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발츠호퍼
1. 생애[3]
1.1. 선수 생활
1.1.1. 클럽
발츠호퍼는 1922년부터 예들러스도르퍼 SC에서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25년에는 옛 소속팀의 라이벌이던 플로리드스도르퍼 AC로 이적했으며 1926년 봄에 1부 리그에 데뷔했다. 1925-26시즌이 끝나고 SK 라피트 빈으로 다시 팀을 옮겼지만 그 곳에서는 출전 기회를 받지 못했으며 시즌이 끝나기도 전인 1927년 1월 1일, 비너 AC로 팀을 또 옮기는 등 발츠호퍼의 초반 커리어는 복잡했다. 그러나 발츠호퍼는 비너 AC에서 자신의 기량을 꽃피우는데 성공했고 팀 내 최고의 골잡이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928년 비너 AC는 ÖFB-컵 결승에 갔지만 SK 아드미라 빈에 1대2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1928-29 시즌에는 14골을 득점하며 토니 샬에 이어 오스트리아 1부 리그 득점 2위에 올랐으며 그 시즌에 SC 바커 빈으로 팀을 옮겼다.
바커 빈에서는 센터 포워드 포지션에서 카를 치셰크와 호흡을 맞췄다. 하지만 분더팀 공격수 2명을 보유했음에도 바커 빈은 우승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고 1930년대 후반,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편성된 가울리가 오스트마르크에서 준우승 3회를 거두는 데 그쳤다. 1939년 참메르포칼 준결승전에서는 SV 발트호프 만하임과 재경기를 2번이나 치르는 혈전 끝에[4] 추첨에서 패하며 결승 진출에 실패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우승과는 거리가 먼 발츠호퍼였지만 그는 모든 커리어를 통틀어 총 249골을 넣어 성공적인 개인 커리어를 쌓았다.
1.1.2. 국가대표팀
발츠호퍼는 1927년 11월 6일, 이탈리아와의 중유럽 컵 경기에서 대표팀 멤버로 첫 선을 보였다. 하지만 1928년에 2게임을 더 치른 이후 발트호퍼의 국가대표 경력은 긴 휴식에 들어갔다. 1931년 중유럽 컵 체코슬로바키아전에 출전하고 난 후 그의 대표팀 경력은 다시 긴 잠에 빠지고 말았다. 센터 포워드로는 에이스이자 폴스 나인이었던 마티아스 신델라, 인사이드 레프트 포워드로는 오스트리아 1부 리그 5회 득점왕에 빛나는 토니 샬과의 주전 경쟁에서 밀린 탓이었다.
1934년 월드컵 당시 발츠호퍼는 대표팀에 선발은 되었지만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 같은 해 11월, 중유럽 컵의 스위스전이 그의 다섯 번째 경기이자 마지막 대표팀 경기가 되었다.
1.2. 감독 생활
발츠호퍼는 1937년 1월부터 9월까지 소속팀 SC 바커 빈의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했다.
1947년부터 발츠호퍼는 5시즌 동안 SK 아드미라 빈의 감독을 맡았지만 감독으로도 우승컵을 차지하진 못했다. 1953년, 발츠호퍼는 아드미라에서 사임했고 이후 SC 가스베르크의 감독직을 끝으로 1957년에 축구계를 떠났다.
2. 수상
2.1. 클럽
- ÖFB-컵 준우승 1회: 1927–28(비너 AC)
2.2. 국가대표
- 중유럽 컵 우승 1회: 1931-32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출처: 위키피디아, 11v11[4] 4강전에는 1대1, 1차 재경기에서는 2대2, 2차 재경기에서는 0대0으로 2주일간 무승부만 3번 연속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