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 선언
1. 개요
6.10 민주 항쟁이 한창이던 1987년 6월 29일, 집권여당 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전격 발표한 선언.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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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호헌조치가 참아왔던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그로 인해 일어난 6월 항쟁을 통해 국민의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자 노태우 후보는 6월 29일 시국 수습을 위해 이 선언을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대통령 직선제가 한국 땅에 정착되었고, 13대 노태우 대통령부터는 국민 직선으로 뽑힌 대통령이 선출되었다.[1] 즉, 한국에서 제대로 정착된 제도적 민주주의의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전두환에게 건의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선언에서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비롯해 김대중의 사면/복권 및 극소수를 뺀 시국사범의 대거 석방, 대통령 선거법 개정, 국민 기본권 신장, 언론자유의 창달, 지방자치제 실시 등 8개항을 제시하였다. 당초 노태우는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에 대한 공식 사과'''도 넣으려 하였으나, 군부의 반발을 우려해 마지막에 빠졌다.[2]
노태우는 6.29 선언을 발표하면서 이를 청와대에 건의해 만일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당 대표 등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자 전두환 대통령은 선언 다음 날 특별담화에서 6.29 선언 수용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훗날 관련자들의 주장 등으로 드러난 바에 의하면, 노태우가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은 아니고, 전두환이 직선제를 결심한 뒤 노태우로 하여금 이를 건의해 노태우가 수용하고 발표하게 하였다고 한다. 즉, 노태우의 직선제 당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일종의 이미지메이킹을 한 것. 김성익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의 저서 <전두환 육성증언>에서 전두환 본인은 이렇게 주장했다.
물론 노태우가 실제 이런 반응을 보였을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당시 보안사의 참모들 역시 정세 분석과 토론을 거듭한 끝에 직선제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는데, 고명승 보안사령관은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보안사 참모들의 의견을 전두환에게 진언했고, 대통령은 보안사의 의견을 비중 있게 경청했다는 얘기도 있다. 고명승 본인은 다음과 같이 얘기하였다.사실은 2주일 전에 노 대표와 저녁을 함께 할 때 내가 직선제를 검토해 보라고 했더니 노 대표가 펄쩍 뛰었다. 그래서 내가 「필사즉생, 필생즉사」라고 했어. 그리고 인간사회의 모든 원리가 백보 전진을 위한 일보후퇴에 있다, 지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 원 출처: <전두환 육성증언> - 김성익 저. 조선일보사. 1992. p441, 2차 출처: 중앙일보 1993년 2월 19일자 <청와대 비서실> 내용 중에서.
또 김성익이 쓴 책에 의하면 1986년 당시 한 언론인이 작고 전에 전두환을 만날 적에 간선제가 직선제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주장을 했으며, 전두환이 이에 동조했다는 주장도 있었다.[3] 물론 전두환이 4.13 호헌조치를 고수하면서 6월 민주항쟁이 터진 것이기 때문에 지금 와서 보면 다 부질없는 소리긴 하지만.그해(1987년) 4월 중순 보안사의 장성 참모 등 핵심부에서는 누가 대통령 후보가 되든 직선제를 택해야 하며, 당선된 1년 후 중간평가를 통해 국민의 신임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정치인들을 사면 복권한다면 굳이 특정인들을 제외시킬 필요가 없다는 참모들의 판단이었습니다.
- 원 출처: <군부와 권력> - '80년대 신군부와 6공의 민군관계(김재홍 글)'. 나남. 1992. p181
어쨌든 6.29 선언으로 인해 몇달 후 대통령 5년 단임 직선제를 골자로 한 9차 개헌안이 국민투표에 붙여져 94.5%의 찬성을 받아 통과되었고, 이후 2020년대 현재까지도 한국은 소위 87년 체제라 일컬어지는 제6공화국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3. 전문
5공 시절 내각제 헌법초안 작성 참여자였던 한승조 고려대 교수가 <WORLD & I> 1992년 12월호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선언문 초안 작성은 박철언이, 완성 단계에선 노재봉, 이홍구, 김학준 등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들이 참여하였다고 한다.[4]
3.1. 요약
이 선언을 통해 노태우 후보는 자신의 선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대통령 후보를 포함한 모든 공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했고, 이후 당시 여당이었던 민정당은 이 선언을 당의 공식입장으로 인정했다. 이어 전두환도 특별담화를 통해 6.29 선언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면서 이 선언은 정부의 공식 선언이 되었다. 그와 함께 4.13 호헌조치는 철폐되었다.
이렇게 발표된 6.29 선언으로 시민의 손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쾌거를 이룬 6월 항쟁은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6월 항쟁이 끝나고 6.29 선언에 따른 헌법 개정 작업이 착수되었고,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를 통해 새 헌법이 확정, 6월 항쟁과 6.29 선언으로 이어진 일련의 과정은 일단락되었다.
4. 평가
4.1. 긍정론
그동안 독재국가였던 한국은 이 선언 이후 민주주의 국가로 탈바꿈할 수 있었고,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이후에도 민주주의 지수 자료 등을 보면 한일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그래도 민주주의 국가라 부를 수 있는 나라는 한국과 비슷한 민주화 과정을 거친 대만이나 공산주의 일당독재 체제를 포기하고 민주주의를 도입한 몽골 정도 뿐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5]
특히 한국의 민주주의는 6월 항쟁으로 '''국민들이 희생을 치르며 이뤄낸 민주주의'''였다는 점에서 미국의 강한 압력하에 국가 차원에서 하향식 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한 일본과도 차이가 있다.[6] 세계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국민들이 직접적으로 희생을 치뤄서 민주주의를 쟁취해 낸 국가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7] 오히려 민주화 운동이 미완성으로 끝나거나, 반대로 다른 독재체재의 연장선을 초래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서구권에서도 한국은 성공적인 민주주의 체제 전환의 한 예시로 보는 경우가 많다.
4.2. 부정론
임영태가 쓴 <대한민국 50년사> 2권에서의 평가에 의하면, 6.29 선언은 신군부의 국민에 대한 '항복선언'이지만, 실상은 신군부가 군 투입과 양보 사이에서 노태우가 주도적으로 실시한 것처럼 만든 위장 전략이자 강자의 아량이 아닌 궁지에 몰린 약자의 '마지막 저항'이라 주장하였다.[8]
노동자 출신 재야역사가 이성광은 <민중의 역사> 하권에서 6.29 선언을 미국의 '목표물 갈아치기'의 변종이라고 해석하였다. 즉, 국민들의 분노가 '간선제 대통령 선출'이란 비민주적 제도에 집중되어 그 제도만 갈아치워 국민들의 분노를 호도시켰다는 것이다.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졌는데,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거론됐던 양김이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서로 단독으로 출마하자 표가 나누어져 결국 13대 대통령으로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어부지리로 당선되었다. 노태우는 사실상 전두환과 한 뿌리였기 때문에, 5공 비리 청산은 늦추어 질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 제5공화국도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다. '''극본 전두환, 주연 노태우'''라는 표현을 통해 짜고치는 듯한 모습이 나왔다. 이들은 직선제를 선언한 후, 삼김씨를 다 풀어주면 서로 분열돼서 노태우에게도 충분히 승산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고 나온다. 그리고 이는 그들 입장에서는 맞는 판단이 되었다. 노태우는 득표율 36% 였음에도 분열된 삼김씨[9] 가 투표율을 서로 애매하게 먹어버린 덕에 직선제로 당선된 대통령이 되었다.
이원복 교수는 <먼나라 이웃나라> 우리나라편에서 다른 쪽으로 부정적 해석을 했는데, 6.29 선언 뒤 한국 곳곳에선 1945년 8.15 광복 후 해방정국 상황과 동급으로 혼란이 넘쳐났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군사독재 치하에서 참아오던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등을 외치며 시위를 하고, 사회 각계에서 군사독재 잔재와 권위주의 청산 등 불만과 분노를 쏟아내는가 하면 분단상황 하에서 금지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평등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번져 이념대결이 심화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무조건 6.29 선언을 부정적으로 본 건 아니고, 6.29 선언 이후 한국사회에 민주주의가 자리잡고 더 많은 자유와 권리를 누리게 되었으며, 더 이상 독재 정권을 용납하지 못하는 국민들의 저력을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발전으로 국민들이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한민족의 비극이 6.29선언으로 막을 내렸다고 서술하기도 했다.
5. 미국 개입설
박세길은 저서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3권에서, 6.29 선언은 미국의 개입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는데, 당시에도 동아일보 1987년 7월 2일 기사와 중앙일보 1987년 6월 30일 기사 같은 곳에서 그런 추측들이 나온다.
실제 미국 일부 인사들은 6.29 선언 주도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자신들의 공적으로 선전하기도 했는데, 스티브 솔라즈는 게스틴 시거를 '노벨평화상 감'이라고 발언하였다.[10] 그리고 시거는 "1987년에 대선이 있을 것"이란 말을 남기고 선언 다음 날 한국을 떠났다. 물론 이때는 대선 일정은커녕 개헌조차 착수하지 못한 시점이었다.[11]
다만 과거 군부독재를 용인해줘[12] , 오히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국 쯤으로 인식되던 미국이 어떻게 저럴 수 있냐며 국내 반미주의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던 당시를 생각해보면, 이는 상당히 아이러니한 부분이기도 했다.[13][14]
6. 관련 문서
[1] 이전에도 이승만, 박정희는 직선제로 대통령이 된 적이 있긴 했다. 허나 알다시피 이승만은 박수칠 때 떠나지 못하고 사사오입 개헌과 3.15부정선거 등 씁쓸한 모습을 남기며 국민들에게 쫓겨났고, 박정희는 합법적 민간정부였던 장면 내각을 쿠데타로 무너뜨린 후(제2공화국은 의원내각제였다), 관권선거란 이점 속에서도 직선제 대통령은 점점 힘들다는 감이 오자 종국엔 간선제로 국민의 주권을 뺏어버린다. (전두환 역시 간선제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연장선상에서 박정희 역시 김재규에게 암살당하고 만다.[2] 사실 노태우의 5.18에 대한 입장은 묘한데, 정권을 잡은 후의 행보는 4당합당을 위해서인지 5.18 조사에 대한 전권도 약속하며 간이라도 내줄듯 김대중을 회유했으나,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노태우는 5.18을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당시 군부가 무조건 잘못한 것도 아니다(유언비어가 진범, 5.17은 치안 유지 차원이라고 믿고 있다, (95년 구속 직전) 문화대혁명처럼 더 많은 피를 흘린 사건조차 처벌된 사람은 생각보다 적었다)란 식의 양비론을 펼쳤다. 그런데 몸져앓아누운 후엔 전두환과 차별화를 하고 싶었는지 진짜 생각이 바뀌었는지 어쨌는지 2019년부터 장남 노재헌을 통해 사과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3] 원 출처: <전두환 육성증언> p447~448. 이 책에서 언급된 언론인은 그 당시에 사망한 선우휘로 보인다.[4] 때문인지 노재봉, 이홍구, 김학준은 노태우 정권에서 중용되었다.[5] 중국이나 북한은 일당 혹은 일인독재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데다가 좀 더 넓게 잡아 유라시아권인 러시아를 포함해도 비슷한 상황이다. 이들 국가는 2019년 민주주의 지수 조사에서 모두 권위주의 체제로 분류되었다.[6] 사족으로 일본제국 시절 (전제군주제와 입헌군주제 중간쯤에 놓인) 외견적 입헌군주제 체제가 들어서긴 했으나, 이것조차도 엘리트들이 위에서 주도한 것이었으며, 덕분에 덴노의 권한 대비 행정부의 위엄이 떨어져 군에 대한 문민통제가 이뤄지지 않아 알다시피 종국엔 군국주의란 괴물로 치닫고 만다.[7] 사실 과거만 해도 아시아 국가들에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설 가능성에 대한 서구권의 시선은 꽤나 싸늘했다. 1960년대 영미권의 한 칼럼니스트는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탄생하길 바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어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라는 글을 실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8] 승부수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맞을 듯. 어찌됐든 총을 쥔 건 군부였으니.. 단, 궁지에 몰렸던 것은 사실이었다.[9] 김영삼, 김대중을 합한 득표율이 무려 55%였다. 하지만 이는 사표가 되버리고 말았다.[10] 원 출처: <통일교실> - 민성일 저. 돌베개. 1991.[11] 원 출처: <한미관계의 재인식(2권)> - '한국 정치변혁기의 미국의 역할(김홍석 글)'. 두리. 1991. p26.[12] 사실 한국에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고, 대만이나 인도네시아, 칠레, 니카라과, 온두라스, 아르헨티나, 브라질, 이집트, 파라과이, 과테말라, 우루과이, 태국, 이란 등 많은 국가들의 독재정을 지원했고, 특히 중남미에서 중남미의 민주주의를 내팽겨치는 짓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더러운 전쟁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그 참상이 어느정도인지 알수있을 정도. 1980년대와 90년대에 이들 나라 상당수가 민주화되었지만 지금보면 도미노 이론에 매몰되어서 제3세계 민주주의를 내팽겨치는 짓을 정당화했다는 얘기이다.[13] 1970년대 후반 당시 민주당 출신 지미 카터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론까지 거론하며 한국의 인권 개선을 촉구한 적도 있다. 이후 박정희가 암살되고 미국도 공화당 출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으로 정권이 바뀌며 잠잠해졌다. 오히려 레이건은 전두환에게 무기개발을 포기하게하고 전두환을 백악관으로 초대해서 연설까지 하게 해준 모습을 보였다.[14] 다만, 그 당시 미국도 군부독재를 용인했던 것이 나름 사정이 있었다. 당시에 국제정황이 빠르게 변하고 있었기에 한국에 또다른 문제가 생기기를 바라지 않았다. 물론, 미국도 나중에 군부독재가 저지른 짓을 보자 경악해하며 당시 야권인사였던 김대중을 구출하는데 나름 신경을 썼었고 6.10 민주 항쟁 당시에 신군부가 시위자들에게 무력진압하려는 등의 계획을 세우자 하지 말라고 정치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등의 노력도 했었다.