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리크 쇼팽

 


<color=#373a3c>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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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프레데리크 쇼팽 걸작선
The Masterpieces of Fryderyk Chopin
국가
폴란드
소장·관리
쇼팽협회(The Fryderyk Chopin Society)
폴란드 국립도서관(The National Library)
등재유형
기록유산
등재연도
1999년
본문
프레데리크 쇼팽(Fryderyk Chopin, 1810~1849)은 바흐(J. C. Bach)나 모차르트(W. A. Mozart), 베토벤(L. van Beethoven), 베르디(G. Verdi)와 마찬가지로 지속적이며 보편적인 가치를 지닌 작곡가로 평가된다. 그의 음악이 지닌 가장 중요한 특징은 독창성과 새로움이다.
쇼팽은 아시아(특히 일본과 대한민국),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 지역에 이르기까지 유럽 밖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바르샤바에서 열리는 프레데리크 쇼팽 국제 콩쿠르(Fryderyk Chopin International Competition)에서는 각 대륙을 대표하는 음악가들이 모여 쇼팽이 작곡한 곡을 연주한다. 낭만주의 음악의 아버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는 쇼팽의 음악은 독특한 개성을 지니며, 그가 이룬 음악적 성과의 우수성은 전무후무하다.
폴란드를 떠나 19년을 살았던 쇼팽의 음악 작품은 여러 컬렉션에 흩어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쇼팽의 작품의 상당 부분을 소장하고 있는 프레데리크 쇼팽 협회(Fryderyk Chopin Society)와 폴란드 국립도서관(National Library)은 특별한 중요성을 가진다. 쇼팽의 음악적 성과가 너무도 중요한 까닭에 유네스코(UNESCO)는 1999년을 ‘국제 프레데리크 쇼팽의 해(Fryderyk Chopin International Year)’로 선언하여 전 세계가 쇼팽 150주기를 기념하기도 했다.

'''프레데리크 쇼팽 '''
'''Frédéric Chopin'''
''' 본명 '''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1]
Frédéric François Chopin
''' 국적 '''
[image] 폴란드, [image] 러시아 제국, [image] 프랑스
''' 출생 '''
1810년 3월 1일
바르샤바 공국 젤라조바 볼라
''' 사망 '''
1849년 10월 17일 (향년 39년 230일)
프랑스 공화국 파리
''' 직업 '''
작곡가, 피아니스트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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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소 '''
파리 뻬흐 라쉐스 묘지
''' 학력 '''
바르샤바 음악원 (1826년~1829년)
''' 활동 기간 '''
1825년 – 1849년
''' 사조 '''
전기 낭만주의
''' 신체 '''
170cm, 45kg[35]
''' 종교 '''
가톨릭 (세례명: 프란치스코)
''' 부모 '''
'''아버지''' 니콜라스 쇼팽 (1771-1844)
'''어머니'''  테클라 유스티나 크르치차노브스카 (1782-1861)
''' 배우자 '''
없음

1. 개요
2. 생애
3. 음악적 특징과 평가
3.1. 작품 성향
3.2. 바흐, 모차르트의 열광적인 추종자
3.3. 피아노사에 남긴 업적
5. 대중문화에서
5.1. 트러스티 벨 ~쇼팽의 꿈~
5.2. Frederic: The resurrection of music
5.3. 피아노의 숲
6. 기타
7.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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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쇼팽은 그의 모든 인생을 피아노에 바쳤고, 우리 피아니스트들은 그를 '''피아노의 절대, 절대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 어떤, 그 어느 작곡가보다도 훨씬 더 피아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2]

'''쇼팽은 가장 위대하다. 피아노 하나만으로도 그는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클로드 드뷔시#

폴란드작곡가, 피아니스트. 쇼팽은 피아노 역사상 프란츠 리스트와 함께 최고의 업적을 이룩한 작곡가이며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린다. 폴란드인이 자부심을 갖고 존경하는 폴란드 최고의 위인중 한 명이기도 하다. 폴란드의 관문 바르샤바의 공항 이름도 바르샤바 쇼팽 국제공항이다.

2. 생애


프레데리크 쇼팽은 1810년 3월 1일[3]아버지 니콜라 쇼팽(Nicolas Chopin)[4]어머니 테클라 유스티나 크시자노프스카(Tekla Justyna Krzyżanowska)[5] 사이에서 1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위로는 누나 루드비카(Ludwika)가 있었고, 아래로는 두 여동생 이자벨라(Izabela)와 에밀리아(Emilia)가 있었다. 막내 에밀리아는 14살 때 결핵으로 요절했다.
쇼팽은 어릴 때부터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으며, 7살 때는 폴로네이즈 두 곡을 작곡했을 정도였다. 어린 쇼팽의 재능은 바르샤바의 귀족들에게까지 알려져 그들 앞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쇼팽이 얼마나 연주를 잘 했는지, 당시 폴란드 언론이 "천재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만 태어나는 줄 알았지만 우리나라에도 드디어 천재가 태어났다."라고 극찬했을 정도였다.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1816년으로, 체코계 폴란드인이었던 보이치에흐 지브니(Wojciech Adalbert Żywny)[6]라는 피아니스트에게 배우게 되었다. 지브니는 엄청난 골초에 보드카에 빠져 살았지만, 쇼팽의 연주를 듣자마자 그를 의욕적으로 가르쳐 주었다. 훗날 쇼팽이 말하기를, "지브니 선생님 앞이라면 노새도 천재가 될 겁니다." 라고 했을 정도. 1818년에 기로체프의 협주곡을 완벽하게 연주하는 쇼팽을 보고, 지브니는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면서 쇼팽이 자유롭게 성장하도록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이후 1822년에 바르샤바 음악원의 창설자인 유제프 엘스네르(Józef Antoni Franciszek Elsner)를 통해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우게 되었고, 1825년 중학생 때는 러시아 황제 앞에서 연주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후 피아니스트 바츨라프 빌렘 뷔르펠(Václav Vilém Würfel)을 사사하며 바르샤바 음악원을 다녔다. 바르샤바 음악원을 졸업한 후, 1828~29년에 이탈리아오스트리아를 여행하면서 음악의 중심지인 으로 가서 피아니스트로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1830년 다시 한 번 빈에 갔다. 이 때 그를 위한 고별 연주회에 그가 연모했던 콘스탄치아 그와트코프스카(Konstancja Gładkowska)가 찬조 출연했는데, 사실 그가 빈에 유학을 간 이유는 그녀에게 고백하지 못하자 고민 끝에 그녀가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였다는 카더라가 있다. 그의 곡 중 에튀드 3번 '이별의 곡'과 협주곡 1, 2번은 사실 그녀를 위해 작곡한 곡이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
빈에 다시 한번 가서 카를 체르니, 요한 네포무크 훔멜 등과 교류했지만, 빈의 청중들은 쇼팽에게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나마 로베르트 슈만은 비평에서 그에게 "모두 모자를 벗어라. 천재가 등장했다." 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쇼팽을 극찬했다. 그러나 정작 쇼팽은 "슈만은 나를 천치로 만들고 있다." 라고 말하며 대단히 불편해 했다고.
그러던 중 폴란드에서 러시아에 대항해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빈을 떠나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했을 때 러시아군의 잔혹한 진압으로 혁명이 실패로 끝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때 겪은 분노와 조국과 집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걱정 등이 뒤엉켜서 쓴 곡이 에튀드 '혁명'으로 알려져 있다. 쇼팽의 집도 당시 러시아군의 약탈로 사라져 있었고, 러시아군은 그의 집에 있던 피아노까지 도끼로 작살내 땔감으로 썼다. 이를 보고 쇼팽은 자신의 일기에 "하느님, 당신은 러시아인이십니까?" 라고 적으며 울분을 토로했다. 같은 시기에는 술집에서 러시아인들이 하던 "하느님의 최대 실수는 바로 폴란드인을 창조한 거야." 라는 말을 듣는 수모도 겪었다.[7]
이후 쇼팽은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그러나 파리에서도 신통치 않은 결과만을 얻었고,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불리던 프리드리히 칼크브레너(Friedrich Wilhelm Michael Kalkbrenner)에게 피아노를 더 배울까 생각했지만 칼크브레너의 피상적인 연주 스타일 때문에 쇼팽이 개성을 상실할까 우려한 친구 프란츠 리스트펠릭스 멘델스존, 힐러 등이 만류했고, 3년이나 배워야 한다는 말에 그만두게 되었다.
파리에서도 별 소득이 없자 쇼팽은 미국으로 건너갈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파리 길거리에서 고향 귀족을 만나게 되어 귀족들과 당대 유명인사들이 드나드는 살롱에 소개되었고, 살롱에서의 연주회로 호평을 받아 쇼팽은 파리에 정착하기로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후대에 널리 알려진 많은 피아노곡을 작곡하게 되었다. 쇼팽은 꽤나 베스트 드레서였다고 하며[8] 이따금씩 건반에 피아노 헝겊을 덮고 연주를 하는 묘기도 보여주었다.[9]
1836년, 드레스덴을 여행하던 중 바르샤바에서 사귀었던 여자친구 마리아 보진스카와 다시 만나게 된 쇼팽은 보진스카와 비밀리에 약혼했지만, 쇼팽의 건강이 나쁜 것을 눈치챈 보진스카 주변 사람들의 반대로[10] 결국 파혼하고 말았다.[11]
이후 마리아 다구 백작부인이 주최한 파티에서 당대 화제의 인물이었던 여류 소설가 조르주 상드(1804~1876)를 만나게 되고[12] 그녀와 사랑에 빠져 수 년 간 그녀와 연인이 되었다. 상드는 그 시대에 성공한 소설가로 문학계에서 상당히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여성 인권 옹호자였고, 남자처럼 차려입고 살롱에 출입하며, 남편 외에도 많은 남자들과 염문을 벌인 여러가지 일로 화제가 되던 인물이었는데, 보수적인 성향이 있던[13] 쇼팽은 그런 상드의 보이쉬함을 보고 처음에는 싫어했지만, 점점 그녀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다. 병으로 인해 성적인 능력은 상실한 쇼팽이었지만, 상드의 모성애적인 돌봄 덕분에 그녀와의 관계는 10여 년 동안 유지되었다.
참고로,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달리 두 사람의 관계는 상드의 일방적인 헌신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작곡, 연주와 레슨으로 얻는 '''수익의 대부분이''' 상드와 그녀의 자녀들한테 갔다.
쇼팽의 건강이 좋지 않자, 쇼팽과 상드는 요양차 1838년 지중해의 마요르카 섬으로 가게 되었다.[14] 버려진 발데모사 수도원 근처의 오두막집에서 지냈는데, 하필 그곳에 유례없는 추위가 몰려온 탓에(...) 쇼팽의 건강이 악화되고 말았다. 이뿐만 아니라 오두막의 환경이 지하실 내지 다락을 방불케 했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심지어 사육제에 코스튬을 한 사람들을 보고 진짜 괴물로 착각했을 정도. 그런 중에도 쇼팽은 파리에서 마요르카까지 피아노를 옮겨와 수도원에서 피아노를 치며 작곡을 했다.
그러나 상드와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다. 자유분방한 상드는 쇼팽과의 연애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타인들의 시선을 무시했지만, 쇼팽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둘 사이의 관계가 점점 안 좋아지던 시기에 상드는 쇼팽과의 결혼생활을 다룬 소설을 집필했고, 그걸 쇼팽과 지인들에게 낭독했다. 당시 지인들은 쇼팽을 겨냥한 글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정작 쇼팽 자신은 '''몰랐다.'''[15] 그런 와중에 쇼팽의 건강은 꾸준히 악화되었고, 상드의 큰 딸 결혼문제를 둘러싸고 두 사람은 크게 다투게 되었다. 사실 다투었다고 보기엔 애매하다. 쇼팽이 파리에 있는 동안 노앙의 별장에서 상드와 딸 부부 사이에 큰 불화가 있어 '''물리적인 폭력이 오고갔고''' 사태가 종료되자 딸은 쇼팽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쇼팽은 평소에도 아들에 비해 상드의 사랑을 덜 받는 딸 편을 들어주곤 했고 이번에도 그렇게 했던 것인데, 하필 쇼팽과의 권태기에 돌입한 데다가 딸 문제로 화가 나 있던 상드가 그 일에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고 쇼팽을 비난하는 장문의 편지를 써 보낸 것.[16][17] 결국 상드는 쇼팽을 떠났고, 두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18] 상드는 훗날 쇼팽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파리에서의 쇼팽의 입지도 많이 좁아져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사정이 좋지 않아 쇼팽은 제자의 초청을 받아 영국스코틀랜드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에서도 쇼팽은 큰 굴욕을 당해야 했다. 영국 왕과 귀족, 명사들이 참석한 파티에서 연주를 하게 되었지만, 쇼팽 혼자 어두운 옆방에서 연주해야 했고, 왕과 귀족들은 쇼팽의 연주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쇼팽 정도의 음악가가 한마디로 배경음악 취급을 받은 굴욕을 당한 셈이다.[19] 더욱이 영국의 기후는 쇼팽에겐 치명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팽은 런던에서 어렵게 사는 폴란드인들을 위해 열린 자선 연주회에 참가하기도 했는데, 이는 쇼팽이 대중 앞에서 한 마지막 연주회였다.

파리로 돌아온 쇼팽은 개인교수 말고는 일체 다른 연주 활동도 못할 만큼 중병에 걸려있었다. 침대에서 화장실까지 가는 것도 힘들었고, '''누군가 업어주지 않으면 2층으로 올라가지도 못했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면도와 옷매무새만큼은 단정히 했을 정도.
그러나 쇼팽은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죽기 직전에 자신의 첼로 소나타 도입부를 연주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를 채 다 듣기도 전에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며 연주를 중단시켰다. 이후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두려워하던 것과 똑같이 살아있는 채로 묻히는 것을 막아달라는 육필 메모를 남겼으며, 자정 즈음 몸이 어떠냐는 의사의 질문에 "이제는 안 아파요."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결국 1849년 10월 17일, 쇼팽은 "어머니...나의 어머니..."[20][21]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쇼팽의 소망대로 지인들은 쇼팽의 장례식 때 모차르트레퀴엠을 연주하려 했지만, 쇼팽의 장례식이 치러질 예정이었던 성 마들렌 성당에서 여가수가 성당 안에서 연주할 수 없다고 반대하는 바람에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되었다. 다행히 쇼팽의 간절한 마지막 소원이라는 지인들의 적극적인 설득 끝에 2주만에 성당 측이 이를 양보하였고, 그렇게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되는 가운데 쇼팽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쇼팽의 묘에는 그가 폴란드를 떠나기 전 은잔에 담아온 폴란드의 흙이 뿌려졌고[22], 후에 쇼팽의 심장은 유언에 따라 그의 누이에게 인도되어 나중에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되었다. 이 부분은 11월 30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세월이 지나 2차 세계 대전 당시 바르샤바 봉기 당시 이 성당은 폐허가 될 정도로 포격을 받았으나, 이전에 심장은 무사하게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다. 어처구니없게도 쇼팽의 심장을 안전한 곳으로 정중히 옮기도록 한 장본인이 이 봉기 당시 학살을 주도한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였다! 사실은 보관되어 있던 쇼팽의 심장을 약탈한 후 바르샤바 시민들의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다시 반환한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쇼팽의 심장은 다시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되었다.
이후 2014년에 쇼팽의 정확한 사망 원인을 연구하기 위해 학자들이 심장을 꺼냈다. 일반적으로는 쇼팽이 결핵[23]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쇼팽이 사망한 직후의 부검서에 따르면 의외로 폐보다 심장의 상태가 더 나빴다는 내용이 있는 것을 토대로 쇼팽의 사망 원인이 실제로는 결핵이 아니라 심장 질환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성당 측에서는 심장의 보존 문제 때문에 공개를 거부하다가, 결국 심장이 담긴 병을 공개했다. 본격적인 심장 해부 및 조직 검사는 이뤄지지 않았고, 대신 육안 및 촬영 장비로 겉을 관찰하는 것만 허용되었다. 연구 결과, 학자들은 심장에 발생한 심낭염이 쇼팽의 직접적인 사인이라고 발표했다.다만 엄밀히 따지면 결핵 또한 사망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심낭염이 발병하는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결핵이기 때문이다. 이 연구 결과의 내용은 2017년 11월 ‘전미 의학 학술지(the American Journal of Medicine)’에 실렸다.성당에 안치된 쇼팽 심장, 2014년 다시 꺼내 보니

3. 음악적 특징과 평가



3.1. 작품 성향


쇼팽은 일평생 거의 피아노를 위한 곡만을 작곡했다. 물론 가곡이나 다른 악기를 위한 곡 같은 다른 장르의 작품도 있긴 하지만 피아노곡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첼로 소나타나 가곡과 같은 곡이라 하더라도 그의 모든 작품에는 피아노가 들어간다. 당대는 낭만주의 음악의 시대였음에도 쇼팽은 자신의 음악이 낭만주의로 평가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초기에는 몇몇 사람들에겐 낭만주의자로도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대담한 전조나 그 당시 절대 허용되지 않았다시피 한 불협화음, 기교 등은 그를 음악사에서 완전한 돌연변이로 만들다시피 했고, 심지어 때로는 그를 아마추어 음악가로 오해하고 착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의 음악은 당시에도 완전히 이해되지 않을 정도의 음악이어서[24] 그와 비슷한 곡을 작곡한 몇 사람은 사후 쇼팽에겐 불명예스럽겠지만 그와 대등한 명성을 얻기도 했다(대표적으로 고트샬크(가초크)와 스테판 헬러 정도가 있다.)[25] 그렇지만 오늘날엔 낭만주의 작품의 대명사처럼 불리며, 대중들이 가장 잘 아는 낭만주의 피아노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다.
그의 작품에선 피아노로 다양한 음색의 창조를 위한 페달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지휘자나 연주자의 재량에 따라 템포를 의도적으로 조금 빠르거나 느린 듯이 연주하는 기법인 루바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으며, 당시 장식음이 대부분 기교적이기만 한 악절 정도로 취급됐다면 쇼팽은 장식음을 기능적으로 사용하여 선율의 하나로서 취급하기도 했다.
동시대의 작곡가이자 쇼팽의 동료이기도 했던 리스트의 음악에 비해 난이도 면에서는 왠지 모르게 어렵다는 평가를 하지 않는 듯하지만 피아노를 치다가 피아노를 박살내고 싶을 정도로 '''애매하게, 왠지 모르게''' 어려운 페시지가 눈에 엄청 자주 띈다. 리스트와는 다르게 왠지 어렵게 들리지는 않으나 상당히 어려운 곡들이 많다. 이유를 따지기에 먼저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리스트의 작곡 스타일 자체가 웅장한 효과, 화려함만을 부각시키기 위한 악절들을 상당히 많이 썼다. 즉 나쁘게 말하자면 곡 전체에 있어서 안 써도 될 부분을 남발했다는 점이다.[26] 쇼팽은 그런 악절들을 거의 쓰지 않았고 기교 자체를 중시하는 게 아니라 내용적인 측면에서 기교적인 악절을 단순히 도구로 취급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리스트보단 기교적인 효과를 중시하는 악절들이 상대적으로 눈에 덜 띄거나, 어떤 부분은 단순하게 봐선 어려운 악절인지 아닌지 파악하기 어렵게도 쓰여있다. 그런 면에서 슈만이나 쇼팽의 몇몇 곡들은 치기 매우 어려운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단지 악보를 읽고 손놀리는 부분을 익히는 데에서만 어려움을 느끼는 것으로 테크닉적인 난이도를 평가하는건 절대 금물이다. 20세기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리스트의 30분 가량의 소나타보다 쇼팽의 짧은 전주곡이 더 연주하는데 힘들다고 말했다. 그리고 쇼팽은 관현악에 대한 지식이 상대적으로 부족해서 그런지 오케스트라 부분은 발달되어 보이지는 않는데, 그것을 커버하기 위해 일부러 피아노 파트를 화려하게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op.2 변주곡, 2개의 협주곡 등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연주회용 알레그로에서도 원래 협주곡 계획이 있었던 만큼, 기교적으로 상당히 어렵다는 점이 그렇다.
유튜브의 한 클래식 작곡가가 쇼팽의 왈츠에 등장하는 작곡 기법들과 표현 방식들을 본따서 쇼팽스러운(?) 왈츠를 만들어 헌정한 적이 있다. 쇼팽 음악세계의 여러 구성요소들을 시각적으로 소개하고 있으므로 음악적인 분석이나 공부에도 도움이 될 수 있겠다. #

3.2. 바흐, 모차르트의 열광적인 추종자


쇼팽은 자신의 일생 동안 바흐모차르트를 가장 존경하며 추종했다. 그는 바흐의 아주 완벽한 음악 체계를 자신의 음악으로 끌고 와서 새로운 피아노 테크닉을 만들어냈는데, 오죽하면 자신의 제자들에게 “손가락 연습을 하려면 바흐의 곡을 통해 테크닉을 기르라”라고 말했을 정도다. 모차르트의 영향력도 이에 못지 않은데,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에 나오는 아리아 내게 손을 주렴(La ci darem la mano)[27]이라는 곡을 자신이 피아노 변주곡(Variations)으로 새롭게 작곡했다. 모차르트의 완벽하고 천재적인 음악성은 쇼팽의 피아노 창작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유명한 쇼팽의 어록 중 하나가 “모차르트는 음악 창작에 있어 전 영역을 아우르지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내 부족한 머리로 이 (피아노) 건반에 손을 대는 것일 뿐이다.”이다. 또한, 자신의 장례식에 반드시 단 하나의 곡만을 꼭 연주해달라고 지인들에게 사실상 유언인 부탁을 했는데 그 곡이 바로 모차르트의 레퀴엠이다. 쇼팽이 죽고 나서 약 3,000여 명이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그 가운데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되었다. 그만큼 쇼팽은 음악 창작과 자신의 일생에 있어 바흐와 모차르트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다.

3.3. 피아노사에 남긴 업적


그의 연습곡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의 곡과는 거의 완전히 다른 기법과 기교를 사용하였다. (구세대식 교육을 받긴 했지만 훌륭한 예술가였던) 모셀레스는 한때 그의 연습곡를 쳐보곤 '기교적으로 어렵고 비예술적인 부분에서 나의 손가락은 돌아가지 않았다.'라고 썼다.

그러나 쇼팽은 그의 곡을 자신이 직접 연주하면서 악기로서의 피아노 연주방식을 고려하지 않아 불가능해 보이는 부분과 비예술적으로 보이는 부분이 어떤 식으로 가능하게 연주할 수 있고 비예술적인 부분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였고[28][29], 슈만 같은 훌륭한 음악가들이 그의 음악의 우수성을 끊임없이 주장하면서 평론가와 음악가들은 쇼팽에게로 서서히 돌아섰고, 이 후 그가 완성하고 제시한 테크닉은 리스트에 의해 보급되고 향상되어 금세 낭만주의의 중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후 그의 스타일은 스크리아빈, 라흐마니노프 등에 의해 응용되었으며 고도프스키는 거기에 기초해 독자적인 기술과 음악의 세계를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동시에 인상주의 작곡가나 러시아의 프로코피에프 등에 의해 피아노 테크닉은 다시 한 번 큰 변화를 겪게 된다.

4. 작품 목록




5. 대중문화에서


유명한 클래식 음악가인 모차르트, 베토벤과 더불어 다양한 2차 창작물에서 등장한다. 아마 전자가 '괴팍한 괴짜 천재'의 전형적인 이미지라면 이쪽은 '연약하고 섬세한 예술가'의 이미지에 잘 부합하기 때문인 듯. 클래시컬로이드에서도 내성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영화라고 예외는 아니다.

5.1. 트러스티 벨 ~쇼팽의 꿈~


망했어요. 자세한 것은 여기로.
여긴 어디 난 누구

5.2. Frederic: The resurrection of music


그의 고국(!) 폴란드에서 제작한 인디게임이다. 장르는 리듬게임.
스팀 appstore 구글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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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9곡 + 히든곡(쇼팽 난이도로 스토리 모드 클리어) 1곡 + DLC 2곡(0.99$)로 있다.
[image]
''' '''
2편인 Evil Strikes Back! 10곡이 전부.
마이클 잭슨, 레이디 가가 등의 현대 음악가들이 출연한 것과, 원곡의 작품명이 표기되지 않는 것과 후속작에 대한 떡밥이 없다....기보다는 딸랑 물음표 하나.
그런데 전작에 비해서 이스터 에그와 유머가 없고, 스토리도 흥미진진하지 않아서 재미가 영 떨어진다. 설상가상으로 쇼팽도 정이 떨어진다. 1편에서도 심장이 없어도 점잖게 행동하더니, 이제는 그것을 되찾기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는 등 과도하게 너무 집착해댄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이 봉변을 당해도 '''"걔내들 자유의지니까."'''라며 신경쓰지 않는다. 여담으로, 음악으로 최면술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1편에서는 쇼팽이 현대 시대에 누군가에 의해 부활되고, 세 명의 여신이 마차와 피아노를 주며 떠난다. 그는 세계를 떠돌아 다니며 쇼팽을 없애라는 명령을 받은 뮤지션들과 음악대결을 펼친 후에, 모든 음악가들의 저작권사재기하고 쇼팽을 없애라고 명령한 매스터마인드 X(보라색 망토)라는 사람과 결국 이겨 원상태로 되돌린다. 엔딩 후에는 누군가에게 습격을 받는데...
2편에서는 매스터마인드 X를 물리친 직후에서 이어지는데, 이번에는 그를 부활시킨 퍼펫 마스터가 갑자기 그의 심장을 도로 빼앗고 여신들까지 납치하고는 튄다. 심장이 없어져 성격이 건방지게 된 쇼팽은 다시 가 보지 않았던 세계를 떠돌아 다니며 쇼팽을 물리치려는 '인형'들과 음악대결을 펼친 후에, 퍼펫 마스터인 레이디 즈가가를 물리치고, 둘이 탔던 배가 사이보그 만악의 근원인 '그레이트 신디사이저'로 변하자 그것도 물리친다. 그러고 나서 쇼팽은 레이디 즈가가에게 사회봉사로 도시를 청소하는 벌을 준 다음에 여신들을 차에 태우고 간다.

5.3. 피아노의 숲


이시키 마코토의 만화 피아노의 숲에 중후반부 메인 무대가 위에 언급한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이다.

5.4. 리듬스타


2008년 3월 31일부터 2013년 3월 1일까지 리듬스타는 꾸준히 신곡을 출시했는데, 쇼팽 명의의 노래가 전체 노래 중 무려 '''13%'''나 차지한다![30] 대중들에게 매우 유명한 베토벤모짜르트가 각각 10%, 6%인 걸 감안하면 엄청난 대우를 받은 셈. 물론 리듬스타 공식 팬카페 역시 쇼팽의 곡을 매우 좋아했다. 첫 스마트폰 버전인 리듬스타T에서도 쇼팽의 노래를 최우선적으로 리마스터 했고, 2018년에 출시된 리부트 작에서 쇼팽은 S급 캐릭터가 되었고, 그를 본따 너프 시킨 쇼팽 주니어는 스타팅 캐릭터로 선정된 걸 보면 제작사에서도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셈.
리듬스타T/스토리모드에서 쇼팽의 곡은 흉기로 쓰인다 카더라. 리듬이쇼팽의 추격을 마따라는 캐릭터에게 3배속 랜덤을 걸어서 강제로 플레이 하게 했더니, 마따는 그 충격으로 응급실로 실려갔다.[31]

6. 기타


  • 프로필에 기재된 사진은 알려진 두 장의 쇼팽 사진 중 제일 유명하고 쇼팽이 사망하던 해에 찍은 것이다. [32] 1846년이나 1847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나머지 한 장은 훼손 상태가 심하다. 보기 2017년 1월 쇼팽 연구가 알랭 쾨너가 1847년 경의 것으로 보이는 쇼팽 사진을 발견했으나,# 9개월 뒤에 슬렌진스키라는 폴란드 화가가 1951년경에 그린 그림 일부분을 편집한 것으로 드러났다. #
  • 생전에 신랄한 입담으로 유명했던 듯하다. 워낙 타인에게 음악적 영향을 안 받기도 했고 깐깐했기도 했지만, 베를리오즈에 대해서는 "잉크를 여기저기 튀기면서 작곡한다"라고 했고, 19세기의 아이돌이나 다름없던 리스트에 대해서는 "쟤는 나중에 어느 나라의 왕이나 국회의원이 되겠지"라고 했다. 누군가 리스트는 자네에게 왕국을 만들어 줄 수도 있다고 하자 "리스트의 제국 안에 있는 작은 왕국이겠지"라고 답했다고, 참고로 베를리오즈와 리스트는 쇼팽의 음악에 대해 여러 칭찬을 남겼다.
  • 쇼팽을 기리기 위해, 1927년에 시작되어 1955년부터 5년에 한 번씩 열리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이란 대회도 있다. 이는 세계적으로 굉장히 권위있고 명망있는 대회로, 차이코프스키 콩쿨, 퀸 엘리자베스 콩쿨과 더불어 세계 3대 콩쿨이라 불리며 우승하면 온 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되는 대회다. 아르헤리치, 폴리니, 부닌 등의 피아니스트가 이 대회에서 우승해 유명 피아니스트로 거듭났다. 임동혁, 임동민 형제는 2005년 2위 없는 공동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5년 조성진이 1위를 한국 최초로 차지했다.[33]
  • 쇼팽이 생전에 사용하던 피아노는 플레옐[34] 피아노로, 현재는 없어진 브랜드이다. 이 피아노의 특징은 페달을 밟았다가 떼었을 때에 어느 정도 그 효과가 유지된다는 것. 따라서 생전에 그가 의도했던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는 연주 시 페달링을 좀 더 길게 할 필요가 있다. 쇼팽의 곡을 연습하는 이들은 이 점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 2차 세계대전 폴란드 침공 때 있었던 폴란드군과 독일군의 바르샤바 공방전 기간 동안, 바르샤바 방송국은 확성기와 스피커를 통해 쇼팽의 음악들을 큰 소리로 도시 전역에 송출했다. 나라가 위기에 빠진 절체절명의 순간,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 시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던 셈. 폴란드인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바르샤바는 독일군에게 점령 당했다. 그리고 바르샤바 방송국은 '항복'을 의미하는 뜻에서 독일의 음악가 바그너의 곡을 송출했다.
  • 쇼팽의 시신은 프랑스 페르 라셰즈 묘지에 있지만 그의 심장은 폴란드 바르샤바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그의 누나가 쇼팽의 시신에서 심장을 적출해 폴란드 성 십자가 성당 기둥에 묻었고, 쇼팽은 1894년 심장이 없는 상태로 프랑스 묘지에 묻혔다.

7. 바깥 고리



[1] 쇼팽은 폴란드 태생으로, 이름을 폴란드어식으로 적으면 Fryderyk Franciszek Chopin(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 쇼펜)이지만, 프랑스에 살게 되면서 프랑스식으로 바꿨다. Chopin은 프랑스계 성씨이기 때문에 폴란드어에서도 폴란드어식 발음인 '호핀'이 아니라 프랑스어식 발음을 따라한 '쇼펜'으로 발음하며, 이 발음을 폴란드어식으로 전사한 Szopen(쇼펜)이라 적기도 한다.[2] # // 그의 인터뷰 초반부 [3] 일반적으로 이날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젤라조바 볼라 마을의 성당에는 2월 22일에 유아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실제 생일은 2월 중인 것으로 보인다.[4] 프랑스 동부 보주(Vosges)주 에피날(Épinal) 아롱디스망 마렌빌쉬르마동(Marainville-sur-Madon) 출신의 프랑스인으로, 폴란드에 와서 귀족가정교사를 하고 있었다.[5] 원래 폴란드인 귀족이었지만 집안이 몰락하여 다른 귀족의 집안에서 일하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가정교사인 니콜라 쇼팽과 만나 결혼하게 된 것이다.[6] 지브니는 그다지 음악사에서 유명하거나 중요한 인물은 아니지만, 재미있는 사실이 있는데 그는 오랫동안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의 마지막 항목의 주인이었다. 당연히 음악인 사전에서도 마지막 항목이었고 그 때문에 이름이 남았다.[7] 이러한 러시아와 폴란드의 악연은 계속 이어진다. 훗날 폴란드의 또다른 위인 마리 스크워도프스카 퀴리가 예시.[8] 그는 가끔씩 버는 것보다 더 못 쓴다고 불평하기도 했으며, 버는 돈에 비해 낭비가 심하다는 말에 자신의 패션을 위해 쓰는 돈보다 버는 돈이 적은데 어떻게 많이 번다고 생각할 수 있겠냐며 불평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 바로 다음 세기부터 최정상급 음악가들은 '''명품 정도야''' 풍선껌 사듯이 살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돈을 벌게 되었으니... 시대를 앞서간 불평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슷한 예로 20세기 초중반의 축구, 야구 스타들은 짧은 선수생활에서 많이 받아봤자 당대 직장인보다 몇 배 정도밖에 안 되는 연봉을 받았다. 제대로 저축한 선수들도 은퇴 후 당연히 일자리를 찾았던 판에 명품까지 밝히면 얼마나 돈이 빨리 바닥나는지는 설명이 필요없다(...).[9] 하지만 본인은 이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고도 한다.[10] 쇼팽은 이미 폐결핵을 앓고 있던 중이었다.[11] 마리아가 보내는 편지의 양이 줄어들고 점점 그의 어머니의 편지로 바뀌더니, 결국 위의 통보가 오게 되었다.[12] 특이한 점으로 상드는 쇼팽의 친구인 프란츠 리스트와 사귀기도 했었는데, 상드를 쇼팽에게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리스트 본인이었다(...).[13] 그의 패션 또한 극단적으로 보수적이었다.[14] 마요르카에서 쇼팽이 지내던 곳은 쇼팽 박물관이 되었다. 이곳의 입구 옆쪽으로 들어가면 파노라마 풍경이 펼쳐지는데, 절로 악상이 떠오를 듯한 아름다운 장관이므로 마요르카에 가게 된다면 한 번 들러보기 괜찮다. #[15] 그 소설을 보면 여주인공과와 남주인공의 외모, 나이 차이, 출신 성분 등이 실제 상드-쇼팽 커플과 굉장히 유사하다. 훗날 리스트는 쇼팽에 대한 책을 쓰면서 이 소설을 출처도 명시하지 않고 여러 군데 가져다 썼다(...). 이렇게나 비슷한데 어째서 쇼팽은 눈치채지 못했는지 신기할 정도.[16] 쇼팽은 그 편지를 친구이자 화가인 외젠 들라크루아한테 읽어줬는데, 들라크루아는 '''"정말 문학적으로 잘 쓴 편지다. 이게 소설이었다면 정말 재미있게 읽었을 것이다."''' 라고 평가했다.[17] 쇼팽은 상드에게 처음 받은 쪽지를 죽을 때까지 보관했는데, 이 장문 편지만은 보관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건지 없애버린 건진 불명이지만...[18] 상드는 쇼팽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두 불태웠지만, 쇼팽은 죽기 직전까지 상드와 주고받은 편지를 그녀의 머리카락과 함께 보관했다.[19] 반면 당대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리스트는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1세가 연주 도중 얘기를 하면서 제대로 듣지 않자 연주를 중단하고 일어나서 "니콜라이가 말하면 음악은 조용해져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물론 쇼팽과 달리, 리스트는 사회적 명망도 쇼팽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높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20] 혹은 "어머니...가엾은 나의 어머니..."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21] 일각에서는 어머니를 조국 폴란드로 해석하기도 한다.[22] 그 흙은 쇼팽이 폴란드를 떠날 때 송별식에서 친구들이 담아준 것이다. 참고로, 송별식 자리에 있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후에 쇼팽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23] 그가 사망하기 전에 설사가 심했던 사실을 토대로, 결핵이 장으로 전이됐다고 추측하는 의견도 있다.[24] 리스트도 한때는 '대담하고 이상한 불협화음들 투성이'라고 그의 곡을 평가하기도 했다.[25] 고트샬크는 전성기에 실력이 굉장한 피아니스트이긴 했지만 작곡능력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그의 작품은 시대적인 매력은 있지만 몇 작품을 제외하면 소품 수준이거나 평작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26] 하지만 당대최고의 피아니스트인 브렌델이나 슈나벨 등이 집중적으로 연구했을 만큼 지금 세대에선 충분한 천재성이 담긴 작품들로 인정받기도 한다.[27] 돈 조반니와 체를리나의 2중주. 돈 조반니가 체를리나를 유혹하면서 부르는 아리아이다.[28] 물론 모셀레스는 쇼팽이 연주하는 그의 곡을 듣고 다시 한번 전적으로 그의 곡을 인정했다고 한다.[29] 쇼팽은 몸이 약한 이유나 소심함 등 때문에 일생동안 공개연주회를 많이 하진 못했지만 30번 정도 상대적으로 사람들이 적게 모이는 살롱에선 많이 연주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때의 연주회장이란 수용인원 2~3000명 정도 대비 살롱은 가장 큰 곳이 2~300명 정도라고 한다. [30] 출처: 리듬스타/출시된 곡 통계 [31] 쇼팽의 에튀드 Op. 10, No. 4는 9키 기준 ☆9(시즌 1)/☆10(시즌 2)의 난이도를 지닌 곡으로, 정배치 기준으로도 패턴 연습곡 취급을 받을 정도로 연습이 없다면 쳐 내기 매우 곤란한 패턴이 다수 출현한다. 다만 BPM이 140(시즌 1)/150(시즌 2)으로 너프되고 부자연스러운 커팅도 많이 발견돼 리메이크가 불만족스러운 곡 중 하나라는 평가가 존재한다. 만약 원곡 BPM인 176으로 높이고 리메이크도 커팅 없이 원곡을 따라갔다면 ☆10 난이도 중상급의 곡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32] 당시 다게레오타입이 발명된지 10년 정도 되었을 무렵이다.[33] 폴로네이즈 '영웅'으로 폴로네이즈 상까지 덤으로 수상했다.[34] 요제프 하이든의 제자이기도 했던 음악가 이그나츠 요제프 플레옐이 런칭한 피아노 브랜드. 후에 아들 카미유 플레옐과 공동으로 회사를 운영한다. 플레옐은 연애 문제로 인해 엑토르 베를리오즈에게 살해당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