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티슬라바

 

브라티슬라바 (슬로바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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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관광
4. 교통
5. 기타


1. 개요



'''Bratislava''' 공식사이트
주 슬로바키아 대사관
브라티슬라바 무역관 (KOTRA)
슬로바키아의 수도. 인구는 2015년 현재 491,061명이며 인접 지역까지 포함하면 659,578명이다.[1] 인접국 수도들인 , 프라하, 부다페스트 등과 비교하면 수도 치고 인구가 적은 편. 독일어로는 프레스부르크(Preßburg). 헝가리어로는 포조니(Pozsony)이다. 지리적으로는 오스트리아의 과 지척으로, 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헝가리 삼국의 접경지 부근에 위치해 있으며, 체코 국경과도 상당히 가깝다. 버스나 기차를 통해 빈까지 1시간 내외면 닿을 정도. 그래서 많은 유럽 여행객들이 빈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오거나 부다페스트로 가는 여정 중에 들리는 곳. 여타 다른 동유럽 도시처럼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공존하며, 도시 가운데를 다뉴브 강이 관통한다.
인접한 중부유럽 국가들의 수도 대부분과 자매 도시 결연을 맺었다. 체코 프라하, 폴란드 바르샤바, 헝가리 부다페스트, 오스트리아 그리고 우크라이나 키예프, 미국클리블랜드, 아르메니아 예레반 등이 있다.

2. 역사


이곳에 사람이 산 흔적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200년 경부터 켈트족이 살기 시작했으나 곧 로마 제국에 의해 정복당하고 4세기까지 로마 제국의 변방 지역으로 머무른다. 5세기 경부터 이곳에 슬라브족이 정착하기 시작해 현재의 시 인종 구성이 이 때 자리잡는다. 907년 마자르 족의 침략을 받아 헝가리 왕국에 편입된다.
1526년 헝가리가 모하치 전투에서 패하고 난 뒤 이곳도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끊임없이 받았으나 다행히 부다페스트 근방과 달리 점령되지 않았고 1536년 헝가리 왕국의 새 수도가 된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에 편입된다. 그 이후 합스부르크 군주들의 헝가리 왕 대관식은 브라티슬라바에서 열렸다.[2]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의 치세 이후 19세기까지 브라티슬라바는 지방 도시로서 번성을 했다.
1866년 보오전쟁의 패배 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들어서게 되었고, 원주민들이었던 슬라브 족(슬로바키아인)은 이 근방을 지배하던 헝가리에 의해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인 191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이곳은 42%가 독일인, 41%가 헝가리인이었고 슬로바키아인은 15%에 불과했다. 그러나 1차대전에서 패해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공중 분해되는 바람에 이곳은 신생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산하 슬로바키아 지방의 중심도시로 다시 출발한다.
1938년 뮌헨 협정의 결과 슬로바키아가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이란 이름 아래 나치 독일괴뢰국이 되면서 브라티슬라바도 나치의 영향력 아래 놓였고 제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브라티슬라바에 잔류하던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화되면서 브라티슬라바는 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으나 체코슬로바키아의 중심지는 여전히 프라하였고 브라티슬라바는 인지도 면에서 매우 안습한 처지에 놓였었다.
1989년 벨벳 혁명이 이곳에서도 일어났으며[3]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가 분리됨으로서 브라티슬라바는 독립된 슬로바키아의 수도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관광


  • 브라티슬라바 성: 11세기에 건립된 후, 1811년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다가 1953년 재건되었으며, 공산주의 시대에는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의 브라티슬라바 거처이자 슬로바키아 국회의사당으로 이용되었으며, 현재 브라티슬라바성 입구에는 슬로바키아 국회가 위치한다.
  • 성 마틴 성당: 1563-1830년에 복원된 고딕양식의 성당으로 과거 헝가리왕국의 대관식 개최장소였다. 높이 16.02m의 첨탑형태로 된 고딕성당으로, 베토벤의 장엄미사곡이 처음 연주된 곳이다.
  • 슬로바키아 (구)국립극장: 1776년에 최초 건립되었으나, 1886년 비엔나 출신의 극장 전문 건축가 Fellner와 Helmer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재건하였다. 건물 앞의 브라티슬라바 출신의 조각가 빅토르 틸그너가 만든 '가니메데스(그리스신화의 술시중을 드는 소년)' 분수가 유명하다. 2007년 다뉴브강가의 부지에 신국립극장이 건립되면서, 양 극장 모두에서 다양한 오페라, 발레, 연극공연을 개최한다.
  • 슬라빈 묘지: 2차 세계대전 중 슬로바키아 서부에서 나치에 대항해 싸우다 전사한 6845명의 소비에트 군사들을 기리는 오벨리스크(39.5m)가 있는 공동묘지이다. 국가 문화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이 유명하다.
  • 前 이스트로폴리타나 대학교 건물: 1465년에 건립된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이며, 현재는 음악예술대학교의 일부로 사용 중이다.
  • 미하일 문: 도시 요새의 5개 문 중에서 단 하나 남은 문이다. 미하일 문에 대한 최초 기록은 14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14세기 전반에 고딕형식의 정사각형 탑이 있었고, 1511-1513년에는 육각형으로 더 높이 증축되었다. 1753-1758년간 51미터 높이의 탑 정상에 대천사 미카일(슬로바키아어로 미하일)의 상을 세우면서 현재의 형태가 완성되었다.
  • 레두타 음악홀: 슬로바키아 교향악단의 전용 공연장으로 1773년 마리아 테레지아의 명에 의해 곡식저장소로 지어졌다가 1919년 네오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이후 시립음악학교 및 영화관으로 사용되다가 1950년부터 오늘날까지 교향악단의 전용 연주장으로 사용되었다.
  • 대주교 궁전: 1781년에 건립된 고전주의 건물로 현재는 시청 건물로 사용 중이다. 1805년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 완승을 거둔 후, 동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간 프레스버그 조약 체결. 2층에 전시되어 있는 17세기 영국 산 벽걸이 융단(테피스트리)이 유명하며, 첨탑의 꼭대기 부분에는 후에 대주교가 된 바티아니(Josef Bathyany) 추기경의 모자장식 조각이 존재.
  • 대통령궁: 1762년 바로크양식으로 건축된 여름 궁전으로 현재는 대통령 집무실. 건물 뒤편에는 프랑스식 정원이 가꾸어져 있어 산책 및 휴식을 할 수 있고, 브라티슬라바 출신의 음악가 훔멜(Hummel) 동상이 위치.
  • 데빈 성: 다뉴브강과 모라바강의 합류지점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이자 교역의 중심지로, 현재는 석조 고딕 건축물의 폐허만이 남아있으나, 브라티슬라바 외곽의 조용한 강가 언덕에 있어 주말에 자연을 즐기며 휴식을 취하기 위해 가족 단위로 찾는 장소.
인지도 면에서 프라하와 빈, 그리고 부다페스트에 밀리지만 이곳의 구시가지도 예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최근에는 관광객이 조금씩 늘고 있다. 다만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국경 지대인 페트르잘카(Petržalka)는 소련식 아파트 천지인 매우 삭막한 풍경 을 가진 곳이다. 다른 슬로바키아 영토와는 다뉴브 강 너머로 분리되어 있다. 나치 독일의 괴뢰국인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이 들어섰을 때에는 브라티슬라바에서 분리되어 나치 독일령 엥게라우(Engerau)로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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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이런 모습이다.

4. 교통


브라티슬라바를 중심으로 슬로바키아, 체코, 오스트리아, 헝가리 4개국이 모두 접해있기 때문에 이곳을 거점으로 잡고 4개국을 방문하는 것도 좋을 듯. 이곳을 지나는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이 4개국 차량들의 번호판이 모두 보이는 신기한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인접 국가 수도인 오스트리아 빈, 폴란드 바르샤바, 체코 프라하, 헝가리 부다페스트, 우크라이나 키예프지하철이 모두 개통되어 있는 반면 이 도시에는 지하철이 없다. - 사실 계획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고 1980년대 중반 프라하에 이어 이곳에도 지하철을 뚫으려 했으나, 공산 정권이 무너지면서 백지화되어 일부 지역에 땅을 팠던 흔적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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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바키아의 사실상 유일한 항구도시이기도 하다. 내륙국에 웬 항구냐 싶기도 하지만, 빈이나 부다페스트와 마찬가지로 국제하천인 다뉴브 강에 위치한 점을 살려 강 연안에 항만 시설이 갖춰져 있다. 단순한 선착장 수준이 아니라 컨테이너를 처리할 수 있는 크레인, 창고 등 하역 시설에서 이에 연계된 철로와 정유시설, 심지어 소규모이긴 하지만 조선소까지 갖추고 있는 본격적인 항구로써 기능하고 있다. 대형 선박 건조 같은 건 못하고 소형 선박건조나 간단한 선박 보수 및 수리 정도를 할 수 있다.

5. 기타


  • 음극선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한 독일 물리학자 필리프 레나르트의 고향이기도 하다.

[1] 전주시와 인구가 거의 비슷하다.[2] 1683년 헝가리 본토가 수복되긴 했으나 이후로도 150여년간 이런 상태는 지속되었다.[3] 동유럽 혁명의 성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