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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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尙鎭
1884년(고종 21) 12월 7일 ~ 1921년 8월 13일
1. 개요
2. 생애
3. 사후
4. 여담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고헌(固軒). 무장 독립 운동의 대표적 인물 중 한명으로 꼽힌다.잊혀진 영웅!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KBS 역사스페셜

2. 생애


박상진은 1884년(고종 21) 12월 7일 경상도 울산도호부(현 울산광역시 북구 송정동)[1]에서 1885년(고종 22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승지를 지낸 박시규(朴時奎)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큰아버지인 홍문관교리 박시룡(朴時龍)[2]에게 입양되었다. 그의 조부는 진사 박용복(朴容復)[3]이다.
박상진은 어려서 한학을 배웠으며, 1895년 일제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와 단발령 강제 시행 등에 대항하여 의병을 일으켰던 허위(許蔿)[4]의 문하에 들어가 1902년부터 수학하면서 척사(斥邪)적 반(反)외세 민족 의식을 키웠다.
1904년 양정의숙 전문부에 입학, 법률학 및 경제학을 전공하다가 1910년에 판사 시험에 합격하여 평양 법원으로 발령이 났으나, 거부하고 부임치 않았다.
그후 1912년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 곡물상을 가장하여 독립 투사들의 연락처로 삼고 군자금 마련에 주력하였고 1915년 유림들을 규합, 그해 1월에 대구 비슬산에 있는 안일암에서 조선 국권 회복단을 조직하였고, 7월에는 1913년에 이미 조직되었던 채기중 등의 풍기광복단과 합작하여 '''대한광복회'''를 조직, 총사령으로 활약했다.
대한 광복회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1. '''부호의 의연금 및 일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
2. 남북 만주에 군관 학교를 세워 독립 전사를 양성한다
3. 종래의 의병 및 해산 군인과 만주 이주민을 소집하여 훈련한다
4. 중국․아라사(俄羅斯, 지금의 러시아) 등 여러 나라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
5. 본회의 군사 행동․집회․왕래 등 모든 연락 기관의 본부를 상덕태상회에 두고, 한만(韓滿) 각 요지와 북경․상해 등에 그 지점 또는 여관․광무소(鑛務所) 등을 두어 연락 기관으로 한다.
6. 일인 고관 및 한인 반역자를 수시(隨時)․수처(隨處)에서 처단하는 행형부(行刑部)를 둔다.
7. 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일인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의 달성을 기한다
이를 보면, 대한광복회는 우선 군자금을 조달하여 남북 만주에 군관 학교를 설립하고, 여기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외 요지에 독립 운동 거점을 확보하여 정보․연락망을 구성한 뒤, 적시에 무력으로 최후의 복적(민족 독립)을 쟁취하려고 했던 혁명적 독립 운동 단체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대한 광복회는 일제 타도의 계획을 추진하는 행동 강령으로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개 항목을 시달하였다.
부사령에는 황해도 평산군 의병장으로 용맹을 떨친 이석대가 선임되었다. 그러다가 그가 순국한 이후에는 김좌진이 맡아 만주에 상주하면서 독립군 양성을 담당하였다. 대한 광복회는 창립 이후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1916년에는 예산을 중심으로 하는 충남 일대, 해주를 중심으로 하는 황해도 일대, 보성을 비롯한 전남 일대, 그리고 서울, 삼척, 인천 등지에 조직망을 구축하였다. 국외에도 조직망을 설치하여 주진수, 손일민, 우재룡 등은 북만주 길림 지방에서 광복회를 조직하였고, 남만주 서간도 지방의 부민단 또는 신흥 학교 등과도 연계를 맺고 활동하였다.
그러나 일제에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한편, 만주로 망명한 부사령 김좌진이 그를 구하기 위해 파옥 계획을 세웠으나 시행하지는 못했다.

3. 사후


박상진 일대기 박상진 묘
무장 독립 운동사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던 1910년대 무장 독립 운동에서 크게 활약했지만, 8.15 광복 후에는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의 묘도 국립현충원이 아닌 경주 내남면 노곡리 백운대에 있다. 그의 외아들을 비롯한 가족들도 아주 가난하게 살았다.기사

4. 여담


박상진 의사 증손자는 박중훈이다.[5]
생가가 울산광역시 북구 송정동에 복원되어 있는데 내부에는 의사의 업적과 생애를 소개하는 자료가 함께 전시되어있다. 또한 인근 택지지구에는 그의 호를 딴 고헌초등학교가 2019년에 개교하였으며 고헌중학교도 2020년에 개교할 예정이다. 인근의 울산송정역 예정지 옆에는 박상진호수공원도 있다.
또한 아래 도로명들의 유래가 되기도 한다.


[1] 인근의 정자동·신현동·당사동·어물동과 함께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2] 마찬가지로 1890년(고종 27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3] 1870년(고종 7년) 식년 진사 급제참조[4] 13도 창의군서울 진공 작전의 선봉대로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는 등 정미 의병으로도 활약하다가, 결국 체포되어서 서대문 형무소 사형 1호가 되었다. 그 유해를 박상진이 거뒀다.[5] 영화배우 박중훈과는 동명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