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스 마흐무드
1. 개요
이라크의 축구선수. 그가 이라크 축구에서 차지하는 이름은 그야말로 엄청나며, 이라크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내전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어 2007년 이라크 최초의 아시안컵 우승이라는 대업을 달성했다. 본인은 대회 MVP와 득점왕까지 모두 석권. 이후 돌연 은퇴했다가 다시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와 무소속으로 치른 2015년 아시안컵에선 팀을 다시 4강으로 이끄는 저력을 보이는 등, 그야말로 이라크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영웅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선수.
2007년 아시안컵의 활약상을 인정받아 축구계 최고 권위의 상인 발롱도르에서 아시아 선수 최초로 득표하는 데에 성공한다. 2점을 득표하며 29위에 랭크되었고 최고 순위는 2019년 손흥민이 22위를 기록하며 경신했다.
2. 클럽 경력
유니스는 2001년 자국의 알 탈라바에서 프로로 데뷔했고 2003년 잠시 아랍에미리트의 알 와흐다로 임대되어 선수생활을 한다. 이후 탈라바로 돌아온 그는 시즌이 끝나고 카타르의 알 코르와 계약하였고, 2006년까지 3년동안 39골을 넣으며 좋은 활약을 한다. 2006년 알 가라파로 이적하여 선수생활을 하였으며, 2008년 잠시 알 아라비로 임대되었다가 돌아온 후 2011년까지 총 95경기 72골로 맹활약하며 개인 커리어 중 가장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낸다. 2011년 알 와크라로 이적했으나 2013년까지 33경기에 출전하는 데에 그쳤고, 시즌 후 알 사드로 이적한다. 알 사드에서의 커리어가 끝난 후 유니스는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했으나, 그해 9월 은퇴를 번복하고 알 아흘리에서 다시 선수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아흘리와의 계약이 만료된 후 그는 2015 아시안컵 전까지 소속팀을 찾지 못했고, 결국 무소속으로 팀을 등록하여 아시안컵에 출전하게 된다. 다행히 아시안컵이 끝난 2015년 2월 자국의 아르빌과 계약에 성공했으며, 그해 9월 고향팀 알 탈라바로 무려 12년 만에 다시 컴백한다.
3. 국가대표
2001년 19세 이하 대표팀 데뷔를 시작으로 연령별 대표팀을 거친 뒤 2002년 3월에 A대표로 데뷔전을 치른다. 2002년 9월 요르단과의 경기에서 A매치 첫 골을 넣었다. 2007 아시안컵 예선에서 4골을 넣으며 팀의 본선 진출을 이끌었고, 본선에서도 4골을 터트리며 이라크가 첫 우승을 차지하는 감격을 누렸다. 이후 브라질 월드컵 예선, 2015 아시안컵 예선 등에서 출전하여 팀의 주장을 역임했고, 2015 아시안컵 본선에서도 명단에 포함되어 2골을 넣었다.
2015년 아시안컵에선 노쇠하고 한물 갔다는 여론이 있는 상황에서 주장으로 팀을 이끌었는데, 라이벌 이란과의 8강전에선 연장전 1대1 스코어 상황에서 역전골을 넣었고,[1] 이후 승부차기에선 4대4[2] '''서든데스 상황에서 파넨카 킥을''' 성공시키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바로 3주 전에 열린 이란과의 평가전에서 파넨카 킥을 실패했었는데, 똑같은 상대로, 그것도 실축하면, 이란 키커가 무조건 실축해야 하는 위험한 상태에서 가볍게 해내며 강심장을 자랑했다. 해설자들의 탄성은 덤.
한국과의 4강전에서 패하자 쓰러져 있는 어린 선수들을 일으키며 관중들에게 박수를 보내게 하는 등, 그가 출전한 마지막 아시안컵에서 뛰어난 리더십을 보여줬다.
4. 여담
이라크 국적이지만 아랍인이 아니라 투르크 계 출신이다. 이라크 내에선 아랍계, 쿠르드 계에 이어 3번째로 많은 혈통이라고 하며, 아랍보다는 쿠르드 족 혈통에 더 가깝다고 한다. 과거 투르크 계 이라크인들은 쿠르드 족 못지 않게 차별과 박해를 많이 받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분이 국가대표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일.
또한 개인의 커리어 자체도 영광스런 때도 있었지만 뒤로 갈수록 상당히 굴곡지고 어려움이 많았다. 심지어 1년여 간 소속팀을 찾지 못하는 일은 물론이고 조국에서 내전까지 벌어졌으니... 이쯤되면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볼 수 있는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