물에서 살리에리는 항상 모차르트에게 열폭하는 비운의 2인자 역할을 하고 있다. 반면 모차르트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음악적 능력을 갖고 있지만 살리에리의 질투와 방해공작 때문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몰락하는 비운의 천재로 묘사된다. 살리에리는 한마디로 고뇌하는 악역으로 등장하는데, 신이 내려준 모차르트의 재능을 살리에리가 인간의 그릇으로 뛰어넘으려고 노력하다가 벽에 부딪히는 모습에서 동정표를 얻기도 한다. 위 창작물들 때문에 많은 대중들에게는 살리에리가 영원한 2인자, 콩라인의 대명사로 인식되어 있다.

"욕망을 갖게 했으면 재능도 주셨어야지!"

살리에리가 묘사된 많은 창작물 가운데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단연 영화 아마데우스.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계획적으로 궁지에 몰아넣고 모차르트의 정신을 옥죄어 사실상 자살을 유도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천재를 뛰어넘을 수 없는 범재''' 그 자체인 캐릭터이며 천재 모차르트에 대한 질투, 경외심, 더 나아가 그는 가진 재능에 비해 인간적으로는 한심하다(...)는 확신에서 오는 분노가 묻어난다. 스토리도 그렇고 살리에리 역을 맡은 머레이 에이브러햄의 열연도 그렇고, 이보다 더 살리에리의 좌절과 질투를 극적으로 묘사한 작품은 없다고 봐도 된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모차르트 스스로가 쓰도록 유도함으로써 '''신이 내려준 그의 재능(아마데우스)을 이용해 모차르트와 신을 욕보이는''' 인물이 되려 했으며 늙어서는 이런 악행에 만족감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는 모습도 보여준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는 살리에리가 하인을 검은 망토의 남자로 분장시켜[13] 모차르트를 찾아가 계속 레퀴엠 작곡을 재촉하는 바람에 모차르트가 죽었다고, 자신이 모차르트를 죽게 만들었다고 고백한다.[14] 더빙판 성우는 양지운(MBC)/이완호(KBS).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살리에리 본인이 '평범한 사람들의 대변자'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위에서 본 것처럼 살리에리를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또한 작중에선 살리에리가 이런 자괴감 때문에 자살을 시도하고 정신병원에서 폐인처럼 생활하며 죽어가는 걸로 묘사한다. 물론 실제로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70세가 넘게 살며 당시로서는 상당히 장수하였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생애를 마쳤다.
2014년과 2016년에는 아예 그를 타이틀 롤로 내세운 한국 창작 뮤지컬 '''살리에르(뮤지컬)'''가 공연. 그런데 초연 공연장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바로 옆'''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그것도 '''거의 같은 기간'''에 '''모차르트!'''가 공연했다?! 게다가 모차르트가 살리에리보다 일찍 죽은 것처럼 폐막도 <모차르트!>가 <살리에르>보다 먼저 했던지라 당시 연뮤덕들 사이에서 소소한 이야깃거리가 되기도 했다.
클래시컬로이드에서는 슈베르트에게 '''모차르트의 음악을 표절하지 마라'''라며 슈베르트를 표절범으로 몰아 슈베르트가 모차르트를 증오하게 만들었다.[15] 2기에서 살짝 모습이 나왔는데 영화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리와 비슷하게 생겼다.
Fate/Grand Order에서 등장. 살리에리를 폄하하는 루머에 대해서는 전부 사실이 아니었다고 부정하지만, '''그런 루머가 대중에게 고착화된 탓에 그대로 살리에리의 이미지로 고착화되었다'''는 식으로 접근했다. 즉 사람들이 죄다 악인으로 몰아가니 그에 물들어버려 원하지도 않음에도 악인이란 이미지대로 행동하게 된 것. 다만 본성은 착한지라 모차르트를 상대할 때만 아니면 기본적으로 선하고, 마스터왕족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상명하복의 태도를 고수한다. 자세한 건 안토니오 살리에리(Fate 시리즈) 참조.
Steins;Gate 0에서도 뛰어난 실력의 마키세 크리스를 모차르트에, 같은 연구실 동료지만 그녀보다 떨어지는 실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 히야죠 마호는 살리에리로 묘사되는 장면이 나온다. 심지어 마키세 크리스의 기억을 넣은 인공지능의 이름도 아마데우스다.

[1] 정확히 말하자면 살리에리 본인에게는 유산이 상속되지 않았던 듯하다. 형들이 그를 돌봐주거나 아니면 아버지 친구의 집에서 지냈다고 한다.[2] 물론 어디까지나 가난한 음악가들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이며, 중산층이나 부자 가문같이 재산이 많은 집안에서 자처해서 돈을 주고 가르침을 청한다면 돈을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어서 받았다.[3] Singspiel. 18세기 후반~19세기 초에 독일어권에서 유행했으며, 아리아나 중창, 합창 등 노래로 된 부분과 순전히 대사로만 된 부분으로 나뉜다. 다시 말해 레치타티보가 없다. 따라서 오페라와 연극의 중간 형태라고도 볼 수 있을 듯. 모차르트의 마술피리가 이 장르의 대표적인 작품이다.[4] 똑같은 제목으로 주세페 베르디가 쓴 마지막 오페라와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5] 다만 코지 판 투테도 실패한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인기를 얻었다. 초반 흥행을 기준으로 상대적으로 치프라에 밀렸을 뿐. 당시 살리에리의 명성과 실력을 고려하면, 모차르트 입장에서는 그와 비교된다는 것이 도리어 엄청난 명예였기도 했다.[6] 다만 살리에리가 이런 수모를 겪은 것은 그의 음악이 수준이 낮아서라기보다는 기악작품을 많이 남기지 않았던 탓이 더 크다. 음악 공부를 해 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처음 작곡을 배울 때에는 주로 기악곡을 바탕으로 배운다. 그리고 살리에리에게서 배웠던 유명한 음악가 대다수가 주로 기악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7] 물론 마술피리같은 환타지풍의 작품도 있고 너무 급하게 써서 스토리에 신경을 쓰지 못한 티토왕의 자비와 같은 작품도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8] 대표적인 일화 중 하나로, 오스트리아 황궁의 궁내상서가 모차르트에게 직접 와서 "자네 그 성격 때문에 자네를 싫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나? 그러니까 제발 그놈의 성격 좀 고치게"라고 '''조언'''을 했는데 모차르트는 "고칠 게 뭐가 있습니까?!"라고 코웃음치고 떠났다. 이 궁내상서라는 직책은 알기 쉽게 말하면 '''궁궐을 담당하는 장관, 현대 한국으로 치면 대통령비서실장쯤은 되는 급'''인데다 나이로만 따져봐도 그 궁내상서가 모차르트보다 최소 30살은 연상이었다. 현대에도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인성에 크게 문제 있다는 소리 듣는다.[9] 이 때 다른 궁정음악가는 2천굴덴이나 받는데 난 800굴덴밖에 안주냐... 라며 대놓고 투덜거린적도 있었는데 '''전임음악가가 수십년 일해서 오른 연봉'''을 초봉으로 달라하니 궁정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 애초에 그 800굴덴도 그 당시 상위 공무원이 받는 연봉으로 상당한 고액이었다.[10] 프리랜서 음악가라는 입장자체는 모차르트가 최초였는데 모차르트는 그 개차반 성격때문에 반은 본심으로 반은 사회적으로 어쩔수없이 된 감이 있지만 어쨋든 그런 선례가 있기 때문에 베토벤은 스스로 프리랜서 음악가라는 길을 고를 수 있었다. [11] 여러 번 거절당해서 많은 설득 끝에 살리에리의 딸과 담당의사를 통하여 흥분시키지 않도록 주의하며 이야기할 것을 허락받았다.[12]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성격을 고려하면 베토벤의 말은 '일단 나에겐 모차르트도 스승이니 막 욕보일순 없는데 그래도 모차르트 성격이 개판인것도 맞았고 살리에리가 그럴 사람은 아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13] 사람들이 살리에리가 직접 분장한 것으로 오해를 하는데, 감독판에서 감독이 살리에리가 아니라 하인이라고 밝혔다. 그래서 분장을 하는 손에 장갑이 있는 것이라고.[14] 영화의 원작인 희곡 초판에서는 발제크 백작의 의뢰로 처음엔 하인에게 검은 망토를 입혀 레퀴엠 의뢰를 보냈다가 양심상 도저히 못 하겠다는 하인 때문에 스스로 가면을 쓰고 모차르트에게 찾아가 곡을 독촉한다. 많이 개정된 현재의 판에서는 모차르트가 당시 그가 유일하게 신용하고 의지하던 살리에리에게 '자꾸 검은 망토의 사내가 자신에게 레퀴엠을 재촉한다'고 말하자, 내심 '이게 뭔 개소리야?' 하면서도 모차르트에게 최후의 일격 삼아 즉흥적으로 '사실 그거 나야'라고 답한다. 나중에서야 검은 망토의 사나이가 실재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15] 실제 인물 슈베르트도 표절 의혹이 돌았는데 동명이인으로 인한 헤프닝이다. 사실 당시엔 표절이 흔하던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