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아스 신델라

 


'''마티아스 신델라의 수상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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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베스트팀'''





'''오스트리아의 前 축구인'''
''' 이름[1] '''
'''마티아스 신델라'''
'''Matthias Sindelar'''

''' 출생 '''
1903년 2월 10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코슬로프[2]
''' 사망 '''
1939년 1월 23일(향년 35세) /
나치 독일
''' 국적 '''
오스트리아
''' 신체 '''
175cm | 체중 63kg
''' 직업 '''
축구선수( 중앙 공격수[3] / 은퇴)
''' 소속 '''
''' 선수 '''
FK 아우스트리아 빈 (1924-1938)
SC 오스트마르크 빈 (1938-1939)
''' 국가대표 '''
43경기 27골(오스트리아 / 1926~1937)
''' 감독 '''
FK 아우스트리아 빈(1937~1938)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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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명 '''
종이 인간(Der Papierene)
''' 등번호 '''
-[15]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선수 생활
2.3. 애국심
2.4. 사망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4. 뒷이야기
5. 수상
5.1. 클럽
5.2. 국가대표
5.3. 개인


1. 개요


'''“신델라는 아마도 오스트리아 역사상 최고의 선수다.”'''

조나단 윌슨

오스트리아의 前 축구 선수.

2. 생애



2.1. 어린 시절


마티아스 신델라는 체코계 유대인 혈통으로[4] 원래 이름은 마테이 쉰델라르(체코어: Matěj Šindelář[ˈmacɛj ˈʃɪndɛlaːr̝̊]).[5] 당시에는 체코라는 나라가 없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라는 다민족국가였다. 원래 신델라의 아버지 얀 쉰델라르는 가난한 구두수선공[6]이었고 1905년 가족을 이끌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인 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신델라는 빈의 거리에서 축구를 접했다.
1917년, 아버지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이손초 전선에서 전사하게 되자 어머니에게 4형제의 생계 부양이라는 무거운 짐이 지어졌고 신델라는 14살의 나이에 학교를 나와 자물쇠 제조 견습생으로 일하며 생계에 뛰어들었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15살에 신델라는 지역팀 중 하나인 ASV 헤르타 빈에 입단하여 정식으로 축구를 배우게 되었다. 축구를 배우면서 견습생 생활은 계속되었고 마른 체형에 열등감이 있기는 했지만 그의 기량은 빠르게 늘었다.
그러다 1923년, 신델라는 수영장에서 실수로 심각한 반월판 부상을 입게 되었다. 결국 수술을 받게 되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신델라는 이 부상으로 인해 이후 다른 선수들과 다르게 무릎 밴드와 니 삭스를 착용해서 니 삭스가 일종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1924년에는 헤르타 빈의 재정 악화로 인해 신델라 역시 팀을 옮길 수밖에 없었고 결국 전년도 리그 우승팀 비너 아마추어 SV에 입단하게 되었다. 신델라는 비너 아마추어 SV에 입단한 후 헝가리 출신 형제 공격수 콘라드 예뇌와 칼만의 도움으로 스타일을 정립했고 얼마 안 있어 1925-26 시즌의 더블#s-7을 이끌면서 유럽을 대표하는 공격수로 인정받았다.[7]
1926-27 시즌에는 18골을 넣어 팀 내 최다 득점자에 이름을 올렸지만 팀이 7위에 머무르는 등 아우스트리아 빈은 리그 챔피언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컵대회에서는 5회 우승, 2회 준우승으로 강자의 모습을 보였다. 이런 팀의 상황 때문에 수많은 팀들이 신델라의 영입을 시도했는데 오스트리아 팀들은 물론 SK 슬라비아 프라하, 물건너 영국아스날 FC까지 영입전에 뛰어들었다. 특히 아스날은 1932년 잉글랜드와의 A매치 이후 4만 파운드[8]의 이적료를 준비했지만 신델라는 끝까지 소속팀에 남았다.
1932-33 시즌에서 아우스트리아 빈은 리그 6위에 그쳤지만 미트로파 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슬라비아 프라하, 유벤투스 FC를 꺾고 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주세페 메아차가 이끌던 암브로시아나 인테르. 이탈리아 원정으로 치러진 1차전에선 1대2로 패했다. 하지만 2차전 홈경기에선 신델라의 해트 트릭을 앞세워 3대1로 승리하며 우승컵을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이탈리아 월드컵에서의 실패를 뒤로 하고 신델라는 클럽 무대에서 다시 날아 올랐는데 1936년에는 컵 대회와 미트로파 컵 우승을 동시에 달성했다. ÖFB-컵에선 비너 AC를 꺾고 우승했으며 미트로파 컵에선 AC 스파르타 프라하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2.2.2. 국가대표팀


신델라는 1926년의 체코슬로바키아 원정 경기에서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다. 신델라는 데뷔전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오스트리아의 2대1 승리를 이끌었다.
그 후 기량을 인정받은 신델라는 후고 마이슬에 의해 주장이 되었지만 처음에는 부침도 있었다. 1928년 남부 독일 선발팀과의 경기에서 눈으로 덮인 경기장 사정 때문에 드리블과 패스에서 여러 차례 실수를 범했던 것. 그로 인해 1년 반 동안 대표팀에 선발되지 않았고 그 기간동안 신델라는 더욱 실력을 끌어올렸다.
그 이후 오스트리아는 1931년 5월, 스코틀랜드를 5대0으로 격파한 것을 시작으로 1933년 4월 체코슬로바키아에 1대2로 패배하기까지 10승 2무 1패, 54득점 18실점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써내며 분더팀[9]이라 불리게 되었고 1930년대를 대표하는 강팀으로 손꼽혔다.

2.2.2.1. 1934년 월드컵

이런 전적이 있으니 후고 마이슬 감독 체제의 오스트리아는 그야말로 잉글랜드 정도를 제외하면 유럽에서 끝판왕이었다. 잉글랜드와의 원정 경기에서도 대등한 시합을 펼친 것은 물론 유럽의 수많은 팀들을 제압하며 명성을 떨쳤고 잉글랜드와 전 대회 우승팀인 우루과이가 모두 출전을 거부한 마당에 오스트리아를 막을 팀은 없어보였다. 게다가 월드컵에서 오스트리아와 우승을 다툴만한 팀이라고 평가받던 이탈리아를 토리노 원정 경기에서 신델라 없이도 카를 치셰크해트 트릭을 앞세워 작살을 내놓았다.[10] 게다가 전성기를 포함한 월드컵 이전의 4년간 A매치에서도 승률 68%를 찍었다.[11]
1년 전과 비교하면 포스가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이렇게 출전한 월드컵에서 오스트리아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듯 했다. 하지만 프랑스에게 밀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긴했지만 첫 경기는 연장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여기에서 신델라는 한골을 기록했다. 그리고 8강전이던 라이벌 헝가리와의 경기에서 2:1로 승리를 하면서 체면치레를 했다.
다음 상대는 개최국 이탈리아. 신델라 없이도 원정에서 박살을 냈던 이탈리아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스트리아의 승리를 예상했지만, 신델라의 전담 수비수로 나온 루이스 몬티는 온갖 반칙을 섞어서 신델라를 막았고, 이것을 막아야 할 심판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결국 신델라는 온갖 파울성 수비와 함께 경기장에서 지워졌다. 그것 때문에 이탈리아의 우승에 낙인이 찍힌 것은 덤. 이탈리아에게 패해 결승 진출이 좌절된 오스트리아는 3,4위 전에서도 독일에게 패해 4위에 머물렀다.

2.3. 애국심


신델라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애국심이 남달랐다.
1937년 신델라는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고 FK 빈의 선수 겸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1938년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병합되었고 공식 A매치는 아니었지만 1938년 4월 3일에 있었던 오스트리아 대표팀의 마지막 상대는 독일이었다. 여기에서 선수들은 신델라의 뜻을 받아들여 전통적인 흰색 상의와 검은색 하의 대신 오스트리아의 국기 색인 빨강-하양-빨강의 색 유니폼을 입고 왔다.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카를 세스타와 신델라 자신의 골로 독일을 2:0으로 이길 때 나치 간부 앞에서 요란한 골 세레머니를 했다고..
1938년 5월 31일, 나치에 의해 유대인 선수들의 계약이 종료되고 선수들이 체포되었으며 유대인 클럽의 출전은 금지되었다. 이 상황은 아우스트리아 빈도 예외가 아니었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즉시 도망쳤지만 신델라는 그러지 않았다. 게다가 오스트리아 대표팀이 독일과 합병되었을 때 나치 독일 측에서 신델라에게 다가오는 월드컵에 출전할 것을 요청했지만 신델라는 그것을 나이와 부상 등을 이유로 거부했다. 신델라는 이 무렵 축구에서 손을 떼고 안나호프(annahof)라는 카페를 2만 국가마르크에 인수한 후 운영했다. 그러면서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나치 당에 가입하길 거부했다.

2.4. 사망


1939년 1월 23일, 신델라는 의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여자 친구인 카밀라 카스토뇰라도 신델라와 같이 발견되었는데 신델라가 사망한 다음날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그의 뒤를 따랐다. 공식적인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 굴뚝에서 새어나온 일산화탄소 때문에 죽었다고.. 하지만 굴뚝이 손상되지 않았다는 담당 경찰의 확인도 있고 워낙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던 관계로 항상 음모론이 따라다닌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빈을 빠져나가려던 신델라를 나치 독일이 죽였다는 것. 그리고 그의 오랜 친구였던 에곤 울브리히는 2000년 BBC와의 인터뷰에서 나치의 법률상 자살하거나 살해당한 사람은 명예의 무덤에 묻힐 수 없는데 신델라는 중앙 묘지에 묻혔고, 이것은 당시 공무원이 압력, 또는 뇌물을 받고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저명한 언론인 조나단 윌슨은 이 주장에 대해 본인의 저서 '축구 철학의 역사'의 대목을 빌려 음모론일 뿐이라는 뉘앙스로 반박했다. 결국 진실은 저 너머에... 이 부분은 2018년 2월 18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그의 장례식에는 15,000명의 조문객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공격수로서 못하는게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드리블 기술과 창조성이 특히 뛰어났다고.. 당시 관중들은 신델라의 플레이뿐만 아니라 축구라는 게임 자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신델라의 경기를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한다.
그라운드의 모차르트[12]라는 별명과 더불어 그를 대표하는 별명으로는 '''종이 인간(Der Papierene)'''이 있다. 이는 몸싸움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몸의 움직임이 빨라서 마치 바람에 날리는 종이같이 몸싸움을 피했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은 것. 추가로 63kg의 몸무게도 한 몫했다.

4. 뒷이야기


  • 신델라의 아버지가 전사한 11차 이손초 전투 당시 같은 전투에 참전한 군인 중 나중에 대표팀 감독이 되는 후고 마이슬이 있었다.[13]
  • 어린 시절 신델라는 성격적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피치에서 너무 자신감에 차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마치 카메라를 위해 플레이하는 것 같다는 평도 있었다.
  • 신델라의 오스트리아 대표팀 통산 43경기의 전적은 25승 11무 7패로 승률 58%이다.
  • IFFHS에서 뽑은 오스트리아 역대 최고의 선수이다.[14]
  • 유럽 대륙을 호령하던 분더팀의 에이스다보니 광고 모델 요청이 상당히 많이 들어왔다. 1938년 Roxy und das Wunderteam라는 오스트리아 영화에도 본인 역으로 카메오 출연하기도 했다.
  • 주위 사람들의 신델라에 대한 평을 보면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홀어머니와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고 정원 가꾸기가 취미였다. 또한 고향 코슬로프를 많이 생각해서 코슬로프에서 일하는 부모를 둔 아이들을 초청해 정기적으로 자신이 뛰는 경기를 무료로 관람시켜주기도 했다.
  • 2004년 오스트리아의 우정사업본부에서 그의 기념 우표를 발행했는데 이름에서 오탈자가 나는 해프닝이 있었다.

5. 수상



5.1. 클럽


  • 오스트리아 1부 리그 우승 1회: 1925-26(FK 아우스트리아 빈)
  • ÖFB-컵 우승 5회: 1924-25, 1925-26, 1932-33, 1934-35, 1935-36(FK 아우스트리아 빈)
  • 미트로파 컵 우승 2회: 1933, 1936(FK 아우스트리아 빈)
  •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준우승 2회: 1924-25, 1936-37(FK 아우스트리아 빈)
  • ÖFB-컵 준우승 3회: 1926-27, 1929-30, 1930-31(FK 아우스트리아 빈)

5.2. 국가대표


  • 중유럽 컵 우승 1회: 1931-32

5.3. 개인


  • 월드컵 베스트 11 1회: 1934
  • 미트로파 컵 득점왕 1회: 1933
[1] 원래 독일어 표준 발음으로는 진델라가 맞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독일어에서 어두의 s는 ㅅ발음이 난다는 점과 신델라의 고향인 체코어의 발음도 신델라로 하는 점으로 미뤄보면 신델라가 옳은 발음이라 추론 가능하다.[2] 현재는 오스트리아가 아닌 체코이다.[3] 폴스 나인의 시조[4] 유대계였긴 하지만 신델라의 가문은 이미 가톨릭으로 개종한지 오래였다.[5] 하지만 신델라의 어원을 거슬로 올라가면 독일 계통의 쉰들러이다.[6] 벽돌공이라는 이야기도 있다.[7] 이 더블 이후 비너 아마추어 SV는 FK 아우스트리아 빈으로 이름을 바꾸었다.[8] 1932년 베르나베 페레이라의 이적료 2만3천 파운드가 17년간 세계 축구계 이적료 기록이었다.[9] 기적의 팀[10] 이 덕분에 이탈리아 대표팀의 주장이었던 움베르토 칼리가리스는 다시는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피치에 서지 못했다.[11] 이 정도 승률이면 뒤의 펠레 시절 브라질이나 2008년~2013년까지 최전성기를 달렸던 스페인과 비슷한 수준이다.[12] 21세기 초반의 축구팬들에겐 토마시 로시츠키의 별명으로도 유명하지만 원조는 신델라다.[13] 출처: Francka, Camilo (2016). Matthias Sindelar: una historia de fútbol, nazismo y misterios. Buenos Aires: Librofútbol. ISBN 978-9873979156[14] IFFHS가 그다지 권위 있는 기관이 아니라곤 해도 여기에 태클을 거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2위는 1950년대를 대표하는 중앙 미드필더 에른스트 오크비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